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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83화 (283/1,277)

##  283화

짧은 일정이긴 했지만 우리 집에 놀러 와 준 친구들도 집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언제까지고 같이 놀면 좋겠지만, 파티는 끝이 있어야 다음에 더 즐거워지는 법이었다.

예고르를 찾아가서 차량으로 친구들을 각각 집에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모두들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고 사양했지만 난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에르네스트와 사샤, 류보비를 각각 자택으로, 한승우와 리처드는 기숙사로 데려다주는 것으로 다른 아이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아나스타샤가 남았다.

“…….”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외출하면서 집 안의 차량과 경호원들도 많이 빠져나가서 내 부탁으로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차량은 세 대까지였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잠시 남아서 차량이 돌아오면 떠나기로 했다.

티 가든으로 나와서 잠시 그녀와 앉아서 바깥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냈다. 7월의 모스크바에 부는 바람은 선선해서 얇은 옷에 볼레로만 걸치고 있는 것으로도 상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캐모마일차로 입술을 축이며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편히 앉은 채로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살짝 불러보았다.

“아나스타샤.”

“응?”

“바로 가실 건가요.”

이렇게 물어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입이 제멋대로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들여다보던 스마트폰을 무릎 위로 내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햇빛 아래에서 싱그럽게 빛나는 눈동자가 잠시 의문을 품더니 곧 미소로 이어졌다.

“왜, 조금 더 있을까?”

“…….”

장난에는 장난으로, 그냥 죽 여기서 살아 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게 가장 간단한 인사치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장난으로 오가는 말들은 너무 가볍게 휘발되어 버린다. 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침묵하자 아나스타샤도 말이 없다.

잠자코 이쪽을 보는 아나스타샤를 보다가, 불현듯, 내 얼굴을 지금 볼 순 없지만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동시에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아나스타샤는 히죽 웃으며 테이블 위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살짝 흔들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말했다.

“네 친구로서 조금 더 있어 주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돌아갈래.”

“왜요?”

“그래야 일주일 뒤가 더 기대되지 않겠어?”

친구로서 해야 할 일이 함께 있어 주는 일이라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될 텐데,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돌아가 있겠다고 말했다.

난 그 말을 이해했다. 다른 친구들이 돌아갔듯, 다음 학기에 볼 친구들을 기다리면서 기대하고, 걱정하고, 보고 싶어 하듯, 지금은 아나스타샤를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았다.

이제 괜찮아졌다. 난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약속을 기다리는 시간은 귀중한 향신료가 되겠죠.”

“응.”

“그럼…… 보내 드릴게요.”

“너 정말로 나 잡아 둘 생각이었구나?”

“……약간은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단 며칠간만이라도 아나스타샤를 조금 더 데리고 있고 싶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면 빠르게 포기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한 내 갈등을 알아본 아나스타샤는 어쩐지 기분 좋게 웃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내 옆에 다가와 살짝 포옹했다.

“고마워.”

난 그녀와 마주 포옹하며, 친구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떠났던 차량들이 차 한 잔만 더 마실 시간만큼 조금만 늦게 돌아오길 바랐다.

***

갑자기 적적해졌다.

여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북적거렸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마지막으로 아나스타샤까지 떠난 뒤로 집 안은 조용해졌다.

정말 나 혼자인 것도 아니었고 수십 명의 고용인분들이 계셨으니 집이 조용하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내 마음 속이 고요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

잠깐 저택 주변을 서성이면서 친구들과 함께 갔었던 곳들을 멀찌감치 스쳐 지나가다가, 마지막으로 별관으로 돌아왔다.

이 별관에서 내가 쓰는 방은 한 칸뿐이었다.

“…….”

연습실에 들어오자 고요했던 마음속에 갑자기 수십 가지 선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서도 괜찮을 수 있는 것은 이 음악들이 언제나 함께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이유를 다시금 깨달았다.

우물을 앞에 두고 목이 마른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피아노로 향했다. 급한 손으로 건반 덮개를 열고, 바로 손을 뻗어 건반을 짚었다. 피아노라는 우물에 설치된 펌프는 건반이라는 지렛대로 움직일 수 있었고, 건반을 누르자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난 정신없이 건반을 움직여서 소리를 받아 마셨다. 목이 마르지 않을 때까지. 하지만 어설픈 움직임으로는 언제까지고 이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집중해서 안간힘을 쓴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고, 음반을 녹음하는 것으로, 조금 더 잘할 수 있게 된 나는 보다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들을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숙련도와 감각의 예리함이 한층 나아지면서 내가 가진 펌프는 조금 더 우물의 깊은 곳까지 닿았다.

하지만 아직, 아직 바닥에 닿진 않았다.

나는 분명하게 안다. 내가 가진 건 무한정 깊은 우물이 아니니 분명 바닥이 존재하지만, 아직까진 조금 더 깊은 곳에서 퍼 올릴 수도 있다. 보다 차갑고 심원한 무언가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점에 조금 더 갈증을 느끼면서, 동시에 안도를 느끼기도 한다.

바닥을 맛보고 싶지만 늦게 마주하고 싶기도 한, 굉장히 이중적이고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건반을 누른다.

홀로 연습실에서 기술을 숙련하고, 깨달은 것들을 이해하고, 다시 기술과 합쳐 체화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다음 연주에서 부족함이 드러난다. 다시, 또다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충분한 시간을 거쳐 내 기량을 갈고 닦으며 조금 더 정갈하게 가다듬었다. 보다 깔끔하고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

딱히 며칠 동안 연습해야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완전한 무계획으로 오로지 음악성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만 놓고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씨름을 하다가, 빅토르의 전화를 받았고 날짜를 확인했을 때, 비로소 나는 혼자 연습을 한 지 닷새나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

매일 날짜를 확인하긴 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며칠이 흘렀다는 것을 계산해 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현실감이 들자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그사이 방으로 돌아가 잠도 자고, 식사도 열심히 하고, 벨카와 산책도 하고, 혼자 수영장에 가 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고, 루슬란 오빠와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고, 드미트리에게 요리도 배우고,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음반 제작 현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표면에 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누군가 내게 지난 닷새간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난 연습실에서 연습을 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와서 하룻밤 자고 돌아간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닷새가 지났다니 뭔가 시간 감각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시간감각이 뒤틀림을 느낀 것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이상하진 않지만, 연습을 많이 해서 보람차고 뿌듯하긴커녕 약간 시무룩해졌다.

친구들이 없으면 난 혼자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이렇게 며칠이건 피아노로만 보내는 사람인 것이다.

멍하니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 타티아나 아가씨.

“예, 빅토르.”

서로를 확인하자마자 빅토르가 난데없이 물었다.

- 연습실이십니까?

“……감시카메라라도 달아 뒀나요?”

- 푸하하,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는 감시카메라 같은 건 필요 없이 이미 눈에 다 보인다는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난 살짝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연습실이에요. 전 재미없는 애니까요.”

-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만.

빅토르가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나 역시 약간 당황했다. 빅토르의 장난에 장난으로 답한 말이었는데 살짝 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저도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 음,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랜만의 빅토르와의 통화였는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난 스스로의 바보 같음에 한탄했다. 대체 뭐 하는 건지.

빅토르도 첫마디부터 내게 장난을 쳤던 것이 미안한지 헛기침을 했다.

- 크흠, 어쨌든 저번에 보고 전화 드린 이후로 며칠 만에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늘 격무에 시달리다가 기껏 오랜만에 휴가를 갔는데 고용주인 내가 계속 전화를 걸고 귀찮게 굴면 신경 쓰여서 제대로 휴가를 즐기지 못할까 봐 내 쪽에서 전화를 하는 것은 최대한 자중했다.

그래도 빅토르는 일부러 보고전화라면서 내게 전화를 걸어 오곤 했다. 전화로나마 그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는 것은 상당히 반가운 일이라서 고마웠다.

난 피아노 의자에 옆으로 앉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빅토르. 휴가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 그렇고말고요. 자하르와 같이 홍콩에 와 있습니다.

“홍콩이요?”

얼마 전에 통화했을 땐 모스크바라고 들었는데, 그사이에 정말 해외로 훌쩍 날아간 모양이다. 그런데 홍콩이라니, 약간 의외였다.

빅토르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 예. 전부터 한 번 와 보고 싶었던 곳인데 괜찮군요. 북적북적하니. 영화 세트장도 구경하고 케이블카도 타고 마카오에서……. 음, 그랬습니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아, 그런데 음식은 약간 조심하셔야 합니다. 전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인데도 부담스러운 것들이 많더군요.

그러면서 빅토르는 홍콩에서 있었던 이러저러한 일들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관광지로 홍콩이 그렇게 유명한진 잘 모르지만 빅토르는 꽤 감명 깊게 관광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난 흥미롭게 빅토르의 말을 경청했다. 빅토르가 자하르와 함께 홍콩에서 있었던 일들을 흥겹게 설명해 주는 것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간간이 맞장구도 쳐 주고 처음 듣는 것에 대해선 질문을 하기도 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해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빅토르가 갑자기 멈칫하며 말을 멈추더니 죄악감이 짙게 서린 어투로 말했다.

- ……아가씨는 집에 두고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하하하, 지금 와서요?”

- 지금 와서 말입니다. 허 참…….

빅토르는 날 두고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 마음 편치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쩔 수 없이 조금은 기쁘다.

빅토르가 물었다.

- 제가 돌아가면 어디 가실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나스타샤가 함께 해외로 가자고 했어요.”

- 계획이 있으시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 아마 유럽 쪽으로 가게 될 것 같아요.”

빅토르가 돌아와서 다시 내 경호 업무로 복귀하게 되면 함께 놀자고 말해 준 아나스타샤는 국내가 아니라 조금 더 밖으로 가서 많은 것들을 보자고 권했다. 난 거기에 적극 응했다.

빅토르 역시 적극 찬성했다.

- 어디라도 좋지요. 어디든 좋으니 마음껏 다니십시오.

“빅토르가 옆에 계시면 어디든 갈 수 있겠죠?”

- 물론입니다.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를 나누고는 빅토르와 전화를 끊었다.

“…….”

다시 조용해진 연습실에서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빅토르가 돌아오면 여행을 갈 예정이다. 아나스타샤와 한 약속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혹은 클래식 음악 강국인 독일과 그 근처 나라들. 어느 하나를 고를 필요는 없었다. 그냥 그 모두를 다 돌아봐도 상관없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하는 여행은 어느 나라를 며칠을 가건 즐거울 것이 분명했다. 유럽은 우리 두 명이 여행하기에 충분히 넓다.

하지만 난 기대하면서도 경계해야 함을 느낀다. 며칠 전에도 난 그녀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분명히 그녀와 같이 있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난 지난 닷새간 그녀와 함께 즐겁게 보냈을 것이다. 연습도 했겠지만, 피아노에 온전히 모든 집중을 다하는 나날은 아닐 것임이 분명하다.

내 절제력은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을 땐 상당히 무르게 된다. 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탓은 아니다. 내 균형의 문제다.

안다면, 아는 만큼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워야 할지도 모른다.

피아노 연습은 여행에 비해 고루하고 재미없어 보이고, 어쩌면 사실 방학은 여행에 투자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피아노를 연습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고,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아직 많이 부족했다. 더 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이 열다섯 살 여름방학의 시간을 잘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결코 방학 내내 여행만 다니자고 한 적이 없었고, 적당히 여행을 즐긴 후엔 모스크바로 돌아와 자기 개발에 힘쓸 것이다. 그녀는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날 망가뜨리지 않는다.

하지만 날 못 믿겠다. 그녀가 아니라, 나를.

며칠 뒤면 자유로워질 내게 의무를 가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가만 생각하던 나는 미하일 선생님과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방학 동안 콩쿠르 같은 것에 나갈 수도 있겠지만 난 이제 청소년 콩쿠르는 안 나가기로 했다.

그런 내겐 연주자로서 두 가지 정도 선택이 남아 있었다. 홀로 연습을 해서 피아노 실력을 더더욱 끌어올리거나, 아니면 연주회를 하는 것이었다.

연주회라는 것이 아무 때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내겐 아주 좋은 것이 하나 예비로 있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곧장 스마트폰을 들어서 전화를 걸었다. 잠시 기다리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 잘 지내고 계신지? 학교는 방학이겠군요.

“일주일쯤 되었어요. 늦게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 늦다뇨. 아주 적절합니다.

상대방은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확인하겠다는 듯 물어 온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건으로 연락 주신 것 맞습니까?

“예. 그래요.”

내가 전화를 건, 이름도 모르는 상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가 속한 에이전시의 에이전트였다.

학교의 일과 아직 협연에 대한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금 미뤄 두고 있었는데, 자선 연주회에서 성공적으로 연주회를 하기도 했고, 음반 작업도 끝난 지금 이 협연을 더 늦출 이유가 없었다.

“바로 할 순 없겠지만 미팅 자리라도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 물론입니다. 연주회 준비를 하는 데엔 시간이 많이 들죠. 지금 시작하신다 해도 방학 안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되도록 빠르게 미팅을 했으면 좋겠어요.”

- 흠…….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저도 스케줄을 확인을 해야 해서.

“예.”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오케스트라와 미팅 자리는 바로 다음 주 혹은 적당히 기간을 두고 잡을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잠시 기다리자 에이전트가 말했다.

- 약간 곤란하군요.

“무슨 일인가요?”

- 오케스트라가 지금 프랑스에 가 있습니다. 지금 프랑스 현지 협연자와 연습 및 리허설 중일 텐데, 거기에서 연주회를 하고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열흘 정도 걸릴 것 같군요.

“프랑스라고 하셨나요?”

- 예. 프랑스 파리입니다."

빠르게 머릿속의 스케줄이 짜 맞춰졌다.

앞으로 일주일도 안 되어 빅토르가 돌아온다. 열흘이라면 난 프랑스에 가 있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여행을 즐기다가 프랑스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미팅을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여행지가 프랑스로 정해질 이유가 하나 늘었다.

계산을 마친 내가 말했다.

“제가 프랑스에 가서 오케스트라 분들을 만나 뵈어도 될까요?”

- 예?

에이전트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답했다.

- 그렇게 급하게 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일주일 정도 후에 마침 프랑스에 갈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요.”

- ……그렇습니까?

확정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말이었고, 에이전트 역시 내 말이 조금 애매모호하다고 느꼈는지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말했다.

“제가 확실해지면 다시 전화를 드릴게요. 그때 미팅을 잡아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 알겠습니다.

그제야 에이전트가 조금 편하게 대답했다.

“…….”

전화를 끊고 난 잠시 생각했다.

내 일이기 때문에 내 멋대로 진행시키고 있지만 아나스타샤에게 분명히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약속했던 그녀와의 여행에 내 일정을 끼워 넣는 것은 그녀 입장에선 불쾌하게 여겨질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명백한 비웃음이 흐른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나스타샤가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 여행이나 다니고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다. 방학이란 그런 것 아닌가. 대체 나는 왜 일부러 의무를 당겨와 입안에 집어넣는 사람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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