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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76화 (276/1,277)

##  276화

베르체노프가에 있는 체육관은 고용인들이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하지만 내부로 조금 깊숙이 들어가면 베르체노프의 성을 단 사람들만을 위한 프라이빗한 공간이 존재했다. 실내 수영장은 바로 그곳에 위치했다.

최고급의 인테리어로 되어 있는 실내 수영장은 어느 마을에나 있는 시민 수영장 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시설이었다. 사람도 우리 외에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한적하게 물놀이만 즐길 수 있었다.

“와……! 세상에, 너무 멋져요!”

류보비가 감탄사를 발하며 제자리에서 거의 방방 뛰듯이 했다. 그런 그녀만 보고 있어도 수영장에 오길 정말 잘 결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

난 살짝 옆을 돌아보았다. 리처드와 한승우가 유리 너머로 보이는 수영장의 규모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평소와 비슷하게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물러설 곳도 없지만 약간, 무섭다.

“…….”

오기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설 때도 이렇게 괜한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그땐 피아노에 집중하면서 다른 잡념들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수영장에서 친구들과 논다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다른 신경 따윈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난 친구들을 이끌고 수영장 옆에 쉴 수 있게 마련된 공간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며 음료와 간식들을 먹으며 쉬고 있자, 외부에서 온 업자가 수영복들을 가지고 와서 간이 매대를 세워 준비해 두었다. 우리가 남녀 혼성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었더니 반반으로 나누어서 여유 있게 수영복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언니, 언니. 이거 어때요?”

“귀여워요. 류보비.”

“에헤헤.”

류보비는 내가 수영복을 사 준다고 했더니 신이 나서는 이것저것 바꿔 보면서 즐거워했다. 아마 이 자리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는 건 류보비인 것 같았다.

그렇게 수영복을 고르려고 하는데,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건너편 남자들 쪽에선 미리 수영장에 가 있겠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정말 빨랐다.

우리는 조금 시간을 들여 수영복을 골랐다. 일단 류보비는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몇 벌과 아나스타샤가 골라 준 몇 벌을 가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아나스타샤는 오도카니 남아 있는 날 보더니 웃었다.

“타티아나. 넌 뭐 입을 거야? 역시 비키니?”

“그, 글쎄요?”

약하게 보이기 싫어서 시치미를 뚝 뗐다.

하지만 예리한 아나스타샤가 그런 날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녀는 봐주지 않고 매대에서 비키니를 집어 들었다. 난 어이가 없어서 눈을 크게 떴다. 만약 입는다면 대체 남들 앞에 어떻게 나서야 할지 상상도 안 되는 디자인이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어때?”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쳤다.

“아나스타샤!”

“아하하, 장난이야. 장난.”

야하다 못해 선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상한 비키니를 내려놓으며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었다.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놀리려 하는 아나스타샤보단 하나하나 예민하게 구는 나 스스로가 우스웠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

“응?”

“제가 유난인 걸까요?”

“아니?”

“?”

아나스타샤는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의외의 대답을 했다.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난 솔직히 네가 기특하기까지 한데.”

“기, 기특요?”

“응. 도전적이잖아? 난데없이 남자애들이랑 수영장에 간다고 하면 싫다고 도망갈 애들도 많아.”

“……그런가요?”

“당연하지. 그런데 넌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지. 이런 것도 배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난 여성으로 살면서 배워야 하는 것들은 되도록 충실하게 배우고 있었다. 그게 피아노를 다시 할 수 있게 된 내게 당연하게 주어진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그 부분을 파악한 듯했다.

말문이 막혀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내가 막아서는 건 비겁한 짓이겠지?”

“……?”

“아무튼 골라 보기나 해. 예쁜 것 많네. 이건 어때? 크롭 래쉬가드야.”

내가 무언가 물어보기도 전에 아나스타샤는 다른 수영복을 들어 보여 주었다. 래쉬가드는 일반적인 티셔츠처럼 소매가 있었는데 그 덕분에 맨살을 많이 노출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난 이런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약간 타협하면서 골라낸 것은 허리가 짧은 크롭 래쉬가드와 보드숏이었다. 탈의실에서 입어 보니 조금 더 자신감이 생겼다. 배와 다리가 드러나긴 하지만 아예 비키니를 입은 아나스타샤에 비하면 난 정말 많이 타협한 셈이었다.

“가 볼까? 타티아나.”

“예. 아나스타샤.”

난 이미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

남자들은 나란히 수영장 가에 앉아서 물에 발만 넣고 있었다.

“……그래서.”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아무도 수영할 줄 모른다고?”

“어.”

“응.”

“몰라.”

리처드, 한승우, 사샤가 나란히 대답했다. 에르네스트는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답이 없다.

이 피아노 벽창호들이 살면서 운동이랄 것을 거의 하지 않았으리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중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에르네스트 혼자라는 것은 조금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리처드는 승마도 배웠을 정도로 집에서 교양으로 이런저런 스포츠를 시킨 것 같으니 수영도 배웠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역시 물에 뜨는 것 정도밖에 할 줄 모르는 초보 중의 초보였다.

수영을 조금 할 줄 아는 에르네스트는 우월감을 느끼기보단 조금 절망에 빠졌다.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 할 줄 아는 것으로 아예 못 하는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낄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고지식한 타티아나가 창피해하면서도 수영장에 가자고 한 것도 잘 이해가 안 갔고, 수영을 할 줄 모른다면서 당당하게 따라온 이 자식들도 이해가 안 갔다.

어차피 이 수영장은 물이 깊지도 않기 때문에 굳이 수영을 배워야만 놀 수 있는 곳은 아니긴 하지만……. 7명 중에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이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둘뿐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수영 교습이라도 해야 하나?”

조금 낙관적으로 보자면, 수영을 못 하는 리처드와 한승우를 물에 집어넣고 할 수 있을 때까지 괴롭히면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실 에르네스트가 수영을 가르쳐 주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

하지만 아마 그 역할은 아나스타샤가 맡게 되겠지.

에르네스트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차라리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타티아나가 부담스러워하는 것보단 그게 나았다.

타티아나는 세상 모두에게 친절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한 걸음만 잘못 들어서면 금방 벽을 치고 물러나는 건 그 고지식한 성격에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성격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 적어도 타티아나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면 천천히 시간을 두고 알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낭만이라는 단어는 우스갯소리처럼 여겨지는 세상이고 열다섯 살이면 모르는 것 없이 거의 성인 취급을 받긴 하지만, 타티아나를 보고 있자면 다른 사람들이 급하고 삭막하다 해서 그렇게 따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그런데 사실 조금은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다.

툭 까놓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에르네스트는 다른 자식들에게 타티아나의 수영복 차림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자유에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었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것이 독점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 그녀와는 친구일 뿐인데, 독점이라는 단어는 꽤나 불성실하게 들린다. 타티아나가 그리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싫었다.

이러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진 머리를 일단 수영장 물속에 집어넣으면 조금 식을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뭐 해? 남정네들. 물이 뜨거워서 못 들어가겠어?”

“오래 기다리셨죠.”

문이 열리면서 세 명이 마저 들어왔다. 에르네스트는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굳어 버렸다.

귀여운 분홍색 수영복을 입은 류보비는 당장이라도 수영장에 뛰어들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곁에 있는 두 언니들과 비슷해 보이고 싶은지 유려한 걸음으로 따라 걸었다.

두 언니 중 한 명인 아나스타샤는 거의 매일같이 보는데도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대담한 비키니 차림의 아나스타샤를 보고 가장 먼저 해 주고 싶은 말은 적당히 좀 할 순 없었느냐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그 옆의 한 사람. 늘 곧은 자세가 인상적인 그녀는 오늘따라 조금 수줍은지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었다.

배가 살짝 드러나는 짧은 래쉬가드 차림이었다. 얼굴만 하얀 게 아니었구나. 에르네스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어졌다.

비키니보다 노출이 훨씬 적은데도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를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

남자들은 잠시 넋이 나갔으나, 말없이 있는 것도 실례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리처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발장구 치는 중이야.”

“무슨 소리야? 에르네스트는 수영할 줄 아는데.”

“그래. 에르네스트만 빼고.”

리처드가 다시 말하자 아나스타샤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이 나랑 에르네스트뿐이야?”

“그런 것 같네.”

아나스타샤는 팔짱을 턱 끼고는 삐딱하게 서서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별 상관 없잖아.”

“그도 그렇지.”

“시간 나면 수영이나 좀 가르쳐 주지 뭐.”

“난 솔직히 얘들 가르치기 싫은데.”

“야, 나도 너한테 배우기 싫거든?”

에르네스트의 말에 리처드가 퉁명스레 답했다.

하지만 기왕에 이렇게 수영장에 왔으니 수영을 조금이나마 배워 보기로 의견이 합치되었다. 남자들은 에르네스트가 여자들은 아나스타샤가 각각 맡기로 하고, 물에 바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시간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수영장 주변을 잠깐 걷다가, 혼자 떨어져 있는 타티아나를 발견했다.

몇 초 되지 않는 사이에 말을 걸지 말지 갈등이 몇 백 번은 일었다.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타티아나.”

“아…….”

타티아나는 약간 놀랐는지 움찔하더니 바로 주변부터 살폈다. 그 모습이 흡사 아나스타샤를 찾는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약간 불만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없으면 자신이 해코지라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불안해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서,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가까이 휙 다가가지 않고 적당히 멀리서 말을 걸었다.

“수영할 줄 모른다고 했지?”

“예……. 맞아요.”

“너만 못 하는 것도 아니더라고. 다들 평생 피아노만 치다 보니 할 줄 모르는 게 거의 당연한 것 같아.”

“아하하, 그런가요…….”

타티아나는 조금 편하게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경계하는가 싶더니 곧 이렇게 무방비하게 웃곤 한다. 에르네스트는 그 웃음이 누구에게나 향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타티아나가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지, 타티아나가 에르네스트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에르네스트는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이었지만 아예 다른 곳을 보고 있을 수도 없어서 타티아나의 어깨 부근에 시선을 두었다.

타티아나도 그리 편해 보이진 않는다. 분명 강한 척을 하며 태연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타티아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에르네스트의 코앞까지 다가온 타티아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말을 고르는 듯하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 꽤나 마르셨네요. 에르네스트.”

“……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체격은 분명 좋으신데…….”

타티아나는 약간 당황해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 에르네스트뿐만이 아닌 듯했다.

약간 긴장이 풀어짐을 느낀다.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장난스레 답했다.

“맨날 손가락 운동만 해서 그렇지 뭐.”

비로소 타티아나가 빙그레 웃었다.

“피아노 연주자가 근력 운동을 할 수도 없으니깐요. 그렇죠?”

“그래.”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충분히 강한 타건을 구사하시니…….”

에르네스트는 괜한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부딪치는 것을 타티아나는 가장 좋아하고, 잘 받아 준다.

“……아하핫.”

“갑자기 왜 웃으시나요?”

“그냥, 갑자기. 우리는 이런 곳에서도 피아노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타티아나도 쿡쿡 웃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우리, 오늘은 피아노 이야기 하지 않기로 할까요?”

“……그럴까.”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와 피아노 이야기로 하루 종일 대화를 해도 좋았지만, 오늘마저 그럴 생각이 들진 않았다. 타티아나 역시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수영장 쪽으로 손짓했다.

“모처럼 수영장에 왔으니까……. 이제 물에 들어갈까?”

“좋아요.”

타티아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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