## 260화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죄송하다는 말이 연신 나오는 걸 보니 좋은 말 같진 않았다.
사실 그건 아무 생각 없이 4개월 동안 스튜디오에 왔다 갔다 한 내게도 잘못이 있는 것 같은데,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고개를 저었다.
“계약서는 제가 내일 직접 아버님을 찾아가서 보여 드리면 됩니다. 지금 타티아나가 신경 쓸 부분은 따로 있지요?”
“아.”
계약에는 말도 안 되는 조항만 없으면 된다.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음반 계약이 아니라 음반 그 자체였다.
난 다시 전자 악보를 들었다.
“잠시만요. 한 번 더 읽어 봐야 할 곳이 있어서.”
“피아노로 연습하셔도 됩니다만?”
“곡을 읽을 땐 어설픈 소리가 섞이면 헷갈려서요.”
그것은 내가 곡을 연구하고 익히는 순서였다.
하나의 곡이라는 것은 짧게 나누면 악장과 악절, 즉 무브먼트와 프레이즈에서 더 짧게는 아티큘레이션과 음표 하나까지도 나눌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음악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 거대한 흐름을 악보에서 읽어 내는 일에 집중하며 원본으로부터 가장 올바른 음악을 해석해 내 머릿속으로 연주해 본다. 그리고 내 손에서 만들어지는 음악은 모두 그 머릿속 음악의 모방인 것이다.
때문에 난 흐름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곡을 해석할 땐 조용히 악보만을 읽고, 연습을 할 때 비로소 피아노 앞에 앉곤 했다.
“…….”
다시 난 독보에 들어갔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파우스트 소나타.
독일 문학의 거성 괴테의 역작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작곡된 곡이었고 때문에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난 이 곡을 내 레퍼토리로 삼은 적도 있고, 해석을 위해 소설 파우스트를 읽고 연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설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었고, 사실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난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악보를 보며 곡 자체를 읽어 낸다. 주변은 고요했지만 내 귓가에선 가장 이상적인 파우스트 소나타의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순수음악처럼 선율과 화성, 그리고 리듬을 느낀다.
그림에서 이야기를 읽어 내듯 난 음악에서 이야기를 읽어 냈다.
라흐마니노프가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를 읽고 이 곡을 작곡했다면 그 반대로 이 곡에서 소설을 써낼 수도 있어야 했다. 그리고 한 곡에서 나온 소설의 내용은 모두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문장이나 단어가 다르기 마련이다.
연주자들은 그 소설을 곧 연주자의 해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올해 겨울에 선생님들의 지도와 함께 만들어 놓았던 새로운 해석들은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난 조금 더 신중하게 악보를 읽으며 커다란 이야기를 다듬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악보를 다 읽었을 때, 난 소파에서 일어섰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
“데모 녹음 부탁드려요.”
내 말을 듣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바로 준비하죠.”
난 전자 악보를 들고 피아노 부스로 향했다.
보면대에 전자 악보를 놓고, 풋스위치를 세팅하고 심호흡을 했다.
몇 시간 전 베토벤과 슈만을 녹음했었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서 재녹음도 필요 없을 것 같다는 극찬을 받았다.
이번엔 조금 불안해서 데모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하고 싶었다.
내가 끝끝내 이 곡을 잘 연주해 내지 못한다면, 앞전의 곡들보다 만족하지 못한다면.
결국 난 내 입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음반에 넣지 말아 달라 요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건 연주자로서의 긍지이기도 했다.
“…….”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건반을 눌렀다. 베토벤에서 슈만으로 건너갔던 음색이 라흐마니노프로 향한다.
건반을 통해 내 목소리로 부르는 라흐마니노프는 지상이 아니라 허공 어딘가에 떠 있는 듯한 느낌으로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무게감을 이룬다. 소리는 치밀하게 설계된 부스 안의 벽에 맞아 마이크에만 스며들어 공간감을 조성한 뒤 사라진다.
그렇게 음색을 가늠하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신호를 받아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1번의 연주에 들어갔다.
악보를 보며 천천히 주제를 그려 냈다.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음악은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다. 웅장하면서도 정열적인 화음은 양손 전부를 동시에 그리고 완벽하게 사용해야만 했고, 곧 화려한 화성이 교차하고 아르페지오로 펼쳐지면서 손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라흐마니노프의 광기 어린 음악은 내 육체적 한계를 실험한다.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과 동급, 혹은 더 까다롭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소나타 2번보다도 어렵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어디까지 몸을 다룰 수 있는지 집중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중력과 공기, 무엇보다 몸 그 자체의 한계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알아보기라도 하듯 그간 새겨 넣은 모든 기술을 다 했다.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 내 몸은 라흐마니노프에게 허락을 얻어 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주 흡족한 허락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다.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지 않고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된 연주자에겐 보다 특별한 자격이 주어진다.
음악과 마주하고 조금 더 섬세하게 손을 움직인다.
주인공 파우스트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피아노로 내 해석을 표현해 나갔다. 파우스트, 그리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관조하는 신. 그 모든 것이 피아노 위에 떠올랐다.
“…….”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그 광기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나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정신을 집중했다.
무념무상은 곧 자아도취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건 좋은 뮤지션에게 필요한 것일진 모르겠지만 좋은 클래식 연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광기와 혼란 사이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깔끔하게, 음악의 마력을 피아노로부터 뽑아낸다.
난 연주를 중단하는 일 없이 약 30분간 소나타의 코다와 피날레까지 완주를 해냈다.
꽤 오랜만의 파우스트 소나타였고 악보를 확인하면서 연주했지만 중간에 흐름을 잃고 연주를 실패하거나 하진 않아 다행이었다.
“…….”
의자에서 일어서자 이번에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박수를 쳐 주었다. 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부스 밖으로 나왔다.
프로듀서가 있는 메인 컨트롤 룸으로 가니 찬사가 이어졌다.
“맙소사……. 바로, 정말 연습도 한 번 않고 바로 연주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떠셨나요?”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군요. 장담하건데 타티아나의 또래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원숙한 파우스트 소나타를 연주하진 못 할 겁니다.”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칭찬 속에서 그 말뜻을 이해했다. 내 또래엔 없겠지만, 절대적인 완성도를 본다면 과연 어느 수준일까?
어쩐지 칭찬일색인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리고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멈칫했다. 과연 그가 솔직하게 말해 줄지, 조금 기대되기까지 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다고 했었죠. 약속은 분명하게 지키도록 하죠.”
“아하하하, 고마워요.”
솔직하게 이 라흐마니노프는 베토벤과 슈만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니 재녹음하자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대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했다. 충분히 솔직한 말이었다.
난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이 곡의 완성도를 훨씬 더 높게 끌어올리고 싶다는 욕구가 마음속에서 끓어올랐다. 더 잘하고 싶다는 연주자로서의 도전정신이 자꾸만 날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려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자꾸만 갈증이 일고, 가슴이 답답하다. 음악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살짝 시간을 살폈다. 7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었다.
이미 충분히 늦었고, 데모곡은 녹음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래도 나보다는 갈증이 조금 해소된 듯한 얼굴로 프로듀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데모곡도 녹음했으니 이만…….”
“저기, 마카로프 프로듀서.”
“예.”
이만 돌아가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함께 저녁 식사 하시지 않으시겠어요?”
당장 재녹음을 하자고 하자니 식사도 안 하고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서 문득 나온 말이었다.
내 딴엔 아무 생각 없는 핑계 같은 제안이었는데 말로 뱉고 보니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겐 처음 해 보는 권유인 것 같았다.
그는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식사도 한 번 같이 한 적이 없군요.”
“섭섭했어요.”
“하하, 미안합니다. 이것 참, 먼저 권유를 했어야 했는데.”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가만 보면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대단한 실력자이긴 하지만 조금 허술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난 배시시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좋습니다. 대신 식사는 제가 사도록 하죠.”
“아,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제가 사고 싶어서 사는 겁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가 학생이어도 금전적으로 궁핍하지 않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내게 저녁을 사고 싶다는 것 같았다. 그런 제안을 구태여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난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어차피 이 근방에 파인 다이닝급의 레스토랑은 없습니다. 너무 기대 마셨으면 좋겠군요.”
“아하하, 괜찮아요. 전 어디든 좋아요.”
“고마운 말이군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
우리가 도착한 곳은 근처의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다.
예약과 드레스코드를 필요로 하는 파인 다이닝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상당히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테이크를 한 점 썰어서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육질이 꽤나 괜찮다.
“훌륭해요.”
“다행이군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솔직히 조금 걱정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까탈스러워 보이시나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타티아나가 아무 곳이나 괜찮다고 말한다 해서 정말 아무 곳에나 데리고 갈 순 없잖습니까?”
분명 스튜디오에선 날 한 명의 연주자로 대해 주고 있지만, 밖에선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난 웃기만 했다. 프로듀서는 내 웃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농담을 건넸다.
“이 근방엔 특색 있는 식당들이 꽤 있긴 하지만……. 거기에 중요한 분을 데리고 모험을 갈 정도로 젊진 못해서 말이죠.”
“특색 있는 식당이라니 궁금해지는걸요?”
“이런, 한 번 도전해 볼 걸 그랬습니다?”
“재미있지 않을까요?”
“음, 너무 흥미를 가지진 마시죠. 타티아나가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진 않군요.”
“아하하하.”
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전 쉽게 실망하지 않는답니다.”
“그렇습니까? 하하.”
좋은 분위기에서 웃음이 오갔다.
한동안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그와 음악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꽤 즐거웠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와 음료가 나왔다. 난 디저트만 취급하는 가게에서 먹어 본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별로 흥미 없을 것 같은 주제에도 잘 응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화를 하는 와중, 난 내가 참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물을 마셔도 갈증은 심해지기만 한다.
뭘 참고 있는진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예.”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나중에 생각하려 했는데 안 되겠어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의아하게 바라본다.
난 이상한 여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파우스트 소나타에 대한 리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녁 식사를 하고 즐겁게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연주에 대한 리뷰를 해 달라고 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하죠.”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반응이었다.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리뷰가 시작되었다.
“이야기가 너무 명료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주제는 물론이고 발걸음도 조금 경쾌하게 들리더군요. 파우스트는 만물의 지식을 알고 있는 인물이므로 모든 결정이 확고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 예. 맞아요.”
“심지어 그를 타락시키기 위해 찾아온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하고 쾌락을 찾아 여행을 하며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원이고 심판인지에 대해선 현대의 통속적인 도덕의 잣대를 대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단 당시 배경인 중세와 19세기 그리고 지금까지 통시적으로 분석하고 그 이면의 종교적 가치까지 이해해야……. 제가 말이 길었군요.”
“아뇨, 괜찮아요. 계속해 주세요. 부탁해요.”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짧게 한다더니, 할 말이 굉장히 많아 보였다.
그리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괴테의 파우스트 원작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과 구노의 파우스트 오페라 등도 언급하며 어떠한 해석과 관점에 의한 차이들이 있는지 짧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것들이 라흐마니노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또 내 연주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지도.
인상적인 것은, 그렇게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감상을 들으면서 난 프로듀서와 성격도 외모도 전혀 다른 음악 선생님인 구세프 선생님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물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피아니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연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요점보다는 큰 그림을 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향하는 곳을 따라가 보면 구세프 선생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분은 전공도 경력도 다르지만,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처럼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감상은 상당히 날카롭고 정확하게 느껴졌다.
피아노곡에 대한 편협한 지식밖에 없는 내가 저 정도 수준이 되려면 대체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그 점으로 타티아나의 강점을 살리자면 조금 더 짙게……. 타티아나?”
“아, 예.”
난 순간 넋 놓은 표정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사과했다.
“모두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름이 아니라,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요? 타티아나가 아니라?”
“전 피아노밖에 모르지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문학, 교향곡, 오페라 등등 모르시는 것이 없잖아요.”
순수하게 감탄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모르는 것이 왜 없겠습니까?”
“그래도요.”
“하하……. 어쨌든 고맙군요.”
조금 쑥스러움을 느끼는지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곧 이어 말했다.
“다른 분야에선 도저히 잘난 척을 하기 어렵군요. 하지만 제가 가장 자신 있게 잘난 척할 수 있는 분야도 있지요.”
“어떤 분야인가요?”
“레코딩 엔지니어링입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믿고 있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서, 이젠 정말 헤어질 때였다.
오늘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요청한 파우스트 소나타의 데모곡은 녹음했고, 재녹음은 내가 연습을 조금 더 해서 다른 날 하면 된다. 이쯤에서 그만 쉬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난 더욱 심해진 갈증을 조금이라도 달래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방금 들었던 리뷰와 녹음 환경이라면 아까보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가 빠르게 돌고 손이 근질거렸다.
이대로 다음을 기약할 순 없었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했다.
“…….”
길가에 서서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올려다보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아무 말도 않고 있지만, 내 눈빛을 눈치챈 듯하다.
무언가 예상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가 입가에 맺힌다.
난 그 예상을 확인시켜 주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시죠.”
“늦게까지 수고를 끼쳐 드려 죄송하지만, 지금 스튜디오로 돌아가서 재녹음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조금은 뻔뻔하게,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바로 대답해 주었다.
“몇 번이든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거 알고 있습니까? 타티아나.”
“무엇인가요?”
“전 타티아나가 혹시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술을 안 마셨습니다.”
“아하하, 정말인가요?”
“잡담을 나누면서도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생각밖에 없어 보이더군요.”
들켰다는 생각보다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알아봐 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내 재녹음까지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단 말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최대한 빨리 스튜디오로 돌아가서 피아노 앞에 앉고 싶었다.
벌써 8시가 훌쩍 넘었는데, 지금 가서 다시 이전 연주를 들어 보고 한 번 더 악보를 참고해서 해석을 가다듬고 피드백하여 재녹음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진 모르겠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혹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피곤해하진 않을까 살폈지만, 그 역시 나만큼이나 빨리 스튜디오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에 미쳐 있는 우리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차에 올라 스튜디오로 되돌아갔다.
“바로 들어 보는 것부터 할까요.”
“예.”
불이 꺼져 깜깜한 스튜디오에 불을 켜고, 컴퓨터와 장비들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방금 전 녹음한 곡을 재생시켰다.
만약 음반에 추가시켰다는 가정하에 내가 연주한 음원이 아닌 다른 무명의 연주자가 연주한 것이라 생각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로 임했다.
음악을 들으며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지 않고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왼손잡이어서 그가 내 왼쪽에 앉으니 서로 불편할 것도 없었다.
부분마다 더해지는 짧은 감상과, 나 역시 피드백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내용이 노트 위로 빼곡하게 적혀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전자 악보에 소설 파우스트를 불러왔다. 우리는 파우스트 원작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다.
아무리 파우스트 소나타가 소설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하여 곡에 소설을 그대로 대입시키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작이 나타내는 거대한 흐름과 메시지를 확실하게 캐치해서 보다 선명하게 곡에 드러내는 것은 가능했다. 그건 곧 작곡가의 의도를 따라가는 일이기도 했으므로 굉장히 세심하고도 정밀한 이해를 필요로 했다.
난 솔직히 아직도 피아노 독주곡 파우스트라면 모를까 소설 파우스트에 대해선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나보다 훨씬 넓은 식견으로 이 소설을 보다 쉽게 이해시켜 주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설명은 단순히 이 책에만 국한되지 않고 넓은 분야에 걸쳐 두루 펼쳐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고 나는 악보를 다시 펼쳤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타 준 차를 홀짝이며, 다시 머릿속으로 보다 이상적인 음악을 구현했다. 조금 더 나아진 이해도로 내 해석이 시시각각 나아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바뀐 해석이 좋아졌는진 따로 기준을 둘 필요조차 없었다. 곡을 연구하고 공부할 때 종종 느끼는 이 고양감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다. 난 분명히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듯 미친 듯이 파우스트에 파고들며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다음 재녹음을 준비했고, 2시간 후에 난 부스로 들어갔다.
“시작하시죠.”
난 건반으로 대답했다.
모든 집중력을 다해, 기술적인 한계 근처까지 내 손에 허락된 모든 것들을 끌어내었다. 빠듯하지만, 가능했고, 난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파우스트는 그저 어떠한 이미지가 아닌 조금 더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려졌고, 메피스토펠레스의 웃음소리는 더욱 유쾌해졌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훨씬 더 흔들림 없이 유려해졌다.
내 두 번째 연주는 첫 연주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모든 부분에서 발전한 것이다.
“…….”
연주를 마치고 손을 떼었다.
“브라보.”
유리 너머에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박수를 쳤다.
그가 듣기에도 썩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난 부스에서 나왔다. 마카로프가 웃으며 말했다.
“천재로군요, 타티아나.”
“……아뇨. 아직 멀었어요.”
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흐르는 소나타에는 조금, 아주 조금 모자랐음을 느낀다. 거짓말로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손에 잡힐 것 같았지만…… 잡히지 않았거든요.”
“그걸 느끼고 쫓을 수 있다는 것이, 천재라는 겁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천재라는 말은 어쩐지 여태껏 들어왔던 말들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고개를 들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목소리엔 열기가 아직 시들지 않았다.
“잡힐 것 같다고요?”
“예.”
“하하…….”
내가 곧장 대답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이미 그도 나도 끝장을 보지 않고는 어찌할 수 없이 빠져들어 있는 것이다. 아주 멀리 있다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노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손을 조금 더 뻗어 잡을 수 있다면, 대답은 뻔하다.
“그렇다면 잡아야죠.”
“그런데 그래도 되나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퇴근은요?”
“전 상관없습니다. 연주자들과 밤샘 작업 같은 건 흔한 일이니까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히죽 웃더니, 내 쪽을 손짓했다.
“문제는 타티아나죠.”
“아…….”
당황하며 시간을 확인하러 스마트폰을 드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섬뜩함을 느끼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루슬란 오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