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잠시 후 유리와 루슬란이 연회장으로 들어왔고, 에르네스트는 하던 생각을 멈췄다.
사샤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 주진 못해도 최대한 힌트를 주려고 한 것 같지만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무언가에 집중해 봐야 바로 답이 튀어나올 리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무언가를 찾는 것보다는 당장 유리가 있는 자리에서 실수나 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녁 식사는 잔잔한 분위기에서 흘러갔다.
점심때와는 또 다른 고급 요리들의 향연에 간간이 탄성이 터져 나왔고, 기분 좋은 농담이나 대화들도 오갔다.
타티아나는 류보비가 혹여나 소외감을 느낄까 싶었는지 바로 옆에 앉혀 놓고는 마치 자신의 동생인 마냥 챙겨 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광경에 유리와 루슬란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타티아나는 사샤에게도 물었다.
“식사는 어떠셨나요? 사샤.”
“맛있었어요.”
“다행이에요.”
타티아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사샤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홀로 온 류보비를 챙겨 주느라 죽 붙어 있었지만 내심 사샤도 신경 쓰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에르네스트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에르네스트도 고마워요.”
“나? 내가 왜?”
“동생을 잘 챙겨 주셨잖아요. 저는 다 봤어요. 냅킨도 놓아 주시고, 소스도 밀어 주시는 걸.”
“내 동생이니까 내가 챙겨야 하는 거잖아.”
“그래도요.”
사샤가 타티아나를 불렀다.
“타티아나 누나.”
“예. 사샤.”
에르네스트는 식사 직전 사샤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샤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약간 긴장하는 사이,
“콜라 더 마셔도 돼요?”
사샤는 천진난만하게 탄산음료를 더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동생이 뭘 원하든 이번엔 당해 주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살짝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타티아나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상관은 없지만…… 탄산음료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아요. 사샤.”
“안 되나요?”
“그럼 오늘만…… 괜찮겠죠? 에르네스트.”
보호자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듯 타티아나가 살짝 물어 온다. 사샤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았다.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진지하게 말하던 동생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눈빛이 마냥 천진함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샤는 똑바로 전해 오고 있었다. 오늘 이후로 사샤는 에르네스트의 의도에 앞서 무언가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모든 걱정과 조언은 마쳤고, 사샤는 착한 동생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음대로 해.”
뭔진 모르겠지만 바라던 바다. 양심적으로 사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었지만, 에르네스트는 머저리에 자존심도 없는 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린 동생은 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는 에르네스트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모두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디저트와 음료 등을 즐겼다.
도중에 리처드가 흐르는 음악의 제목을 묻는 것으로 클래식 곡 제목 맞추기 퀴즈가 벌어지기도 했다.
중앙음악학교에 재학 중인 모두가 퀴즈를 맞히고 놀면서 동시에 공부도 하는 것을 보며 루슬란이 말했다.
“음악학교 애들은 이런 걸 하면서 노는구나. 생각도 못 했네.”
“그렇다면 대학생들은 뭘 하시나요? 루슬란.”
“어, 음…….”
아나스타샤의 질문에 루슬란은 약간 대답하길 주저했다.
대학생인 그는 늘 사람 만나고 술 마신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루슬란을 제외한 7명은 미성년자들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루슬란은 문득 좋은 것이 생각났는지 제안했다.
“마피아 게임 해 볼래?”
생각도 못 한 게임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약간 당황했다. 마피아 게임이 무슨 게임인지는 알고 있지만 해 본 적도 없었고, 이런 장소에서 꺼낼 만한 게임인지 의아하기도 했다.
루슬란은 에르네스트가 돌아보자 그 시선을 느끼고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너희들이 하던 음악 맞추기 게임도 재미있어 보이지만 그냥 퀴즈잖아. 그에 비해 마피아 게임은 그야말로 파티용 게임이라 재미있을 거야.”
“그거 재미있나요.”
“대학생들도 많이 해. 애초에 이 게임의 창안자가 우리 모스크바 대학교의 심리학부 교수였고, 대학교 교실에서부터 시작된 거거든.”
“모스크바 대학교? 처음 들었네요.”
“이젠 세계적인 게임이라 누가 만들었는진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에르네스트는 그 말엔 동의하지 않았다. 마피아 게임이 러시아에서 만든 게임이라는 것은 충분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리 관심이 없었던 러시안 파티 게임이 급격히 해 보고 싶어졌다.
갑자기 에르네스트가 관심을 보이자 루슬란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해 볼래? 사회자는 내가 맡아 줄게.”
이번엔 흔쾌히 대답했다.
“해 보죠. 아나스타샤. 할 거지?”
“재미있겠네.”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도 씩 웃으며 대답했고, 어느새 모여든 다른 사람들도 마피아 게임이라는 것에 흥미를 보였다.
타티아나는 열성적으로 찬성했다.
“해 보고 싶어요!”
오늘 타티아나는 승마장이나 사격장 등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곳에 데려가 주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 함께 즐길 수 있는 파티용 게임을 더욱 바랬던 것 같다.
루슬란을 제외하고 총 7명의 사람들은 원형 테이블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둘러앉았다. 루슬란은 킥킥 웃더니 말했다.
“연회장에서 마피아 게임을 해 보는 건 또 처음이긴 하네. 으슥한 방구석에서 하는 게 좋긴 한데.”
에르네스트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고풍스럽고 밝은 연회장에서 마피아 게임이라는 조금 살벌한 네이밍의 게임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자리에 앉자마자 끓어오르는 긴장감을 느꼈다. 7명의 참가자들은 모두 착석하자마자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 자체로 벌써 전운이 감돌았다. 사실 이만큼 흥미진진한 게임도 드물 것 같았다.
루슬란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듯 가볍게 말했다.
“그래도 재미있을 거야. 해 본 사람이 별로 없더라도 몇 판 해 보면 감이 올 테니 일단 해 보자.”
한 판 하는 데에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다 보면 밤을 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며, 루슬란이 게임의 막을 열었다.
일단 규칙 설명이 있었다.
“자, 그러면 내가 사회자를 하고. 총 7명이니까 마피아 2명에 경찰 1명, 의사 1명, 시민 3명으로 정할게. 첫 판이니까 디폴트 룰로 가 보자고.”
“루슬란에게 맡길게요.”
“고마워.”
그리고 루슬란은 마피아 게임의 낮과 밤 시스템과 각 직업의 역할을 설명했다.
마피아 게임은 낮에는 토론을 하고 다수결로 한 사람을 처형하고, 밤에는 각각의 역할에 맞게 능력을 사용하여 마지막까지 남는 직업에 따라 마피아팀과 시민팀의 승리가 정해지는 게임이었다.
기본적으로 7명 모두에게 낮의 투표권이 주어지며, 마피아들은 낮에는 시민인 척 위장하고 있다가 밤에 한 사람을 골라 공격해 죽일 수 있고, 경찰은 밤에 한 사람을 특정해서 그 사람이 마피아인지 시민인지 밝혀내는 능력, 의사는 밤에 한 사람을 골라 마피아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임 시스템 자체가 복잡하진 않았다.
“직업 선정이나 밤에 해야 할 지시 같은 건 메신저로 하게 될 거야.”
“간편하네요.”
밤에 사회자에게 직접 전할 수도 있지만, 스마트폰 메신저를 이용하는 쪽이 훨씬 더 간편하고 비밀 유지에 용이했다.
메시지 알림을 무음으로 꺼놓는 것까지 치밀하게 준비를 마치고, 마피아 게임이 시작되었다.
“밤이 되었습니다. 모두 뒤로 돌아 고개를 숙여 주세요. 모두에게 직업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사회자답게 진중한 목소리로 루슬란이 말했고, 모두 거기에 따라 테이블을 등지고 앉았다.
원형 테이블은 상당히 커서 뒤돌아 앉으니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옆을 보려면 고개를 돌려야 했는데, 사회자에게 적발되지 않고 고개를 돌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생전 처음 해 보는 마피아 게임에 조금 흥분되었다. 처음이라면 무난하게 비중이 낮은 시민 같은 역할로 게임을 익혀 나가는 것이 순서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간절히 마피아가 되길 희망했다.
시민들을 속이고 밤이면 한 명씩 죽일 수 있는 마피아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피아니스트 외의 다른 직업을 이렇게 간절하게 원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
그리고 기도는 이루어졌다.
에르네스트는 루슬란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마피아로 선택되었다는 메시지를 받고도 에르네스트는 혹여나 싶어 움찔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혹시나 잘못 날아온 것이 아닌가 한참이나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마피아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에르네스트는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뒤에 따라오는 문장을 읽었다.
동료 마피아는 한승우였다.
“…….”
에르네스트는 두근거리던 기분이 싹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딱히 악감정이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 에르네스트는 아직까지도 한승우가 조금 어색했다. 말이 서툴러서 그렇지 멍청한 자식이 아니라는 건 이제 알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여전히 그에겐 외국인일 뿐이었다.
어쨌든 게임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멍청하게 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진짜 마피아가 되어 다른 마피아와 비즈니스적으로 접촉하는 기분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안녕.]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밀려들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꿋꿋하게 메시지를 적어 나갔다.
[넌 처음부터 의심받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았어.]
한승우는 순순히 답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혼자 다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에게 직업이 부여되었고, 낮이 밝았다.
다시 원형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7명이 마주 보고 앉았다. 루슬란이 말했다.
“이 중 누가 마피아일지 자유롭게 토론을 나눠 주세요.”
“…….”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이였지만, 이 가운데에 속임수를 쓰는 마피아가 둘이나 끼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비밀은 감추고 다른 사람의 의중을 읽어 내기 위해 날카로운 눈빛들이 오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임인 것 같은데, 벌써부터 스릴이 넘쳤다. 모스크바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가 만들어 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누구도 깰 수 없을 것처럼 견고한 침묵을 가장 먼저 깨뜨린 것은 아나스타샤였다.
“알겠다.”
“??”
어차피 토론을 나누어야 하니 누군가 말을 하긴 해야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알았다며 나서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모두가 의아해했다.
에르네스트 역시 아나스타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치켜들더니 에르네스트를 똑바로 가리켰다.
“에르네스트! 너 마피아지!”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어서 항변했다.
“야,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게 어디 있어!”
“아니야. 내 감은 정확하게 널 가리키고 있어. 에르네스트.”
“어이가 없네, 진짜.”
어이가 없다고는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어떤 단서도 없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찍었겠지만 그 감각은 가히 동물적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막무가내에 말려들면 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요, 사회자님. 첫날엔 다수결 처형 안 하겠죠?”
재빨리 사회자인 루슬란에게 묻자, 루슬란이 담담히 답했다.
“첫날은 토론만 하겠습니다.”
“아, 아깝네.”
아나스타샤는 정말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당당함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는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반격했다.
“너야말로 대뜸 첫날부터 아무나 찍고 보는 게 의심쩍기 짝이 없는데, 아나스타샤.”
“네가 왜 아무나야? 이 마피아야.”
“아니, 추리를 하라고 추리를. 중세 시대식 마녀사냥을 하지 말고!”
“내 추리는 완벽해. 네 눈빛은 하루에 한 명씩 죽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악질 마피아의 눈빛이야.”
“너 추리라는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와 그렇게 소모적인 언쟁을 주고받았다. 게임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이 게임의 본질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일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명료한 추리보다는 심리전으로 상대를 흔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도 그 점은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이리저리 흔들려 해도 태연하게 대꾸했다.
잠시 후에야 아나스타샤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타깃을 옮겨 갔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 너무 조용한데? 흠…….”
사냥감을 물색하는 맹수의 눈빛이 한 바퀴 돌더니 옆자리로 향했다.
“타티아나?”
“예, 옛!”
“깜짝이야……. 갑자기 왜 놀라고 그래.”
격렬하게 언쟁을 벌이던 둘을 보다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던 타티아나는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들이 와닿자 깜짝 놀랐는지 크게 대답했다.
타티아나는 큰 소리를 낸 것이 창피한지 머뭇거리더니, 순진하게 대놓고 물었다.
“어……. 저 무슨 말 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 딱히 안 해도 되는데.”
“안 하면 의심받는 거 아닌가요?”
“거꾸로 너무 말이 많아지면 의심받을 수도 있지.”
“어렵네요.”
중얼거리며 주변을 돌아본다. 이 중에 마피아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정말 이런 게임은 해 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타티아나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른 편에 속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가장 짧고 강력한 말을 꺼냈다.
“살려 주세요…….”
“아하하하!”
“너는 절대 아닐 것 같다. 타티아나. 정말로.”
괜한 의견을 내는 것보단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쪽이 현명했다. 추리보다는 심리전에 기반을 둔 게임이니, 의식했든 그러지 않았든 타티아나의 행동은 효과가 있었다.
낮 시간은 아무 근거 없이도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중심은 단연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어린 사샤와 류보비에겐 심하게 하지 않았지만 리처드와 한승우, 에르네스트에겐 그야말로 거의 강압적인 수사관처럼 굴었다.
아무 단서도 없이 일단 서로를 떠보기 위해 밀어 보기도 하고 당겨 보기도 해야 하는 낮에 당연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럴 땐 목소리 큰 사람이 무조건 유리했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나스타샤는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었다.
[누구 죽일래?]
한승우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에르네스트는 길게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아나스타샤를 일단 치워 놔야 게임이 편해지겠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이름을 쓰려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가만 화면을 보던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엉뚱한 이름을 적었다.
[타티아나를 죽이자.]
[???]
한승우가 물음표를 세 개나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대체 왜 그런 발상을 한 건지 들어 봐도 될까.]
[그냥 넌 어떻게 생각하나 해서.]
문장을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도 에르네스트는 스스로가 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샤가 심각하게 말했던 것들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며 에르네스트를 자극했다. 궁금했다. 신경 쓰였다.
그 와중에도 머리 한편이 시끄러웠다. 그냥 게임에 이기는 데에만 충실하는 게 맞지 않아? 대체 이게 쪽팔리게 뭐 하는 짓거리야?
평소 같았으면 혀를 깨무는 한이 있어도 안 했을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가 정말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에르네스트는 답장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이 연회의 호스트를 제일 먼저 죽이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정석적으로는 아나스타샤를 죽여야 해. 말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게 나아.]
[타티아나는?]
[살려 두고 싶은데. 살려 달라잖아.]
굉장히 상식적인 답변이라 힘이 쭉 빠졌다.
한승우는 바보도 아니었고, 이따위로 유치하게 에두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진 에르네스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분명했다. 사샤가 뭐라 했든 지금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첫 마피아 게임에 즐거워하는 타티아나를 처음부터 아무 말도 못하게 유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다시 막 표적을 아나스타샤로 옮기자고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아니다.]
한승우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짧고 단호한 메시지다.
[하자.]
[뭘.]
[타티아나를 쏘자.]
[???]
이번엔 에르네스트가 물음표를 보냈다.
이 자식 미쳤나?
갑자기 입장이 역전된 상황에서 당황한 에르네스트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한승우가 순식간에 장문의 문장을 보내왔다.
[생각해 봤어. 아나스타샤는 발언권이 강력해. 첫날 공격당할 것을 예상하고 의사가 붙거나, 마피아를 의심하고 경찰이 붙을 수도 있겠지. 첫날 아나스타샤를 노리는 것은 좋지 않아.]
[그래서?]
[일단 살려 두고, 단순히 살아 있으니 마피아일 것이라는 억지 논리로 몰아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경찰이 붙는다면 경찰까지 한 번에 말이야. 먼저 죽여서 결백을 증명시키면 다음으로 네가 더 위험해져.]
이렇게까지 긴 문장을 논리적으로 쓸 수 있는 놈일 줄은 미처 몰랐다. 러시아어로 논술 시험까지 쳐 봐서 그런지 한승우는 말보다는 글쓰기에 조금 더 익숙해 보였다.
내심 놀라움과 동시에 순수하게 감탄을 하고 있을 때, 한승우가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일단 추리다운 추리는 불가능하도록 미궁에 빠뜨리자.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 내가 한 명씩 죽일 테니까.]
“…….”
순간 에르네스트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덩치만 컸지 사실 별 볼일 없는 놈일 것이란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거 진짜 미친놈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를 떠보기 위해 그냥 해 본 말이었지만, 한승우는 타티아나가 첫 게임이고 이 연회의 호스트면서 살려 달라고 빌기까지 했다는 것을 감안하고도 없애 버리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였다.
진짜 마피아라도 이렇게 잔혹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이제 와서 반대하자니 처음 죽이자고 주장했던 것이 바로 자신이라 모순이었다.
말문이 막힌 에르네스트는 마지막으로 해도 되냐고 묻는 한승우에게 그렇게 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루슬란으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정말로 처음부터 타티아나를 죽인다고?]
사회자의 말투는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루슬란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묻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취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어라 메시지를 보내기도 전에 사회자 루슬란이 낮 시간을 선언했다.
그 목소리는 건조하고 차가웠다.
“간밤의 희생자는…….”
에르네스트는 의사가 누구건 타티아나를 방어해 주길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없습니다.”
“!”
“잔학무도하고 악랄한 마피아들이 시민을 노렸지만, 의사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의사가 누군진 몰라도 첫날 타티아나를 지켜 낸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전날 가장 말을 많이 하고, 위험하게 보였던 것은 분명 아나스타샤였다. 하지만 의사는 타티아나를 지키기로 했다.
에르네스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에르네스트는 그 어떤 연기도 없이 시민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심판의 창칼은 마피아들에게 향했다.
“에르네스트…….”
“……어?”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돌리자 타티아나가 약간 주저하고 있었다.
지금 말해도 되나 안 되나 고민하던 그녀는 잠시 생각 끝에 말했다.
“제가 경찰이라서 에르네스트를 조사해 봤는데요……. 마피아래요.”
“뭐……라고?”
순간 뇌가 정지했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타티아나를 보면서 당장 변명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치열한 심리전에선 1초의 머뭇거림도 치명적이다. 에르네스트는 잠시의 당황을 급히 갈무리하며 다시 정색했다.
이렇게 나온다면 중요도 높은 직업을 사칭해서라도 쉽게 처형할 수 없게 혼란에 빠뜨려야 했다. 경찰이 나왔다면 같은 경찰보다는 의사를 사칭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
에르네스트가 간과했던 것은 심판의 창칼은 창과 칼이었다는 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소름이 끼친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에르네스트 너 정말 나쁜 놈이다.”
“?”
“내가 의사인데 타티아나를 지켰거든. 그런데 저 애가 의사의 보호를 받고 살아났다는 건 네가 타티아나를 공격했다는 거잖아?”
아나스타샤는 거의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두 번째로 생각이 멈추었다. 변명하려던 모든 생각들은 저 멀리 하얗게 사라졌다.
“자, 잠깐만……. 오해가…….”
“죽어. 그냥.”
“변론을 들어야…….”
“변론은 무슨 변론이야. 어떻게 첫 희생자로 타티아나를 노릴 수 있어? 살려 달라고 하기까지 한 애를? 네가 사람이야? 아니지, 사람 아니지. 사람이면 못 그래.”
“…….”
힐난하는 아나스타샤와 배신감에 충격을 받고 굳어 버린 타티아나의 얼굴을 보면서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어차피 게임일 뿐이니 배신감까지 느낄 건 없다고 말한다면 그 순간 진짜 쓰레기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할 수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평소 말을 잘 못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런 심리전에서 쉽게 말리진 않을 것이란 자신이 분명 있었는데, 그 모든 자신감은 깔끔하게 증발해 버렸다. 옆머리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당황했다.
“와, 정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그때 테이블 저편의 한승우가 합세해서 에르네스트를 비난했고, 에르네스트는 이 모든 판을 뒤집어 버리고 한승우를 죽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