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67화 (267/1,277)

##  267화

어둡다. 간신히 든 정신은 어두운 곳을 헤매고 있었다.

형태가 있는 것, 개념뿐인 것. 온갖 것들이 두서없이 머리에서 뛰논다. 피아노와 건반, 장조의 스케일과 반음계 스케일, 드문드문 알 수 없는 음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 뒤로 흐르는 선율의 구조. 특유의 대위법은 라흐마니노프의 것이다.

거기까지 정체를 알아냈을 때, 그저 의식만이 남아 있던 나는 위로 훅 끌려 올라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 위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는다.

“…….”

급격한 부양감과 함께 눈을 떴다.

손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이불도 제대로 걷어 내지 못하고 멈춰 있는 상태였다.

편안함도 잠시, 온몸에 통증이 찾아들었다. 거친 창칼로 몸 곳곳을 쑤시는 기분이었다.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였지만 소리를 칠 힘도 없었다.

힘없이 꿈틀거리다가 그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손목과 손가락들을 움직여 보았다. 어쨌든 간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손이 움직이며 부드러운 이불 안에서 까딱였다.

“타티아나!”

“…….”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무어라 대답을 하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말이 생각이 안 났다.

난 멍하니 누워 있다가 일단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통증 때문에 죽을 것 같다. 누군가 다가와서 급히 날 부축했다. 오빠였다.

아 그래, 루슬란 오빠.

그렇게 천천히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데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있자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안 좋아진다.

난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1년쯤 전 이야기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현실감이 확 차올랐다.

“아버지. 오빠.”

간신히 입을 열어 말하자 방 안에 차오르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해소되었다.

한결 걱정이 덜어진 표정으로 아버지가 다가왔다.

“정신이 드느냐.”

“예.”

“아픈 곳은 없느냐.”

“괜찮아요.”

“기분은 어떻고.”

“좋아요.”

안 아픈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지만 무조건 괜찮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짧게 툭툭 내뱉을 일이 아니라 무슨 말이라도 더 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기분도 좋다고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아버지는 기분이 안 좋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 어깨를 누른다. 가뜩이나 힘도 없는데 그대로 침대 밑으로 눌러져 버릴 것 같다. 난 가만히 아버지를 불렀다.

“저기……. 아버지.”

“말하거라.”

“……죄송해요.”

마음대로 할 일은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죄송하다고 하자니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막돼먹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다른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엄한 눈길로 날 내려다본다.

“바로 잘못을 비는구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 있었겠지, 타티아나.”

“……예.”

“알면서도 무리를 했겠고.”

“그건…….”

말문이 턱 막힌다.

이렇게 무리를 할 만큼 피아노와 음악이 내게 중요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걱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딱히 둘 사이를 저울질 한 것도 아니었고. 난 그저…… 괜찮으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잘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는데, 옆에 있던 루슬란 오빠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괜찮다고 하니 이만 용서해 주시죠, 아버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조용히 해라, 루슬란.”

엄하긴 하지만 그래도 점잖게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어조가 조금 더 매섭게 돌변했다.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비인 내 대신 네가 잘 보살필 수 있다며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그 결과가 이것이냐?”

“그 결과는 여기에 없습니다. 스튜디오에 있죠.”

“그따위 결과는 신경 쓰지 않는다, 루슬란. 내가 아는 결과는 타티아나가 쓰러졌다는 것이야.”

“…….”

분위기가 무서웠다. 아버지는 고함만 안 치고 계셨지 거의 루슬란 오빠를 잡아먹기 직전이었다. 루슬란 오빠가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못 했다.

남매가 나란히 얼어붙어 있자 그제야 아버지는 조금 태도를 가라앉히셨다. 그러고는 오빠가 아닌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타티아나. 네 음악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아버지는 말씀을 하시면서 스튜디오에 있을 내 음원을 그따위 결과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건 들어 보지도 않은 음악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내 안위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잠시 물러나 있던 루슬란 오빠가 다시 차분히 말했다.

“저도 사실 아버지의 의견과 같습니다. 뭘 하든 간에 무리하는 것보다는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죠.”

“아는 녀석이 뭘 했느냐?”

“아무것도 안 했죠.”

“왜냐.”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루슬란 오빠가 날 내려다보더니, 다시 아버지를 보고 말했다.

“아버지도 못 말렸을 겁니다.”

딱히 빈정거리거나 도전적인 어투는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로서 전하는 듯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인상을 쓰며 루슬란 오빠를 바라보시다가, 짧게 말했다.

“아니. 난 했다.”

“그때 타티아나를 못 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루슬란. 지금 아비에게 도전하는 것이냐?”

다시 한 번 아버지가 화를 내실 것 같은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난 아까처럼 모든 것을 루슬란 오빠에게 전가하고 가만히 있는 대신 빠르게 끼어들었다.

“아버지. 루슬란 오빠에겐 잘못이 없어요.”

“뭐라고 했느냐.”

“다 제 탓이에요. 루슬란 오빠는 절 몇 번이고 데려가려고 했어요. 제가 고집을 부렸던 거예요.”

“네 오빠를 감싸는 건 기특하다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네 오빠에게 아무 책임도 없을 줄 아느냐?”

“저, 정말인걸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부 내 잘못이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루슬란 오빠는 전화상으로도, 내가 코피를 흘리고 빈혈을 느꼈을 때도 계속해서 강력하게 날 집으로 데리고 가야겠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맞서 고집을 부린 건 나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생각하는 보호자의 입장이란 그런 것이 아닌 듯했다.

난감했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책임 자체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쓰러지는 일은 이전에도 몇 번 있었…….”

“4시간이나 혼절해 있었으면서,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지금!”

아버지가 처음으로 버럭 고함을 치셨다. 난 그 소리 자체에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정말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다.

괜히 별것 아닌 일처럼 넘기려고 했다가 호통만 들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선 심각한 일인 것이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난 작게 말했다.

“잘못했어요…….”

“후우…….”

아버지는 더 화를 내지도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약간 당황했다. 아버지가 저렇게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죄책감이 밀물처럼 마구 밀려들었다.

“아버지.”

“…….”

“제가 아버지 마음도 모르고 너무 제멋대로 했어요.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타티아나, 넌 그렇게…….”

“아, 말로 가볍게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건 잘 알아요. 벌이 있어야겠죠.”

“뭐라고? 벌?”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버지. 말씀하시는 대로 따를게요.”

“…….”

아버지의 눈빛이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변했다.

난 진담이었다. 이렇게 말로 죄송하다 해 봐야 마음이 편치 않다. 게다가 루슬란 오빠 몫까지 함께 해결하려면 정말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각오가 선 눈으로 올려다보자 아버지는 한참을 말씀이 없으시더니, 이번엔 한숨처럼 말씀을 내뱉었다.

“됐다.”

“예?”

“혹시라도 건강에 문제 생기지 않도록 푹 쉬기나 하거라.”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냐. 네게 피아노 금지령이라도 내리란 말이냐?”

“그, 그건…….”

뭐라도 하겠단 결심은 어디로 가고 잔머리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2주일 정도 연습을 쉬어 본 적은 있었다. 딱히 죽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땐 명분이 없더라도 슬럼프를 겪고 있던 때였고, 지금이랑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 난 사흘만 피아노를 못 치게 둬도 미친 사람처럼 책상에다가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너무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그러라고 하신다면…….”

“어려운 표정이구나. 그러니 되었다 하지 않느냐.”

아버지는 그만큼 날 꿰뚫어 보고 계셨다. 난 입을 다물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아버지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버지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네게 그리 화가 나 있진 않다. 너무 겁먹진 말거라.”

“……아.”

“부모 된 마음으로 걱정이야 할 순 있지만 노력하는 네게 잘못했다고 할 순 없지.”

멍하니 듣고 있자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슥 다가와 내 머리 위에 닿았다. 쓰다듬거나 하시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몸을 못 가누리라고 생각하시는지, 그저 올려만 놓고 계실 뿐이었다.

난 그것만으로도 아프던 몸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가 웃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게 만들진 않아 줬으면 좋겠구나. 네가 혼절했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죄송해요, 아버지.”

난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걱정한다는 것도 알고, 알아서 자제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파우스트 소나타에서 느꼈던 것처럼 하룻밤 사이 도달하여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은 무언가를 느꼈을 때 내가 그만둘 수 있을까. 그런 감각은 결코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난 다음엔 다시 이런 일 없을 것이라고 확실히 약속을 드리지 못한다는 데에 스스로가 구제불능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감사함과 자책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만하마. 점심 식사는 나제즈다를 시켜 올려 보낼 테니 나오지 말고 쉬거라.”

“아뇨, 괜찮…….”

“오늘은 내 말을 듣기로 하지 않았느냐?”

딱히 그렇게 말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그렇게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그래야지.”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흡족하게 말씀하시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

방 안에 남아 있던 루슬란 오빠가 돌연 인상을 썼다. 난 아버지가 나갔다고 해서 다 끝난 게 아님을 깨달았다.

잔뜩 움츠러들어서 어떤 질책이 쏟아질지 숨죽이고 있을 때였다.

“……?”

루슬란 오빠는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오빠는 날 내버려 두지 않고 손으로 마구 쓰다듬었다. 몸에 힘도 없는데 진짜 목이 부러질 것 같다.

“조금 더 자.”

그 말만을 남기고 루슬란 오빠는 아버지를 따라 방 밖으로 휙 나가 버렸다.

“…….”

괜찮던 머리를 루슬란 오빠가 마구 흔드는 바람에 괜히 어질어질해졌다. 난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폭신한 베개에 머리가 파묻혔다.

창문엔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지금이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 했지만 밤새 말 안 듣고 마음대로 했으니 지금이라도 잘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시키는 대로 다시 자기로 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수마가 내 의식을 덮쳐 왔다. 난 저항하지 않고 잠들었다.

***

그렇게 10시간 정도 잠만 잤다. 내 평소 수면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깊게 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도 피로가 완전히 풀리진 않아서 난 온갖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서 있기만 해도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지만 구태여 내색하지 않았다. 자랑할 일도 아니었고.

늦게 출근하신 아버지에게 다시 괜찮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아나스타샤에게도 메시지를 했다.

아나스타샤는 걱정되어 죽을 뻔했다며 난리를 쳤다. 줄곧 내 옆에 있어 주려고 했지만 아나스타샤 역시 밤을 새운 건 마찬가지라서 아버지가 일단 돌려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살그머니 루슬란 오빠의 방으로 가 보니 오빠는 자고 있었다. 피곤한 것 같다. 아직 오후 5시이니 이따 저녁 식사를 할 때 즈음 깨워도 될 것이다.

“……음.”

어제 있었던 사람들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도 늦게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고 전 괜찮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다음은 끝까지 있어 준 내 경호원들이다.

카디건을 걸치고 천천히 빅토르와 다른 경호원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본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2층 건물이었다.

몇 번이고 와 봐서 익숙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금방 반응이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문을 열어 주었다.

“엇, 타티아나 아가씨.”

이곳은 숙소이기도 하지만 베르체노프가 전체의 시큐리티를 관리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24시간 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 그 담당은 경호원 중 한 명인 예브게니인 것 같았다. 자주 보진 못하지만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난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예브게니.”

“괜찮으십니까?”

그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괜찮고말고요?”

“밤새도록 음반을 만드셨다고 들었는데요.”

“아하하하, 예. 그럴 일이 있었어요.”

“더 안 주무셔도 됩니까?”

“괜찮아요.”

이미 소문이 다 퍼진 모양이다.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 일이긴 했지만 조금 창피했다.

난 대충 대답하며 용건을 말했다.

“자하르와 빅토르는 있나요?”

“방에서 자고 있을 겁니다. 당장 깨우도록 하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브게니가 바로 고개를 들며 2층을 향해 고함이라도 칠 것같이 숨을 들이쉬자 난 급히 그의 소매를 잡으며 막았다.

“괜찮아요. 깨우지 말아요.”

“예? 아니 그래도 아가씨가 오셨는데…….”

“피곤할 거예요. 음……. 아니면 어딘지 방만 살짝 가르쳐 주세요. 얼굴만 보고 갈게요.”

“…….”

내 부탁에 예브게니는 묘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굳이 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부탁은 약간 이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돌아가겠다고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예브게니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경호원들의 방을 가르쳐 주었다. 소로킨은 저택 밖의 아파트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숙소에 있는 건 자하르와 빅토르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1년 넘게 그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의 방이 어떤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 또한 프라이버시였고 굳이 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 기회에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역시 자고 있는데 훔쳐보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내 다리.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웃기는 상황을 겪으면서 난 결국 2층에 다다랐다.

예브게니에게 설명을 들은 대로 빅토르와 자하르의 방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은 2층 복도 중간에 있는 휴게실처럼 생긴 공간에서 소파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마련된 공간이니만큼 텔레비전도 있고 소파도 있고 간단한 운동기구, 컴퓨터와 게임기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생동감 넘치는 공간에서 빅토르와 자하르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쿨쿨 자고 있었다.

“…….”

검은색 슈트 차림이 아닌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어쩐지 재미있었다. 언제나 한참 어른 같았는데, 이렇게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들은 굉장히 어려 보였다.

실제로 그리 나이가 많지 않기도 했다. 빅토르가 이제 20대 후반이라고 했었던가.

난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소파 옆으로 다가갔다. 깨울 생각도 없고 사진을 찍는다는 둥 버릇없는 짓을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냥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어젯밤 내내 나와 함께 밤을 새우고, 쓰러져서 속 편히 잠들어 버린 나와 다르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바빴을 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정말 얼마나 고생했을지…….

“아가씨.”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막 걸음을 옮기던 자세 그대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방금 누가 말한 거지?

그렇게 가만히 서 있자 눈을 감고 있는 빅토르가 입만 움직이며 말했다.

“왜 여기에 계십니까?”

“……!”

그야말로 식겁했다. 눈을 뜨지도 않고 어떻게 나라는 걸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초능력을 선보인 빅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절 기습하시려면 백 년은 멀었습니다.”

“아, 아니…….”

졸지에 암살자 취급을 받고 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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