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루슬란은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상당히 믿고 있었다. 그녀는 상냥하고 어른스러웠으며, 언제든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로 타티아나의 엉성한 부분들을 채워 주곤 했다.
때문에 이렇게 피아노에 몰입한 타티아나가 무서울 정도로 체력과 정신력을 혹사시키고 있을 때, 적당히 브레이크를 걸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아나스타샤는 루슬란을 가로막았다.
“저도 루슬란만큼이나 타티아나를 걱정해요. 하지만…… 저 애가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나도 그래. 하지만 난 지지자임과 동시에 보호자이기도 해.”
“알아요. 저도 같으니까.”
아나스타샤는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대답했고, 그 당돌한 대답에 루슬란은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넌 가족이 아니라 친구이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지금 이 대화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자신 쪽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슬란이 반걸음 물러선 사이,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창백한 안색으로 유령처럼 앉아 있는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주제에, 약해 보이면 끌려갈 것이라 생각하는지 고개만은 빳빳하게 들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나도 연습하다가 잘 안 되면 종종 쓰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해 볼래?”
“방법이요?”
“응. 그 방법으로 마지막 녹음을 하는 거야. 깔끔하게.”
아나스타샤의 제안에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아픈 건가요?”
“뭐? 무슨 소리야? 아픈 걸 너한테 왜 하겠어?”
어이가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소리쳤다. 타티아나는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신뢰와 각오의 미소가 깃든다.
“그럼…… 해 볼게요. 뭐든 좋아요. 마지막으로 녹음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난 아직 허락하지 않았…….”
“루슬란.”
어림없다는 듯 루슬란이 단호하게 입을 여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끊어 냈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돌렸다.
타티아나 대신 그녀가 간청했다.
“한 번만 들어줘요.”
루슬란은 이 두 아이들을 보며 경외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약간의 짜증을 느끼기도 했다.
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일에 집요하고 열정적인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루슬란이 오늘 타티아나가 늦게까지 스튜디오에서 음반 작업을 하겠다는 것을 흔쾌히 들어주고 여기까지 온 것도, 타티아나의 열정을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껏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타티아나는 여전히 그리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체질이었다. 1년 사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 햇빛처럼 빛나던 금발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하얗게 바래 있는 것이나 약한 체력, 창백한 안색이 그러했다.
루슬란은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의 타티아나를 기억한다. 그때 동생이 얼마나 활동적이었는지를 떠올리면 지금 건강은 건강도 아니었다.
약간의 스트레스를 느끼며 루슬란이 말했다.
“지금 여기서 나만 이상한 사람인 건가?”
“아뇨. 상식적인 말씀을 하고 계신 건 루슬란이죠. 그래서 딱 한 번이에요. 당장 피아노를 치게 둘 것도 아니고요.”
아나스타샤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지금은 컨디션이 망가져서 어차피 제대로 연주를 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일단 1시간 남짓이라도 휴식을 취하면서 그사이 잠들면 자게 두고, 아니면 컨디션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손을 내뻗어 볼 수 있게 해 주려는 거예요.”
“…….”
그 말에 타티아나를 무조건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결심이 흔들렸다.
루슬란은 다시 동생을 내려다본다.
타티아나는 책상 앞에서 펜을 끼적이며 밤을 새운 것이 아니고 혼신의 힘으로 격렬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밤을 보냈긴 하지만, 그래도 코피를 조금 흘렸다고 해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아나스타샤의 말대로 조금 쉬게 하면 한 곡 정도는 더 연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생각하던 루슬란은, 이 또한 자신이 졌기 때문에 떠올리는 타협안임을 자각했다.
그 어떤 상식도 결단도, 후퇴 없는 강렬한 열정엔 결국 물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소한 1시간은 쉬어야 해. 그 뒤에도 안색이 안 좋으면 반드시 데리고 돌아갈 거야.”
“저도 그건 무조건 찬성이에요.”
아나스타샤는 눈웃음으로 감사를 표한 다음, 타티아나의 옆으로 가서 팔을 잡았다.
“타티아나. 이리 와. 일단 쉬어야 해. 결정사항이야.”
“……예.”
타티아나는 약간 휘청거리긴 했지만 스스로 일어섰다.
그렇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데리고 부스를 나가서 일단 소파에 앉혀 두었다. 원피스를 갈아입히고 싶었지만 이 스튜디오에 당장 타티아나가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눕혀 놓기만 했다.
열도 조금 있는 것 같아 수건을 적셔 와서 이마에 올려 주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아무 말 않고 아나스타샤의 손길에 따라 자신을 맡겼다.
소파에 누워 있는 타티아나에게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조금 잘래?”
“아뇨. 안 돼요.”
“그렇겠지.”
당연하다는 듯 두 연주자는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타티아나는 수십 시간이나 깨어 있어서 뒷머리에 손가락만 대면 잠들 정도로 졸릴 텐데도 눈을 뜨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럼 잠깐 쉬고 있어, 타티아나. 난 네 마지막 연주를 준비할 테니까.”
“아나스타샤…….”
타티아나는 멀거니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아나스타샤는 맑게 웃고는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쪽 벽에서 두 사람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루슬란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루슬란.”
“……?”
루슬란은 고개를 기울이는 것으로 의문을 대신했다.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잠깐 같이 나가요.”
“지금?”
“예. 할 일이 있거든요.”
뭔진 몰라도 준비한다는 것에 대한 일인 것 같았다. 루슬란이 바로 승낙하려는 찰나, 소파에 누워 있던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어디 가시나요……?”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잠깐 루슬란과 나갔다 올게.”
“두 분만요?”
“응. 괜찮지?”
“…….”
타티아나는 잠시 말이 없더니 비척거리며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커다란 소파에 앉아 있는 타티아나의 눈빛은 조금 가라앉아 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답했다.
“전…… 쉬고 있을게요. 빨리 오셔야 해요.”
“알았어.”
그제야 타티아나는 다시 허벅지 위로 떨어진 물수건을 쥐고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아예 물수건을 펴 얼굴 전체를 덮었다. 눈을 가리고, 얼굴 전체를 식히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래선 숨이 안 쉬어질 텐데?
아니나 다를까. 10초 남짓 지나자마자 타티아나는 숨을 몰아쉬며 물수건을 떼어 냈다. 멈춰서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와 루슬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내버려 두고 나갔다 와도 되는지 걱정이 태산이다.
“제가 보고 있도록 하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두 사람을 안심시켰고, 그 옆에 있는 빅토르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함께 벤츠의 뒷자리에 탄 루슬란과 아나스타샤 사이엔 말이 별로 없었다.
타티아나에게 아무 문제만 없다면 먼저 농담이라도 건넸겠지만, 루슬란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 속에 있던 루슬란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마뜩잖아도 그렇지 연장자가 되어선 동생의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옳지 않았다. 괜한 불안감만 조성할 뿐이다.
“아나스타샤.”
“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차 안에서 간간히 스며드는 빛이 그녀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동생인 타티아나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대단한 미인이었지만 아나스타샤도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의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오늘은 타티아나가 오라고 한 거야?”
루슬란은 멍청하게 그런 질문밖에 하지 못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고양이처럼 웃었다.
“아뇨? 그냥 제가 오고 싶어서요.”
“그런 거였어?”
“루슬란이랑 같다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는, 화면을 끄고 집어넣었다.
“저 애는 저렇게 필사적이니까…… 응원해 줘야죠.”
“솔직히 난 네가 타티아나에게 브레이크를 걸어 줄 거라 생각했어.”
“글쎄요…….”
루슬란의 솔직한 본심에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다가 옅게 웃었다.
“제가 무슨 수로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듯한 어투였다.
루슬란이 계속 말했다.
“네 말이라면 들을걸.”
“그 말이 아니에요. 루슬란이야말로 더 강하게 말했다면 타티아나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을 거라 생각해요?”
“……그건 아닐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못 했죠.”
루슬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대하는 태도는 종종 경건하게 보일 정도라서 쉽게 건들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던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턱에 대고는 말했다.
“음, 갑자기 생각났는데, 루슬란에게 이건 말해야 할 것 같네요.”
“무슨 말이지?”
“전 타티아나에 대해 알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루슬란을 향해 아나스타샤가 설명을 이었다.
“그 애가 기억상실로 1년분의 기억밖에 없다는 걸요.”
“……뭐?”
루슬란이 놀랐다. 그는 평소에 타티아나가 가족, 그리고 고용인들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의 상황을 숨기고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오해 마세요. 그 애가 직접 제게 알려 준 거니까.”
“직접 알려 줬다고?”
“예.”
그렇다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유리와 루슬란은 타티아나에게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면 기억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했었다. 그것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단지 타티아나는 그렇게 과거와 완전히 선을 긋는 행위는 하기 싫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집을 지켜 나갔지만, 생각이 조금 바뀌어 친한 친구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 놀랍긴 했다. 말을 꺼내기 어려웠을 텐데.
“그렇게 하기 싫다고 했었는데……. 다른 친구들도 아는 건가?”
“아뇨. 저만요.”
“네게만 알려 줬구나.”
그만큼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를 믿고 있었다. 평소 태도에서도 보이지만, 비밀을 드러낸 것으로 더더욱 확실해졌다.
루슬란은 잠시 아나스타샤를 보다가, 작게 말했다.
“다행이네.”
“다행인가요?”
“다행이지.”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고맙네요.”
자신이 신뢰받는다는 것이 기쁜지 아나스타샤가 웃었다. 루슬란은 그제야 아나스타샤가 했던 말과 태도들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이해가 가네. 아나스타샤, 네가 아까 그랬지. 내가 타티아나의 지지자이자 보호자이듯 너 또한 그렇다고.”
“그랬었죠?”
기억이 짧은 만큼 많은 것이 부족한 타티아나를 아나스타샤는 단순한 친구로만 대하진 못했던 것 같다. 루슬란은 그녀의 마음씀씀이를 느끼며 가족이나 보일 법한 헌신에 감사했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조금 궁금한 점이 있어.”
“뭔가요?”
“그렇다면 오늘은 왜 나와 뜻이 안 맞았던 거지?”
“무슨 말씀이실까. 그 애를 위한다고 해서 꼭 똑같아야만 하나요?”
더없이 어른스러워 보이기만 했던 아나스타샤의 태도가 살짝 변했다.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지만, 루슬란은 아나스타샤에게서 맹목적인 응원과 애정 같은 감정 등을 느꼈다.
그건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방금 한 말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아나스타샤는 약간 말을 골랐다.
“지금 타티아나는 굉장히 중요한 지점에 서 있는지도 몰라요.”
“그건 천천히 하면 안 되는 건가?”
“저도 미칠 것 같아요. 정말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아나스타샤는 애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곧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타티아나가 절 내버려 두고 가는 건 싫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목을 붙잡을 순 없겠죠.”
조금 무섭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루슬란은 그녀의 말이 정확하다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로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음악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선 아무리 친한 친구와 함께일지라도 천천히 어깨동무를 하고 가 주지 않는다.
피아노라는 거대한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인 두 사람이 갈 길은 그렇게 평화로운 산책로가 아님이 분명했다. 타티아나는 자기 자신을 이끄는 것에도 힘이 부친다. 타티아나에게 말하면 절대 아니라고 하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아나스타샤는 강렬한 의지로 말했다.
“늦어 버리기 전에 저도 따라갈 테고요. 반드시.”
타티아나는 숙련된 산악인처럼 주저 없이 산을 올라간다. 대부분 절망해 버릴 절벽을 마주치더라도 앵커를 박고 밧줄을 걸면서 타고 오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뒤따라 밧줄을 잡고 오를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
그런 아나스타샤를 보며 루슬란은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훨씬 앞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피아노에 한해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타티아나는 그렇게 혼자서 척척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가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면 타티아나는 몇 걸음 가지 못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두 사람의 존재는 서로에게 중요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나저나 그냥 집으로 가면 되는 거야?”
“예.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저희 집에도 들렀으면 좋겠어요.”
“괜찮을 거야.”
“고마워요.”
루슬란은 아나스타샤가 준비한 방법이 무엇일지 기대하며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그가 아나스타샤에게 가지고 있던 약간의 관심과 호감은 조금 더 커졌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훨씬 아나스타샤를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동생인 타티아나였다.
***
그대로 소파에 누워 있으면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일어나 앉았다. 빅토르는 조금 더 누워 있는 게 좋겠다고 말했지만 난 괜찮다고 말했다.
“…….”
그렇게 멍하니 앉아서 난 오늘 밤 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딱 잘라서, 어마어마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룻밤 만에 난 파우스트 소나타의 완성도를 굉장히 높게 끌어 올렸고, 그건 일반적인 연습으로는 족히 몇 주는 걸릴 수준이었다.
이렇게 무언가 감을 잡았을 때 집중적으로 연습을 해서 쫓아가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판단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는 감수해야 했다.
손을 들어 올렸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난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그저 손가락과 팔뿐이 아닌 몸무게 전체를 실어 누른다.
손가락이 감당해야 하는 건 무게뿐이 아니다. 보다 강한 소리를 위한 속도도 필요했다. 몸무게로 깊이를 만들고, 속도로 음량을 만든다. 늘 해 온 일이지만 몇 번이나 연주를 반복했더니 온몸이 노곤하고 풀어져 버릴 것 같았다. 산 채로 분해될 것 같은 기분이다.
연주 내내 집중했던 신경에도 끈적한 무언가가 부어진 것처럼 나쁜 기분이 들었다. 곡의 분석과 피드백만을 떠올리던 머리도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다.
몸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이만 자지 않고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
하지만 이 와중에도 의욕은 충만했다.
오늘만 날인 건 아니지만, 오늘 같은 연주를 할 수 있는 건 오늘뿐이었다.
난 마지막 남은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조금 가라앉았던 마음속 음악이 둥실 떠오른다.
일어나서 온몸을 스트레칭했다. 팔을 당겨서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스트레칭을 하고, 어깨를 내리고 목을 이완시킨다. 알렉산더 테크닉은 밸런스가 무너진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릴랙스시키는 데에 아주 유용했다.
졸음과 피곤이 잇달아 엄습해 오지만 버텨 냈다. 스스로를 진단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행스럽게도 내 몸은 조금 더 움직여 주었다. 내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몸에서 무리가 생겨 따라오지 못한다면 당장 그만두어야 하겠지만, 어쨌거나 따라와 준다는 것이 너무 고맙다.
난 몸을 험하게 다룰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오늘 밤은 어쩔 수 없을 뿐이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타티아나.”
문이 열리고 아나스타샤와 루슬란 오빠가 들어왔다.
아나스타샤는 날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왜 일어나 있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어요.”
“그 와중에 준비를 하고 있었어? 넌 정말…….”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미안함을 느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뒤편에서 루슬란 오빠는 가라앉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루슬란 오빠.”
“……그래.”
“걱정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이젠 정말 괜찮아요.”
“안 믿어.”
“예?”
대뜸 그렇게 말하는 데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안 돌아가는 머리가 우뚝 정지했다.
멍청하게 서 있자 루슬란 오빠가 한참을 날 보더니 이내 약간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이번이 마지막 녹음이야. 알겠지?”
“……예. 약속할게요.”
“약속한 거다.”
어차피 나도 이번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마지막 녹음일 것이라 생각한다. 난 분명하게 약속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나스타샤가 활짝 웃으며 내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자, 그러면 준비를 해 보자, 타티아나.”
“무슨 준비인가요?”
“짠.”
그녀는 루슬란 오빠에게서 커다란 쇼핑백을 받아 들고는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서 펼쳤다. 푸른 색채가 눈앞에 반짝였다.
아나스타샤가 가지고 온 것은 푸른빛의 연주회용 드레스였다. 난 이 드레스를 기억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첫날 입었던 드레스였다. 집으로 가져와 보관하고 있었지만 그간 볼 일은 없었는데.
“집에서…… 가져오셨어요?”
“응. 그래서 루슬란과 함께 갔었던 거야.”
“아…….”
아나스타샤 혼자 우리 집, 그리고 내 방에 들어가서 옷장을 뒤적거릴 수는 없었기에 루슬란 오빠를 데리고 갔었던 것이다. 난 그제야 모든 정황을 파악했다.
“…….”
아나스타샤가 펼쳐 든 드레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넓디넓은 무대 위에서 연주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주회용 드레스는 이 밋밋한 스튜디오에서 과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솔직히 잘 안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었다.
“여긴 딱히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고, 넌 잠옷을 입고 집에서도 무대에 선 것처럼 똑같이 집중해서 잘 해내곤 하겠지. 안 그래?”
“비슷해요.”
그녀의 말처럼 난 입고 있는 것이나 장소에 딱히 구애받지 않는다. 어디서나 피아노가 있다면 음악에 집중했고, 거기에 큰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아주 없지도 않다.
“그래도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연주가 가장 잘 되는 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해.”
“……무대는 단 한 번뿐이죠.”
“그렇지?”
녹음도 매순간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지만, 그래도 연주자에게 드레스라는 복장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군인에게 군복이 필요하듯, 연주자에겐 포멀한 복장이 중요했다. 난 그 힘을 무시하지 않는다.
여덟 번째 녹음은 분명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그녀에게서 드레스를 받아 들고 웃었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조언에 따르도록 할게요.”
“응! 바로 입어 보자.”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뒤로 돌아 말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남성분들은 잠시 나가 주시겠어요?”
“어, 그, 그래.”
루슬란 오빠와 빅토르, 그리고 저편의 마카로프 프로듀서까지 조금 당황해하며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문에는 유리창이 있지만 누군가 엿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대로 옷을 벗으려고 하니, 아나스타샤가 기겁하며 말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창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난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무도 보지 않아요.”
“무슨 말이야!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여자 두 명이 옷을 갈아입는데 창문을 안 가린다는 게 말이 돼?”
“두 명이요?”
“응? 응.”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발치의 쇼핑백을 가리켰다.
“내 것도 있거든.”
“……?”
연주는 저만 하는데 아나스타샤는 왜요?
약간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녀가 싱긋 웃었다.
“청중에게 드레스가 강제되는 건 아니지만, 입어도 괜찮잖아?”
“……아.”
내가 완벽한 연주자로 연주에 임할 수 있게 도와주면서 동시에 아나스타샤는 완벽한 청중이 되어 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세심함에 난 순간 울컥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대체 어떻게 답례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그렇게 서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솜씨 좋게 노트를 펼쳐 창문턱에 걸쳐서 가려 놓고는 빙그르르 돌아섰다.
“드레스 입는 거 도와줄게.”
“……고마워요.”
아나스타샤는 쾌활하게 말했다.
“멋진 연주로 마무리하자. 타티아나.”
“예.”
난 짧게 대답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고양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