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2악장 렌토. 매우 느리게.
다장조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바장조인 이 악장은 아주 천천히 물결처럼 다가온다.
여러 사람이 만들어 나가는 오페라나 교향곡과 달리 타티아나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낸다.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노인에서 경박하고 자신만만한 악마, 그리고 사랑스러운 여인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력의 스펙트럼은 끝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비약을 먹고 젊어진 파우스트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그레트헨을 테마로 하는 악장이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그레트헨은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환희에 찬 노랫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러한 그레트헨의 노래는 단순히 사랑스러움에서 그치지 않는다. 긴 멜로디 라인을 이어 나가면서 작은 목소리들이 겹쳐진다. 그레트헨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들을 죽이는 죄를 저지르기도 한 죄인이다. 순수한 영혼을 지니고 있지만 참회와 기도 그리고 구원 없이는 타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2악장은 그레트헨의 기도이기도 했다.
두 번에 걸쳐 주제가 드러나고, 1악장에서 빌려 온 작은 카덴차가 이어졌다. 여러 목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서정적이고 아름답지만 이 복잡한 주제는 정말 그려 내기 어려웠다.
겉보기엔 세 악장 중 가장 짧은 길이와 느긋한 템포를 지니고 있어 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기다란 프레이징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다성부의 노래를 부르고, 복잡한 주제와 클라이맥스까지 유려하게 풀어 나가는 데에 굉장히 깊이 있는 깨달음을 요구한다.
타티아나는 진지하게 연주를 이끌어 나갔다. 왼손의 손목을 기묘하게 움직이며 건반을 짚었다. 일반적으로는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다음 건반을 짚지도 못할 것 같이 보이는데도, 타티아나는 절묘하게 곡을 이어 나갔다. 예상하기 힘든 깊고 묵직한 음이 매력적으로 울린다.
신비로운 밤하늘이 둥실거리며 떠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된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평소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정말 손가락 끝만을 이용해서 건반을 누르는 듯한 자세였다.
실수는 없었다. 정확하고 섬세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타티아나는 몇 번에 걸쳐 특이한 음향적 효과를 기술적으로 어떻게 표현해 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클라이맥스 코다에 이르러 황홀한 꾸밈으로 음악이 진동했다.
오른손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트릴하며 떨리는 음색을 자아낸다. 특별하게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떨림이었다. 보다 간절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잔잔하게 그리고 동시에 생기 넘치게 흐르는 노래는 따뜻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 순수한 영혼을 향해 악마는 처형을 부르짖지만 천사들은 구원을 허락한다.
이 클라이맥스는 타티아나가 처음 두어 번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꽤 곤혹스러워하던 구간이었다. 기술적으로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도 구원받는 영혼을 어떻게 묘사해 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몇 번의 연주와 연구를 거친 끝에 타티아나는 자신의 해석과 음악을 찾아낸 듯했다. 일곱 번의 발전을 거치며 지향하던 목표점은 이제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마카로프는 눈을 감고 타티아나의 노래에 심취했다. 자애롭고 사려 깊은 음색에 탄복이 절로 나온다. 하룻밤 만에 얻어 낸 과실이라기엔 굉장히 가치 있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음악에 빠져든 마카로프는 오늘 밤이야말로 정말 기적이나 다름없는 밤이라고 생각했다.
환상적인 2악장이 살며시 사그라들며 마무리되고, 타티아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카로프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가 아주 잠깐 경련하는 것을 발견했다. 피로에 지친 몸이 긴장과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
여기서 멈춰도 된다. 레코딩 엔지니어의 일은 단순 녹음에만 있지 않다. 멈춘 다음 조금 컨디션을 되찾고 3악장을 따로 녹음해서 아무도 모르도록 감쪽같이 이어붙일 수도 있었다. 딱히 문제될 것도 없었고 누군가를 속이는 일도 아니었다. 되레 그것이 마카로프의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카로프는 그저 손을 내려놓고 가만히 부스 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흐트러지면 흐름이 깨진다. 타티아나의 강인한 집중력을 믿고 싶었다. 한 번에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
타티아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고, 시선을 살짝 내려 건반을 노려본다. 2악장까지의 흐름과 곧 그 뒤로 이어 나갈 3악장의 연계. 그사이에 잠시 주의를 환기시키는 적막의 시간. 그 속에도 리듬은 존재한다.
타티아나는 고요 속에서 선율도 화성도 없는 리듬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첫 시작부터 사로잡힌 모든 청중들이 공유하는 그 리듬 속에서, 타티아나가 강렬한 화음을 터트리며 3악장을 연다.
“……!”
회색빛으로 침잠해 가는 고요를, 작렬하는 빛이 집어삼켰다.
깜짝 놀라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리듬에 합치된 빛은 악장 전체를 서서히 달구며 이끌어 나갔다.
알레그로 몰토의 매우 빠르고 드라마틱하고 품격 있으며 동시에 러시아적인, 그야말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화려하게 전개되었다. 타티아나의 압도적인 기교는 피로에도 녹슬지 않고 건반을 넘나든다.
파우스트가 그리스부터 중세까지 시간을 넘나들며 세상의 진리를 찾아 여행하며 겪는 모든 일들이 점멸하는 빛 속에서 마치 파노라마처럼 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유혹과 퇴폐. 자비와 노력. 또다시 탈선과 전락. 참회와 노력.
파우스트를 타락시키고자 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갖은 술수와 그것에 농락당하면서도 길을 잃지 않고 걸어 나가는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여기에 존재한다.
단 몇 분 남짓 되는 짧은 시간 사이에 다섯 개도 넘는 음악적 테마가 순식간에 주어지고, 발현되었다가 사라져 갔다. 그 모든 것은 절묘하게 맞물리며 하나의 길을 따라간다.
이러한 해석을 만들고 직접 손으로 구현해 내기까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이 필요한지 마카로프는 상상조차 힘들다. 이 곡은 연주자에게 어마어마한 실력을 요구했다.
타티아나는 그 요구를 철저하게 받아 낸다. 한 치의 양보도 타협도 없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열다섯 살의 소녀는 파우스트였다가 메피스토펠레스였으며, 그레트헨이었지만 지금은 거대한 거인으로 보였다.
“…….”
곧이어 1악장과 2악장에서 보였던 주제들도 등장해서 섞여 든다. 각각 나누어진 악장이지만 3악장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이전의 모든 음악과 주제들을 하나로 통합했다. 변화된 주제가 스쳐 지나가고, 화려하게 치솟는다.
정열적으로 교차되며 엇갈리는 양손의 조화는 눈으로도, 귀로도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르면서도 완벽하게 머릿속에 이미지들을 쏟아 내었다. 저항할 수 없이 마카로프는 그 흐름에 휩쓸린다.
장엄한 화성과 함께 곡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되돌아와 주제를 반복했다. 그 주제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예리해져 있었다.
막연하게 세상의 진리를 추구하던 파우스트의 욕구가 보다 구체화되는 듯, 화성의 밀도가 높아지고 음악의 깊이는 깊어졌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약속하는 화려함과 호사스러움은 재가 되어 바스라진다. 방황하나 노력하는 파우스트는 시공간을 떠돌며 깨달은 지혜로 자신의 선을 추구한다.
그 의지를 대변하듯 타티아나의 피아노는 보다 심원하고 노쇠한, 하지만 현명한 숭고함을 담고 흐른다.
“…….”
코다에 이르러 타티아나의 피로도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지 흐릿해지다가 그대로 음악과 함께 피아노로 빨려 들어갈 것같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푸른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의 자세와 손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인간이라면 피로에 지쳐 그만두고 잠들어 버리고 싶은 유혹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유혹을 이겨 내고 자신의 결론으로 자신의 길을 닦아 끝을 맺으려는 파우스트처럼 타티아나는 더더욱 연주에 몰입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건반을 스친다. 하나의 선율이 작게 아른거린다. 그렇게 잠시 잔잔하게 흐르던 소리는 점차 커졌다. 타티아나의 손이 빠르고 강렬하게 교차한다. 아주 난해하면서도 절묘한 악센트가 양 극단에 머물다가 사라진다.
각 순간마다 모든 패시지가 의미를 담고 흐른다. 짧은 순간으로 압축된 메시지를 잘라 내지 않고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해선 초절의 기교가 필요했다.
이 악장에서만 열 개도 넘는 주제와 네 개의 클라이맥스가 화려하고 정밀하게 얽혀 있었다.
그중 가장 장대하고 강렬한 클라이맥스가 막을 열었다.
“……!”
마치 음악 그 자체와 하나 된 것처럼, 타티아나는 온몸으로 모든 음악을 한곳으로 집중시킨다.
타티아나가 그려 내는 이미지는 너무나 명료했다.
마카로프는 땅 위에 선 파우스트를 떠올린다.
몇 번이고 봐서 이제 외우게 된 문장들이 저절로 마카로프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파우스트는 지혜의 결론을 내린다. 매일을 노력하며 싸워서 정복한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위험에 마주해서도 값진 나날을 보낼 수 있는 이유이다.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민중들을 내려다보며, 파우스트는 외친다.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마카로프는 지금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타티아나와 그 시간을 기록하는 자신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 타티아나는 현재 자신이 피아노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의 모든 것을 쏟아 내었다. 아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해낸다. 때론 멋지고, 때론 아름답고, 모든 것을 근사하게.
라흐마니노프의 독주곡 중에서도 까다롭기로 손꼽히는 파우스트 소나타가 열다섯 연주자의 손으로 완주되었다.
양손으로 마지막 음을 짚고, 타티아나는 그 음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무게와 영혼을 끝까지 건반에 집어넣으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그 모든 것은 마무리까지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연주가 끝났다.
마카로프는 거의 넋이 나간 채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소리를 기록하는 파장이 완전히 일직선을 그리자 멍하니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청중으로 함께했던 아나스타샤와 루슬란, 빅토르도 열정적인 박수로 연주자인 타티아나에게 찬사를 건넸다.
압도적인, 그야말로 영혼을 쏟아 내는 듯한 연주였다. 그 영혼이 소리에 섞여 들어가고, 스튜디오의 녹음 장비가 소리를 잡아냈다면, 타티아나의 영혼은 정말로 그 일부분이나마 기록되었을 것이다.
마카로프는 파우스트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세상에 남겨 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행복을 예감하면서, 마카로프는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었다.
“정말…….”
아나스타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연주가 얼마나 기적적인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유리 너머로 계속되는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도 타티아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의 얼굴엔 잠시 연주자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이 거대한 대곡을 그토록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다고는 상상도 안 되는 가녀린 소녀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곧 다시 연주자로 되돌아간다. 타티아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아한 몸놀림으로 슥 일어선 그녀는 피아노 옆에 서더니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마지막까지 무대 매너를 보여 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얼굴에 둥실 떠오른다. 그리고 무어라 입을 여는 순간, 타티아나는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
“타티아나!”
루슬란과 빅토르가 가장 빠르게 움직였고, 아나스타샤가 뒤따랐다.
마카로프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연주회를 하다가 무대 위에서 사망한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페트로브나 니콜라예바가 떠오른다. 마카로프는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걷어차고 싶어졌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이 자리에서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어야지 타티아나가 잘못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마카로프가 마지막으로 부스에 들어가자 빅토르가 타티아나의 목을 짚고 가슴에 귀를 대고 있었다. 이 중에서 응급조치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은 경호원인 빅토르뿐인 것 같았다.
“하느님 제발…….”
루슬란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떨고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그 옆에 주저앉아서 양손을 모아 쥐고 울고 있었다.
눈을 감고 쓰러져 있는 타티아나를 보며 마카로프는 머리가 텅 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생을 무교로 신에게 빌어 본 적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을 찾고 싶어졌다.
잠시 후, 빅토르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정말이야? 정말이냐고!”
이성을 잃고 흥분한 루슬란이 다짜고짜 빅토르에게 윽박질렀다. 빅토르는 꿈쩍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구급차를 불러야겠지만 일단은 호흡도 심박도 안정적입니다.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
“당장…… 당장 구급차 불러. 당장.”
“예.”
물러난 빅토르가 스마트폰을 들었고, 아나스타샤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가선 타티아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은 것 같다는 빅토르의 말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연신 손목을 쥐어 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슬란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옆의 피아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깨어나기만 해 봐…… 진짜…….”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에도 충격과 물기가 얼룩져 있음이 느껴졌다.
마카로프 역시 부스 구석에 앉아 버렸다.
큰 문제가 없다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멍하니 타티아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막 쓰러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기절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서 있는 상태에서 기절하는 것은 몇 배나 더 위험했다. 넘어지면서 얼마든지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은 머리를 부딪치는 것 정도를 걱정하겠지만 연주자는 팔이나 손가락 끝만 잘못되어도 큰일 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다행히도 쓰러지면서 운 좋게 피아노 다리에 기댈 수 있었다. 물론 그 후에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긴 했지만 서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넘어지는 것보단 훨씬 충격이 덜했을 것이다.
“……후우.”
어쨌거나 지쳐서 기절해 버린 것을 가지고 지금 다행이라고 말했다간 루슬란이 그를 죽여 버리려 할지도 모르지만, 마카로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직 그녀는 연주자로서 할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