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하는 데에 1시간 정도 걸렸고, 안내를 받아 전용기 터미널로 들어갔다.
북적거리는 일반 터미널에 비해 한산하기 짝이 없는 전용기 터미널에서 출국 심사를 받는 데에는 딱 5분 정도 걸렸다.
심사랄 것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해야 할 수하물을 옮기거나 여권 등을 확인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들의 경호원이자 수행원인 빅토르가 대신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출입국 관리관들은 계속 빅토르와 대화를 했다.
우리는 차에 실려 있던 짐들이 어디로 갔는지, 검색대는 어디에서 통과해야 하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냥 복도를 따라 승강장으로 향하면 그만이었다.
저번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돌아올 때 해 봤기 때문에 자연스레 행동할 수 있었다.
전용기에 오른 우리는 좌석에 앉았다. 안내 방송에 따라 이륙 전 안전벨트를 매고, 아나스타샤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여행지인 프랑스에 관한 것과 여행 전 우리가 준비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여권 이야기가 나왔다.
해외에 나갈 때 필수적으로 챙겨야 할 것은 많지만 여권은 그중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였다. 외국에서 나라는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국제 신분증은 여권뿐이다.
하지만 난 여권을 만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에 가겠다고 결정지었을 때 루슬란 오빠에게 여권 문제에 대해 상담부터 했다.
여권이 신청한다고 바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데 시간은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에서 물어보는 게 정말 바보같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물어볼 만한 사람은 루슬란 오빠나 아버지밖에 없었으므로.
스스로의 안일함에 부끄러워하며 오빠에게 물어본 순간, 루슬란 오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빨간색의 작은 수첩을 건네주었다. 받아 보니 내 여권이었다.
생각도 못한 깜짝 선물에 놀라워하자 오빠는 내가 여름방학에 해외에 나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대신 절차를 밟아 두었다면서 웃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아나스타샤는 거의 감동한 듯했다.
“세상에 뭐 그런 오빠가 다 있다니? 우리 집에 있는 사람한테도 좀 보고 배우라고 하고 싶다.”
“일리야도 친절하신걸요.”
“속으면 안 돼,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곧 이륙한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고 비행기는 잠시 활주로를 달리다가 순식간에 이륙했다.
이륙 후에는 안전벨트를 풀고 뒤편에 있는 작은 룸으로 향했다.
꽤 많은 사람이 파티를 즐겨도 괜찮을 정도로 잘 꾸며진 이곳에서 예전에 에르네스트와 그의 가족들도 함께 작은 파티를 즐겼던 적도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미리 소파에 가 앉아 있는 아나스타샤의 부름에 따라 그 옆으로 갔다. 잠시 있자니 스튜어디스가 와서 서빙을 해 주었다. 우리는 디저트 종류와 음료만을 조금 부탁했다.
비행기 안에서 차렸다기엔 굉장히 호화로운 티 테이블이 차려졌다.
“필요하면 호출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가 룸에서 나갔고 나와 아나스타샤는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파리까지는 4시간. 그동안 내내 이야기만 하고 있기도 지치는 일이라 우리는 웹서핑을 하거나 객실 내 모니터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프랑스에 도착해서 잔뜩 돌아다니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이유로 잠을 청하기도 했다.
큰 담요 한 장을 가져와선 아나스타샤와 같이 덮고 서로 어깨를 기댔다. 따뜻한 온기가 오갔다. 아나스타샤는 내 옆에 기대자마자 10초도 안 되어 하품을 하더니 까무룩 잠이 들었다.
“…….”
갑자기 적막해진 공간에서 나는 천천히 숨을 쉬며 아나스타샤를 살짝 돌아보았다.
난 그녀와 함께 여행을 간다는 것이 기뻐하면서도, 내가 남은 방학 전부를 유럽 여행에 써 버릴지도 몰라서, 일부러 현지에 일을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 멍청한 짓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런 사람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 알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존중과 믿음, 공정함과 자신감 등을 느낀다.
“…….”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두 개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린다. 내 것이기도 하고 아나스타샤의 것이기도 했다.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차분하게 마음을 내려놓자 엇나가 있던 파동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편안함과 따뜻함 속에서, 난 아나스타샤를 뒤따라 잠시 꿈나라로 떠나 보기로 했다.
***
4시간 뒤. 우리는 프랑스 파리의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출국했을 때 그랬듯 검역이나 세관, 출입국 사무소 직원들과 마주할 일은 없었다. 우리는 샤를드골 공항 전용기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비행기에서 내려선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리무진에 탑승했다.
출입국 관리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비행기 옆으로 다가왔고, 빅토르는 잠시 그들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고 주고받고 있었다.
“…….”
차에 타기 직전,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쭉 뻗은 활주로와 건물 몇 개만 보인다. 여기가 프랑스인가?
어차피 공항이라는 곳은 허허벌판처럼 되어 있는 곳이라서 이렇게 둘러봐도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별로 오지 않았다.
잠깐 그렇게 서 있다가 리무진에 탔다. 빅토르도 금방 수속이 끝났는지 차에 올랐다.
앞좌석에 탄 빅토르는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는 나와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장난스레 웃으며 팔을 펼쳤다.
“프랑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가씨들.”
“어……. 고마워요?”
“죄송합니다. 제가 환영한다고 하니 역시 조금 이상하군요. 마음 같아선 레드 카펫도 깔고 취주악단도 대기시켜 놓…….”
“절대 그러지 마세요!”
깜짝 놀라 소리를 치자 빅토르가 껄껄 웃었다. 내가 거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한 농담이라는 건 알지만 갑자기 살짝 심통이 났다.
“제가 정말 그렇게 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나요?”
“뭘 어떻게 합니까? 아가씨가 하라면 해야지.”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무조건 사과하자 이번엔 아나스타샤가 빵 터졌다. 그녀는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할 때마다 유난히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맨날 나만 손해다.
어쨌든, 프랑스 공항에 도착했으니 이제 행선지를 정해야 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레스토랑? 관광지? 백화점? 바라시는 곳으로 모시도록 하죠.”
일반적으로는 호텔부터 찾아서 확인하고 짐을 풀어놓겠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도착한 지금 이 순간부터 관광을 즐겨도 되는 것이다.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나스타샤?”
“살짝 돌아다녀 보고 그다음에 식사하러 갈래?”
“좋아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다닐지 기획해 놓았던 루트를 태블릿PC 위에 띄워서 빅토르에게 보여 주었다.
애초에 차량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딱히 세심하게 고려해서 행선지의 순서를 고를 필요는 별로 없었지만, 모든 관광지를 무슨 도장 찍는 기분으로 차량으로 가서 보고 다시 차량으로 이동하고 싶진 않았다.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나 튀일리 공원 같은 경우엔 도보로 걸으면서 구경하고 싶기도 했기 때문에 너무 힘들지 않게 대충이나마 동선을 만들어 두어야 했다.
우리가 지도에 그려 놓은 길들을 본 빅토르가 말했다.
“에펠탑이 가장 먼저로군요?”
“예. 꼭대기에 올라가서 파리의 정경을 내려다보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2월에 루슬란 오빠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도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높은 전망대에 올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체를 눈으로 보는 일이었다.
나는 전망대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비로소 어디에 와 있는지 현실감 있게 확인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슬란 오빠에게 배웠던 그 방법을 이번에도 쓰고 싶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1시간 30분가량 걸릴 예정입니다.”
“알겠어요.”
앞자리에 탄 소로킨이 현지 운전수에게 무어라 말했고, 리무진은 천천히 움직였다.
파리 도심으로 향하면서 나와 아나스타샤, 빅토르, 자하르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빅토르와 자하르는 아나스타샤가 있다는 이유로 약간 사무적으로 변해 있었다. 빅토르는 차에 올랐을 때도 농담을 하곤 했지만 소로킨과 자하르는 아예 뻣뻣했다. 시간이 잠깐 흐르자 빅토르도 그 분위기를 느꼈는지 조금 딱딱해졌다.
아나스타샤가 부담되어서가 아니라, 고용주인 내가 경호원인 그들과 굉장히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너무 대놓고 보여 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라는 것이 빤히 보였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만, 약간 섭섭하긴 했다.
아나스타샤는 내게 딱히 어떠한 위엄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좋은 사람이었다. 이 여행이 조금 길어지면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평소에 주고받는 사적인 이야기들 대신 조금 공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빅토르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 늘 외부에서 아가씨를 경호할 땐 주변에서 하곤 했습니다만, 이번엔 제가 곁에 붙어 있으려 합니다.”
“그런가요?”
“예. 러시아라면 쓸 수단도 방법도 많기 때문에 딱히 아가씨 두 분을 방해하면서 제가 붙어 있지 않아도 되지만, 여기선 아주 작은 위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해요? 아뇨, 되레 좋은데요?”
“예?”
빅토르가 약간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난 내 경호원들의 방법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빅토르가 자기 판단하에 우리 옆에 서 있겠다면 그보다 든든할 수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빅토르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선글라스 쓰고 그 슈트 입고 있을 건 아니죠?”
“죄송합니다만 이 선글라스와 슈트는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특수한 장비들이라서 말이죠. 꼭 필요합니다.”
“그래요? 아쉽네. 우리처럼 관광객처럼 하고 같이 다니는 거면 빅토르 오빠라고 부르려 했는데 말이에요.”
“……예?”
빅토르가 두 번째로 되물었다.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난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빅토르는 한술 더 떴다.
“지금 그렇게 부르셔도 됩니다.”
“와! 정말요?”
“대신 타티아나 아가씨의 허락이 있다면 말입니다.”
“세상에, 멋져라.”
아나스타샤가 눈을 반짝이며 날 돌아보았다.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이, 얼른 허락해 달라는 것 같았다.
난 아나스타샤와 빅토르를 돌아보았다. 빅토르는 뻔뻔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지만 새삼 이 남자가 농담거리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생각났다. 그런 그가 한술 더 떴다면 나는 두술 더 뜰 뿐이다.
“저도 앞으로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빅토르 오빠?”
빅토르와 그 옆에 있는 자하르가 숨도 쉬지 못하고 굳었다.
아나스타샤와 빅토르의 렐리에 살짝 끼어들었을 뿐인데 반응이 조금 세다. 그들이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조금 심했나 생각하는 찰나, 빅토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농담이 심했군요.”
사과이긴 하지만 정색하고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되돌리려는 사과가 아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들 사이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졌고, 자하르와 소로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앞으로도 같이 다녀야 하고 심지어 빅토르는 바로 옆에서 근접 경호를 할 텐데, 공적인 관계로만 딱딱하게 있는 건 사양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적절하게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주어서 다행이었다.
리무진에서의 약 1시간 30분 남짓한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냥 이렇게 하염없이 있어도 즐거울 것 같았지만, 우리의 목표는 관광이었기에 목적지가 존재했다.
창 너머로 거대한 철제 탑이 보인다. 소로킨이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럼 자하르.”
“예.”
차가 멈춰 서자마자 소로킨과 자하르가 빠르게 내렸다. 가까이서 경호하는 빅토르와 달리 두 사람은 평소 하듯 주변 전체를 경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가고 잠시 후, 빅토르가 이어서 리무진의 문을 잡아 주며 말했다.
“내리시죠.”
나와 아나스타샤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드니, 차 안에서 창 너머로 봤던 그 철제 탑이 보다 확실하게 보였다.
“저게…….”
“에펠탑이야.”
에펠탑은 파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센강 남쪽의 파리 7구 마르스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차량으로 타고 온 내가 여기가 어디인지 알 방법은 없었고, 단지 눈앞에 보이는 파리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에만 관심이 쏠렸다.
“…….”
정말 크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간 큰 빌딩들은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위압되는 일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거대한 건축물의 위용에 압도되는 건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네 개의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는 에펠탑은 그 기둥 사이로 사람들이 수백 명은 족히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고, 그래서 그런지 이 광장 전체를 감싸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높이는 324m. 모스크바에 있는 97층짜리 페더레이션 타워보다 조금 작은 탑을 19세기에 저렇게 지어 올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떠한 벽 없이 철제 기둥들로만 이루어진 구조는, 한때 파리에 처음 세워졌을 때 왜 흉물스럽다는 평가를 들었는지 문득 알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봐도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기분이 들 정도였는데 이 탑이 지어졌을 19세기엔 얼마나 파격이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그 외관을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미리 해 둔 엘리베이터 예약 시간에 맞춰 에펠탑 쪽으로 향했다.
탑 내부엔 꼭대기 전망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3개 있었는데 예약을 안 하면 한참이나 줄을 서야 했다. 빅토르가 해 줘서 다행이었다.
“사람이 많으니 이쪽으로, 아가씨.”
“아……. 예.”
그리고 빅토르는 나와 아나스타샤가 많은 관광객 사이에서 헤매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느낌 탓인진 모르겠지만 검은 슈트를 입고 있는 빅토르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별로 다가오지 않으려는 듯했다.
덕분에 편하게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고, 잠시 후 우리는 에펠탑 꼭대기 전망대에 오를 수 있었다.
“와…….”
전망대에서 파리를 내려다보며 나는 탄성을 토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역사와 전통적인 건물들을 중요시하고 도시 그 자체를 보존해서 거의 예술품으로 만들어 놓은 도시들이 으레 그렇듯, 파리 역시 높은 건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들 낮고 예쁜 작은 건물들이 도시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아래쪽으론 센강이 보였다. 에펠탑에서 이어지는 샹 드 막스 공원도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조금 비슷하기도 했지만, 도시 전체가 주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조금 더 고즈넉하고 건조한 새벽 같은 느낌이라면, 파리는 보다 역동적이고 열정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정말 멋지네요.”
비로소 파리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처음 보는 나라와 처음 보는 도시. 멋지다고밖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도 이렇게 전망대에 올라와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높은 건물들이 마천루를 이루고 있는 것이 더 좋다며 현대인의 시각으로 말했다. 마천루는 마천루 나름대로의 웅장함이 있기도 하니 그녀의 말도 이해가 가긴 했다.
우린 그렇게 한참이나 전망대에서 파리 시내를 구경하고, 앞으로 가 볼 곳들을 손짓해 보기도 하면서 맞춰 보기도 했다.
이제 멀리서 보는 것은 마치고, 직접 가 볼 때가 왔다.
내려가기 직전 내가 제안했다.
“계단으로 내려가 봐도 될까요?”
“계단으로요?”
“예.”
올라올 땐 엘리베이터로 편하게 올라왔지만, 이 에펠탑을 조금 더 제대로 느껴 보자는 의미로 계단도 조금 디뎌 보고 싶었다.
빅토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층수로 따지면 80층 가까이 되는 탑을 어떻게 걸어 내려간다고 하십니까?”
“그……런가요?”
“그리고 그것 말고도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요?”
“시범 삼아 조금만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
막상 80층이라는 말을 듣고는 엄두가 안 나서 포기하려 했는데 빅토르가 은근히 부추기자 다시 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한지 10초 만에 나는 다리가 후들거림을 느꼈다.
사방이 뻥 뚫린 철제 탑에서 계단을 내려온다는 건 생각보다 상당한 담력을 필요로 했다. 딱히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도 그렇고, 잘못하면 휙 떨어질 것 같았다.
난 곧바로 다시 올라왔고, 아나스타샤와 빅토르는 너무 즐거워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웃는 것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