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7월 파리의 하루는 긴 편이었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오후 10시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긴 하루의 절반은 파리 시를 둘러보고 남은 절반은 호텔을 둘러보는 데에 썼다. 아나스타샤와 함께 워낙 재미있게 보내서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스파부터 시작하여 헤어 살롱에 갔다가 부티크에서 쇼핑을 하고 레스토랑에서 식사까지. 어느 하나 아쉽거나 불만족스러운 것 없이 최고라고 느껴졌다.
특히 스파나 헤어 살롱 같은 경우 똑같은 수준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 집에 만들어 놓고 싶을 정도였다. 집에 그런 시설을 만든다고 해도 아버지나 오빠가 쓸 일은 거의 없을 테니 내 전용이 되어 버릴 게 뻔했지만.
그게 꽤 부담스럽게 느껴지더라도 일단 만들어 놓고 집에 있는 고용인 분들도 같이 사용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최고의 복지시설이 되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도 스파라면 꽤 자주 다녀 보았지만 파리 최고 특급 호텔의 스파는 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감탄과 감동을 연신 발하며 아나스타샤와 돌아다니다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때가 되어 객실로 돌아왔다.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잠시 쉬고 있자니, 해가 뉘엿뉘엿 지다가 금방 밤이 찾아왔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마무리 짓는 의미로 테라스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파리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예뻐라…….”
불빛이 화려하게 번쩍이는 에펠탑을 보며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난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달빛과 테라스의 조명 그리고 도시의 불빛만이 우리를 비췄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리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나스타샤.”
“으응?”
“피곤하신가요?”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시차가 나는데.”
“시차라고 해 봐야 1시간밖에 안 나는걸요…….”
“그 1시간이 얼마나 큰 차이인데.”
“그래서 비행기에서 조금 자기도 했었잖아요?”
“…….”
내가 맞는 말만 계속 하자 아나스타샤가 약간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난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도 따라 웃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홍차 잔을 살짝 기울이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목을 축인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재미있었어…….”
“저도요.”
우리는 야경을 바라보며 한가하게 파리의 밤을 만끽했다.
에펠탑은 반짝거리다가 잠시 전체적으로 밝아지더니, 갑자기 등대처럼 긴 빛을 쏘아 올렸다. 어디를 비추는 것인진 잘 모르겠지만 어떠한 행사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기도 했지만, 아마 그랬다면 너무 높은 에펠탑을 한눈에 다 보지 못하고 고개를 들고 있느라 목이 아팠을 것이다. 이렇게 호텔 테라스에 앉아서 보는 것은 확실히 편했다.
잠시 그렇게 구경하다가, 아나스타샤가 내일 일정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연주회는 모레라 그랬고, 내일은 뭐 할까? 역시 루브르?”
“그게 좋겠죠? 바로 앞 튀일리 정원까지 구경했으니까……. 일부러 선형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루브르 박물관에 가 보고 싶긴 해요.”
“그다음은?”
“오르세 미술관이겠죠?”
“선형적이네. 다음은 조르주 퐁피두 센터?”
“어……. 글쎄요?”
역시 그것이 합리적인 순서라고 생각하는지, 아나스타샤는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라 할 수 있는 곳들을 순서대로 나열했다.
가장 먼저 고대에서부터 19세기까지의 예술을 전시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19세기의 예술을 보여주는 오르세 미술관, 마지막으로 20세기 이후의 현대예술을 담당하는 조르주 퐁피두 센터.
난 앞의 루브르와 오르세엔 정말 관심이 많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문화의 최전방에 서서 창의적이어야 할 예술가의 태도로 보자면 그리 올바르다고 할 순 없겠지만, 우리 클래식 음악가들에겐 약간 딱딱한 보수적인 기질 같은 것이 있었다.
그냥 조금 고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자기 평가에 기반한 약간의 체념을 떠올리고 있자, 아나스타샤는 내 얼굴을 보더니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아뇨, 싫은 건 아니에요.”
“싫은 게 아니긴. 어차피 우린 이런 사람들이야.”
“이런 사람이요……?”
“최소 100년 이상 되지 않은 것들에선 감동을 못 느끼는 사람들.”
장난스러운 미소가 내게로 향한다.
아나스타샤는 나보단 훨씬 적극적이고 세련된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그녀 역시 본연의 예술성에서 비롯된 정체성은 클래식 음악가인 것이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겠다는 듯 키득거렸다.
난 살짝 반항하고 싶어져서 입을 열었다.
“그건, 아나스타샤.”
“비약 좀 해 봤지롱.”
할 말이 없다.
비약이라고는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내가 항복하자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래도 한 번 가 볼래? 오늘 그랑 팔레에서 본 현대미술이랑은 또 다를지도 모르잖아?”
“가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그래. 재미없으면 나오면 되는 거니까.”
그랑 팔레에서 모니터에 입김을 불면서 우리는 좌절감 비슷한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한 부분만을 보고 무언가 결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난 아나스타샤의 제안에서 맹목에서 벗어나 보자는 의지를 발견했고, 동의했다. 파리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워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후로도 계획을 짜 나갔다. 우리의 여행 계획은 시작부터 상당히 느슨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블릿PC로 유명 명소들을 휙휙 돌아보다가 예뻐 보이면 짚는 것으로 간단간단하게 행선지들이 정해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꼭 가 봐야겠네.”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사크레쾨르 대성당도 가 보고 싶어요.”
“그것도 괜찮지.”
아나스타샤는 의자에 앉은 채 야경을 내려다보며 찻잔을 기울였고 나는 테이블에 팔을 기대고 태블릿PC의 화면을 넘겼다. 파리 밖의 다른 관광지들의 소개도 있었다. 천천히 하나하나 읽어 주었다.
“베르사유에 있는 베르사유궁전도 반드시 가 봐야겠어요. 사진만 보아도 정말 예쁘네요.”
“그래, 그러자.”
“그리고 아비뇽 교황청이라든가…….”
프랑스는 넓은 나라였고 파리에만 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많은 관광지들이 있었고, 우리가 원한다면 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동 수단이나 시간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든 가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만만하게 화면을 휙휙 넘기던 나는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해변에 대한 관광 가이드를 찾아냈다. 그리고 생각을 약간 고쳐먹었다. 여름이긴 해도 거기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맹목에서 벗어나 직접 보고 실망도 하고 감동도 하면서 제대로 된 관념을 쌓는다는 건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커다란 문화에서 조금 얕게는 취향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불쑥 물어보았다.
“연주회는 내일모레라고 했었지?”
“예. 맞아요.”
“그것도 기대되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라고 하니까 잘 했으면 좋겠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특색 있는 관광지들을 여행하는 것도 즐겁지만, 역시 음악가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클래식 연주회 관람은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인 것이다.
***
파리 여행 2일 차. 우리는 아침 일찍 튀일리 정원을 다시 산책하면서 이탈리아식 정원의 묘미를 마저 만끽하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직행했다.
고전적인 디자인의 건물들 한가운데에 유리로 된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는 건 처음 봤을 땐 정말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것을 느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박물관의 도슨트 서비스로 제공되는 디바이스가 닌텐도 게임기였다는 점이다. 정말 온갖 문화가 섞인 파리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루브르 박물관에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던 것 같다. 이전에 가 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박물관, 영국 블룸즈버리의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것은 절대 허명이 아닌 것이다.
팔과 머리가 없는 사모트라케의 니케, 그리고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 등 조각상들을 구경하면서 사람 이름인 줄 알았던 사모트라케와 밀로가 조각상이 발견된 그리스 섬의 이름이라는 설명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나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같은,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회화 작품들도 정말 많이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작품 중 최고봉은 역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였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작았고 구경하려는 사람들은 많아서 가까이서 보기 상당히 힘들었다.
수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도 나는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라는 18세기 화가의 퐁파두르 후작 부인 초상화 앞에서 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로코코 양식의 절묘한 아름다움을 너무나 잘 그려 낸 그림이었는데, 화려한 드레스와 배경에 놓인 클라비코드가 인상적이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클라비코드의 실력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루브르를 제대로 돌아보려면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은 필요로 할 테지만, 내게 그 정도 체력은 없었기 때문에 점심 즈음엔 루브르에서 나왔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는 미리 계획했던 대로 차례로 오르세 미술관과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도 가 봤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나 로댕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꽤 즐거웠지만, 마지막으로 들린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나온 나와 아나스타샤의 감상은 단순했다. 역시 우리들이 20세기 이후의 예술작품을 감상하기엔 공부가 모자라다는 것이었다.
미술관을 세 개나 돌고나니 하루 종일 예술 작품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기분이었다.
상당히 피로하고 머리에 쌓인 것들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지만 그냥 호텔로 돌아가긴 아쉬워서 근처의 뤽상부르궁전까지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로 사흘째다.
“……하악.”
“괜찮아……?”
아나스타샤가 걱정스레 날 돌아보았다. 난 씩씩하게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안쓰럽다는 듯 근처에서 사 온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푸니쿨라 타자니까…….”
“…….”
계획은 완벽했다. 3일 차인 오늘, 오전엔 노트르담대성당을 보고 바로 옆의 마레 지구에서 쇼핑을 조금 하고, 오후에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몽마르트르 언덕과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관광하기로 했다.
오전엔 아무 문제없이 행복했다. 노트르담대성당은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백 배는 훌륭했고 마레 지구도 깨끗하고 재미있었다.
문제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생겼다. 밑에서 보니 얼핏 보기에 오를 만하게 보였고, 이름도 언덕이니 아나스타샤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 볼 만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간 건강도 꽤 많이 좋아졌고, 요 이틀간은 많이 걸으면서도 크게 체력 부담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기에 나름 자신 있게 앞장섰는데…….
왜 언덕이라는 곳에 꼭대기까지 가는 산악열차인 푸니쿨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야 했다. 내가 얼마나 바보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객관적으로 보아 사람이 못 오를 정도로 높은 것은 아니라서 어떻게든 다 올라가긴 했지만, 난 체력을 거의 모두 끌어다 쓴 기분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육체적 한계가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피아노 건반과 마주해서도 중력이 얼마나 무겁고 내 몸은 얼마나 둔하고 허약한지 느끼곤 하지만, 그래도 계단을 오를 때에 비하면 피아노 앞에서 나는 정말 자유로운 편에 속했다. 너무 힘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준 음료수를 마시니까 정신이 조금 돌아온다. 힘들어서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잠시 계단 옆 경사진 들판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쉬었다. 따사로운 7월의 햇빛과 다양한 언어들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나와 아나스타샤 말고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들판에 앉아서 햇빛을 쬐고 있었다. 이 일광욕은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코스 중 하나인가 보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 잠깐 계단을 오르면서 노곤해졌던 몸이 조금씩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무거워졌던 팔다리도 점차 가벼워지고 호흡도 편해져 간다.
평상시엔 느끼지 못하지만 난 종종 이럴 때 현실감을 느낀다.
새삼 웃음이 나온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
고개를 바짝 들어야 할 정도로 높은 천장과 신비로운 빛을 성당 전체에 흩뿌리는 스테인드글라스. 수준 높고 엄격한 권위와 힘을 느낀다.
신성함이라는 것이 아름다움이나 근사함 같은 가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어떠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신성했다.
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보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
사실 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늘 원해 왔다.
약간의 합리성과 유혹을, 정말 매력적인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난 여전히 음악의 독실한 신자일 뿐이었다.
지금 이 웅장한 성당을 보고도 중세시대 있었던 음악사 등을 떠올리는 것밖에 하지 못할 정도로.
“…….”
난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의 팔을 이끌었다.
“이만 가 볼까요.”
“응.”
아나스타샤는 이 성당을 더 보고 싶진 않은지 순순히 날 따라 나왔다.
성당 밖으로 나온 그녀가 내게 물었다.
“다음은 어디로 갈 거야?”
“성당이요.”
“응?”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과 얽혀서 말이 헛나갔다. 성당에서 나오자마자 성당으로 가자니 이상한 소리처럼 들릴 만도 했다. 난 고개를 젓고는 다시 말했다.
“콘서트홀로 가죠. 오늘의 마무리는 연주회이니까요.”
“슬슬 시간이겠네. 그러자.”
음악이 아닌 모든 잡음을 금지하고, 오로지 경건하게 감상만을 요구하는 콘서트홀이야말로 음악의 신자인 내게 있어서 성당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프랑스에서 듣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는 아나스타샤와의 파리 여행 3일 차를 마무리 짓는 일정으로 최고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