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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86화 (286/1,277)

##  286화

올라갔던 그대로 얌전히 엘레베이터를 타고 에펠탑에서 내려왔다.

우리가 온 곳이 파리라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어서 가요! 아나스타샤, 빅토르.”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 관람은 모레였고 오늘과 내일 이틀간은 관광만 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그리 급할 건 없었지만, 난 약간 보채며 아나스타샤를 이끌었다.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샤를드골 광장에 있는 에투알 개선문이었다.

“……정말 크네요.”

개선문 옆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에펠탑보다는 확실히 작지만 그 위용은 만만찮은 거대한 석재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19세기에 나폴레옹 1세가 전쟁에서 승리 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 크기도 크기이지만 벽면에 세밀하게 만들어진 조각상들이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나에게도 굉장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조금 현대적이고 인상주의적이라 볼 수 있는 에펠탑에 비해 이 개선문은 그야말로 고전적인 위용이 있었다. 예술품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200년 가까이 된 이 거대한 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아나스타샤와 기념사진을 남기고 개선문을 구경하다가 주변을 살폈다. 사람도 많지만 자동차들도 쉴 새 없이 오갔다.

개선문은 우리가 구경하고 싶은 곳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출발 지점이기도 했다.

총 12개의 크고 작은 도로들이 교차하는 로터리이기도 한 이 샤를드골 광장에서, 개선문의 문이 열려 있는 방향으로 난 두 개의 도로 중 지도상으로 남동쪽의 큰 도로로 눈을 돌렸다.

“저쪽으로 가면 될까요?”

“응. 맞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광활한 거리는 17세기에는 여왕의 산책로라고 불렸고, 이후 확장하여 파리 최대의 번화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불리는, 샹젤리제 거리였다.

좌우로 잎이 무성한 가로수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도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느껴졌다. 보기만 해도 멋진 이 거리를 걸어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들떴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가 볼까?”

“예.”

난 즐겁게 대답하며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빅토르가 우리 뒤를 따랐다.

샹젤리제 거리는 10차선이나 되는 넓은 도로만큼이나 보도도 넓었다.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는 일렬로 늘어서서 걸어도 될 정도로 넓은 거리는 모스크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신아르바트 거리는 이보다 좁았고 높은 빌딩들이 많아서 아예 분위기가 달랐고, 구아르바트 거리는 거리 폭은 넓었지만 가운데에 도로가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대로가 조금 비슷한 느낌은 있지만, 역시 보도가 이렇게 넓지는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기분을 느끼며 거리 주변도 살펴보았다. 많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러시아어는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고 대부분 프랑스어나 영어였다. 그 종류는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그렇게 신기해하며 구경하면서 지나치는데, 아나스타샤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우리 저기 들어가 볼래?”

“어디요?”

“루이비통 본점.”

“루이비통 본점이 프랑스에 있었나요?”

“……무슨 소리야. 루이비통이 어느 나라 말인데?”

“음……. 프랑스어요.”

“그렇지?”

“그렇네요.”

내 바보 같은 소리를 가볍게 받아 준 아나스타샤가 내 팔을 이끌었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긴 하지만 용돈을 타서 쓰는 아나스타샤는 평소 명품 같은 것에 그리 큰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늘 패션에 관심이 많은 그녀가 루이비통 본점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루이비통이라는 유명한 브랜드의 본점이라면 구경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했다.

내 지갑엔 카드도 있었고, 이전에 콩쿠르에서 탄 상금과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으로 꽤 많은 금액을 쓸 수 있었으니 마음에 들면 무언가 사지 못할 것도 없었다.

10분 정도 웨이팅 후, 우리는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와.”

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거의 못 찾아보겠고 대부분이 우리 같은 관광객 같았다. 영어, 중국어, 기타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마구 섞이면서 제대로 구경도 못 할 지경이었다. 직원들도 모두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타티아나! 저거 어때?”

그 와중에도 아나스타샤는 가방 하나를 발견해서는 신나 했다. 난 아직도 패션 감각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좋다고 집어 올린 것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1층에선 향수와 지갑, 가방 등을 구경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2층에선 옷과 구두 등을 볼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도 아나스타샤와 복잡한 백화점 쇼핑을 한 적은 몇 번이나 있었고 때문에 꽤 익숙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러시아어가 들리는 것과 온통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섞여 들리는 것은 다른 기분이었다. 정신이 세 배는 산만해졌다.

내가 약간 넋이 나가서 아나스타샤를 쫓아다니는 것이 보였는지 빅토르가 살짝 와서 물었다.

“아가씨. 어지러우십니까?”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빅토르는 주위를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조용히 만들어 달라고 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시진 않으실 테죠.”

“……예?”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했다. 빅토르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이곳을 조용하게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우리가 있는 동안 전세를 내 버리는 방법이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진 상상도 못하겠지만, 빅토르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와 그간 가깝게 지내 온 빅토르는 내가 그렇게 하라고는 절대 부탁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때문에 전세 내 버릴까요? 라고 물으면 내가 또 기겁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괜히 어렵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비행기도 숙소도 충분히 사치스럽게 하고 그 외 모든 비용도 아버지에게 기대면서 쇼핑만 자력으로 하는 것처럼 해 봐야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어차피 난 누릴 수 있는 것들은 다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편한 전용기와 편한 차량, 편한 숙소를 넘어서 일부러 적극적으로 명품에까지 눈독을 들이고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난 그런 식으로 돋보이는 데엔 관심이 별로 없다.

난 평범한 관광객으로 아나스타샤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눈을 반짝이며 가장 괜찮아 보이는 물건들만 콕콕 집어내는 아나스타샤를 따라다니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아, 이거 하나 건졌네.”

매장에서 나왔을 때, 나와 아나스타샤는 카드 지갑을 하나씩 구매했다.

솔직히 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아나스타샤가 사기에 따라 샀다. 내가 따라 사는 것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내게 정말 잘 어울릴 것이라며 몇 번이나 말해 주었다.

그 후로 십여 분쯤 더 걷다가, 꽤 유명한 프렌치 레스토랑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파인 다이닝을 찾아 들어갔다.

프랑스 현지에서의 프렌치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 모스크바에도 파인 다이닝은 많았고 가격으로 비교하자면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비싸기까지 한 곳도 많았지만 그래도 현지에서 먹는 것과는 분위기도 맛도 달랐다.

이게 진짜 프렌치인 건가? 솔직히 어느 쪽이 더 나은진 모르겠다.

“이 밀푀유 너무 맛있다.”

아나스타샤는 식후 디저트로 나온 밀푀유를 한 입 먹더니 황홀해하며 말했다. 난 드미트리의 레시피 중에 밀푀유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제가 나중에 배워서 만들어 드릴게요.”

“진짜? 약속한 거다?”

“너무 기대는 마세요. 이것보단 못할 테니까요.”

“상관없어. 아무튼 약속한 거야.”

그녀는 기뻐하면서 한층 더 들뜬 모습으로 앞으로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본적인 일정은 이대로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콩코르드광장까지 도착하는 것이었지만, 약간 돌아가면서 아나스타샤와 쇼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것 같고.

넌지시 말했더니 아나스타샤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음……. 네 말대로 정말 쇼핑하기에 좋은 거리는 여기 샹젤리제 거리가 아니라 요 앞 샹젤리제 로터리에서 오른쪽으로 뻗은 몽테뉴 거리거든?”

구글 선생님에게 물어보아도 몽테뉴 거리엔 샤넬, 구찌, 셀린느, 베르사체, 프라다, 돌체앤가바나 등등 수많은 브랜드들이 줄지어 위치하고 있어서 사실 쇼핑하기엔 샹젤리제 거리보다 훨씬 적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우리가 쇼핑하러 여기 온 건 아니잖아?”

“……그렇죠.”

“응.”

아나스타샤가 무엇을 좋아해 줄지 생각하다가 반대로 내가 약간 목적의식이 흐려졌던 것 같다. 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날 보더니 킥킥 웃었다.

“무엇보다 돈도 없어.”

용돈을 가불받았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사고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다 살 수 있을 리 없었고, 명품 거리에 가 본들 가슴만 아플 뿐이다.

난 장난으로라도 사 주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특별한 날 서로 선물을 사 줄 순 있겠지만, 평소엔 안 된다. 우리 사이에 그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 이상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샹젤리제 거리를 나름대로 만끽했다.

샹젤리제 로터리를 지나선 남쪽의 그랑 팔레 전시관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랑 팔레는 1900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명소였다.

잔뜩 기대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거의 그랑 팔레에 도착했을 때, 길 저편에서 서성이는 여자애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 여자애들이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왔다.

착각인가 싶었는데 명백하게 내 쪽이었다.

“?”

무슨 일인가 싶어 잠깐 걸음을 늦추는데, 뒤편에서 빅토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작게 자하르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무섭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도 나와 비슷하게 걸음을 늦췄고, 우리는 곧 네 명의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였다.

“Do you speak english?”

난데없이 영어로 된 질문이 날아들었다. 프랑스에서 왜 영어를 찾는진 모르겠지만, 이 애들도 프랑스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난 영어를 잘 못하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인가 싶어서 조금 할 줄 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어눌한 발음이지만 그래도 알아듣기 쉬운 단어들로 여자애들이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회단체에서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고 있고, 우리도 거기에 서명을 해 주었으면 한다는 것 같았다.

사회단체에서 서명만 받는 일이라니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난 펜을 받아 들었고 필기체로 서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를 돌아봤더니,

“…….”

“?”

아나스타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기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난 좋은 일인 것 같으니 아나스타샤에게도 해 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사회단체라는데 음악가인 우리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돕는단 말인가? 약간은 섭섭했지만 서명을 할지 말지는 아나스타샤의 자유였으니 일단 내 서명만 하고 건네주었다.

여자애는 아나스타샤를 잠깐 쳐다보긴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그러고 나서 용건이 끝났나 했는데, 이번엔 여자애가 내 뒤편을 힐끔거리더니 서명에 대한 약소한 기부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말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어쨌든 난 흔쾌히 알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말한 기부금은 10유로였다. 난 지갑에서 현금을 꺼냈다.

난 내 앞가림도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일은 신경도 쓰지 못하고 살고 있다.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난 따뜻하게 웃으면서 현금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말했다.

“아픈 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주셔서 고마워요.”

“……?”

여자애는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지 약간 얼이 나간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일단 돈을 받아 들었다. 말은 못 알아들었어도 뉘앙스는 전해졌을 것이다.

여자애는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무언가 엄청나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여자애를 쿡쿡 찔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한참 무언가 이야기를 하더니,

장미꽃을 한 송이 꺼내선 내게 건네주었다.

뭔진 몰라도 받으라는 것 같아서 받았다. 그제야 여자애들은 기쁘게 웃으며 무어라 말하고는 떠나갔다.

“…….”

장미꽃을 보니 잘 포장되어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오늘 갓 잘라 온 듯 생생했다. 장미꽃의 향기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10유로를 주고 장미꽃 한 송이를 산 건 정말 수지가 안 맞는 일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장미꽃을 보다가, 문득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나스타샤.”

“응?”

“궁금한 점이 있어요. 왜 서명해 주지 않으셨나요?”

딱히 힐난하려는 투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자유였으니까. 그냥 궁금했다. 그녀가 보이는 눈빛도 이상했으므로.

아나스타샤는 엄청나게 고민하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팔짱을 끼고 중얼거리다가, 심지어 뒤편의 빅토르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리기까지 했다. 아주 심각해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합의인지 타협인지 모를 무언가가 끝나고, 눈빛이 오갔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정말 심사숙고했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타티아나.”

“왜 그러세요.”

“너 아까 서명해 주고 기부금 준 거 말이지.”

“예.”

“그거 사기당한 거야.”

“?”

난데없는 말이 이해가 안 갔다.

“무슨 말씀이세요?”

“방금 그 애들은 조직적으로 그런 일을 해. 사회단체를 사칭하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동정심을 유발해서 돈을 뜯어 내지.”

“사칭이라 하셨나요?”

“응. 그거 정말 흔한 사기 수법이거든……. 네가 너무 순순히 서명해 주고 돈까지 주니까 양심에 찔렸는지 장미꽃을 주긴 했는데…….”

난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 겪었던 일들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회단체라는 말에 신경이 쏠려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위화감. 그 애들은 분명 아나스타샤와 내 뒤의 빅토르를 살피는 듯한 눈치였다.

빅토르를 보니 그 역시 같은 말을 했다.

“아나스타샤 아가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제가 가까이에 있었고, 바로 막았어야 했습니다만……. 순간적으로, 아가씨께서 기부를 하셨다고 믿고 계신다면 적어도 기분이 상하실 일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난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빅토르도 아나스타샤도 그 자리에서 큰 소리를 치거나 다른 방법으로 그 애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정말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지금 생각해 보면 심지어 내게 접근했던 애들도 빅토르가 잠자코 있어 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뒤에 있는 빅토르를 보고도 사기를 치겠다고 접근했을 리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맞아 들어서 빅토르와 아나스타샤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내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이 계속 입을 다물었다면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고 문제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순간적으로 그렇게 하자는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이해했다.

하지만 결국 그게 날 속이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고, 때문에 빅토르와 아나스타샤는 뒤늦게라도 이렇게 이실직고를 하는 것이었다.

빅토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경호원으로서 잘못했다는 것 같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빅토르가 오로지 내 경호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면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즉각 어떠한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날 생각했고, 때문에 기다렸다. 그렇다면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난 조용히 물었다.

“그런 것이었나요?”

“돈은 지금이라도 제가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

“아뇨.”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빅토르가 물었다. 10유로가 아깝지 않냐는 것이 아니라, 당했다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냐는 뜻이었다.

기분을 묻는다면, 난 괜찮았다.

“예. 괜찮아요.”

“아가씨가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빅토르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듯 말하더니 곧장 자하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낮고 빠르게 무어라 쏘아붙이고 있었는데, 아마 주변 경호를 확실히 하라는 것 같았다. 그것까지 말릴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내 곁에 다가왔다. 그녀도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냥 널 속이고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겐 못 하겠더라. 타티아나.”

난 기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빅토르도 그렇게까지 절 생각해 주셨다는 게 더 기뻐요. 그리고 절 속이지 않기로 결정하신 것도. 모두요.”

“…….”

“그 애들은 나쁜 짓을 하긴 했지만…… 괜찮아요.”

물론 기분이 아주 좋진 않았다. 아나스타샤와 빅토르가 진실을 말해 준 순간 내가 받은 충격은 꽤 강했다.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거짓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하지만 두 사람이 내 기분을 고려해서 아예 내가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던 것과, 이후 내가 기부를 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보단 진실을 아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진실을 가르쳐 주었던 것. 둘 모두 이해가 간다.

그리고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다 보면, 기쁘다는 것도 솔직한 진심이었다.

난 정말 이상한 애인 것 같다.

괜히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전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는 일만 주의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신기한 일을 겪네요.”

“신기한 일이라뇨 아가씨…….”

빅토르는 그제야 황당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난 헤죽 웃었다.

그래도 그 애들이 10유로로 뭘 할지, 또 다른 관광객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할지, 장미꽃은 왜 준 것인지, 별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쨌든 손에 남은 장미꽃엔 악의가 담겨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빅토르는 그 애들에게 겁을 주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모든 것은 지나갔으며 난 진실을 알았다.

난 지금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즐거운 여행이었고 앞으로도 즐거울 여행이었다. 난 일부러 활기차게 웃으며 아나스타샤의 팔을 끌었다.

“이제 가요.”

“응.”

아나스타샤는 한결 편해진 미소를 지으며 날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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