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전날, 나는 꽤나 오랫동안 고민했다. 에르네스트와 사샤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초대하니 한 번에 남자 네 명이 합류해서 혼성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방학이니 놀러오라고 기세 좋게 초대를 했으니 내겐 친구들을 재미있게 해 줄 책임이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말했다. 으레 남자들이란 대충 승마장이나 데려갔다가 사격장에 데려가면 군소리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계속 분위기를 살피면서 괜찮을지 보고 있었는데, 걱정할 것 하나 없이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에르네스트와 사샤는 물론이고 리처드와 한승우도, 그리고 나처럼 구경만 했던 류보비까지도 모두들 약간 기분이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니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난 안심할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레오니드에게 전화를 걸어 실내 사격장에 갈 테니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레오니드는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다. 그 외에 달리 준비할 건 없었다.
“조금 걷도록 해요. 그리 멀진 않아요.”
그렇게 내가 앞장섰고, 우리는 실내 사격장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약간 흥분한 남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떠들썩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대부분 총에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난 실소를 머금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왔든 남자들에겐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축구와 술, 총 정도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난 거기에 함께할 수도 없고, 함께할 생각도 별로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야, 리처드.”
“뭐. 왜.”
“작년엔가, 너네 나라 펍pub에서 축구 보면서 술 마시다가 총격전 벌어진 적 있지 않았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았는데…….
리처드가 화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난 급히 끼어들어서 이야기를 돌렸다.
“아, 아무튼 지금 가는 곳은 그저 레저로 즐기려는 것이니 편하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말만 그렇게 하고 갑자기 덩치가 내 두 배는 되는 교관이 나와서 마구 훈련시키는 건 아니겠지?”
“예? 아뇨,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덩치가 두 배쯤 되긴 하겠지만요.”
“……뭐라고?”
리처드가 미심쩍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난 괜한 말들이 더 나오기 전에 조금 더 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오솔길처럼 난 길을 따라 조금 걷다가 코너를 도니 나무가 우거진 곳에 커다란 방공호와 어둑어둑한 건물들이 몇 채 들어서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돌아보기 전엔 있는 줄도 몰랐던 곳이었다. 더 깊게 들어가서 알아보진 않았지만 보안에 관련된 물건들이 있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견학하러 온 것도 아니었고 보안상 문제로 접근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건물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레오니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그는 쉬는 날이었는데 내 부탁에 선뜻 나와 준 것이다. 난 그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오니드.”
“오셨습니까, 아가씨.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 실내 사격장에서 여러분을 책임질 레오니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모두가 약간 뻣뻣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 사격장이라는 곳은 장소 특성상 어두침침하고 철과 화약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거기에 자극받은 우리들은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레오니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 이리 오시죠. 제 설명과 지시만 잘 따라 주시면 어려울 건 없을 겁니다.”
레오니드는 우리의 긴장을 풀어 주면서 혹여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꼼꼼하게 주의사항을 설명해 주었다.
난 멀찍이 떨어져서 류보비와 함께 있었다.
남자애들이 네 명이 온다는 것에 신경을 쓰느라 승마와 사격 등을 중점적으로 동선을 잡았지만, 어린 류보비는 그중 어느 것도 제대로 즐기기 힘들었다. 승마는 그래도 보는 재미라도 있었지, 사격은 벌써부터 무서워하는 듯했다.
그렇게 류보비와 앉아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다가와서 물었다.
“넌 안 해 보게? 이것도 처음이잖아?”
“전 류보비와 함께 견학할게요.”
“음……. 그래?”
“예.”
딱히 흥미가 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무섭다는 류보비를 혼자 두고 싶지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우릴 보더니 훗 웃고는 다시 돌아섰다.
“그럼 내가 대신 박살 내고 올게. 잘 보고 있어 줘.”
“힘내요. 아나스타샤.”
응원이나 하면 될 것 같았다.
사격장에서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사격에 참가하지 않는 나와 류보비를 제외한 에르네스트와 리처드, 한승우, 사샤, 아나스타샤 다섯 명 사이에서 작은 내기도 성립했다.
잠시 기다리자 먼저 리처드가 사로에 들어섰다.
그는 권총을 들고, 헤드셋처럼 생긴 귀마개를 쓰고는 레오니드의 설명에 따라 탄약을 장전했다.
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리처드가 과녁을 향해 권총을 들자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류보비의 귀를 덮어 주었다.
“……!”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리처드의 손이 반동으로 살짝 튀었다.
나도 움찔했다. 총성에 귀뿐만 아니라 전신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도 단순히 그 소리의 크기에 놀랐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게 들린다.
리처드는 휘파람을 휙 불더니 한 발씩 권총을 발사했다. 총 5발이었으니 금방 끝났다.
사로에서 내려온 리처드는 평소 그답지 않게 흥분한 듯했다. 레오니드가 과녁을 가지고 왔다. 5발 모두 과녁에 잘 들어가 있었다. 약간 흩어지긴 했지만 리처드는 처음인데도 꽤 잘 쏜 자신의 성적에 만족한 듯했다.
그다음 차례로 한 사람씩 올라갔다. 난 다음으로 올라간 한승우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레오니드에게 구경하는 우리에게도 귀마개를 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레오니드가 깜짝 놀라선 죄송하다며 귀마개를 내주었다. 류보비가 아니라 나도 총성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류보비는 귀마개를 받더니, 갑자기 날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언니.”
“꼭 하고 계세요.”
“이것도 이거지만……. 아까도 제 귀 막아 주신 거…….”
난 별것 아니라는 뜻으로 웃으며 답했다.
“놀라실 수도 있으니까요.”
“대신 언니가 놀라셨잖아요.”
그래도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옆에 붙어 있던 류보비에겐 내가 움찔거리던 것이 다 느껴진 모양이었다. 난 약간 창피해져서 그녀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귀마개를 씌워 주었다.
나도 귀마개를 쓰고, 그렇게 웅웅거리는 세상에서 류보비와 함께 사격장을 구경했다.
한승우도 상당한 명사수였다. 그의 5발은 모두 과녁에 맞은 것은 물론이고 리처드의 것보다 더 가깝게 밀집해 있었다. 은근히 못 하는 게 없는 한승우는 이런 것에도 능숙했다.
에르네스트는 리처드와 한승우의 과녁을 보고는 승부욕을 불태우며 사로로 올라섰다. 그 눈에서 정말 불길이 치솟는 게 아닌지 우려될 정도로 그는 승부욕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정말 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긴 했다.
“…….”
레오니드가 가르쳐 주는 대로 서서는 정확하게 몸을 지탱하고, 자세를 잡는다. 모두가 처음일 텐데도 에르네스트는 몇 번 해 본 사람처럼 자세를 취했다.
레오니드는 수정해 줄 곳이 있는지 몇 번 위아래로 보더니 그대로 하면 되겠다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보기에도 에르네스트의 자세는 흠잡을 곳이 없었나 보다.
다섯 번의 총성이 울리고, 에르네스트가 사로에서 내려왔다. 모두가 그의 과녁에 달라붙었다.
“야, 이거 한승우랑 비슷하지 않냐?”
“헛소리할래. 이쪽이 더 가깝잖아.”
“자로 재 봐야 할 것 같은데.”
“안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 너?”
누가 더 점수가 높은지에 대한 거친 토론이 오갔고, 결국 레오니드가 와서는 동점이라고 평가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불만인 듯했지만 심판의 판정엔 깔끔하게 승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아나스타샤가 사로에 올라서자 모든 것이 의미 없어졌다.
“……뭐야 이거.”
에르네스트가 처음으로 멍한 소리를 냈다.
아나스타샤의 과녁은 누가 보더라도 가장 가운데에 많이 밀집되어 있었다. 논의를 거칠 것도 없이 아나스타샤의 우승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왜 이렇게 못하는 것이 없는 걸까. 심지어 레오니드도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는 이전에 체육관에서 아나스타샤의 운동 능력과 반사 신경을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초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혀를 내둘렀다.
넋이 나간 남자 세 명을 둘러보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왜, 내가 못할 줄 알았어?”
“……그건 아닌데. 좀 심하지 않냐.”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지.”
아나스타샤는 상쾌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와서 손을 들어 올렸다. 난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의도를 알아채곤 마주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연달아 류보비도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샤가 나섰다.
“내가 형들의 복수를 해 줄게.”
에르네스트는 얼굴을 감쌌고 리처드는 천장을 쳐다보았고 한승우는 고개를 돌렸다. 다들 사샤를 볼 면목이 없는 듯했다. 그 모습들이 재미있긴 했지만 안쓰럽기도 해서 난 웃을 수도 없었다.
사샤는 조금 더 작은 권총으로 똑같이 5발을 쏴서 2발을 명중시켰다. 사샤는 불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만하면 충분히 잘한 것이었다.
***
모두 그렇게 처음으로 사격을 해 보고, 즐겁게 서로 느꼈던 기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류보비와 덩그러니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득 난 류보비를 돌아보았다. 난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으나 류보비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류보비. 심심하죠.”
“예?”
멍하니 앉아 있던 류보비는 깜짝 놀라며 도리질을 쳤다.
“아니에요. 재미있어요.”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언니! 저 오늘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정말이에요.”
“그런가요?”
류보니는 절대 심심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난 고민했다. 이다음엔 스크린 야구장에 가거나 테니스를 잠깐 치러 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기 가면 류보비는 또 할 것이 없었다. 나 역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류보비는 손님이었다. 나랑은 상황이 다르다.
유심히 류보비를 보며 이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일이 무엇일지 빠르게 떠올려보다가, 난 그녀의 옆얼굴에 땀방울이 조금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류보비. 혹시 더우신가요?”
“아……. 약간요?”
초여름의 날씨지만 해가 하늘 꼭대기에 떠 있는 지금 오랜 시간 있다 보면 충분히 더울 날씨였다. 난 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 체질이라 괜찮았지만, 류보비만 덥진 않을 것이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수영장에 가시겠어요?”
“수영장이요!?”
갑자기 류보비가 반색했다. 목소리 톤이 확 치솟았다.
“수영장이 있어요?”
“예. 실내 수영장이 있어요.”
“갈래요! 가고 싶어요!”
류보비는 너무 기대된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다가 딱 굳어 버렸다.
“그…….”
어제 내가 이 동선을 기획하면서 왜 수영장을 무의식적으로 피했는지, 그 이유가 지금에서야 떠올랐다.
저편에 서 있는 남자 세 명을 보니 수영장에 가자는 말이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남녀 혼성으로 수영장에 가는 것 정도는 아주 평범한 일이었고, 저 애들은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약간의 심리적인 저항감이 있었다. 그리 복잡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주 단순하게, 그냥 창피했다.
난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여자인 아나스타샤에게도 맨살을 보이는 것을 꺼려 했었다. 하지만 이젠 익숙해졌고 아나스타샤와 단둘이 있을 땐 괜찮았는데, 남자애들이 끼어들었다는 것으로 상황은 한 단계 더 변화했다.
괜한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조금 한심해져서 입을 앙다물고 있자 내 시선을 눈치챈 사샤가 다가왔다.
“왜 그래요, 누나?”
“아, 음…….”
뭐 하고 있어? 빨리 수영장에 가자고 하지 않고.
재촉하는 목소리는 머리에서만 울릴 뿐, 내 입에선 바보 같은 소리만 나왔다.
그때 류보비가 대신 말했다.
“언니가 수영장에 간대!”
“수영장?”
“응. 응.”
사샤도 더웠는지 수영장이란 말에 반색했다.
이제 와선 말릴 수도 없었다. 사샤는 남자들이 있는 쪽으로 가서는 수영장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약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쪽을 지켜보았다. 멍하긴 했지만 솔직히 별생각은 안 든다. 이제 와서 무슨 의리를 지키고 하는 것도 웃긴 이야기였다. 그냥 자연스레 친구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데, 곁에 앉아서 가만히 날 보고만 있던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타티아나.”
“……예.”
“물에 들어가기 싫으면 안 들어가도 돼.”
“…….”
그렇게 티가 났나. 약간 오기가 생긴다.
“괜찮아요.”
“그래?”
“예. 정말로요.”
난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가 수영을 가르쳐 주기도 했잖아요. 할 수 있어요.”
아무렇지도 않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 진저리 칠 정도로 거부감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만했다. 애초에 이해랄 것도 없다. 친구들과 수영장에 가는 데엔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 있는데, 이번엔 에르네스트가 이쪽으로 왔다. 내게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눈길이었다.
그가 물었다.
“타티아나. 사샤가 그러던데…… 실내 수영장도 있다고?”
“예. 그리 멀지 않아요.”
“그래……?”
에르네스트는 길게 말을 흐리더니, 이어서 물었다.
“원래 수영장도 계획에 있었어?”
“……!?”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 내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원래 계획에 수영장은 없었고, 난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긴 하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떠올렸더라도 상관없지 않은가?
“아, 아뇨……. 하지만 상관없잖아요?”
약간 더듬긴 했지만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말할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말이 없다. 내가 도전적으로 올려다보자 그는 잠시 뒤편의 남자 두 명을 돌아보곤, 무언가 결심이 선 듯 말했다.
“그냥 여자애들이랑 여기 사샤 데리고 가서 놀래? 우리 남자들은 여기서 총이나 조금 더 쏴 보게.”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아까 결과, 솔직히 열 받거든.”
“…….”
에르네스트가 구명줄처럼 던져 준 제안은 지금 내 입장에선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내 쪽에서 제안할 순 없지만, 에르네스트는 충분히 던져 줄 수 있는 해결책. 당장 잡기만 하면 모든 것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나도 살짝 열 받았다.
“아뇨, 다 같이 가요. 괜찮잖아요? 여름에 수영장에 가는 것 정도는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고요. 그렇지 않나요?”
“수영복도 없어 나.”
“빌려 드릴게요.”
“남자 수영복을 네가 왜 가지고 있어……?”
“제가 가진 게 아니라! 밖에서 빌려오면 되잖아요!”
“아, 음……. 화내지 마.”
“화낸 적 없어요.”
난 내가 지금 괜히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더 말문이 막히라고 그렇게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갑자기 이러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난 그에게 말했다.
“어차피 사샤와 류보비의 수영복도 필요해요. 차로 밖에서 들여올 텐데 두 벌만 사지 말고 한 번에 다섯 벌쯤 사면 좋겠네요.”
“아깐 빌린다면서?”
“살 거예요. 사서 드릴 거예요.”
“…….”
에르네스트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더니 뒤편을 가리켰다.
“쟤들도 다?”
“물론이죠.”
“……그렇겠지.”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순간 에르네스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어졌다.
날 배려한다면서 알아서 떨어져나가 주겠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약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뭘까. 궁금해진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에둘러 물어볼지 궁리하는 사이 에르네스트가 먼저 손짓했다.
“알겠어. 그럼 가자. 수영하러.”
“음…….”
“왜 그래?”
“저…… 아직 물에 뜨는 정도밖에 못 하거든요.”
“……타티아나.”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난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