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에이전시 라파의 베르너 위넬은 난감했다.
1부가 끝나고 바로 연주자 대기실에 왔을 때, 피아니스트인 루이 디아라가 피아노를 교체를 요구하고 스테이지 매니저인 브뤼노 베르트랑이 거절하는 광경을 봤을 때만 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미처 몰랐다.
베르너는 대기실 안이 조금 합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제3자이지만 예리한 감각을 지닌 타티아나가 자신이 짚어 내었던 문제를 살짝 제시하고, 연주자인 루이가 동조하고 브뤼노가 인정하는, 그런 그림을 상상했다.
하지만 브뤼노는 피아노의 문제라는 것 자체를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 같았고, 당장 무대 위로 다 같이 올라가서 청중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에 피아노를 쳐 보면서 테스트를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은 훨씬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저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울적해 보이는 타티아나를 집어넣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가는 대화를 전하면서도 창피할 지경이라 베르너는 잠시 통역을 멈췄다.
그런데 타티아나가 불쑥 말했다.
“곤란한 상황이네요. 위넬.”
“저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 동행을 제안했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죠.”
“이해해요.”
타티아나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너는 이 진절머리 나는 상황을 보고도 그걸 안쓰럽게 생각할 수 있는 이 아가씨의 순수함에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죄악감을 느꼈다.
따라와 달라는 말에 긴 말 않고 따라와 주는 것을 봤을 때부터 느꼈던 죄악감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나서 베르너를 짓눌러 왔다.
그리고 기어코 죄악감으로 베르너를 죽일 생각인지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계속 알려 주세요.”
“…….”
당장 문을 열고 나가 버려도 아무도 말리지 않을 텐데도 타티아나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기분은 조금 안 좋아 보이긴 하지만 그 태도에선 어떠한 결연한 책임감 같은 것이 엿보이기도 해서, 베르너는 당혹스러웠다.
“피아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짚어 냈다는 것으로 책임감 같은 것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책임감이요? 아뇨, 제가 왜 책임감을 가져야 하나요?”
“그렇다면 왜…….”
“글쎄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듯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지켜보고 싶다는 것 같다.
베르너는 그녀가 베르체노프 콘체른이라는 어마어마한 배경을 등에 업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태도는 그런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베르너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타티아나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녀가 요청한대로 통역이나 계속 하기로 마음먹었다. 큰 연주회를 하다 보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겪어 보는 것은 그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
계속 언쟁 중이던 두 명 중 연주회용 턱시도에 갈색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 루이 디아라가 힐끔 시간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결 차분해진 어투로 입을 열었다.
『베르트랑 씨.』
그래도 무슈 베르트랑이라고 불러는 주는군. 베르너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말다툼중인 상대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주자와 협조를 해야 할 스테이지 매니저, 브뤼노 베르트랑은 대답하지 않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루이가 다시 말했다.
『5분 남았습니다. 지금 이렇게 시간 끌고 있을 때가 아니잖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언쟁할 사이에 피아노를 교체했다면 진즉에 했겠습니다!』
『하! 웃기는 소리!』
참다못해 다시 목소리를 키우는 루이에게 브뤼노도 지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브뤼노가 비웃음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홀 아래에 피아노가 준비되어 있기라도 한 것 같소? 버튼을 누르면 바닥이 열리면서 새 피아노가 짜잔 등장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우리 홀에선 피아노를 교체하는 데엔 최소 30분은 필요하오.』
『30분!? 너무 길지 않습니까?』
『전혀.』
『다시 말하지만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닌…….』
『지금 무대에 올라가 있는 피아노를 내리는 데에 10분, 다시 다른 피아노를 무대에 올리는 데에 10분, 그리고 그 피아노를 세팅하는 데에 10분!』
무어라 하려는 루이의 말을 끊으며 브뤼노가 손가락 세 개를 하나씩 접었다. 코앞까지 손을 보여 주며 소리를 치는 그 박력에 멀리 있는 베르너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백스테이지에 피아노를 쉽게 이동시킬 수 있게 준비되어 있는 홀이라면 모를까. 필하모니 드 파리 콘서트홀은 무대가 홀 가운데에 있는 빈야드 스타일의 홀인 데다가 피아노들을 보관하고 있는 악기 보관소도 거리가 있어서 500kg이 넘는 그랜드피아노를 운반하는 데엔 10분으로도 빠듯했다.
브뤼노는 마치 당신이 뭘 아냐는 듯 짝다리를 짚으며 조소했다.
『이봐요, 디아라 씨. 지금 누가 장난치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제발 그만하시오.』
『…….』
『쳇, 준비를 해 놓으면 불평을 할 줄밖에 모르지.』
베르너는 브뤼노의 비웃음을 타티아나에게 통역해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최대한 순화해서 말해 주었다. 타티아나는 별 반응 없이 듣기만 했다.
그렇게 바늘 하나 찔러 넣기 힘들 것같이 단호한 태도의 브뤼노에 비해 루이는 상당히 마음이 급해 보였다.
고민하던 루이가 결국 말했다.
『알겠습니다.』
『뭘 말이오?』
『제가 사과하면 되는 겁니까?』
『?』
정말 의외의 말이라 브뤼노는 물론이고 베르너도 놀랐다. 저 강경한 태도의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사과하겠단 말을 할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루이는 그냥 꺼내 본 말은 아닌 듯, 조금 더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피아노에 대해 까다롭게 군…… 아니, 아침부터 전화상으로 언성 높인 것 사과드립니다. 그 사고에 대해…….』
『사고? 이젠 사고라고 말해 주는군. 일찍이 뭐라 그랬소? 내가 미안하다고 했더니 수작 부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운반 중이던 피아노에 고장이 생겨 무대에 올리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루이가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항의한 모양이었다. 베르너는 혀를 찼다. 모든 문제는 혓바닥에서 생긴다고 하지.
루이가 재차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그게…….』
『하하하하, 웃기는군. 그래서?』
『…….』
웃는 브뤼노를 앞에 두고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듯했지만, 결국 루이는 그 자존심을 굽혔다.
『2부도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인터미션을 연장하고 피아노를 교체해 주셨으면 합니다.』
『…….』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이 다른 모든 자존심을 꺾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연주회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 나가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루이는 그렇게까지 막돼먹은 연주자는 아니었던 듯하다. 어떻게 해서든 2부에선 제대로 실력을 보이고 싶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그가 이어 말했다.
『……물론 인터미션을 연장하면 불만이 많아지겠죠. 제가 모두 받아 내겠습니다.』
『그런 역할도 중요하지.』
『그럼…….』
『하지만 거절하겠소.』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였는데도 브뤼노는 거절했다. 이쯤 되니 베르너가 화가 날 정도였다.
브뤼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피아노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지……. 그 피아노는 리허설실에 있던 것이긴 하지만 2년 전에 모든 현을 교환했고 아무 문제없이 사용하던 피아노요. 조율도 조정도 꾸준히 받고 있고, 모든 것이 다 기록으로 남아 있소. 보증서가 있는 고급 와인처럼 말이오.』
『…….』
『난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와인의 바디감이나 당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고 있소.』
『……하지만.』
『하지만은 하지만에서 그쳐 주시오.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테이블 위의 반쯤 마신 와인을 바꾸겠다고? 우리 홀에서 지난 3년간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소.』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언제나 피아니스트의 요구를 모조리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 정도면 피아니스트가 피아노가 이상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줄 만도 한데, 브뤼노는 그럴 리 없다며 딱 잘라 대처하고 있었다.
반복하는 이야기는 피아니스트의 사과가 있었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베르너는 타티아나에게 그냥 나가도 된다고 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통역을 원했다. 베르너는 그녀를 이곳에 데리고 온 책임이 있으므로 멋대로 나가자고 할 수 없었다. 베르너는 천천히 두 사람의 프랑스어 대화를 통역해 주었다.
머리가 아픈지 루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제가 더 뭘…….』
그때, 베르너는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베르너 위넬.”
“……?”
내려다보니 타티아나가 올려다보고 있다.
베르너가 통역해 준 대화를 곱씹어 보고, 무언가 결정했다는 눈빛이었다.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베르너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베르너도 지금 타티아나와 비슷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아가씨, 정말 마음에 든다.
『베르트랑 씨.』
베르너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스테이지 매니저를 불렀다.
브뤼노 베르트랑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오? 에이전트.』
무슨 일인지 지켜보고 있어서 다 알고 있건만, 뻔뻔한 태도였다. 하지만 말꼬리를 잡을 필요는 없었다. 베르너가 말했다.
『왜 이야기가 복잡해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르트랑 씨, 피아노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청중 중에도 있습니다.』
『청중 중에?』
타티아나를 전면에 내세울 생각은 없었지만, 브뤼노의 시선이 자연스레 베르너의 뒤편으로 향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궁금해했던 모양이다.
『저 아가씨들?』
『그렇습니다.』
『허, 대단하구먼. 정확히 뭐라고 합디까? 피아노 소리가 이상한 이유가 누가 봐도 명백히 100% 피아노 탓이랍니까?』
베르너는 타티아나가 말했던 감상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피아노의 음색이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가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그게 디아라 씨가…….』
『아뇨, 그다음 정확하게 피아노를 바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대책까지도.
브뤼노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틀었다. 그 시선이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브뤼노가 물었다.
『우리나라 아가씨들은 아닌 것 같은데.』
『러시아에서 오셨죠.』
『오! 러시아! 훌륭한 오케스트라엔 박수가 절로 나오더군. 에이전트도 러시아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소?』
『전 독일인입니다. 러시아에 살고 있긴 하지만.』
『복잡하군.』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큭큭 웃던 그는 머리를 바로하며 돌연 퉁명스레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어쩌란 말이오?』
『인터미션을 연장하고 피아노를 교체해야 한다고 봅니다. 2부는 베토벤이지 않습니까?』
『오호, 그래서 1부의 모차르트를 연주했던 피아노가 교체해야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콩코르드광장에 끌려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 되겠군?』
『베르트랑 씨.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사과는 디아라 씨가 같이 해 주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말이오, 피아노에 문제는 없소.』
브뤼노는 세상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그럴 일은 없다는 듯 단호하게 툭 내뱉었다. 베르너는 높다란 담벼락이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종종 느끼곤 하는 점이지만, 이렇게 독단과 아집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말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거의 절망하는 베르너의 표정을 보고도, 브뤼노가 자신의 말이 정론이라는 듯 말했다.
『러시아 아가씨들을 이렇게 연주자 대기실로 오시게까지 한 건 참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덜컥 피아노를 교체할 순 없소. 30분이나 걸려 가면서. 하지만 힘든 걸음 해 주신 아가씨들에게 우리가 해야 할 건 있지.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라 씨.』
『…….』
1부 프로그램에 대해 문제가 있음을 짚어 낸 청중에게 연주자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루이 디아라는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곧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진지하게 사의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
타티아나는 프랑스어를 모르지만 어렴풋이 뉘앙스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표정을 했다. 물론 기뻐하진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되레 더 어두워졌다.
베르너는 우울했다. 스테이지 매니저는 꼴통이었고 피아니스트는 기운이 없었고 오케스트라는 진절머리 난다는 태도였다. 대체 이 상황에서 에이전트가 무엇을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타티아나가 조용히 말했다.
“위넬. 제 말을 전해 주실 수 있나요?”
“아무 말씀 않으셔도 됩니다만.”
“알고 있어요. 제가 말할 상황도 아니고 자격도 없다는 건. 그래도 부탁드릴게요.”
베르너는 순간 타티아나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화상으로도, 실제로 만났을 때도 그녀는 품위 있는 어조를 사용했지만, 이번엔 정말 열다섯 살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아한 분위기가 드러났다.
굳이 발을 담글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서 베르너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통역을 맡으면서도 브뤼노 베르트랑이 이상한 소리를 하면 곧바로 통역을 멈추고 자신이 나서서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타티아나의 감상에 혹해서 그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그의 책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