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294화 (294/1,277)

##  294화

타티아나가 브뤼노를 향해 인사했다.

“스테이지 매니저님. 전 타티아나라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학생이죠.”

갑자기 정중한 인사부터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브뤼노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인사는 러시아어였지만 그 목소리와 자세는 언어를 초월하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브뤼노는 베르너의 통역을 듣고서야 곧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반갑군요, 타티아나.』

“실례인 줄은 알지만, 스테이지 매니저님에게 드리고자 하는 중요한 말이 있어요. 잠시 괜찮을까요?”

『아, 하시죠. 하시죠.』

허락을 구한 뒤 타티아나가 말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진 우리 에이전트님을 통해서 들었어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스테이지 매니저님은 지금 무대에 올라가 있는 피아노로 2부에서도 충분히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죠?”

『그렇소만?』

“그리고 피아노가 안 좋다면 안 좋은 대로 그건 연주자인 루이 디아라께서 잘 연주하셔야 할 일이고요. 연주자는 피아노를 고르기도 하지만 무대 위에 올라온 피아노는 그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컨디션 탓이나 피아노 탓 등……. 무대 위에 오른 연주자는 자신의 실력 외에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죠.”

타티아나는 자신을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라고 소개했으므로 당연히 루이 디아라를 옹호할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정반대였다.

브뤼노도 약간 예상 밖이라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대답했다.

『……정확하군요.』

놀라워하는 브뤼노를 향해 타티아나는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스테이지 매니저님, 제가 청중 대표는 아니지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듣도록 하죠.』

“저 피아노로 베토벤을 연주하면 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소란스러워 질 거예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차분하게 말하고 있지만 내용은 심각했다. 단순히 연주의 수준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보다 큰 문제가 터질 것이란 뜻이었다.

타티아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브뤼노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을 땐 천사처럼만 보이던 모습이 차가운 시베리아의 냉기를 드러냈다.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 분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 주셨죠. 하지만 베토벤은 그렇게 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이런 말 들어 보셨나요. 음악은 인간이 휘두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라는 말.”

『……?』

엉뚱한 말을 하는 것 같더니, 그녀는 마치 멸망을 예고하는 예언자처럼 선언했다.

“그 마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언짢음과 분노를 심을 거예요. 베토벤을 타고 더욱 강력하게.”

『…….』

베르너는 한참이나 어린 소녀에게 이렇게까지 압도당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브뤼노는 그런 베르너보다 더 당황한 듯했다.

그가 빠르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군요. 그래서요? 당신도 위험하니 조심해라?』

“아니오. 그 분노에 직격당하는 건 피아노 연주자겠죠.”

타티아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가장 큰 책임자는 루이 디아라다. 피아니스트는 청중들에게 변명할 수 없다. 그건 확실했다.

그녀는 다시 그렇게 못을 박고는, 처연한 미소를 띠었다.

저열한 협박 같은 것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진심어린 걱정과 부탁이 이어졌다.

“하지만 스테이지 매니저님이 도와주신다면 막을 수 있어요. 루이 디아라께서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최선을 다해 좋은 베토벤을 연주해 주실 테고, 청중분들은 감동하실 테고, 스테이지 매니저님은 만족할 수 있을 거예요.”

『…….』

타티아나는 그야말로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한마디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잊고 있던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

타티아나는 브뤼노에게 지금 당신이 권력 남용을 하고 있는 건 알고 있냐고 일부러 자극하는 말을 하진 않았다. 그녀는 단지 무대를 걱정할 뿐이었다.

그녀가 무대 위의 피아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굉장히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져 왔다.

베르너는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브뤼노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리라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결국 똑같은 말 아닙니까. 피아노가 마음에 안 드니 바꿔라, 그걸로 해결된다. 그렇게 음악이라는 것이 쉽게 보입니까?』

그는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며, 더욱 크게 보이려는 듯 어깨를 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웃으며 답했다.

“아뇨. 제게 있어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음악인걸요.”

『…….』

한 치 거짓 없는 진심이라는 것이 전해졌기에 비꼴 수도 없었다.

브뤼노는 정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지만, 결국 한풀 꺾인 태도로 중얼거렸다.

『피아노를 교체해서 해결된다면 다행이지만,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브뤼노는 아무리 그래도 열다섯 살에게 어떻게 책임지겠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결국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와 루이다.

거기에 타티아나는 약간의 믿음을 더했다.

“적어도 피아노의 문제는 해결될 거예요.”

『그래서 그 피아노의 문제라는 게 대체 뭡니까?』

“……현의 문제일 수도 있고, 해머의 문제일 수도 있고 브릿지나 음향판의 문제일 수도 있겠죠.”

『장난합니까?』

타티아나는 정말 대단한 감각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멀리서 듣고 피아노의 어느 부분에 결함이 있다고 딱 짚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초인은 아니었다.

브뤼노는 얼굴을 굳히더니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인터미션이 거의 끝나 가는군요.』

“…….”

좋게 되어 가려는 듯 했지만 결국 브뤼너는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려는 듯했다.

타티아나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게 몇 초,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섬뜩하게 일렁이는 의지가 있었다. 베르너는 숨도 멈추고 그녀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스테이지 매니저.”

『예?』

“그렇다면 인테르메조intermezzo를 허락해 주시겠어요?”

통역을 하던 베르너도 기겁했다. 인테르메조란 인터미션 사이에 연주되곤 하는 짧은 곡을 뜻한다. 한마디로 타티아나는 지금 빈 무대에 올라가서 인터미션 사이에 피아노를 만져 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끼고 싶지 않아 하고 조심스럽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의문이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자마자 타티아나는 정면으로 발을 디딘다.

브뤼노가 대번에 인상을 썼다.

『이 아가씨 정말 큰일 날 아가씨네.』

타티아나는 지지 않았다.

“더 큰일을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미치겠군.』

이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무대에 올라가서 문제를 증명해 보겠다는 도전.

***

스테이지 매니저 브뤼노 베르트랑은 정말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봐요, 러시아 아가씨.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3분 남았소. 청중들이 객석에 슬슬 앉고 있을 거요.』

시계를 툭툭 치면서 목을 빼는 모습이 상당히 위협적이다. 안 그래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몰려다니는 것이, 홀 안으로 청중들이 입장하는 모양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아가씨는 무대가 아니라 바로 그 객석에 가서 앉아야 하고.』

“그렇겠죠. 제가 여기에 없었다면요.”

『피아니스트들이란……!』

브뤼노가 프랑스어로 빠르게 중얼거렸는데 베르너는 거기까지 내게 통역해 주진 않았다.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베르너가 걱정스레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여기서 더 무언가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할 시간도 없고. 만일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면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그건 베르트랑도 바라지 않아요.”

정말 진심 어린 충고였다. 물론 여기까지 날 데리고 온 건 베르너였지만, 그도 상황이 이렇게 답답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적당히 내 말이 통할 정도의 상황이 아님을 알아차린 시점에서, 난 오케스트라와 인사나 나누고 그냥 빠져나오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난 타인의 일이라면 모를까, 피아노에 있어선 합리를 따져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방법이 있어요.”

“방법 말입니까?”

“예.”

“제가 생각하기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베르너는 내가 괜한 치기로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덤비고 있다는 것이 아니란 뜻으로 말했다.

“말씀처럼, 피아노의 트러블을 증명하기란 정말 어렵겠죠. 그것도 3분 사이에는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뛰어난 조율사도 그건 불가능해요.”

“조율사처럼 할 생각은 없어요. 전 피아노 연주자니까요.”

“지금 루이가 피아니스트로서 주장하는 말들이 모두 묵살당하고 있는 것 보고 있지 않습니까?”

같이 봤으니 잘 안다.

음색의 문제라는, 주관적이고 감각적이며 피아니스트의 문제일지도 모르는 모호한 문제는 피아니스트가 주장하기 어렵다. 주장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춰 주장해서 스테이지 매니저의 협조를 받아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협조는 완전히 틀어졌고, 브뤼노는 최근 몇 년 사이 피아노 수리 내역을 근거로 삼고 있었다. 그에게 대항하려면 피아노를 정말 분해해서 문제가 없는지, 장비로 밀리미터 단위로 조정이 잘 되었는지 측정해야 할 것이다. 무대 위에서 3분 사이엔 불가능하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난 발상을 바꿔 생각해 보았고, 결론을 끌어냈다.

“같은 말을 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면요?”

“문제를 증명하긴 어렵지만 피아노를 교체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을 거예요. 스테이지 매니저뿐만 아닌 청중 모두에게.”

“연주로 말입니까?”

“연주로 말이죠.”

“도저히 전…… 잘 모르겠군요.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준비도 없이 무대에 서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진심으로 염려하는 그 말에 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말 정말 많이 들어요.”

그리고 내가 그런 말을 들을 때, 결국 내가 답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단순해요. 제가 피아노 연주자이기 때문이죠.”

“그건 설명이 안 됩니다만. 지금 조금 흥분하고 있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당신처럼 침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요.”

“예? 아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심각하게 날 생각해 주는 베르너를 보고 웃어 버리는 건 정말 예의가 아니었다. 비웃을 의도는 없었기에 황급히 사과했다.

“웃어서 미안해요. 웃을 때가 아닌데. 하지만 위넬. 전 그렇게 침착한 사람도 아니고 예의바른 사람도 아니랍니다.”

“예……?”

“시간이 없어요. 스테이지 매니저님께 전해 주세요. 예로부터 인터미션 사이에 찬조 연주자가 인테르메조를 연주하거나, 더 나아가서 청중에게 마스터클래스를 해 주는 일도 있지 않냐고 말이죠. 무대에 청중이 올라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기가 아니에요. 그렇죠?”

베르너는 다시 한 번 걱정스레 날 내려다본다.

그냥 그가 통역을 그만두겠다고 말한다면 내가 스테이지 매니저에게 허락을 구하는 길도 막혀 버릴 것이다. 거기에서 끝이었다. 베르너는 날 강제로라도 그만두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기대감과 열기가 엇비친다. 결국 사람이란 언제나 합리적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악장,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오케스트라 역시 이 연주회의 관계자이니 의견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정말 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심각한 와중에 정말 미안하지만 전 사실 기대가 되네요. 타티아나. 당신의 실력은 콩쿠르에서 봤었거든요.”

오늘 처음 본 크리스티나는 당연히 나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실력을 믿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멋지네요. 실력도 있고 자긍심도 강하고. 어려서일까요?”

“죄송해요.”

“아, 오해하지 말아요. 뭐라 하려는 건 아니니까. 타티아나나 루이의 말처럼 피아노에 문제가 있다면 어차피 이대로 2부를 시작해 봐야 엉망일 뿐이죠. 아시다시피 베토벤은 그리 녹록치 않거든요.”

“…….”

“뭘 하실지 짐작조차 안 가지만, 저 바보 같은 프랑스 남자들이 쓸데없는 짓 하는 걸 어떻게 끝내 줄지 기대해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어차피 연주회를 그대로 해 봐야 기분만 나빠질 판인데 때마침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눈빛이기도 하고, 어쨌든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착각해선 안 된다. 내가 잘못하면 저 눈빛은 안쓰러움으로 변할 테니.

베르너는 어이가 없는 듯했지만, 러시아 여자들이 정말 만만찮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결국 브뤼노에게 통역을 했다. 브뤼노가 곧장 답했다. 난감하다는 투가 역력하다.

『당혹스럽군요.』

“필하모니 드 파리엔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세션을 위한 장소도 있을 정도로 클래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디렉토리를 다루는 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건 콘서트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하지만 제가 무대에서 인테르메조를 연주한다고 해서 청중들이 경악해서 다짜고짜 비난을 퍼붓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죠? 프랑스 시민들은 톨레랑스를 아는 시민들이니까요.”

『…….』

시간이 없다. 브뤼노야말로 내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다분히 억지를 쓰는 한이 있어도 일단 빠르게 허락을 얻어 내기로 했다.

관용을 뜻하는 톨레랑스를 언급하기까지 한 내 설득이 먹혔는지 아니면 당돌한 도발로 받아들였는지, 브뤼노 역시 베르너와 비슷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대신 그 표정엔 살짝 노기가 스민다.

『좋아요. 러시아에서 온 멋진 아가씨. 해 보시죠. 딱 3분간 인테르메조를 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피아노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지 직접 만져 보고 날 납득시켜 보시죠.』

“감사합니다.”

『웃지 마시죠. 만약 이도저도 아닌 억지로 드러나고, 최악의 경우 무대 위에서 실수라도 한다면 아가씨도 2400명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우리들은 톨레랑스를 알지만 그것을 용서의 개념으로 사용하진 않소.』

겁을 준다. 윽박지르려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이란 뜻이었다.

난 싱긋 웃으며 답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뤼노는 정확히 20초 후에 무대 위로 나오라면서 먼저 후다닥 움직였다.

그가 사라지자 대기실 안에 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난 옆에서 레이저처럼 시선이 와 닿는 것을 느낀다. 돌아보니 아나스타샤가 거의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조건 사과했다.

“미안해요. 또 저질러 버렸어요.”

“정말…….”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저 스테이지 매니저라는 사람 정말 마음에 안 들긴 했는데……. 네가 이렇게 나설 줄은 몰랐네.”

“전 왜 이럴까요?”

“내가 알겠니?”

그녀가 투덜거렸다. 나 같은 애를 친구로 삼아서 머리 아파 죽겠다는 듯하다. 난 웃어 버렸다. 미안해요, 아나스타샤.

하지만 걱정과 별개로, 그녀는 나를 믿는다. 아마도 이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선 제일로.

“방법이 있는 거지? 타티아나.”

“해 봐야 알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지 말고.”

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웃어 보였다.

“지켜봐 주세요.”

아나스타샤는 잠시간 날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제 생기면 빅토르한테 연락해서 너 데리고 무조건 도망치라고 할 거니까 알아서 해.”

꽤나 진지해서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아나스타샤는 날 응원하고 싶은 것이리라. 난 그녀의 응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시간을 보았다. 15초쯤 흘러 있었다.

난 작게 스트레칭을 했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것은 내 의상이었다. 얇은 원피스에 볼레로 차림이었는데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 무대에 나가도 될지 조금 걱정이다.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펑크하진 않으니 상관없긴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는데, 덩그러니 서 있던 루이가 날 보며 중얼거렸다.

“□□□ □□……. □□□□□ □□□?”

무슨 말인진 잘 모르겠고, 통역을 기다릴 시간도 부족하다.

난 러시아어로 답했다.

“미안해요, 시간이 없어서. 보시면 알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실 밖에서 관계자의 목소리로 들리는 목소리가 무대 밖으로 나와 달라고 말했다.

난 마지막으로 심호흡하고, 턱을 당기고,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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