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잘해서 될 일도 아니고 못해서 될 일도 아니다.
제대로 된 음색을 못 내는 피아노를 내가 어르고 달래서 잘 다뤄 낸다고 해도, 교체를 해야 한다는 명분이 사라져 버리고 결국 내가 무대에 오를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이상한 연주를 해 버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실력의 문제로 돌아갈 뿐이며 청중의 야유 등의 끔찍한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난 처음 대기실에서 상황을 듣자마자 이것이 어떠한 증명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을 파악했다.
피아노 연주자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난 연주회 관계자도 아니었으므로 얻을 것은 없고 잃을 것만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도 내가 나선 이유는 연주자이기에 할 수 있는 일도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
내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눈을 돌려 버려도 될 일이지만 연주자로서, 동시에 청중으로서 합리를 따지지 않고 올라왔다. 날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브뤼노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어쨌든 이제부턴 내 일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는 리사이틀이나 협연이나 할 것 없이 언제나 벌어지고 피아니스트는 능동적으로 순간순간에 대처해야 한다.
그것은 음악을 연주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고, 때론 능청스럽고 강경해야 한다.
난 다시 굳게 마음을 다잡고 무대로 향하는 입장로를 따라 걸었다.
“…….”
빈야드 스타일의 홀에서는 사방에서 청중들의 시선이 날아든다. 아직 인터미션 시간이라 이런저런 잡담과 소음도 함께 했다.
온갖 나라의 언어들이 웅성거렸다. 프랑스어처럼 들리는 것도 있고, 영어나 중국어도 있었다. 이 와중에 왜 내가 아는 말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할 일은 명확했으므로. 허리를 펴고 걷는다.
한 걸음씩 무대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정신적으로 더욱 견고해지고,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자세를 되찾는다. 입고 있는 의상은 드레스가 아닌 평범한 원피스였지만, 난 구애받지 않는다.
장소가 어디든, 입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향하는 곳에 피아노가 있고, 난 단지 맨몸으로 그 피아노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
천천히 피아노 옆에 서서, 청중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인테르메조를 연주할 것이라는 안내가 있었는지 없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연주회 도중에 난입한 것이나 다름없는 내 행위에 대한 작은 사죄와, 짧은 시간 동안 잘 부탁한다는 인사다.
빈야드 홀이다 보니 정면이랄 것이 없어서 좌우로만 두 번 고개를 숙였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난 정식 연주자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아노를 연주할 것이라는 것이 제대로 전해진 듯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청중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완전히 집중되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난 가장 먼저 피아노를 살폈다.
“…….”
스타인웨이의 콘서트용 그랜드피아노.
콘서트용 피아노 중에선 가장 좋은 물건 중 하나에 속한다.
난 손가락으로 피아노 옆을 슥 훑으며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현대 피아노는 브랜드에 따라 차이가 그리 크지 않으며 클래식 업계에서 과장하여 유난을 떠는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피아노 제작사 중에는 액션 구조의 일부에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 플라스틱을 사용함으로써 피아노의 고질적인 문제인 습기와 온도에는 조금 강해졌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라서 결정적으로 음색이 좋지 않다.
피아노는 모두 다르다. 제작사마다 다르고, 또 한 제작사의 같은 모델이라 하더라도 모두 다르다.
만져 보고 연주해 보면 터치와 음색에서 정말 많은 차이가 난다. 그건 결코 사소한 차이가 아니었다.
스타인웨이 같은 고가의 피아노에서 문제가 잘 생기기도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
비용이나 내구도보다는 음색을 무조건 최우선으로 따지기 때문이다.
“…….”
난 피아노를 돌아보며 음색을 최고로 추구하는 이 피아노에서 왜 음색에 문제가 생겼는지, 일단 눈으로 보이는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촘촘하게 매여진 현과 건반 쪽으로 현을 잡아당기는 튜닝 핀, 프레임을 천천히 둘러본다.
프레임에 나 있는 상처들이 보였다. 노장에게 새겨진 영광의 상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피아노가 꽤나 오래되었음이 느껴진다.
음색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부분 중 하나인 음향판과 브릿지도 살펴보았다. 피아노는 브릿지를 통해 현의 울림을 음향판에 전달해 큰 소리를 낸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
전통적이지만 역시 고가의 스프루스spruce 나무를 사용한 음향판이었다. 금이 가거나 깨진 부분도 없어 보였고, 눈으로는 잘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딱히 실망하진 않았다. 직접 나와서 잠깐 보고 문제를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피아노는 아주 정밀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었고 문제가 있어도 사람의 눈으로는 찾아내기 힘들다.
가장 정확한 것은 귀와 손끝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루이가 쓰던 것이라 그런지 조금 낮았다. 높이를 살짝 조절하고 앉았다.
건반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한다.
상황은 온전히 내 일로 넘어왔다. 연주자로서 느낀 음악과 내 판단, 그 모든 것을 증명해 보일 때였다.
허리를 틀고,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단 한 번의 기회. 온 신경을 집중한다.
라흐마니노프의 연습곡 op.39의 6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
어둡게 으르렁거리는 늑대와 같은 울음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섞이면서 흩어져 버린다.
첫 마디를 연주하자마자 귀와 손끝으로 문제들을 파악했다.
확실히 음색에 문제가 있었다. 모든 현을 교체한 지 2년이 지났다고 했던가. 콘서트홀에서는 모든 피아노의 현을 3년에 한 번 정도씩 갈아 주긴 하지만, 그건 무대에만 오르는 피아노일 때의 이야기였다. 리허설룸의 피아노는 훨씬 더 혹사당하고, 현의 수명도 짧아진다.
현의 탄력이 떨어져 배음이 제대로 발음되지 않아 음색이 밋밋해지고 거기에 음향판에 소리를 전달하는 브릿지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눈으로 볼 땐 몰랐지만 소리 사이의 빈틈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둔탁하게 바닥을 구르는 소리도. 구조적 문제가 생겨 있음이 확실했다.
그렇게 귀로 이 피아노를 파악함과 동시에, 손끝으로는 건반과 액션, 해머, 현, 모든 것을 느낀다.
피아노는 조율만으로 유지 보수가 끝나지 않는다. 거기엔 조정과 정음이라는 부분도 필요로 했다. 연주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을 피아노로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균일한 건반과 해머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 피아노가 균일한 건반을 가지고 있는지 손끝으로 확인한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올 뻔했다.
마음 같아선 반음계 스케일을 한 번 죽 연습해서 88개 건반 모두의 상태를 파악해 보고 싶었지만, 무대에서 그럴 순 없어서 바로 곡을 시작했음에도 문제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건반의 깊이와 무게가 평균적이지 않았다. 조금 무거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균일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상했다. 해머의 위치를 정하는 렛오프let-off도 평균보다 조금 멀었다. 그 외에도 여러 기계적인 뒤틀림이 있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선 내가 조금 예민한 편이지만, 일반적인 연주자들도 불편해할 정도였다.
“…….”
전체적으로 낡았고, 혹사당했고, 보수가 부족한 피아노였다.
그래도 피아노라는 악기는 상당히 강하므로 어지간해선 제대로 된 소리를 내어 줄 테지만, 어떤 불운이 겹쳤는지 구조적인 결함이 생겨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사람이 혹사당하면서도 몇 년이고 버티다가 어느 한 순간 병에 걸려 무너져 버리는 것처럼, 이 피아노 역시 병들어 있었다.
“…….”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멀리서 이 피아노의 소리를 듣고 짜증스러워하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마주하고 건반을 직접 눌러 보게 된 것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이 피아노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연주를 할 수 있는 피아노가 아니었다. 무대에서 내려야 했다.
문제는 피아니스트가 보기에 아파하고 있는 이 피아노가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기분이 안 좋아 보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브뤼노가 끝까지 고개를 저은 이유 역시 그것이었고.
“…….”
조금 화가 난다. 이 피아노를 보증서가 있는 고급 와인에 비유했던가? 하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아무리 고급 와인이라도 제 맛을 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난 그냥 연주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끌어안고, 독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곡을 계속해 나갔다.
프레스토의 빠른 속주가 이어진다. 음향판을 제대로 울리지 못하고 현에서 끝나 버리고 마는 소리가 끔찍하게 헐떡이는 신음처럼 느껴져서 듣기에 너무 괴롭다.
귀가 어지럽고, 내가 치고 있는 건반이 제대로 누른 것인지 의심이 간다. 귀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느껴지는 터치감도 건반이 아닌 자갈을 누르는 기분이었다.
이를 악물고 연주에 임했다. 내가 힘든 만큼 피아노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이 6번 연습곡은 연습곡답게 꽤나 어려운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곡이다. 특히나 빠른 속주는 손가락들의 독립을 극도로 필요로 하며 내성부를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
난 마치 바람처럼 모든 부분을 달려 나갔다.
연습실에서 몇 번이고 연습해서 체득한 테크닉이 건반 위로 쏟아지고, 음악을 뽑아낸다. 음색의 아름다움으로 음악을 만들기는 어려우니 비르투오시티와 화성의 강렬함에 중점을 두고 더더욱 빠르게 연주해 나갔다.
음악보다 연주 그 자체에 시선이 쏠리도록 하는 것은 내가 극도로 지양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피아노 대신 내가 시선을 받는 것이 나았다.
숨죽인 청중들 가운데에서 말없는 경탄이 일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기뻐할 여유는 없었다.
잠시 잦아든 소리를 일으켜 세우며,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라흐마니노프를 더더욱 몰아붙였다.
쉴 새 없이 요구되는 빠른 도약과 연속되는 옥타브가 1초에도 수십 번씩 울린다.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1번을 녹음하고 난 뒤로 난 테크닉에 있어서 또 한 계단을 디딜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중요한 해석과 음악성과 더불어 이 테크닉의 향상은 날 훨씬 높은 곳으로 이끈다.
머리에 있는 악보를 순서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때려 박는 연주가 아주 거대한 화성을 이룬다.
엉망인 음색이 거슬리면서 아주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쌓고, 쌓고, 쌓았다. 이 하나의 프레이즈로 모두를 질식시켜 버릴지도 모를 만큼, 지독하게 쌓아 올린다.
지금만큼은 음악가가 아닌 피아노 연주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
제대로 표현도 잘 안 되는 답답함과 무시무시함만을 청중들에게 몰아붙이자 경탄은 곧 공포로 바뀌어 간다. 미지의 공포는 순식간에 전염되며 홀을 맴도는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난 모두에게 공포를 떠안길 생각은 없었으므로 잠시 손을 풀어 주었다가, 다시 옥죈다. 빠르게 오른손을 튕겨 올리며 건반을 연타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반은 비명을 토해 내는 것 같았지만 더더욱 빠르게 쳐 냈다.
2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난 쉬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문제를 다시 짚어 냈고, 연주가 안 된다는 것을 확신했고, 마지막으로 이 피아노로 청중들에게 연주를 선보였다. 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연주였다.
음산한 달무리와도 같은 이미지로 주제를 서서히 마무리 짓다가, 다시 되돌아와 건반을 긁는다.
해머가 현을 때리는 순간을 정확하게 느꼈다. 탄력이 하나도 없어 배음이 엉망진창이다. 얼마나 노후해 있는 현인지 느껴진다. 모든 현을 교체했다고는 하지만 저음부의 현은 안 교체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 선 역할을 할 때가 왔다.
연주는 내 역할이 아니었다.
내 역할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피아노를 무대 아래로 내리는 것이었다.
“…….”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 손은 다시 되돌아와 늑대처럼 건반을 물어뜯는다.
왼손을 들어,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내리쳤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속도는 건반 사이를 오가는 속도도 있지만, 건반 그 자체를 타건하는 속도도 있다. 후자는 보다 짧고 빠르게 현을 강타하는 것으로 음량 그 자체와 관련이 있다.
무조건 힘으로 무식하게 찍어 눌러서 될 일이 아니다. 속도의 묘리란 집중과 감각에 달려 있었다. 모든 신경과 집중력을 쏟아서 충분한 기술을 손가락 끝에 전달해 가장 빠른 속도로 해머에 힘을 쏟는다.
선천적으로 약한 힘으로 어떻게 하면 피아노를 완전히 다룰 수 있을지 고민해 온 내 기술이 날카로움을 드러냈다.
쾅, 하고 왼손으로 건반을 내려찍으면서, 미리 서스테인 페달을 최대로 밟아 댐퍼를 떼 놓았다.
그리고,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피아노에서 무언가가 튀어나갔다.
놀라지 않았다. 뭔지 볼 것도 없었다. 난 다시 한 번 더 건반을 긁고, 찍어 눌렀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피아노 안으로 무언가 주저앉으며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
난 양손을 누른 채 잠시 기다리다가 손을 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브라바!”
“□□□ □□!”
그런 내 심정도 모르고, 과격한 피날레로 연주가 끝나자마자 객석에선 귀청이 터질 것 같은 박수와 감탄이 해일처럼 무대를 덮쳤다.
연주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 모두가 흥분을 금치 못했다. 폭발하는 뜨거운 함성이 홀을 울린다. 청중들은 콘서트홀에서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열광하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전신을 전율시키는 그 환호성 속에서, 나는 흔들리지 않고 피아노만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