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타티아나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다른 사람들에게 누워서 쉬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에르네스트는 누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타티아나가 강압적인 표정으로 몇 번이고 손짓하니 결국 어쩔 수 없이 애매하게 모로 누웠다. 에르네스트마저 피크닉 매트 위에 눕는 것을 보고 나서야 타티아나는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정말 알 수 없는 애였다. 피곤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도 타티아나는 눕지 않고 피곤해하는 류보비를 허벅지를 베고 잘 수 있게 하고, 아나스타샤도 어깨에 기대게 했다. 꼼짝도 못 하는 저런 자세로는 쉬긴커녕 더 힘들다.
잠시 낮잠을 자며 쉬자면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가뜩이나 약하면서 그렇게 있지 말고 그냥 나란히 누워서 쉬라고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평소 친구인 아나스타샤는 물론이고 후배인 류보비도 무척이나 아낀다. 여자애들의 우정이라는 건 남자들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허벅지도 저리고 어깨도 뻐근할 것이 분명한데도, 타티아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행복감이 노랫소리에 담겨 있다.
그녀가 이 순간을 정말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이 그 목소리만 들어도 전해져 왔다.
알 듯 말 듯 한 상념에 잠겨 타티아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네스트는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허밍 소리 외엔 조용해진 주변을 느끼며 문득 피식 웃어 버렸다.
어린 류보비나 사샤는 피곤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놀다가 지쳐서 잠들어 버리다니, 정말 애들도 아니고.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에르네스트는 누워 있긴 하지만 타티아나의 목소리를 감상한다는 듯한 기분으로 눈을 뜨고 있었다.
누군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노래를 불러 주곤 하는 타티아나는 막상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부끄러워할 테지만. 에르네스트는 한순간도 기억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했다.
“…….”
하지만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쓸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었고, 에르네스트는 어느 순간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에서 귓가로 상냥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음악가로서의 정신은 자동적으로 그 노랫소리의 선율과 리듬을 나누어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파업을 선언하고 사라져 버렸다. 저항할 수 없는 음악의 마력이 정신에 스민다.
그저 좋다는 기분 속에서, 에르네스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들었다.
***
단잠에 빠져 있던 에르네스트는 살며시 자신의 어깨에 와 닿는 손길을 느꼈다.
“에르네스트. 일어나세요.”
“……?”
멍한 정신이 그 목소리를 해석하다가, 갑자기 비상사태에 들어섰다.
“!? 타티아나?”
“아, 일어나셨나요.”
“윽…….”
깜짝 놀라서 일어난 에르네스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하마터면 타티아나와 부딪칠 뻔했다. 타티아나가 화들짝 놀라 물러섰고, 에르네스트는 어찌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했다.
여름이 오면서 해가 길어지긴 했지만 대략 오후 6시는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편에서 아나스타샤와 류보비는 피크닉 매트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기겁해서 말했다.
“나 잤어?”
“예.”
“왜?”
“……왜라뇨?”
타티아나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에르네스트는 죽고 싶어졌다. 어떻게든 버티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잠들어 버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타티아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잠깐이지만 피로는 조금 풀리셨나요?”
“으……응.”
“다행이에요. 그럼 일어나 주시겠어요? 이제 자리를 정리하고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아버지가 퇴근하셨다고 하셔서요.”
“그, 그래…….”
에르네스트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타티아나의 아버지가 퇴근하셨는데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던 거야? 그게 사실 어떠한 상관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니…….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에 치이던 에르네스트는 이래선 정말 아무것도 안 되겠단 생각을 했다.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옳겠지?”
“예. 그러려고 해요.”
“그 전에 욕실을 잠깐 빌릴 수 있을까.”
“욕실요? 아…….”
에르네스트는 누워서 맘 편히 자 버리면서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타티아나는 알겠다는 듯 탄성을 흘리더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러고는 저편에 있는 바구니로 가서는 작은 빗을 가지고는 다시 돌아왔다. 에르네스트는 마음속으로 설마라는 단어를 2백 번쯤 외쳤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빗어 드릴게요.”
“아, 아니 잠깐만! 내가 할게!”
“괜찮아요. 괜찮아요. 시간도 없고요.”
무조건 괜찮다며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의 뒤편으로 가선 머리에 빗을 대었다.
섬세하게 쓸어내리는 손길과 빗질에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들킬까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그 손길을 머리로 받아 냈다.
온갖 걱정이 다 들었다. 머리가 엉망이면 어떻게 하지. 누워 있었기 때문에 뭔가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기름으로 끈적거려서 타티아나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걱정들을 하면서도 에르네스트는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편에서, 시선 한 쌍이 날아들었다.
“…….”
아나스타샤가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피크닉 매트를 바구니에 대충 집어넣고는 다가왔다.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에르네스트는 어쩐지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녀는 삐딱하게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를 내려다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타티아나. 이리 줘 볼래.”
“잘 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야.”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로부터 빗을 받아선 다시 에르네스트의 머리 위에 대었다. 에르네스트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목 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해야지.”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의 머리를 긁어내렸다. 타티아나처럼 부드러운 손길은 전혀 없었다.
“그……그냥 내가 하면 안 될까.”
“응? 아니야. 가만히 있어. 다치니까.”
“!? 빗질을 하는데 왜 다쳐?”
깜짝 놀란 에르네스트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꼼짝하지 말라는 듯 손과 빗으로 계속 에르네스트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손길은 험악하지만 솜씨는 확실해서, 잠시 후 에르네스트는 딱히 거울을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빗질이 잘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기상천외한 손놀림으로 빗을 휙휙 돌리더니 다른 남자들에게도 말했다.
“거기 남자들도 이리 와. 머리 빗어 줄 테니까.”
“필요 없는데.”
“필요 없긴 뭐가 없어. 그 머리 꼴로 아저씨 만날 거야? 너희가 너저분하다고 아저씨가 뭐라 하시는 건 상관없지만, 그런 너희를 친구로 뒀다는 이유로 타티아나까지 혼나는 건 사양이야.”
아나스타샤는 단호하게 말하며 손을 까딱였다. 리처드는 극구 거부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결국 아나스타샤에게 머리를 맡겼다. 마지막으로 한승우는 정말 거의 질겁하며 스스로 손으로 대충 머리를 쓸어내렸지만 그걸로 아나스타샤가 만족할 리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기어이 한승우까지 잡아서 머리를 빗어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광경을 보며 저런 친구를 둔 것에 대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약간 무섭기도 했다.
***
그렇게 모두 차림새를 조금 단정하게 하자마자 바로 저택으로 향했다. 이미 귀가해서 기다리고 있을 유리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몇 번 보았던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총수 유리 알렉세예비치 베르체노프를 떠올렸다. 약간 긴장감이 느껴졌다.
“왔느냐.”
저택의 응접실에서 유리 알렉세예비치와 마주했을 때, 그 긴장감은 최고치를 달렸다.
커다란 체구와 엄격함이 자리 잡은 이마. 친구 아버지라기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설명하기엔 격을 달리하는 사람이었다.
열다섯 살들에겐 너무나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친구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안녕하세요. 유리 알렉세예비치.”
“모두 반갑군.”
유리는 담담하게 말하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한 명 한 명을 눈에 새기려는 듯 시선이 날카로웠다.
“리처드, 한승우. 자네들은 작년에 본 이후로 처음이로군.”
“예.”
“요즘도 타티아나와 볼링 치는가?”
리처드와 한승우는 이젠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태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후로도 가벼운 문답이 오가면서 조금 옅어졌다.
에르네스트는 처음 듣는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작년에 봤다고? 볼링?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에게도 시선이 돌아왔다.
“에르네스트. 사샤. 오랜만이군. 스테판과는 며칠 전에도 봤지. 에르네스트 자네는 스위스에서 연주회를 했었다고 들었는데, 잘 해냈다니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에르네스트는 깔끔하게 답했다. 아버지 스테판은 유리와 사업적으로 얽혀 있어서 친분이 있었다. 그런데 사업 이야기 말고 사사로운 이야기도 나눈다는 것에 에르네스트는 약간 더 긴장했다. 그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별말은 없었는지 유리는 다음으로 류보비를 내려다보았다.
“숙녀분은 처음 보는군.”
“아, 안녕하세요. 류보비 이바노브나 벨라예바라고 합니다……. 2학년, 아니, 이제 3학년이고요……. 성악과예요…….”
“하하하하, 너무 어렵게 인사할 필요 없단다.”
바짝 얼어붙은 류보비가 귀여웠는지 유리는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차갑고 근엄한 모습이 옅어지자 류보비도 조금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리는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아나스타샤. 요 며칠간 타티아나와 지내다가 오늘은 친구들까지 와서 떠들썩했겠구나.”
“남자애들이니깐요.”
아나스타샤는 긴장 같은 건 하나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리는 그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나스타샤는 유리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굉장히 친근하게 대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친구인데도 아버지가 딸의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를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서,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과 인사가 오갔고, 유리는 길게 이야기를 할 생각 없다는 듯 마무리했다.
“오늘은 작은 연회도 준비했으니 모두들 즐겨 주었으면 하네. 난 간단한 식사만 마치고 집무실에 가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아버지!”
“하하, 왜 그러느냐 타티아나.”
타티아나가 약간 섭섭하다는 듯 불렀고, 유리는 크게 웃었다. 딸이 친구들과 노는데 끼어서 분위기를 흐리기 싫다는 논조의 말이었으나 타티아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섭섭하다는 듯했다.
부녀 사이의 정다운 다툼이 짧게 지나가고, 유리는 다시 한 번 편하게 있어 달라고 말한 뒤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모두들 갈까요.”
타티아나는 방금 전 보였던 모습이 약간 부끄러운지 작은 목소리로 모두를 저택 안의 연회장으로 인도했다.
애초에 베르체노프가에 초대를 받아 왔을 때부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포멀한 슈트를 빌려 입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캐주얼하지만 그래도 말끔하게 단정한 복장을 한 모두는 그대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고풍스러운 촛대에 촛불이 올라와 있었다.
테이블은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유리와 루슬란의 자리까지 총 9사람의 자리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고, 모두들 어렵지 않게 자리를 찾아 가서 앉았다.
에르네스트는 사샤와 함께 조금 바깥쪽에 앉았다.
유리와 루슬란이 오기까지 잠시 담소가 오갔다.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끼지 않고 물로 목만 조금 축였다. 그리고 어린 동생의 무릎에 냅킨을 올려 주었다.
사샤는 무릎 위에 냅킨을 올려 주는 에르네스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불렀다.
“형.”
“왜, 사샤.”
“내가 뭔가 하면 형 화낼 거지.”
무슨 말인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주변을 살피고는 사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안 그래도 다시 이야기하려고 했어. 사샤.”
에르네스트는 그런 사샤의 태도에 약간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하고자 하는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네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 네가 보기엔 내가 그저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지. 이해해.”
“응.”
“하지만 지금 네가 나서는 건 방해에 가까워.”
“방해야?”
“그래.”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더듬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분명하게 손을 뻗어 온다.
아직은 그저 순수한 호의일 뿐이고 그 이상을 논하는 건 멍청한 착각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모든 것이 일방적인 착각일 순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기다렸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고, 언젠가 또 다른 관계성을 이름 짓고 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 시점에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바로 옆에 있고 싶었다.
물론 자신 말고도 다른 남자들은 많다. 같이 트리오를 한 선배들도 있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리처드와 한승우만 해도 그렇다.
타티아나는 그들에게도 굉장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에르네스트는 그중 한 명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 타티아나가 종종 보이는 그런 담백한 태도엔 종종 우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크게 안달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아주 오만하게, 에르네스트는 그 누구에게도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넌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아, 사샤.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돼.”
“…….”
타티아나와 음악적으로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는 것도 자신이었고, 라이벌 혹은 친구로서도 그랬다. 적어도 서로의 피아노 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타티아나와 그의 유대는 특별했다. 에르네스트는 다른 건 몰라도 그 점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사샤는 조용히 에르네스트를 바라봤다. 에르네스트는 가끔 이 어린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다른 어린애들은 표정만 봐도 생각이 다 읽히는데, 사샤는 유독 그 부분이 모호하곤 했다.
잠시간 말이 없던 사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형.”
“……뭔데 또.”
“형도 다 아는 건 아닐걸.”
“뭐?”
자존심 강한 에르네스트는 대번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꼬았다.
“그래? 그런데 넌 알겠고? 참 궁금하네 그게 뭔지.”
사샤는 조금 고민하다가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형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게 있어.”
“……?”
“그걸 못 알아차리면 형은 상대도 안 될 거야.”
“뭐?”
에르네스트는 저도 모르게 조금 목소리를 키웠다가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들 이야기를 나누느라 이쪽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상대도 안 된다니 대체 누구랑? 에르네스트는 사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에 조금 심각하게 들었다. 눈만 돌려서 한 명씩 돌아보았다.
리처드와 한승우. 작년에 이미 타티아나의 아버지와 만났다고 하는 녀석들. 에르네스트가 못 본 것이 있다면 바로 리처드와 한승우의 일밖에 없었다.
별일 없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른다. 상대도 안 될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강한 어떠한 유대가 모르는 사이 정착해 있을지도.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사샤가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너 뭐 다른 걸 봤어?”
“특별한 건 아니야. 그냥 형은 보고도 모를 뿐이지.”
하지만 사샤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보고도 모른다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부러 선문답하듯 에르네스트를 짜증 나게 만들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샤도 시원하게 말해 주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듯 답답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사샤에게 짜증스레 말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물었다.
“무슨 소린데 도대체.”
“지금 이 파티도 누가 만든 거라 생각해?”
“타티아나잖아.”
“아닐걸.”
사샤는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이라고 생각하는지 그 말만 뱉고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은 절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입을 다문 사샤는 어지간해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어린 동생을 들볶는 것도 꼴사나워서 에르네스트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는 머리 회전이 느린 편은 아니었으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느긋하게 해선 어림도 없다는 듯 타티아나와 보다 친해질 기회를 자주 만들곤 하는 사샤였지만, 그게 리처드나 한승우 때문에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사샤가 리처드나 한승우 때문에 에르네스트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려고 하는 것이라면 착각을 해도 크게 착각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샤의 말대로 제대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착각을 하는 쪽이 자신이라면,
다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오만이 성립하기 이전에 놓친 것이 무엇인지 숙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