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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88화 (288/1,277)

##  288화

어디로 모시면 좋겠느냐는 빅토르의 말에 난 일단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흐리다.

시간은 3시 30분. 오늘은 힘들기도 했고, 이만 쉬고 싶었다.

“호텔로 가도 될까요?”

“피곤하신가 보군요?”

막상 힘들다고 하자니 어쩐지 어리광을 부리는 기분이라서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비가 올 것 같기도 해서요.”

“알겠습니다.”

빅토르는 긴 말 않고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튀일리 정원에서 다시 콩코르드광장 쪽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대기하고 있는 리무진에 탈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같이, 리무진에 타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창문 밖을 보던 아나스타샤는 사람들이 비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탄성을 토했다.

“타이밍 너무 좋다.”

“정말이네요.”

“비가 올지 어떻게 알았던 거야?”

난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 무릎이 전해 주더군요. 비가 올 것 같다고요.”

“음……. 타티아나. 네가 마사지를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아가씨, 제발 체통을…….”

빅토르가 미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을 세 명이나 순식간에 때려눕힌 그도 내가 가끔 막나갈 땐 어쩔 줄 몰라 하곤 한다. 난 웃으며 말했다.

“그냥 조금 걸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요.”

진짜 다리가 아프긴 아팠으니까 말이다.

리무진이 출발했다.

차량은 천천히 콩코르드광장을 돌더니 도로로 빠져나와서, 센강을 쭉 따라가기 시작했다.

“…….”

나와 아나스타샤는 잠시간 창밖을 보며 풍경을 감상했다.

아름다운 건물들이 모여 있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센강과 또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 전체가 정말 훌륭한 예술 작품이었다.

보슬보슬 이슬비가 떨어지는 파리의 모습은 평생 잊히지 않을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자, 타티아나.”

“고마워요.”

아나스타샤가 리무진 내부의 바에서 음료를 꺼내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마실 걸 홀짝이면서 살짝 열린 선루프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비 내음과 소리를 즐길 수 있었다. 자연스레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프티 팔레에서 본 것들 예뻤지.”

“유럽의 유행을 선도하다시피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네요. 정말 많은 문화들이 모여서 공명하고 증폭되는 느낌이었어요.”

“나라 전반이 그런 느낌이지.”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문화 그 자체의 깊이와 두께,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러한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내게 있어서 꽤나 행복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행지에 대해 나누던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빅토르가 소매치기를 잡았던 이야기로 흘러갔다.

관광을 하면서 봤던 것들도 멋있었지만, 빅토르가 한 일은 이번 여행에서 인상적으로 꼽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매치기들에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겐 추억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묘하기도 했다.

어쨌든 멋진 건 멋진 것이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때 정말 멋있었어요. 빅토르.”

“과찬이십니다.”

빅토르는 쑥쓰러워하기보단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런 쿨한 모습이 아나스타샤를 더 자극한 듯했다.

“과찬이 아니에요. 빅토르의 일은 타티아나를 지키는 것일 테고 오늘 하신 일은 업무 외의 일이겠지만, 전 그 모습에서도 빅토르가 정말 이 애를 위해 주신다는 걸 많이 느꼈거든요.”

“그렇습니까……? 전 오늘 정작 아가씨에게 접근한 사기꾼들은 내버려 뒀습니다만.”

“그때 빅토르가 침묵했던 것도 타티아나를 위한 거였잖아요. 저도 가만히 있었고……. 그리고 이미 그 부분은 타티아나도 이해해 준 부분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합니다.”

당사자를 앞에 앉혀 놓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정말 지양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여기선 나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살며시 그 위에 말을 얹었다.

“저는 있잖아요, 빅토르.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저는 빅토르가 내버려 뒀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가만히 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만.”

빅토르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가 내 신변을 보호하는 것 이상으로 날 위해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믿고 있다. 난 그냥 미소만 보냈다. 빅토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만다.

맹목을 경계하라고, 많은 것들을 알아 가자고 했던 아나스타샤는 묘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빅토르가 있어서 다행이야. 난 저번에 정말 이상한 놈들도 만났었거든. 난데없이 손목을 잡고는 팔찌를 채우더니 사라고 강요를 하지 뭐야?”

“팔찌요?”

“응. 싸구려 팔찌.”

아나스타샤의 말을 들어 보니 그냥 길을 걷고 있었는데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손목을 붙잡고는 갑자기 팔찌를 채웠다고 한다. 그러고는 좋은 것이라면서 그대로 사도록 유도하고, 말을 안 들으면 윽박질러서 강매한다는 것이었다.

난 깜짝 놀랐다. 내게 사인을 받아가고 기부금 명목으로 사기를 친 여자애들과 비슷한 수법이긴 했지만 정말 질이 안 좋았다. 게다가 손목이라니. 일면식도 없는 낯선 누군가에게 손목이 잡히고, 무언가 채워진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어떻게…… 하셨어요?”

“뭘 어떻게 하니? 말도 안 통하고. 네 명이나 되었던 걸.”

“그냥 돈을 주셨군요?”

“아니? 도망갔는데?”

“예? 어떻게요?”

“그냥 바로 난간 넘어서 뛰니까 못 쫓아오던데.”

깜짝 놀랐다. 뭘 넘어서 뛰었다고요?

아나스타샤는 모험담을 말하는 듯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내게 전혀 모험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전혀.

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위험하잖아요! 그러지 마세요!”

“아, 그냥 그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

“그래도요! 큰일 난단 말이에요!”

나 같은 경우엔 빅토르가 늘 붙어 있기라도 하지, 아나스타샤는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 위험한 일을 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섬뜩하다.

그녀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조절이 잘 안 된다.

“아나스타샤, 약속해 주세요. 앞으로 혹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냥 돈을 주고 지나가시겠다고요.”

“그래도 강매는 억울하잖…….”

“약속해 주세요!”

“알았어, 약속할게. 그러니까 화내지 마…….”

사기꾼들의 강매에 쉽게 돈을 내어 준다는 건 바보 같은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런 것보다 아나스타샤에게 혹시 모를 위험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는 것이 백만 배는 중요했다.

그런 마음으로 화를 냈던 나는 약속이라는 것을 받아 내고 나서야 약간 냉정을 되찾았다. 그제야 난 내가 지나간 일을 가지고 유난을 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하게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른 거라면 모를까, 손목에 팔찌를 채운다는 말에 순간 너무 놀라서 냉정을 잃은 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니야, 괜찮아. 나도 이제 위험하게 안 하려고.”

내가 사과해도 약간 어수선해졌던 분위기는 쉽게 풀어지지 않았고, 잠시 우리는 어색하게 빨대를 물었다.

그런 우리를 보던 빅토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침묵을 파고들었다. 바로 이 도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파리에는 정말 많은 인종들이 섞여서 살고 있었다. 특히 북역gare du nord 쪽의 18구, 19구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많이 살고 13구는 중국인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그 외에도 무슬림, 집시 등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샐러드 같은 도시가 파리인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여러 문화와 이해 집단들이 얽히면서 다툼도 많고 문제도 많다. 내부적으로도 치안 문제니 인구 밀도 문제니 복잡한데, 관광객도 많으니 그들에게도 그러한 문제들이 옮겨 가게 되는 것이었다.

조금 더 깊게 알아보려면 훨씬 복잡했지만, 피상적으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도시는 아니었다.

빅토르는 조심스럽게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과 동시에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쳐선 안 된다는 딜레마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내려는 것 같았다.

난 넌지시 빅토르를 불렀다.

“저기, 빅토르.”

“예. 아가씨.”

빅토르는 올 게 왔다는 듯 약간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불쑥 물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들 미리 공부해 오신 건가요?”

내가 말해 놓고도 조금 엉뚱한 질문처럼 느껴지긴 했다.

예상 못한 질문이라는 듯 빅토르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답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게 설명해 주시려고요?”

“기본적으로는 경호를 위해서입니다만, 조금은 아가씨에게 말씀드리기 위함도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선 내가 가는 곳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고 미리 대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 도시에 대해 무작정 아름다운 기억만 가지는 것보단 조금 더 객관적인 기억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난 도저히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빅토르도 미소를 지었다.

난 다시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고, 비가 내리는 파리 시는 여전히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만 보였다. 내 심미안을 만족스럽게 충족시켜 주었고, 범죄라곤 결코 있을 수 없고, 깨끗하고 멋진 도시로 보인다.

하지만 맹목은 좋지 않다고 했었지. 난 파리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맹목을 조금 벗을 수 있었다. 그다음은? 믿고 있던 것을 배신당했으니 환멸하고 멀리해야 할까?

아니, 난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알게 됨으로서 난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이다음은 내가 고심해서 선택해야 할 일이었다.

난 다시 창밖을 본다.

예술도, 사람들도 샐러드 볼처럼 되어 있는 도시를 본다.

“…….”

그래도 역시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둡지만 다채롭고, 소슬하면서 화려하다.

난 조금 더 진심으로 이 도시를 좋아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

우리가 예약한 곳은 파리 시내의 특급 호텔이었다.

입구부터 러시아와 다른 화려한 프랑스식 장식 예술의 극치가 펼쳐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고급 호텔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오십시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님.”

젊은 남자가 나와서 우릴 맞이해 주었다. 복장이나 태도로 보아 이 호텔의 컨시어지인 것 같았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러시아에서 왔다는 정보는 이미 알려졌는지 그가 러시아어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멀리에서 러시아말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이 호텔의 서비스가 굉장히 수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짧은 인사가 끝나고, 컨시어지는 우리를 스위트룸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냥 스위트룸도 아니고 무슨 어마무시하게 긴 이름의 스위트룸이었는데, 저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묵었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의 친구처럼 들리는 이름이었다. 가격도 만만찮을 것이 분명했지만 일부러 묻거나 하진 않았다.

스위트룸에 올라오니, 우릴 안내해 준 컨시어시가 품위 있게 인사하며 말했다.

“편히 쉬어 주십시오.”

“고마워요.”

“문의할 것이 있으시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즉시 전화나 태블릿PC로 담당 집사인 저, 알랭을 불러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 호텔에선 컨시어지를 집사라고 하는 것 같다. 우리 집의 고용인분들 중엔 진짜 집사분들이 있기도 했지만 호텔에서 듣자니 꽤 생소했다. 하지만 멋지게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스위트룸에 들어가는데, 빅토르가 멈춰 섰다.

“전 이 호텔 경비팀과 잠시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그럼 편히 쉬십시오, 타티아나 아가씨.”

“아…….”

깍듯하게 말하는 빅토르는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익숙한 일이긴 했지만 약간 아쉬움이 남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빅토르가 장난스레 아까 알랭이라고 했던 남자를 따라서 품위 있게 인사하며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즉시 담당 경호원인 저, 빅토르를 불러 주십시오.”

“아하하하.”

결국 난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빅토르가 일을 하러 가고, 스위트룸에 남은 우리들은 호화로운 가구들과 장식들을 거의 박물관을 구경하듯 구경했다. 프랑스식 고급 호텔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이 의자랑 탁자 정말 예쁘다. 말도 안 돼…….”

“정말요.”

“내 방에도 두고 싶은데……. 이게 어울리려면 방의 벽지와 바닥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다 여기에 맞춰야겠지……?”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그녀가 예쁜 구두를 하나 사서는 그 구두에 맞추기 위한 옷과 가방, 헤어스타일과 손톱 색까지 고민하는 것을 보기도 했었다. 그녀의 눈에는 시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조화라는 것이 그냥 보이는 모양이었다.

난 귀는 조금 좋아서 소리로 된 구조와 조화는 듣는 것만으로도 알고 짜 맞출 수도 있었어도 아나스타샤가 지닌 눈은 없었기에 그녀를 보면 항상 조금 신기했다.

우리는 그렇게 프랑스 문화재 같은 스위트룸을 조금 돌아보고, 이 호텔에 어떤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는지도 확인했다.

팸플릿 같은 것이 있진 않았다. 다만 테이블 위에 태블릿PC가 하나 놓여 있었고, 이것으로 모든 것이 가능했다. 러시아어를 선택한 뒤 화면을 넘겼다.

실내 수영장과 스파, 정원, 4개의 레스토랑, 5개의 바, 테라스, 부티크, 헤어 살롱, 피트니스 스튜디오 등등. 정말 다양한 시설들이 호텔 내에 위치했다.

특이한 시설도 있었다.

“와인 양조장?”

프랑스의 호텔 아니랄까 봐 와인에 대한 서비스가 투철한 건 이해하지만, 양조장이 왜 있어야 하는진 잘 모르겠다. 신기했다.

난 다른 것을 짚어 냈다.

“도서관도 있네요.”

“그러게. 처음 봐 이런 건.”

여유 있게 호텔 내 도서관에서 와인을 마시며 독서를 할 수 있기도 한 것 같았다. 수영장이나 스파가 갖춰져서 몸의 피로를 풀 수 있게 해 주는 호텔은 봤지만 이렇게 정신적인 피로도 신경 쓰겠다는 듯 도서관도 갖춘 호텔은 정말 처음이었다.

어쨌든 그런 특이한 시설들은 다음에 본다고 하고, 당장 아나스타샤가 관심 있어 한 시설은 한 곳이었다.

“그보다 우리 일단 스파에 안 갈래? 오늘 피곤하기도 하고……. 프랑스의 스파도 궁금하지 않아?”

“아? 예. 그래요.”

“그럼 가자. 어딘진 아까 봤어.”

일단 스파라는 말은 조금 웃기게 들리기도 했지만, 난 아나스타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

그리고 스파 서비스가 끝난 1시간 뒤. 나는 이런 스파 시설을 집에 갖춰 놓으려면 얼마가 필요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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