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아나스타샤는 땀 흘리기 싫다면서도 체육관에서 스크린 야구, 당구, 배드민턴 등의 놀이들을 돌아가며 즐겼다. 그녀를 상대하는 건 레오니드나 야콥이었는데, 경호원을 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성인 남성들을 상대로도 아나스타샤는 크게 밀리지 않고 상대가 되어 주었다.
레오니드와 야콥은 아나스타샤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에 능한 아나스타샤에게 인간적으로 반해 버린 모양이었다.
난 그들을 이해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어디 하나 빠질 곳이 없는 팔방미인이다. 나처럼 재미없는 사람이랑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자, 타티아나. 이렇게 잡아 봐.”
“이……이렇게인가요?”
“손 줘 볼래.”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내게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다. 난 아나스타샤가 노는 것을 구경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녀는 꼭 나에게 가르쳐 준다.
그 배려와 노력을 헛되게 할 순 없었기에 나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배우려 해 봤다.
배드민턴 라켓을 쥐고 서 있자 아나스타샤가 살살 쳐 보라며 공을 쳐서 내 쪽으로 보냈다. 운동신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나는 보기 좋게 헛스윙을 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아나스타샤가 도와줬으나 간신히 두어 번 정도 맞춰 본 것이 고작이었다.
못해도 너무 못하다 보니 오기가 생기기도 전에 시무룩해진다. 내가 이런 운동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알면서도 단순히 못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자존심이 상했다.
침울해져 있자 레오니드가 위로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원래 처음엔 다 그런 겁니다.”
“그런 걸까요…….”
아나스타샤도 처음엔 나처럼 이렇게 못했을까? 그녀가 헤매는 모습은 상상을 못하겠다. 그녀라면 아마 라켓을 쥐어 보고 한두 번 쳐 보고는 능숙하게 해냈을 것 같다.
물끄러미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자 그녀는 미련 없이 라켓을 내려놓았다. 내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느낀 듯하다.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구경하는 게 좋겠어요. 아나스타샤는 하고 싶은 걸 하세요.”
“아니, 별로. 나도 그만하려고.”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옷 불편해서……. 마음대로 움직이질 못 하겠어. 땀나는 것도 싫고.”
“아.”
아나스타샤도 나도 격하게 움직이기엔 불편한 차림이긴 했다.
난 바지를 입는다고 해서 지금보다 운동 능력이 올라갈 것 같진 않지만, 아나스타샤는 이 와중에도 레오니드나 야콥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 신경 써 가면서 움직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귀찮다는 듯 그녀가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레오니드와 야콥에게 말했다.
“적당히 더워졌는데, 여기까지 할게요. 땀나면 싫어서.”
“아, 그러시죠.”
레오니드는 이제야 아나스타샤가 투피스 차림이라는 것을 안 사람처럼 말끝을 흐렸다.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우물거리는 것이 재미있는지 아나스타샤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레오니드, 야콥.”
“저희야말로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깔끔하게 인사를 마치고 아나스타샤는 내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조금 침울해져 있는 내 기분을 풀어 주려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으로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체육관 내에 마련되어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을 구경했다. 우리 가족들만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그 안은 조금 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실내 수영장까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해변에 가기 전에 미리 물놀이를 할 수 있겠다며 웃었다.
“수영도 가르쳐 줄게. 타티아나.”
운동신경이 없는 것에 나 자신도 절망할 정도였는데, 아나스타샤야말로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했다. 난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뭐라 해야 할지 마땅한 말을 찾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수영은 할 수 있도록 해 볼게요.”
“응.”
아나스타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아나스타샤가 놀러 온 지 이틀이 지났다. 그사이 우리는 정말 즐겁게 지냈다.
오전에는 그녀와 함께 드미트리에게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벨카와 함께 저택 부지를 돌아다니면서 나도 미처 몰랐던 것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난 우리 집에 커다란 방공호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한가롭게 방에서 쉬고 이전에 아나스타샤가 말했던 대로 수영을 배우기도 했다. 이틀 정도 배우자 난 간신히 천장을 바라보고 물에 뜨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멍하니 물 위를 떠다니는 건 꽤 마음에 들었다.
우리 가족과 아나스타샤가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늘 호화로운 식사가 펼쳐졌다.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감사해하면서 손님으로서의 최고의 예절을 보여 주었다. 보기만 해도 경쾌하고 생명력 넘치지만, 동시에 본데 있는 우아함도 갖추고 있는 아나스타샤는 어느 자리에 있어도 존재감이 뚜렷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나스타샤가 마음에 드셨는지 그녀를 정말 좋아해 주셨다. 아버지의 입장에선 내 친구인 데다가 늘 살갑게 아저씨라고 부르는 아나스타샤를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틀간 아나스타샤는 베르체노프가의 손님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머물렀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연습실에서 함께 피아노로 연습을 하거나 듀엣을 연주하기도 했다.
다른 것들을 할 땐 거의 아나스타샤가 날 리드하는 입장이었지만, 연습실에 오면 그 입장은 역전되곤 했다.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내가 연주하는 것을 보며 가끔 넋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사실 연습실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은 아나스타샤의 연습을 도와주는 데에 쓰이고 있었다.
난 그녀의 선생님도 아니고 제대로 된 교수법도 모르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작성된 지도를 가지고 어떻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지 정도는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못 가 본 곳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나보다 기본적인 신체능력이 훨씬 좋았다. 가진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내기만 한다면 정말 남녀불문하고 세계의 쟁쟁한 천재들과 맞부딪쳐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내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는 것처럼, 나 역시 그녀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부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조금 어려워하는 피아노 테크닉과 컨트롤 방법, 홀로 익히려면 오랜 시간을 피아노에 매달려 체득해야 하는 노하우들, 지금 아나스타샤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최대한 자세히 말해 주었다.
물론 내가 아나스타샤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설명만 듣고 할 수 없듯, 그녀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곧바로 따라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천재성이란 것은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서 그녀는 내 엉망인 설명을 듣고도 곧잘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다.
함께 놀기도 하고, 식사도 하고, 연습도 하고, 잠도 자면서 우리는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
“…….”
한가로운 오후.
나와 아나스타샤는 방에서 뒹굴뒹굴했다. 내 방에서 놀거리 따윈 찾아볼 수 없었기에 아나스타샤는 가지고 온 잡지를 읽고, 난 태블릿PC로 블로그를 탐방 중이었다.
창밖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든다. 침대 한편에 웅크려 앉은 채 보고 있던 태블릿PC에 자꾸만 햇빛이 반사되어서 각도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괜히 눈만 부셨다.
그때, 내 옆에서 누워 뒹굴거리던 아나스타샤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이것 좀 봐 봐. 귀엽지.”
아나스타샤는 읽고 있던 잡지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잡지 모델이 쓰고 있는 챙이 넓은 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챙 끝이 살짝 구부러진 것이 예쁘긴 했다.
“예쁘네요.”
“그렇지. 아, 이런 거 하나 사야겠어.”
“곧 여름이니 괜찮겠어요. 저도 살까요?”
“그럴래? 솔직히 나보단 네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럴 리가요.”
“정말이래두.”
난 잡지 모델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큰 키에 아나스타샤를 닮았다. 아나스타샤를 대입해 보니 쉽게 그림이 그려졌지만, 날 대입하려 하니 어려웠다.
아나스타샤가 잡지를 넘기면서 말했다.
“나중에 여름옷도 사러 가자. 타티아나 너 저번 여름엔 집에만 있었다고 했었지?”
“예. 맞아요.”
아나스타샤는 마치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옷장 보니까 여름에 입을 옷이 아무것도 없더라.”
“있잖아요……. 얇은 옷들이요.”
“한참 부족해. 한참.”
그녀는 패션에 대해서라면 정말 가차 없었다.
그 후로 한참동안 내 옷장에 어떤 여름옷들을 채워 넣어야 할지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잡지를 보여 주면서 내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척척 추려 냈다. 이건 괜찮고, 이건 별로고, 중얼중얼하면서 휙휙 넘기는데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아나스타샤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데, 똑똑 하면서 누군가 내 방을 노크했다. 루슬란 오빠였다.
“타티아나, 있어?”
“있답니다.”
괜히 기분이 좋아 노래하듯 대답하자 루슬란 오빠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다.
의아해하며 방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조금 시간이 흘러서야 루슬란 오빠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너한테 우편이 왔거든.”
“우편이요?”
“학교에서 온 거야.”
루슬란 오빠는 다가와서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아나스타샤가 일어나 앉아선 내 어깨 뒤로 찰싹 달라붙었다.
“성적표인가 보네?”
“그런가 봐요.”
봉투 겉면엔 차이코프스키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라는 글자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1학기에 왔었던 성적표도 딱 이렇게 생긴 봉투에 들어 있긴 했었다. 기간도 이렇게 학기가 끝나고 방학에 왔었고.
난 약간의 긴장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루슬란 오빠는 얼른 열어 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내 성적이 궁금한가 보다.
굳이 오빠를 내보낼 필요는 없어서, 이 자리에서 조심스레 봉투를 개봉했다.
“…….”
성적표가 화려할 필요는 없었다. 극히 사무적이고 단조로운 양식으로 성적표는 내 성적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그 성적은 화려했다.
아나스타샤가 내 어깨를 꽉 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수석이야! 타티아나!”
내가 잘못 본 건 아닌 듯하다.
다시 확인했다. 모든 과목의 성적이 A등급이었다. 점수를 보니 감점이 거의 없었다. 솔직히 논술은 조금 불안하기도 했었는데 답안이 썩 괜찮았던 모양이다.
거기에 실기연주 평가도 A등급이었다. 점수는 만점이었고 추가점수까지 9점이 붙어 있었다.
내가 학년 수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평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는 이 연주 평가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덕분인 것 같았다.
그런데 9점이라는 점수가 조금 묘했다. 실기 시험을 봤을 때, 구세프 선생님은 손수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내게 추가점수까지 만점을 주셨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렇다면 4점을 주신 건 구세프 선생님이었다.
“…….”
정말 형편없었다면 아예 추가점수를 안 주셨을 분이다. 이 추가점수 4점은 내가 아직 구세프 선생님에게 완벽한 점수를 받기엔 멀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 선생님의 의도를 분명히 느꼈고 인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아쉬웠다. 구세프 선생님이 그리 쉬운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도 완벽한 점수에서 단 1점이 모자라는 건 학생으로서 분하다.
난 학기가 끝나기 직전 뵈었던 구세프 선생님을 떠올렸다.
받았던 손수건을 돌려 드리면서 새 손수건도 사 드렸더니 묘하게 불편해하시던 것 같았는데, 평가가 바뀔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미안해하셨던 것 같긴 하다.
한참이나 나이 많은 선생님을 귀엽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왜 그래? 안 기뻐?”
“아, 아뇨. 기쁘죠, 당연히.”
“루슬란도 기쁘시죠? 타티아나가 자랑스러우시죠?”
“어? 그, 그래.”
남매가 나란히 바보처럼 말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제일 신난 것 같았다.
아예 내 목을 끌어안아 버린 아나스타샤를 두고 다시 성적표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루슬란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난 웃으면서 오빠에게 성적표를 건네주었다.
오빠는 성적표를 잠시 보더니, 손을 뻗어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네. 타티아나.”
“…….”
“좋은 결과로 보답받은 걸 축하해. 나도 기뻐.”
“고마워요. 루슬란 오빠.”
이렇게 솔직하게 루슬란 오빠가 날 칭찬해 주자 비로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함이 솟아올랐다. 나 혼자선 이런 성적을 받더라도 별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축하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내 목을 뒤에서 끌어안은 아나스타샤가 내 귓가에 말했다.
“역시 난 네가 해낼 줄 알았다니까! 이걸로 에르네스트의 독주도 막을 내렸네.”
“독주요?”
“네가 오기 전엔 그 애가 수석을 놓치는 일이 없었거든.”
갑자기 생각났다.
원래 우리 학년에서 항상 수석을 하던 것은 에르네스트였다. 저번 학기에도 그가 수석, 내가 차석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역전을 한 것이다.
“…….”
솔직히 정말로 기뻤다. 에르네스트는 자타공인 천재 중의 천재였고, 그를 이렇게 이겨 보는 건 확실히 성취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내게 졌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거나 할 사람도 아니었다. 이번에 내게 진 것을 가지고 분명히 분하게 여기긴 하겠지만, 난 그가 한 번 졌다고 해서 흐트러지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피아노로도 몇 십 번이나 엎치락뒤치락했듯, 이번에 성적에서 한 번 졌으면, 다음 학기엔 날 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정당하게 다시 왕좌를 되찾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난 그렇게 에르네스트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전화로 물어보는 건 간단하지만, 어쩐지 성적표를 받은 직후라서 자랑하거나 놀리려 든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걱정된다. 조금 나중에 살짝 메시지만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단 지금은 날 위한 시간이었다. 한동안 내 성적표에 대한 칭찬과 감사가 오갔다.
루슬란 오빠는 저녁에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면 훨씬 더 좋아하실 것이라며 내 기대를 한층 끌어 올려 주었다. 차석이었을 때도 아버지는 정말 좋아해 주셨는데, 이번엔 얼마나 기뻐해 주실지 기대된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그다음은 아나스타샤에게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성적표가 집으로 발송된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싱글벙글하던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내 목에서 팔을 풀고, 그녀가 말했다.
“난 집에 가지 말아야겠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타티아나. 나 그냥 여기 살면 안 될까?”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며칠만 묵으면서 놀다가 가겠다고 어른스럽게 말하던 아나스타샤는 어린애처럼 내 팔을 잡고 흔들흔들했다. 갑자기 그녀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평소 못해도 중상위 성적은 되지 않던가?
황당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나 너한테 말은 안 했지만 이번 시험 조금 불안하거든……. 그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니까…….”
“평소 아나스타샤는 성적 좋으시잖아요?”
“좋긴 뭐가 좋아! 학년 수석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아니, 잠깐만요, 저 팔 아파요, 잠깐…….”
여태껏 내색하지 않았지만 불안한 시험이 있었는지 칭얼거리는 아나스타샤에게 난 한참을 시달려야만 했다. 솔직히 난 학년 수석인 것보단 아나스타샤가 훨씬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공부까지 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난 흔들흔들하면서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저기……. 아나스타샤. 그렇다면 걱정되는 과목 시험 다시 제가 봐 드릴까요.”
“아니, 그건 싫어.”
“……그렇겠죠.”
아나스타샤는 시험을 되풀이해서 어려웠던 부분을 짚어 보자는 제안은 정색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고는 더 내게 칭얼거려 봐야 내가 같이 공부하자고 할 것 같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며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는 게 현명하겠지? 발렌티나도 늘 그렇게 멘탈 관리 하던데. 그 애한테도 배울 게 있단 말이지.”
“그건 좋은 걸 배우신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아, 몰라.”
아나스타샤는 내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크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다음 학기엔 분명히 더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공부도, 연주도. 뭐든지.
아나스타샤는 천재니까요.
입을 열어 말로 하면 소용없을 말들을 마음속으로 하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