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그랑 팔레의 앞에 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건축이라는 것 자체가 예술과 밀접하게 닿아 있으며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심지어 밋밋한 아파트조차도 고도의 수학이 접목된 예술의 일종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 건물은 정말 멋지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돔 형태의 지붕과 좌우대칭으로 넓게 지어진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건물 겉면에 거대한 기둥들을 박아 넣은 것은 고대 그리스의 건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건물 뒤쪽의 돔은 유리다. 전혀 다른 시대의 양식들을 조화시켜 놓았음에도 아름답다.
직선으로 지어졌으면서도 유려한 곡선들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이 보더라도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면의 거대한 입구였다. 건물의 높이만큼이나 크게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입구는 건물이 아니라 어떠한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굉장해요…….”
“들어가 보자.”
“예.”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거대한 입구로 들어섰다.
파리에 있는 다른 박물관과 미술관처럼 이곳 그랑 팔레도 미성년자들에게 무료로 열려 있었다. 우리는 조금 기다렸다가 빅토르의 입장료만 내고 들어갔다.
가방 검사 등의 약간의 절차 후, 우리는 그랑 팔레에 들어왔다.
상설 전시되는 예술품 없이 기획전시만 하는 그랑 팔레에서 이번에 하는 기획 전시는 두 가지로 추상화의 선구자, 그리고 아티스트와 로봇이라는 주제였다.
10분 남짓 돌아본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네요.”
“그렇네…….”
나도 아나스타샤도 취향이 고루한 것일까?
입구를 통하면 다른 세계로 통할 것 같다고 느꼈던 내 감상은 적중했다. 겉보기엔 고전적으로 보이는 그랑 팔레의 내부는 그야말로 다른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그래도 조금 나았다. 공부가 얕아 뭔진 잘 모르겠지만 색채감이 화려해서 보는 맛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세련되었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아나스타샤는 추상화는 조금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과학기술과 접목된 현대미술이란 정말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한 작품은 모니터만 덩그러니 설치되어 있어서 거기에 입김을 불면 스크린에서 하얀 민들레 꽃씨가 휘날리게 되어 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예술인지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민들레 꽃씨가 휘날리는 건 이런 화면이 아니라 실제로 보았을 때가 백 배는 더 예쁜 것 같은데. 예술은 인간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다.
무지에 근거한 비평은 그냥 불평일 뿐이고, 나와 아나스타샤는 그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무어라 감상을 내놓진 않았다. 하지만 지나치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슨트 서비스가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하지만 도슨트가 붙어 다니면서 설명을 해 주었어도 아리송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빅토르가 지나가다가 스크린을 보고 만지기도 하면서 재미있어 해 주었고, 발견의 궁전이라는 곳에 있던 플라네타리움이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져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전시관을 다 둘러본 우리는 그랑 팔레 밖으로 나왔고, 다시 건물을 올려다보고는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고전적이고 멋진 위용의 외부와 현대적인 내부의 건물들은 많이 봤지만 그랑 팔레는 조금 놀랄 정도로 그 갭이 크긴 했다.
기대와 조금 다른 것들을 구경한 바람에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랑 팔레의 바로 맞은편의 프티 팔레에 가보기로 했다.
파리 시립 박물관인 프티 팔레는 그랑 팔레에 비해 조금 작긴 하지만 상설 전시로 전시하고 있는 예술품들도 많았고 건물도 굉장히 예뻤다.
그리고 입구로 들어섰을 때, 난 비로소 박물관에 들어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보기엔 조금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2층으로 나누어져서 고대서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한 문화재와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도자기부터 회화, 조각품, 사진까지 정말 다양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도자기들은 솔직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보았던 하얗고 화려한 도자기들이 훨씬 예뻤기에 큰 관심이 가진 않았지만, 회화 작품들은 멋진 것들이 많았다.
이전에 보았던 추상화들보다 그래도 이해하기 쉬운 모네나 세잔, 고갱, 쿠르베 같은 인상주의 작가들의 회화 작품들은 강렬하고 화려하다. 음악적으로는 라벨이나 드뷔시의 인상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 특히 모네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묘한 색채감에선 드뷔시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런 감상을 말했더니 아나스타샤가 직업병 환자를 보는듯한 눈을 했다.
“넌 그림에서도 음악을 읽어 내는 거야?”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죠.”
아나스타샤도 얼마든지 이정도 감상은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나한테만 그러니까 조금 억울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와 감상을 나누면서 프티 팔레에 전시된 작품들을 구경했다. 도중에 아나스타샤가 샤를 지롱의 작품인 장갑을 낀 여인을 보고는 집에다가 가져다 놓고 싶다고 해서 한참을 웃기도 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작품을 사긴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세련되고 멋진 그림들을 구경만 하고는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곳에서 엽서를 몇 장 샀다.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엽서들이라서 그녀는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랑 팔레에선 미처 충족하지 못했던 심미적 감성을 잔뜩 충전하고 우리는 기쁘게 프티 팔레에서 나왔다.
그런데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흐릿흐릿했다.
“날씨가…….”
“파리는 원래 이래. 습하고 흐리고.”
아나스타샤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바로 비라도 내릴 것처럼 날씨가 흐릿하고 전체적으로 조금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우리가 파리에 있는 내내 날씨가 맑기만 했으면 좋겠지만 날씨를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가 온다면 이만 호텔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아나스타샤도 역시 아쉬웠는지 길 저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음……. 그럼 요 앞 콩코르드광장만 보고 생각해 보자.”
“그럴까요?”
“응.”
콩코르드광장까진 별로 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콩코르드광장까지 가 보기로 했다.
천천히 걸어 5분도 안 걸려서, 우리는 커다란 오벨리스크와 두 개의 분수대가 있는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는 여기까지겠네요.”
“응. 맞아.”
지도상으로는 약 2km정도. 개선문에서 콩코르드광장까지 이어진 샹젤리제 거리 탐방은 이렇게 끝났다.
“…….”
파리의 번화가를 구경하고 미술관을 구경했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이 나라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과 함께 도시 전체에 열정이 흐르는 느낌이다.
그리고 동시에, 무서운 이야기들도 많았다. 난 이 광장에 얽힌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콩코르드광장은 18세기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하고 사형당한, 혁명 광장이기도 하다. 분수대가 있는 바로 이 자리가 바로 수백 명의 목을 쳐낸 단두대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 아름다운 풍경이 약간은 싸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서 서늘한 무언가를 직감하는 순간,
“무슨 생각 해?”
“예?”
난 조금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킥킥 웃으며 다시 물었다.
“왜 멍하니 있어.”
“아……. 그게.”
분수대의 물줄기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하려다가 난 문득 생각난 다른 이야기를 했다.
“여기까지 와서 생각난 것인데요……. 원래 여기에 커다란 대관람차가 있지 않았었나요? 개선문에서 이곳 콩코르드광장까지의 샹젤리제 거리를 찍은 사진을 보면 꼭 대관람차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와, 역시 눈썰미 좋구나? 타티아나.”
눈썰미가 아니라 그렇게 큰 관람차라면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사실 자기도 궁금해서 찾아봤다면서 구글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찾아낸 결과를 내게 보여 주었다.
파리 콩코르드광장의 대관람차는 파리 시의 소유물이 아니라 사기업의 소유물이었다. 그리고 2018년 5월부로 파리 시와의 계약이 만료되었고, 파리 시에서 더 이상 유치할 생각이 없어 완전히 철거해 버렸다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이 철거된 것도 아니고 그냥 대관람차일 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 맥이 빠진다.
“……없어진 거네요.”
“응.”
“아쉽네요…….”
프랑스가 내가 사는 나라도 아니고,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하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웠다.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왜?”
“있었다면 아나스타샤와 함께 타 볼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아나스타샤는 눈을 깜빡이더니,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타티아나. 그거 알아?”
“무엇인가요?”
“그 대관람차말야, 이 파리 시에 두지 않으면 다른 도시에 매각하게 되잖아?”
“그렇……겠죠?”
잘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대관람차니까 고철상에 넘기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도 꽤 있을 것이고.
아나스타샤가 너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거 모스크바 시에서 매수할 거라던데?”
“예?”
상상도 못한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모스크바에서 그 대관람차를 사 간다고요?
“정말인가요?”
“응. 봐 봐.”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보여 주었다.
정말이었다. 여러 법적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대로 파리 시에 영영 둘 수 없게 되면 모스크바 시에 매각될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내 손을 잡아 왔다.
“우리 여기에서 못 타더라도 모스크바에 세워지면 타러 가자. 그러면 되잖아?”
갑자기 기분이 확 좋아졌다.
“예! 꼭 그렇게 해요.”
“약속한 거다?”
“약속이에요.”
그냥 대관람차라면 아무 놀이공원에 가도 될 일이지만, 어쩐지 이런 곳에서 아나스타샤와 하는 약속은 특별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우리는 콩코르드광장에서 분수와 오벨리스크를 구경하고는 잠시 쉴 곳을 찾아 그 옆의 튀일리 정원으로 향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정말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조금 걷자 커다란 인공 연못과 그 옆의 의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근처에서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와선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빅토르도 옆에서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이렇게 앉아서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이 튀일리 정원을 넘어서 그대로 루브르 박물관까지 갈 예정이었지만, 생각보다 다리도 아프고 난 약간 지쳐 있었다.
비도 올 것 같으니 그냥 이렇게 정원에서 조금 쉬다가 일단 호텔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루브르 박물관이 정말 보고 싶긴 하지만 난 맛있는 건 아껴 먹는 스타일이라서 하루 미룬다고 해서 성급한 마음이 들거나 하진 않는다.
“…….”
난 작은 스푼을 입에 물고 아나스타샤가 재잘거리는 것을 들으며 연못을 바라보았다. 바쁘게 돌아다닐 것 없이 이렇게만 있어도 행복했다.
그렇게 편하게 쉬는 기분으로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신경 쓰이는 것을 발견했다.
“……?”
처음엔 영화를 촬영하는 중인가 싶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막 뛰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격전의 촬영인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변에 카메라나 스태프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쫓기는 쪽과 쫓는 쪽의 대비가 너무 극심했다.
“□□ □ □ □□ □□□□!”
한 여자가 프랑스어로 들리는 말로 소리를 치며 쫓아오고 있었고, 세 명이나 되는 남자가 빠르게 도주 중이었다. 간간히 뒤도 보면서 뛰는 것이 거의 놀리는 모습이다.
그리고 세 명의 남자 중 한 남자가 들고 있는 여성용 핸드백을 발견했다.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난 눈썰미가 나쁜 편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관광객이 많은 만큼 범죄도 많다고 듣긴 했는데, 꽤 심각하다.
소매치기라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고개를 돌렸고, 빅토르가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내가 말로 부탁하지 않아도 빅토르는 내 생각을 읽고 있었다.
내가 간결하게 물었다.
“세 명인데요.”
“괜찮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예. 아가씨.”
그 대답과 동시에 빅토르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빠른 걸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코 느리지도 않았다. 빅토르는 무슨 마술을 쓴 것처럼 관광객들 사이에서 스르륵 움직이더니, 쫓기는 쪽의 세 명의 남자 중 가방을 든 남자와 부딪쳤다.
“……!”
빅토르가 갑자기 몸으로 들이받아 버릴 줄은 생각도 못해서 기겁했는데,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성인 남자 두 명이 부딪쳤는데, 빅토르는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달려오던 남자만 그 자리에 넘어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선 안 될 일처럼 보이는 일이 벌어졌다. 앞서가던 두 남자가 멈춰 서더니 뒤돌아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도 그 광경을 봤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타티아나 저거…….”
“저희도 가 보죠.”
빅토르는 위험하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멀찌감치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보이진 않지만 자하르도 아마 근처에서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빅토르와 충돌하고는 벽에 부딪친 것처럼 혼자 쓰러진 남자는 한참이나 기침을 하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험상궂게 생긴 두 명의 흑인 남자가 빅토르를 윽박지르면서 다가왔다.
분위기가 정말 무서웠다. 빅토르에게 괜한 부탁을 한 것이 아닌가 덜컥 걱정이 들었다.
빅토르는 키는 크지만 슈트를 입고 있어서 호리호리해 보인다. 그에 비해 두 흑인 남자는 키가 190cm 가까이 되어 보이는 근육질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싸움이 성립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았다.
“□□□□ □□ □□!”
“□ □□□□!”
그런 판단은 두 남자 역시 똑같이 한 것 같았고, 때문에 넘어진 남자를 그냥 버리고 도망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빅토르는 다가오는 남자들은 신경도 안 쓰는지 밑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무언가 잔상이 일면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막 일어나려던 남자가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빅토르는 허리를 숙이고 땅에 떨어진 가방을 천천히 주워 들었다. 그리고 나서야 두 명의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 친구 데리고 그냥 꺼져라.”
러시아어였지만 그 뜻은 두 남자에게 전해진 듯했다.
“……□□□.”
고민한다. 두 명의 흑인 남자들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관광객들의 시선이 조금씩 모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듯하다. 경찰에 이미 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소매치기범들에겐 아주 안 좋은 상황이다.
시간이 촉박할 테니 그냥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두 남자의 생각은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빅토르를 해치우자는 쪽으로 향한 듯했다.
두 남자가 동시에 빅토르를 덮쳤다.
그다음은 내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저 빠르고 맹렬한 소리가 귀에 들릴 뿐이었다.
“……!”
달려들던 남자 하나가 빅토르에게 무언가 당했는지 몇 번 흔들리더니 옆으로 픽 쓰러졌고, 다른 남자는 숨을 못 쉬는지 목을 부여잡고 콜록거리고 있었다.
“내가 아까 봐줬다고 이번에도 봐줄 것 같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빅토르가 다시 무언가를 했다. 그리고 목을 붙잡고 있던 남자도 쓰러졌다.
정말 눈 깜빡하는 사이 소매치기 일당 세 명 모두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지는 것으로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빅토르는 발밑을 보더니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살벌해서 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빅토르가 유능하고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저편에선 소매치기를 당한 피해자가 무엇에 홀린 듯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빅토르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가방을 건네주자 그녀가 말했다.
“□□ □□□□□…….”
“별말씀을.”
빅토르는 프랑스어를 모르지만 감사 인사 같으니 일단 답인사를 했다.
그리고 환호가 일었다.
“□□□□!”
“□□ □□□ □□□□.”
주변에서 온갖 언어로 된 환호성들과 박수가 있었다. 모두 빅토르를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빅토르는 그런 환호에 답을 하거나 쑥쓰러워하지 않고 그냥 이쪽으로 돌아왔다. 잠깐만요, 저 환호를 달고 이쪽으로 오시면 어떻게 해요?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고, 내가 난처하다는 듯 빅토르를 바라보자 그가 씩 웃었다.
“절 보내신 건 아가씨니까요. 박수는 아가씨께서 받으셔야죠.”
“그래도……!”
“그리고…… 제가 조금 못미덥게 굴기도 했지만, 믿어 주십시오.”
애초에 못미더워한 적도 없는데, 빅토르는 그랑 팔레에 가기 직전에 내가 여자애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것을 바로 제지하지 못하고 고민하면서 지켜봤던 걸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는 듯했다.
정말 그럴 필요 없는데.
그래도 빅토르가 원한다면, 다시 말해 줄 뿐이다.
“언제나 믿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죽이……신 건 아니죠?”
“살아는 있습니다.”
“더 무서운데요…….”
빅토르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30분쯤 있다가 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눈을 뜰 겁니다. 걱정 마시죠.”
장난스러운 그 말에 그제야 내가 아직까지도 놀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빅토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새삼 깨닫는다. 어깨에서 힘이 풀어졌다.
우리가 웃으며 이야기를 맺자 다시 온갖 언어의 함성이 있었다. 그 목소리들 중 분명 일부는 내 쪽으로도 향하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조금 창피했다.
이만 슬슬 자리를 피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빅토르가 가방을 찾아 주었던 여성분이 우리에게도 무어라 말을 걸었다. 내게도 고맙다고 하는 것 같았다.
난 내가 감사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웃으며 말했다.
“감사는 빅토르에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 □□□ □□□□□ □□□.”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웃기만 했고, 그녀 역시 미소로 받았다. 어쨌거나 상황은 분명했고 말이 안 통하면 미소야말로 만국공통어다.
그리고 잠시 뒤 경찰이 와서 소매치기들을 데려가고 피해자에게도 다가왔다. 참고 조서를 받아야 해서 잠시 동행해 달라는 듯했다.
빅토르에게도 무어라 하는 것 같았는데, 빅토르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으며 러시아어로 빠르게 쏘아붙였다. 프랑스 말 할 줄 모르니까 내버려 두란 소리였다.
귀찮게 굴지 말라는 뉘앙스가 너무 정확하게 보였는지 경찰들도 한참 난감한 듯 서로에게 무어라 하다가 빅토르와 우리는 그냥 보내 주었다. 말도 안 통하는 사람 붙잡아놓고 뭘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빅토르는 우리를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다음은 어디로 모실까요. 아가씨.”
정말 그와 함께라면 세계 어디에 간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