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저항했으나 강력하게 얽힌 두 사람을 모두 이길 수는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다른 가능성은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아예 에르네스트를 마피아로 규정지어 버리곤 시종일관 비난과 압박으로 멘탈을 뒤흔들었고, 타티아나는 가장 먼저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수천 명이 있는 무대에서도 위압되는 일 한 번 없이 자신의 퍼포먼스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훈련받은 에르네스트였지만, 멘탈이 완전히 흔들린 지금은 단 6명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에르네스트는 이렇다 할 변명도 제대로 못 하고 6명 모두의 만장일치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마피아인 한승우는 어떻게든 잘 해 보려 했지만 낮 시간에 아나스타샤에게 치여 크게 의견을 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눈치가 이상하다며 아나스타샤는 경찰인 타티아나를 시켜 한승우를 조사해 보도록 했고, 결국 바로 다음 날 한승우도 처형당했다.
너무 깔끔한 완패였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쉬었다.
“게임은 시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루슬란이 선언했고 다섯 명의 시민들은 환성을 터뜨렸다.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가 서로를 칭찬했다.
“잘 했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야말로요. 살려 주셔서 고마워요.”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에르네스트와 한승우 쪽으로 살짝 눈을 흘겼다. 마피아들이 첫날 그녀를 노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할 말이 없어서 작게 사과했다.
“미안…….”
“미안할 게 무엇 있나요? 어차피 게임인걸요.”
“……?”
예상외로 쿨한 대답이었다. 어쩌면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젠 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말했다.
“그리고 전 에르네스트와 한승우가 게임에 있어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었단 것을 배우게 되었으니 앞으론 그것을 염두에 두고 게임에 임하려고 해요.”
“아니 그게…….”
“농담이에요.”
“뭐?”
벙 찐 대답에 타티아나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게임이잖아요? 우후후. 즐겁네요.”
“즐거워……?”
“물론이죠. 다음엔 마피아 역할도 맡아 보고 싶어요.”
정말 즐겁다는 듯 타티아나가 눈을 반짝였다. 이다음엔 마피아도 해 보고 싶다고 하는 것을 보니 정말 게임을 즐기는 것에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공격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는 충격을 받고 토라진 표정을 짓고 있더니, 이제 보니 그것도 다 마피아들의 양심을 공격하기 위한 연기의 일환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전에 서프라이즈 파티 때 타티아나의 연기력을 본 적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새삼 무서움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타티아나가 게임을 그저 게임으로 즐겨 주고 뒤끝을 가지지 않는 깔끔한 성격이라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100% 농담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바로 다음 게임에서 첫날 밤에 마피아에게 살해당했다.
밤에 죽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를 바라보았고, 슬며시 우쭐거리는 입꼬리를 보며 타티아나의 보복임을 직감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지켜보는데, 낮이 되자마자 타티아나는 능숙하게 좌중을 구워삶았다. 한 판 만에 이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실하게 파악한 듯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타티아나에게 휘둘린 모두는 게임이 끝나고 타티아나와 리처드가 마피아였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게임이 몇 판 진행되면서 모두가 룰을 익히고,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익혔다.
무엇보다 서로에게 익숙해져 간다. 이러한 심리전을 요구하는 게임은 서로 평소 알지 못했던 모습들을 드러나게 했다.
에르네스트가 가장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의 관계였다.
늘 붙어 다니다시피 하는 한 쌍의 연대는 굉장히 단단했다. 타티아나도 아나스타샤도 각각 마피아가 되었을 땐 가차 없이 서로를 속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맺어져 있는 신뢰와 믿음이라는 것이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느껴졌다.
“타티아나. 정말 나 아니야……. 정말이야. 나 믿잖아? 그치? 난 아무 특징도 없는 시민이야. 날 먼저 죽여야 할 증거도 없잖아? 나 말고 저기 있는 리처드를 봐. 리처드야말로 마피아 같이 보이지 않아? 아, 지금도 살짝 움찔했어. 정말이라니까?”
“그런 말 하셔도 소용없어요, 아나스타샤. 전 신념 있게 갈 거니깐요. ……그러니까 리처드에게 한 표.”
“야! 그게 무슨 신념이야!”
“잘 가요, 리처드. 잊지 않을게요.”
난데없이 마피아로 몰리게 된 리처드가 소리를 쳤으나 타티아나는 신념인지 피동인지 모를 한 표를 되돌릴 생각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연대가 게임성을 흐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증거가 희박해서 추리가 어려워질 땐 가장 강력한 힘이기도 했다.
이 연대를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가장 어린 사샤도 조심스레 나와서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전 누나 둘이 수상해요.”
“어머, 사샤. 마피아라고 생각된다면 수상하다고 할 게 아니라 증거를 가져와야지?”
“누나는 증거로 게임했었나요?”
“안 했지.”
“…….”
언제나 당당한 아나스타샤는 어디 할 수 있으면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 매력적으로 웃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마를 짚었다. 당해 낼 수가 없다.
게임은 갈수록 무르익었다.
누군가를 속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류보비가 마피아로 지목당하자마자 당황하며 거의 자백하듯 사샤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가 나란히 처형당하는 것으로 끝나 버리기도 하고, 경찰이 된 사샤가 뛰어난 추리력으로 게임을 이끌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웃기도 하고 진지하게 하기도 하고, 선동 당하기도 하고, 선동을 이끌기도 하고, 배신을 당했다가 돌려주기도 하면서 게임을 즐겼다.
사샤가 그간 몇 번이나 스터디룸에 오라고 했었던 것이 단순히 같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추억을 쌓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면, 가끔은 함께 하는 것도 재미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테이블 위의 디저트와 음료가 몇 번이나 추가되고, 몇 번이나 역할들을 바꿔 가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하다가 가장 먼저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타티아나였다.
“정말 아쉽지만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떨까요? 사샤와 류보비는 잘 시간이니까요.”
“그럴까?”
“앗, 아니에요! 전 아까 낮잠도 자서 그런지 안 졸…… 흐아암…….”
깜짝 놀라며 괜찮다고 말하던 류보비는 자기도 모르게 하품을 흘리고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모두가 웃었다. 아이들은 자야 할 시간인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너희만 재우고 우리끼리 치사하게 놀진 않을 거거든.”
“정말인가요?”
“그럼. 다 자러 갈 거야.”
류보비는 이제 모두 자러 갈 것이란 말에 한결 마음이 놓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연회는 마무리되었다.
타티아나는 지금 돌아갈 사람은 차량으로 귀가시켜 주고 혹시 머물 사람이 있다면 자고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늘밤은 자고 내일 아침 떠나겠다고 답했다. 타티아나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여러분들께 드릴 방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부디 편히 묵어 주세요.”
그냥 간다고 해서 섭섭해하진 않았겠지만, 타티아나는 내심 기쁜 듯했다.
그렇게 방들이 나누어졌다.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류보비까지 세 명이 타티아나의 방에서 자기로 했고, 에르네스트와 사샤가 한 방, 리처드와 한승우가 각각 하나씩 방을 배정받았다.
에르네스트는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사샤와 함께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이전 자선 연주회 축하연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었지만, 정말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좋은 방이었다.
이 저택 자체가 지닌 웅장함과 품위는 방 안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침대만 보더라도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저 이불에 파묻히면 10초도 안 되어 잠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잘 수는 없었다. 에르네스트를 안내해 준 고용인은 복도 끝에 있는 욕실에서 씻은 다음 옷장에 있는 가운이나 파자마를 입고 자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고,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씻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사샤가 말했다.
“형. 목말라.”
방 안을 찾아보았으나 냉장고는 보이지 않았다. 호텔이 아니었기에 어메니티가 없는 건 당연했다.
필요하다면 쓸 수 있는 내선 전화가 있긴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내선 전화로 고용인을 불러 물을 가져다 달라 할 정도로 강심장은 아니었다. 그는 직접 식당에 내려가 물을 받아 오기로 했다.
그렇게 복도를 잠깐 걷는데, 뒤편에서 누군가 따라오며 불렀다.
“에르네스트.”
낯익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키득거리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살짝 어둑한 조명 아래의 아나스타샤는 평소와는 또 다른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몇 걸음 걸어오더니 생긋 웃으며 물었다.
“오늘 재미있었니?”
“사샤가 좋아하니까 뭐.”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곧이곧대로 대답하기 싫어서 슬쩍 사샤의 핑계를 댔다. 어디까지나 보호자의 입장으로 있었다는 표현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대충 넘어가 주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런 말 말고. 아까 마피아 게임 할 때 보니까 꽤나 즐기고 있던걸?”
“…….”
에르네스트는 할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손가락을 휘휘 흔들었다.
“즐거워하긴 하는데 입 다물고 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야.”
“오늘은 미안했어. 다음엔 살살 해 줄게?”
오늘 뭐가 미안한지, 다음엔 뭘 살살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에르네스트를 발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뭐든 덤벼.”
“아하하하, 뭐야, 자존심?”
“네가 먼저 살살 하느니 뭐니 하면서 긁었잖아.”
“흐응…….”
콧소리를 내며 살짝 눈을 치켜뜨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순간 자기가 너무 유치하지 않았나 생각했지만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아나스타샤와 이 정도 수위의 투닥거림은 흔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에르네스트를 올려다보더니 아늑하게 웃으며 말했다.
“넌 승부라면 뭐든 피하지 않는구나. 에르네스트.”
“이제 알았다면 많이 늦었는데.”
“난 네가 그래서 좋더라.”
“……?”
에르네스트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얘 이전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았나? 장소도 상황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아나스타샤는 요즘 들어 종종 자신을 평가하는 듯한 말을 하곤 했다. 괜찮다고 그랬다가, 별로라고 그랬다가. 무슨 기준과 목적인진 모르겠지만 분명 이전엔 없었던 일이었다.
“뭔데? 갑자기.”
무슨 의도인지를 몰라 되묻자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어쨌든 너 때문에 나도 멋대로 못 하겠고……. 조금 그렇네. 짜증 나.”
“이랬다 저랬다 이미 충분히 네 마음대로 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짜증이 왜 나?”
“그냥.”
정말 아무 이유 없거나, 아니면 너무 이유가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 말 있으면 시원하게 해, 아나스타샤. 들어 줄 테니까.”
“……응?”
“들어 주겠다고.”
오랜 친구에게 고민이 있다면 들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가끔은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에르네스트는 친구로서 거기에 충실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아나스타샤가 어떤 불만을 쏟아 내더라도 수긍해 주겠다고 작정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따뜻함과 차가움이 혼재되어 있는 듯한, 그러면서도 결코 미지근하지 않은 극단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음울한 냉소가 싸늘하다.
에르네스트가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 물어보려는 순간, 어두운 미소가 살짝 휘어지더니 부드럽게 변했다. 아나스타샤가 조용히 물었다.
“있잖아, 에르네스트.”
“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최선을 다해 겨뤄 줄 거지?”
뭘 묻나 했더니,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뻔한 질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즉답했다.
“네가 어디 내가 대충 해서 될 사람이야?”
“그래서?”
“내 평생소원이 널 시원하게 울려 보는 거라면 믿겠냐?”
“아하하하하!”
난데없이 아나스타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치기까지 했다.
어두운 감정들은 순식간에 희열로 변했다. 아나스타샤는 그야말로 환희에 차서 에르네스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키가 큰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와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도전적으로 치켜뜬 눈이 매섭다.
아나스타샤가 열성적으로 물었다.
“정말? 정말이지?”
“너 왜 이래 오늘.”
“아니 그냥.”
화를 내도 모자를 말에 웃다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에르네스트가 묻자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나스타샤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지 활짝 웃었다.
“어쨌든…… 약속한 거니까 잊지 마.”
무슨 약속인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굳이 다시 물어 확인하지 않았다. 다시 본연의 미소를 되찾은 아나스타샤를 짜증 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이야기가 대충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고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넌 여기서 그런데 뭐 해?”
“나? 코코아랑 과자 좀 받아 가려고.”
“잔다며?”
“이야기 조금 하다가.”
“류보비는?”
“살짝 잠 깼어. 여자들은 밤에도 할 말이 많단다?”
“그거야 그렇겠지.”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밤중에 모여 봐야 게임이나 하고 있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수다로만 밤을 샐 수도 있다고 들었다. 자기 전에 할 말은 무궁무진하게 많을 것이다.
그렇게 대충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는데,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일변했다.
원래 이렇게 변덕스러운 애였나 싶을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좋아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은 것처럼 무표정하게 에르네스트를 바라본다.
이전엔 꽤나 알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면 아나스타샤만큼이나 알기 어려운 사람도 없었다.
잠시 그렇게 말이 없던 아나스타샤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에르네스트. 타티아나는 지금 씻고 있어.”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의도를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는 계속해서 말했다.
“침대가 하나뿐이라서 같이 잘 거고.”
“여자애들은 좋겠네.”
타티아나의 침대가 얼마나 클진 모르겠지만 충분히 크다면 여자애 세 명이 같이 자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을 싫어하는 사샤를 떠올리며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순수한 감상을 표했다.
정말 다른 뜻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나스타샤는 조금 더 짜증이 났는지 시니컬하게 말했다.
“다다음주 쯤엔 타티아나랑 여행도 갈 거야. 유럽으로.”
“유럽?”
“응. 둘이서. 아무도 안 끼고.”
“어디 갈 건데.”
“어……. 글쎄. 프랑스 어떨까? 저번에 가 봤는데 정말 괜찮더라고. 타티아나랑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조금 자랑하듯 말했다. 유럽으로 여행을 간다는 건 자랑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잘 갔다 와.”
“……그것뿐이야?”
“그럼 뭐? 난 모스크바나 지키고 있을 테니까 갔다 오라고.”
“…….”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아나스타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에르네스트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배알이 꼴려 못 견디겠다는 듯 비아냥거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친한 여자애들이 여행을 가겠다는 것에 무어라 말을 얹을 정도로 에르네스트는 눈치 없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결국 자책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뭔데 또, 너 화났냐?”
“아니? 전혀.”
에르네스트의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완전히 가장된 미소를 띠었다.
“너무 기쁜걸?”
말과 달리 목소리는 하나도 기쁘게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