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82화 (282/1,277)

##  282화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

눈만 돌려 창밖을 보니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평상시 내 기상 시간으로 보자면 늦잠에 속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춥지도 않았고, 꿈도 꾸지 않고 정말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요 며칠간 이렇게 조금 더 깊고 길게 잘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아나스타샤 덕분이었다.

“…….”

오른편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내 팔을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각자 베개에 머리를 뉘이고 잠들었는데, 잠결인지 아나스타샤는 양팔로 내 오른팔을 껴안고, 다리는 웅크린 채 새근거리고 있었다.

왼편을 보니 류보비는 얌전하게 잘 자고 있다. 어린 류보비도 저렇게 자는데, 우리 셋 중 가장 큰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매달리듯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새삼 그녀도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살며시 팔을 빼 보려다가 혹여나 그녀가 깰까 싶어 그만두었다. 아나스타샤는 잠이 많다. 이른 아침에 내게 맞춰서 깨우고 싶진 않았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누운 채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자니 전날 있었던 일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승마장도 사격장도 수영장도 즐거웠었다. 내가 즐긴 것은 류보비와 똑같이 수영장뿐이긴 했지만, 모든 건 내 기억 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밤에 했었던 마피아 게임도 생각난다.

처음에 아나스타샤 외에 믿을 사람을 찾고 싶어서 에르네스트를 조사해 봤다가 바로 마피아를 찾아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었다. 그렇게 당황해하는 에르네스트의 얼굴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대로 밤을 새 버릴 수도 있었지만 어린 아이들이 있어서 그렇게 할 순 없었고, 밤 12시 즈음엔 방으로 들어왔다.

아나스타샤가 코코아와 쿠키 등을 식당에서 받아와 주었다. 나와 아나스타샤, 류보비 세 사람은 침대에 앉아 찰싹 달라붙은 채 코코아를 마시고 쿠키를 먹으며 태블릿PC로 이런저런 재미난 것들을 검색해서 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잠들기 직전 흔한 파자마 파티의 분위기였으나, 그때 난 아나스타샤가 약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 집에 손님으로 있었던 내내 한 번도 기분이 상했던 적은 없었고, 먼저 다른 친구들을 초대하자고도 하고 어울려 놀면서 즐거워했었던 그녀였기에 언제 기분이 안 좋아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난 왜 기분이 나빠졌냐고 굳이 묻지 않고 아나스타샤의 손을 꼭 잡아 주기만 했다. 내가 종종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우울해졌을 때도 그녀는 이유를 묻기보단 위안이 되어 주려 하곤 했었다. 나도 똑같이 해 줄 수 있었다.

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나아진 아나스타샤와 함께 침대에 누웠고, 눈을 떠 보니 그녀는 내 손만이 아니라 팔을 통째로 가지고 가서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

꼼짝도 할 수 없이 팔이 묶여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상당히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억지로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면 바로 뿌리쳐 버렸을 것이다. 그냥 뿌리치는 정도가 아니라 원한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대가 아나스타샤이다 보니 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돌리고, 내 팔을 껴안은 아나스타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날이 조금 더 밝아지고 방 구석구석까지 햇빛이 비쳐 올 때까지, 난 꼼짝도 하지 않고 아나스타샤에게 팔을 내어 주며 기다렸다.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그녀가 일어나면.

“안녕히 주무셨나요? 아나스타샤.”

누구보다 먼저, 따뜻하게 인사를 해 주기 위해서.

햇빛이 눈부셨는지 막 눈을 뜬 아나스타샤는 신음 소리를 흘리며 내 팔에 얼굴을 파묻고 마구 비비더니, 내 목소리를 듣고는 퍼뜩 고개를 세웠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귀엽다.

“……?”

“일어나셨어요?”

“아…….”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한숨을 토해 내더니 내 팔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갑자기 팔에 찬바람이 부는 기분이 든다.

아무튼, 자유로워졌으니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옆머리를 손으로 몇 번 쓸어내리더니 내게 인사했다.

“조, 좋은 아침이야.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에요. 아나스타샤.”

“설마 일찍 일어나서도……. 가만히 있었어?”

아무래도 그 점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난 작게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거짓말했다.

“아뇨, 저도 방금 일어났어요.”

“그래? 그래도 먼저 일어났으면 깨우지 그랬어. 불편하잖아.”

“괜찮아요.”

아나스타샤를 깨우는 것보단 내가 조금 불편한 쪽이 나았다. 그리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오늘 밤 내가 편하게 잘 수 있었던 것은 아나스타샤와 류보비가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어느 때보다 편했다고 할 수 있었다.

난 침대에 앉은 채 옆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조금 더 주무실 것이 아니라면 잠시 나갈까요? 류보비가 깰지도 모르니까요.”

“응. 그러자.”

조금 더 침대에서 뒹굴어도 되겠지만, 곤히 잠든 류보비가 조금 더 잘 수 있도록 우리는 방 밖으로 나왔다.

“어제 늦게 잔 것도 아닌데 오늘은 더 잤네.”

“그러네요.”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봐. 살찌면 어쩌지.”

“그걸 이제 걱정하시면 어떻게 하나요?”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되어 버렸나……?”

“아하하.”

요 며칠 동안의 약속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욕실로 향했다. 우선 간단하게 씻고 다시 옷을 갈아입고 아침 산책을 나가는 것까지, 아나스타샤와 나의 아침 일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아침이면 드미트리를 도와 식사를 만들기도 했다. 그건 아나스타샤가 오고 나선 그녀도 함께 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손님이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녀는 꼭 같이 하고 싶다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아나스타샤가 불쑥 물었다.

“타티아나.”

“예.”

“너 오늘도 아침 식사 만들려고 해?”

오늘은 약간 고민되기도 했다. 식당에 앉을 사람에 우리 가족과 아나스타샤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예. 모두들 저보단 드미트리가 해 주는 것을 원하시겠지만……. 그래도 가볍게 차릴 수 있는 아침 식사 정도는 제가 마지막으로 해 드리고 싶어지네요.”

“그래……?”

아나스타샤는 묘하게 말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답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면서 확인해 본 투였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도와줄게.”

“정말요?”

“응. 어차피 잘하지는 못하지만.”

“잘하지 못하시는 게 아니라 하실 기회가 없으셨던 것 아닐까요? 요 며칠간 하시는 것을 봤는데, 충분히 잘하실 수 있어요. 아나스타샤는 뭐든 잘하니까 요리도 배우신다면 금방 잘하실 수 있게 될 거예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아나스타샤는 요리에만 유독 약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드미트리가 잠깐 가르쳐 줬을 뿐인데도 칼을 잘 쓰는 것은 물론이고 요리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심지어 데커레이션에 대한 재능까지 보여 주었다. 기본적인 센스가 타고났다는 것은 다시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정말 단순히 해 볼 기회가 별로 없었을 뿐이었다.

“……글쎄.”

하지만 내 확신어린 말에도 아나스타샤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더니 날 돌아보고는 킥킥 웃었다.

“집에 가서 혼자 요리를 배워 볼 마음은 안 생길 것 같네.”

“어쩔 수 없죠.”

재능이 있다 한들 의욕이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아나스타샤는 식도락에도 취미가 있었지만 그것을 만드는 것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난 가볍게 대답했다. 아나스타샤가 만들 생각이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 먹여 주면 될 일이니 간단했다.

***

흑빵을 굽고 카샤를 만들고 계란을 프라이하고 블리니와 소시지를 구워 내니 아침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드미트리와 아나스타샤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척척 만들어지는 요리들을 보고 있자면 절로 뿌듯해진다.

“…….”

난 옆에서 알아서 접시를 꺼내서 다시 정성스레 닦아 세팅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써도 될 말인진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정말 유능해서,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것처럼 움직여 주었다.

도마를 쓰고 잠시 다른 재료를 가지고 오면 도마가 세척되어 있고, 소시지에 칼집을 내려고 들어 보면 이미 칼집이 나 있곤 했다. 덕분에 난 정말 빠르고 완벽하게 요리를 할 수 있었다. 사람은 한 명에서 두 명이 되었을 뿐인데 속도는 혼자 하는 것의 거의 세 배는 빨랐다.

며칠간 아나스타샤를 지켜본 드미트리도 그녀의 유능함엔 거의 혀를 내두르다시피 했다. 아나스타샤가 칭찬받는 것을 보며 난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 식사를 만들고, 막 일어나서 씻은 친구들을 식당으로 불러 모았다.

러시아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식사들로 테이블을 채우고 아나스타샤와 함께 만든 것이니 드미트리가 한 것보단 맛이 덜할 수도 있다고 양해를 구했더니 모두들 대체 왜 양해 같은 것을 구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그게 양해를 구할 일이야?”

“우유에 시리얼만 말아 줬어도 감지덕지일 텐데, 이건 성찬이잖아.”

“…….”

듣고 보니 그것도 그랬다. 난 이 애들에게 직접 무언가 먹이고 싶었을 뿐이지만 받는 입장에선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리처드는 테이블을 보더니 정말 의외라는 듯 나와 아나스타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말 너희가 만든 거야?”

“예.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만 했는데 미안한 걸…….”

리처드가 약간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듯했다. 아직 먹어 보지도 않았는데 기뻐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모두 자리에 앉았고, 식전 기도를 올린 뒤 스푼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난 한 스푼 떠낸 카샤를 입에 가져가지 않고 약간 미적거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하고 싶은 대로 요리를 했고 내놓았지만, 테이블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 역시 내가 할 일이었다. 무대에서 연주를 마치자마자 하고 싶은 대로 연주를 마쳤으니 청중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내려가 버리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듯. 내게 있어선 모두를 살피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나스타샤에겐 몇 번이나 요리를 해 준 적이 있었고, 에르네스트에게도 저번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 번,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컵라면을 만들어 준 적이 있긴 했지만, 나머지 친구들에겐 처음이었다. 약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스푼을 움찔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데, 사샤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맛있어요! 타티아나 누나. 혹시 셰프 자격증도 있나요?”

“아하하, 아뇨.”

“대단해요.”

착한 사샤가 예의상 해 준 말인진 몰라도 마음이 놓였다. 그제야 나도 편하게 카샤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는 작게 웃더니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 2월만 하더라도 막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정도라 하지 않았어?”

“맞아요. 그쯤이었어요.”

“5개월도 안 되어서 이렇게 잘 하게 될 수가 있나……?”

“스승님이 훌륭하시니까요.”

“아……. 드미트리 셰프가 대단한 사람이긴 했지.”

어제 드미트리의 엄청난 실력을 맛본 친구들은 내가 그에게 배우고 있다고 하자 단번에 납득했다.

그렇게 작은 웃음과 이야기들이 오가는 따뜻한 분위기에서 아침 식사가 이루어졌다.

난 식사를 하면서도 테이블을 보며 이런저런 신경을 썼다. 넓게 테이블을 지켜보니 에르네스트가 앉아 있는 쪽에 치즈가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빈 접시를 하나 들고 우리 쪽에 잔뜩 있는 치즈를 쌓아 올렸더니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타티아나. 치즈 좋아하던가?”

“아뇨. 저쪽에 드리려 해요. 제가 이걸 모두 먹으려는 줄 아셨나요?”

“어? 아니 그건 아니고.”

아나스타샤는 약간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난 치즈가 담긴 접시를 에르네스트 쪽으로 건네주었다.

“여기요, 에르네스트.”

“……? 뭐야.”

“멀리 있어서 손이 잘 안 닿으시잖아요.”

“괜찮은데.”

“에르네스트는 괜찮아도 사샤는 안 괜찮을 수도 있으니까요.”

“……고마워.”

고맙다고 말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가벼운 아침 식사는 금방 끝났다. 기름지거나 부담되는 음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테이블이 정리되었고 곧 디저트와 차가 올라왔다.

난 재스민 차를 홀짝이며 리처드에게 물었다.

“리처드는 내일이면 영국으로 돌아가시죠?”

“응. 얼굴 비추고 와야지.”

“집에 가시는 거잖아요.”

“갔다 올 거니까.”

보통 유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해 집에 간다고 하면 정말 기뻐하고도 남을 텐데, 리처드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금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그냥 모스크바에 있어도 상관없는데, 겨울엔 안 갔더니 난리가 나서…….”

리처드는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집은 특이하지 않은 듯 했다.

난 겨울에 리처드가 한승우와 함께 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러시아 학기의 겨울방학은 1달도 안 되는 기간으로 무척이나 짧기 때문에 아예 자국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던 것 같다. 리처드는 영어, 한승우는 한국어를 각각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가서 수업을 들어 볼 걸 그랬다. 아쉬웠다.

그렇게 내일이면 영국으로 갈 리처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차피 갔다가 다시 와서 다음 학기면 만날 친구이긴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많았다.

리처드는 홍차로 입을 축이더니 말했다.

“아무튼, 마지막까지 굉장한 선물을 받았네. 타티아나. 답례로 뭘 가져와야 할지 모르겠어.”

“답례라니요.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리처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답례하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더 사양하는 것도 실례라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옆의 또 한 명의 유학생. 영국으로 돌아가는 리처드처럼 한국으로 돌아갈 한승우가 내게 말했다.

“나도 답례를 준비할게.”

“정말…….”

난 어쩔 수 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