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65화 (265/1,277)

##  265화

마카로프는 루슬란, 빅토르와 함께 복도에 서 있었다.

자신의 스튜디오고 자신의 작업실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당연하다는 듯 나가 달라 말했다. 맹랑하기도 했지만 귀엽기도 했다.

“…….”

남자 세 명은 뻘쭘하게 침묵했다.

타티아나의 경호원인 빅토르는 어색하거나 심심하다고 사담을 나누는 사람이 아니었고, 루슬란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마카로프는 어쩐지 모르게 타티아나의 오빠인 루슬란에게 못 할 짓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 말을 아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않고 서 있을 일도 아니었다.

“곧 6시……. 정말 오늘 밤을 꼬박 새웠군요.”

마카로프가 툭 화두를 던졌다. 루슬란이 바로 반응해 올 법한 이야기였다.

루슬란은 고개를 돌려 마카로프를 바라보았다.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올해로 스무 살,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완전한 성인이라 하기엔 여전히 애매한 나이. 하지만 동생의 보호자로 이 자리에 있는 루슬란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단호함을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 녹음 잘 부탁드립니다.”

“…….”

마지막이라고 못 박는다. 이다음은 절대로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마카로프는 피식 웃어 버릴 뻔했다. 이 청년은 지금 타티아나가 연주자로서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듯했다.

“이제 타티아나는 드레스를 입지 않았습니까? 걱정 마시죠.”

마카로프가 설명했다.

“연주자란…… 그중에서도 특히 피아노 연주자란 더더욱, 보통 자신의 장소나 악기를 가지고 있지 못해요. 그저 가지고 있는 건 스스로의 몸과 그 위에 걸치고 있는 것들뿐이죠. 그조차도 연주에 방해가 될까 최소화시킨 것들.”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당연하게 자신의 바이올린을 소유하고, 무대에 오를 때도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연주에 임한다. 허나 피아노 연주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니는 연주자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피아노 연주자들은 모르는 곳에 준비된 모르는 피아노로 연주에 임한다. 숙련된 연주자들은 잠깐의 리허설로 금방 악기에 익숙해지지만 결국 자신의 악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운 공간에서 피아노 연주자들은 무엇을 믿고 무대에 임하는가.

마카로프는 그간 봐 온 수많은 연주자들을 떠올렸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그 어떤 음악가들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고한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몸과 돋보이는 의상 외엔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악기이자 무기인 피아노 역시 빌려 쓰는 도구일 뿐.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갈고닦은 정신력의 강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어느 곳의 어느 피아노든, 건반이 있다면 그 자리를 무대로 만드는 것은 피아노 연주자들의 독특한 능력일 겁니다.”

“……그렇겠군요.”

“타티아나는 특히 그 점에서 타고났죠. 무대에 강한 연주자들 중에서도 특히 강합니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그렇게 강한 멘탈을 만들어 나가는 연주자들이 있는 반면, 그런 강함을 성격으로 타고난 연주자들도 있었다.

타티아나는 타고났다. 의상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른 환경엔 전혀 얽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 가지고 매 연주를 마지막인 것처럼 모든 것을 쏟아 낼 수 있는 집중력을 갖췄기에 지금까지도 특별히 무언가 할 필요는 없었죠.”

“…….”

“하지만 모든 피아노 연주자들이 그렇듯 낯선 무대에 몸과 의상만이 올라갈 수 있음을 타티아나도 안다면, 드레스를 입은 지금이야말로 연주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순간일 겁니다.”

이제야 설명할 수 있지만 마카로프는 타티아나에게 드레스를 입혀서 태도를 다잡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너무나 완벽한 천재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더더욱 완벽하게 타티아나를 준비시킬 수 있는 부분을 잡아냈다. 같은 연주자가 아니라면 결코 떠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새삼 감탄하며 마카로프가 말했다.

“그리고 드레스를 입고 오른 무대에선 단 한 번의 연주로 모든 것을 끝내고 내려와야 한다는 것도 알 테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 될 겁니다.”

“설마 아나스타샤도 그런 의미로 드레스를……?”

“분명 그런 의도였다고 생각됩니다. 친구가 한계라는 것은 잘 알 테니.”

아나스타샤는 친구이자 동료 연주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제시했다.

“언제까지고 내버려 둘 순 없다는 마음과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사이에서 드레스를 가지고 오겠단 결론이 나온 것이겠죠. 머리가 좋아요.”

마카로프는 아나스타샤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밤을 새워 음악 작업을 할 때 아는 지인이나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해 준 것은 단순히 함께 있는 일 이상이었다. 조언과 연구 그리고 타티아나가 마지막까지 녹음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것까지,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옆에 있으면서 엄청난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루슬란은 한결 긴장이 풀어진 태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생각이 정리된 모습이었다.

“이참에 말씀드리죠, 마카로프 일리예비치. 음반이 완성된 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필요하다면 제게 전화를 하셔도 좋습니다.”

“…….”

마카로프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존심 강한 타티아나가 없는 자리에서 루슬란이 하는 말을 그는 바로 알아들었다.

루슬란은 동생 걱정에 힘든 젊은 청년으로만 보이지만, 그가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2세라는 것을 생각하면 전화를 해 달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웃으며 말했다.

“루슬란, 그렇다면 당장 도와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장 말입니까?”

그 태도가 조금 뻔뻔하다고 생각되었는지 루슬란이 조금 당황했다. 마카로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문이 열리면 동생분의 드레스를 칭찬하고 연주를 격려해 주시죠. 그리고 잘 듣고 감상해 주십시오.”

“…….”

“그게 당신이 해 줘야 할 가장 큰 일입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루슬란은 괜히 투덜거렸다.

하지만 마카로프가 왜 전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흘려버렸는지에 대해선 이해한 듯했다.

마카로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스스로도 말하면서 이렇게 자신감 넘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잘 보시죠. 동생분이 어디까지 성장할지. 놀라실 겁니다.”

“놀라는 건 이제 싫군요.”

“하핫.”

약간 편해진 분위기에서 두 남자는 서로를 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짧은 환담이 오가길 잠시.

“들어오셔도 돼요.”

닫혀 있던 메인컨트롤 룸의 문이 빼꼼히 열리며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내밀었다.

복도에 서 있던 세 남자는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마카로프는 여성복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정말 감탄이 나올 만치 잘 어울렸다.

그는 담백하게 칭찬을 건넸다.

“정말 아름답군요.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와우,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나스타샤와 푸른색 드레스의 타티아나가 감사 인사를 했다. 의상만 포멀하게 바뀌었을 뿐인데 인사하는 동작까지도 보다 맵시 있고 우아하게 변화했다.

아나스타샤는 칭찬을 받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타티아나를 보았다. 타티아나는 그 짧은 시간에 머리까지 땋아 올려서 목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늘 자세가 바른 타티아나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

“…….”

여전히 혈색이 창백하다. 그간의 무거운 피로에 겨우 1시간의 휴식은 너무나 짧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당장에라도 연주에 임할 수 있는 연주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루슬란이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

타티아나가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고, 루슬란 역시 미소로 답했다.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린다.”

“감사해요.”

“그렇게 잘 어울리는데 막상 네 옷장에 드레스는 그리 많지 않더라. 다음엔 드레스라도 종류별로 맞춰 봐야겠어.”

“마, 많아요, 이미.”

“같이 간 아나스타샤가 네 옷장 열어 보더니 나한테 화내던데. 네 드레스도 잔뜩 안 사 주고 뭐 했냐고.”

“……예?”

아나스타샤가 루슬란에게 핀잔을 주었다는 말에 타티아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당황해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 모습에 흡족해하며 루슬란이 말했다.

“농담이야.”

“?”

“제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 그렇게 화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렇죠? 루슬란.”

“내가 내 목을 졸랐군.”

아나스타샤는 재치 있게 끼어들었고, 루슬란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그제야 타티아나는 웃음을 되찾았다.

루슬란은 웃는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튼…… 듣고 있을게.”

타타아나는 가까이 선 루슬란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주세요.”

부스로 향하기 직전 마지막 격려가 끝나고, 타티아나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는 것은 연주자 혼자였고, 다른 사람에게 허용된 것은 침묵뿐이다.

아나스타샤와 루슬란은 말없이 스피커 옆에 섰고, 마카로프는 컴퓨터 앞에 앉아 녹음 준비를 시작했다.

새 녹음 파일을 만들다가, 마카로프는 키보드를 치던 손을 멈칫했다. 이전까지 타티아나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1번 녹음들은 demo1부터 7까지의 파일명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순서대로이기에 이번엔 demo8로 저장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하게 rach sonata1이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파일을 만들었다.

이전 연주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부스 안에 들어섰다.

그 모습은 흡사 대기실에서 무대 위로 오르는 연주자와 같았다. 타티아나의 걸음걸이에 맞춰 푸른 드레스가 일렁인다. 그것만으로도 삭막한 색과 구조의 부스 안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피아노 옆에 선 타티아나는 바로 앉기 전에 메인컨트롤 룸으로 향하는 창문 쪽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했다. 장난으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청중들을 위해 경애를 표하고 있었다.

이 자리의 청중은 단 네 사람이었다. 네 사람은 박수를 쳐서 타티아나에게 응원을 보냈다. 타티아나는 싱긋 웃는다.

마카로프는 말없이 손짓으로 곧바로 연주에 들어가도 좋음을 신호했다.

피아노 앞에 앉은 타티아나는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고 위치를 조정한 뒤 턱을 당겼다. 길게 드러난 목이 살짝 기울어졌다.

건반과의 위치를 가늠하는 듯 오른손을 뻗어 건반 위에 살포시 올린다. 그 상태로 그녀는 건반을 내려다보며 심호흡했다.

“…….”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60년에 걸쳐 쓴 이 대작을 프란츠 리스트는 교향곡으로 작곡했으며 구스타프 말러 역시 자신의 교향곡에 인용했다. 샤를 프랑수아 구노는 오페라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파우스트 오페라는 그 종류만 16곡이나 된다.

하지만 피아노 소나타는 단 한 곡. 라흐마니노프가 쓴 이 피아노 소나타 1번뿐이다.

교향곡과 오페라로 묘사해 내기도 버거운 이 대작을 라흐마니노프는, 그리고 타티아나는 피아노 한 대로 세상에 드러냈다.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타이밍에, 어느샌가 낮은 음악이 스며들어 스튜디오 전체를 물들였다.

“……!”

일곱 번이나 연주한 곡이었지만 이번엔 또 다른 깊이가 느껴졌다. 타티아나는 절묘한 리듬감으로 곡을 그렸다.

중세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학자이자 연금술사이기도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재를 걷는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발소리와 지팡이를 짚는 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노인은 절망한다. 진리를 찾아 평생을 바쳐 노력하였으나 인간의 한계는 노인의 지식욕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그 광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시니컬한 광기의 아르페지오가 퍼부어진다. 언뜻 가볍게 들리지만 명징한 분노의 음색은 마치 손을 가져다 대면 베일 것만 같다.

타티아나의 테크닉은 건반과 현에서 그치지 않았다. 음을 가지고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듯하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폭력이 아니었다. 확고함에서 비롯된 차가운 광기가 서재를 바라보는 노인의 마음속에서 요동친다. 그 광기는 한순간 끓어오르다가 빠르게 가라앉는다.

아르페지오는 곧 되돌아와 절망하는 노인으로 돌아갔다.

타티아나는 페달을 깊게 밟았다. 프레이징을 길게 이어 가져가고, 끝나는 지점에서 뭉치지 않도록 페달을 뗀다. 하지만 끝까지 떼지 않는다. 정말 미세하게, 구두 끝으로 페달을 조절해서 댐퍼를 완전히 현에 내려놓지 않는다.

그렇게 극도로 정밀한 페달링을 보여 주는 타티아나의 양발은 마치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느릿하고 질척하게 움직였다.

노인, 파우스트는 절망의 늪에서 무겁게 걸음을 옮긴다.

“…….”

타티아나는 평소 페달을 상당히 아끼는 해석을 자주 보였지만, 그것은 페달링이 미숙해서가 아니었다.

아낌없이 페달을 쓰면서 타티아나는 자신의 건반 테크닉과 함께 모든 것을 하나로 파우스트 테마를 연주해서 웅변한다.

기가 막힐 정도의 테크닉과 표현력이다. 마카로프는 여덟 번째로 감탄하면서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는 전율이 인다.

이렇게 마이크를 통해 스피커로 열화된 소리가 아닌, 커다란 홀에서 제대로 듣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만 치솟았다. 하지만 마카로프의 직업은 레코딩 엔지니어다. 그는 타티아나의 연주를 남겨서 현재의 그녀를 영생케 할 의무가 있었다.

“…….”

마카로프는 조용히 연주에 빠져들었다.

느릿하게 방황하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회색 빛깔의 음악은 불분명함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모순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마카로프는 머릿속에 울리는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그렇게 형용할 수밖에 없었다.

명료하지만 동시에 흐릿하다. 저녁 식사를 하며 어설프게 했던 마카로프의 조언을 타티아나는 현실에 끄집어내고 있었다. 단순히 뛰어난 기술이라고 감탄할 수준이 아니었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하리니.

타티아나를 보며 문득 떠올렸던 문구가 음악 위로 흘러내린다. 아주 짧지만, 마카로프는 음악의 행간에서 신의 목소리를 읽어 냈다.

숨 쉬는 것도 잊고 마카로프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

부정의 악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날카롭게 대화를 나눈다. 서로를 지배하기 위한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조롱과 유혹, 겁박.

스치듯 지나가는 경박한 농담에도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타락과 파멸을 바라는 거대한 내기와 계약. 어느 무엇도 가볍지 않았다.

말소리에 섞여 가늘게 경련하는 선율, 순간적으로도 몇 번씩 바뀌는 감정의 편린들이 뒤섞이고 춤을 추다가 한순간 발작하듯 이리저리 튀어 오른다.

타티아나의 손이 건반 위를 스쳐 지나가다가, 순간적으로 잔상을 남기며 찍어 눌렀다. 이미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피로할 텐데도 그 피로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터프하기 그지없는 강렬한 타건이 현을 후려치자 음이 튕겨 나온다. 그만두지 않는다. 연속해서 이어지며 거대한 화성을 이룬다.

그렇게 뛰어난 테크닉과 함께 악장 해석력이 전체적인 음악의 수준을 한없이 끌어 올린다. 1악장 전체를 아우르는 두 개의 제시부는 동시에 표현되며 전개되고 따로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합쳐진다.

작곡가 라흐마니노프가 정밀하게 구성해 놓은 그 구조를 타티아나는 이해한다. 건반을 통해 모순과 방황, 절망, 불안함 등이 엉켜 갔다. 피아노 소나타가 아닌 교향악처럼 여러 개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이는 듯하다.

불확실한 음조와 대위법으로 자유롭게, 하지만 치밀하게 그려 낸 다성부의 노랫소리. 유연하고 생생하며 강렬하다.

라흐마니노프의 천재적인 작곡능력이 빛을 발하고, 이 최상의 곡을 타티아나는 최고의 연주로 재현해 이 시간대에 풀어놓았다.

“…….”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기분으로 감상에 잠겨 있던 마카로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은근한 라장조로 1악장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타티아나는 굉장히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찬란하게 펼쳐지는 클라이맥스는 없었다. 음울하게 고동치는 선율로 천천히 막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깊게 건반을 누른 검지가 천천히 위로 향하다가, 아래로 미끄러지며 떼어지는 것으로 곡이 1악장이 끝났다.

옆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마카로프가 보니 아나스타샤는 양손을 가슴 앞에 쥐고 몰입하고 있다가 간신히 숨을 쉬는 듯했다.

같은 나이의 친구다. 과연 저런 연주를 듣는다면 무슨 생각이 들지, 마카로프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

1악장의 주제가 마무리되고 그 여운이 사라질 즈음,

바로 긴장과 집중이 흐트러지기 직전, 타티아나가 손을 천천히 건반 위로 내렸다.

천천히, 2악장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