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화
베르너 위넬은 노심초사하며 모니터로 무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
어른 된 입장으로, 그리고 에이전트로서 조금 더 강력하게 말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허락해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데, 타티아나가 보이는 태도에 져 버렸다. 정확하게는 진 것이 아니라 믿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그녀가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베르너는 혹시 청중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타티아나에게 문제가 생기는 순간 일단 루이를 무대에 던져 놓고 바로 마스터클래스를 하는 상황으로 바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팔짱을 끼었다.
베르너에게 그런 권한까지 주어지진 않았을지 몰라도 수십 명이나 되는 어른들이 꼴사나운 모습이나 보이다가 결국 어린 연주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된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하.”
잠시 뒤 베르너는 팔짱을 풀고 한숨을 토해 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무대에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타티아나는 마치 미리 준비된 연주자처럼 품위 있게 객석을 향해 인사하고는, 피아노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손가락을 대고 사뿐히 걷는 그 모습은 마치 피아노를 가운데에 놓고 경건한 의식이라도 준비하는 듯 보였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우아한 걸음걸이에 홀 안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베르너는 그것이 피아노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았다.
피아노 안으로 고개를 디밀고 스마트폰으로 불빛을 비춰 본다든지, 툭툭 쳐 본다든지, 그런 짓을 한다면 청중들이 곧바로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타티아나는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피아노의 상태를 살폈다.
아주 인상적이고, 그야말로 연주회 이 자체를 배려하는 행위였다.
그렇게 피아노를 한 바퀴 돈 타티아나가 의자에 앉기까지, 짧은 몇 초가 흐르는 사이 청중들 사이에선 모든 잡담이 사라졌다.
연주회 기획자이자 프로모터이기도 한 에이전트 베르너 위넬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타티아나에겐 극히 단순하지만 강력하게 청중들을 휘어잡을 힘이 있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의 청중들은 러시아에서 온 이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지닌 실력은 외모에만 있지 않았다. 그녀의 외견으로 모두의 집중을 끌어당기는 몇 초, 단지 그것이면 충분했다.
시작된 타티아나의 라흐마니노프에 프랑스의 청중들은 도망칠 겨를도 없이 모조리 사로잡혔다.
“…….”
베르너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목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타티아나의 손이 건반을 유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미 영상으로 몇 번이고 실력을 봤었고, 때문에 무대 위에서 어련히 잘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타티아나의 연주는 인템포보다 훨씬 더 빠르게 느껴지는,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수준의 속주였다. 안 그래도 빠른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를 열다섯 살이 인템포로만 연주해도 기립박수가 쏟아질 텐데, 타티아나는 그것으로는 성에 안 찬다는 듯 초인적인 기교를 선보였다.
순식간에 화음이 수십 수백 개나 쏘아져 나오면서 음의 파도를 이룬다.
베르너는 타티아나가 왜 이렇게 빠른 속주를 하는지 이해했다. 음색이 약간 비틀려 있는 피아노로 평범한 연주를 해 봐야 음악성을 살리기 힘들다는 계산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피아노보다는 아예 연주자에게 시선이 쏠리도록 그야말로 극한의 비르투오시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청중들은 좋은 음악을 원하기도 하지만, 좋은 퍼포먼스 또한 그만큼 원하기 때문이다.
“휴…….”
베르너는 타티아나를 무대에 올려 보내기로 한 것에 대해 약간 안도하면서, 몸에서 힘을 조금 풀었다.
적절하다 못해 완벽했다.
본래 타티아나는 액션도 그리 크지 않고 퍼포먼스도 없이 그저 깊은 해석이 있는 아카데믹한 연주를 하는 연주자였지만, 연주회의 생리를 아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모두를 열광시킬 수 있는 기교를 앞세운 것은 연주자로서 아주 능동적이고 훌륭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본 목적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진 잘 모르겠다.
착각해선 안 된다.
인테르메조를 선보이고 있긴 하지만, 타티아나가 브뤼노에게 해 보이겠다고 한 것은 피아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타티아나가 아무리 잘한들, 다시 돌아와서 피아노를 교체해 달라는 주장의 근거로는 쓸 수 없었다. 베르너는 심란해졌다.
“어떻게 할 겁니까……? 타티아나.”
베르너는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타티아나가 이렇게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이고, 그것을 권위로 내세워서 브뤼노를 설득하려고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피아니스트가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프랑스인인 브뤼노가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줄까? 베르너는 회의적이었다.
2분도 안 되는 짧은 연습곡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청중들의 분위기는 엄숙하기 짝이 없었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면 바로 폭발적인 환호로 바뀔 것이다. 매우 좋았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타티아나가 라흐마니노프로 인터미션 사이에 청중들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엔 성공하겠지만, 결국 피아노를 교체하는 데엔 실패함으로서 문제 해결이 되지 않고 그대로 2부의 베토벤에서는 극도의 실망만을 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렇게 잘해도 방법이 없단 말인가?
베르너는 속이 타는 것을 느끼며 물병을 집어 들었다. 막 뚜껑을 열고 기울이려는 찰나,
“……맙소사.”
그는 충격으로 물병을 떨어뜨렸다.
방금 뭘 본 거지?
타티아나가 마지막 피날레를 펼쳤다. 곡을 마무리 짓는 강렬한 화음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피아노에선 둔중한 쇳소리와 함께 무언가 실 같은 것이 튕겨져 나갔다. 베르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피아노 밖으로 나온 그것은 저음부의 현이었다.
베르너는 떨어진 물병을 주워 들 생각도 못 하고 입을 벌렸다.
타티아나가 다시 건반을 때렸다, 방금 본 것이 결코 우연이나 요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다시 쇳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도 저음부의 현을 끊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허.”
베르너는 헛숨을 들이켰다.
고음부도 아닌 저음부의 굵은 강철 현을 저렇게 끊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도 거구의 성인 남자도 아닌 소녀가?
베르너는 방금 본 말도 안 되는 일에 기가 막혀 뒤를 돌아보았다.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 조금이나마 현실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대기실 안에 있는 십수 명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실감은 되돌아와 주지 않았다.
그리고 찰나의 정적을 산산이 쪼개 놓으며, 대기실이 통째로 뒤흔들린다고 착각될 정도로 굉장한 환호성이 무대 위로 폭사되었다. 청중들은 그 어느 연주회에서도 받기 힘든 엄청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맙소사.”
베르너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피아노의 현이 끊어지는 일은 강한 타건을 지니고 있는 연주자들이 피아노를 연주할 때 종종 벌어지곤 하는 일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사고다. 연주를 진행할 수 없게 되는 사고인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결코 사고가 아니었다.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도중에 현이 끊어진 것도 아니었고, 곡이 끝나는 마지막 화음에서 현이 끊어짐으로서 예술의 하나로, 피날레 퍼포먼스로 장식되었다.
록 밴드들이 연주 마지막에 기타를 부수거나 하는 일은 있지만, 클래식 연주회에선 고금을 통틀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강철 현이 피아노에서 튕겨 오르는 모습은 청중들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광란의 분위기에서 피아노를 교체하기 위해 30분 정도 지연된다고 한들 불만을 제기할 청중이 있을 리 없었다.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30분이 아니라 1시간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타티아나는 완벽하게 청중을 설득하고 피아노를 교체해야 할 명분을 내놓았다.
“…….”
그리고 브뤼노도 지금 경악하며 자신이 완패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거구의 러시아 남성 피아니스트들이 격렬한 라흐마니노프나 리스트의 곡을 연주하다가 현을 끊는 일은 가끔 있지만 저런 작은 체구의 소녀가 현을 끊는 것은 인위적으로 했다기엔 믿기 힘든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피아노의 현이 노후해서 끊어졌다고 주장할 것이고, 브뤼노는 거기에 반박할 수 없다.
마지막까지 발악하여 끊어진 현만을 갈겠다고 하더라도, 현 하나를 교체하는 데엔 일반적으로 15분 정도 소요된다. 두 줄이면 더 오래 걸리고, 조율사를 불러오는 시간을 합한다면 피아노를 교체하는 30분보다 훨씬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까지 감안하고 타티아나는 현을 두 줄 끊어 낸 것 같았다.
“하, 하하…….”
순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티아나는 연주자로서 무대에 오르겠다며 허락을 구한 시점에서부터 이렇게 할 것을 작정했을 것이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현을 끊기 쉬웠다면 타티아나가 하기에 앞서 루이가 먼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문제가 있는 피아노를 두고 스테이지 매니저와 싸울 필요 없이 현을 몇 줄 끊어 버리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루이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강한 피아니스트라도 원하는 타이밍에 아무에게도 의도를 들키지 않고 현을 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저음부의 현은 훨씬 굵고 강했다.
만약 하고자 하더라도 타티아나처럼 극히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거칠고 볼썽사납게 현이 끊어질 때까지 건반을 내리찍어야 했을 것이다.
청중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피아니스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데엔 3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때문에 루이처럼 보통 피아니스트들이라면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믿고, 나서서 해냈다.
그 누구도 모르도록 아주 교묘하고 확실하게.
베르너는 테크닉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라면 몇 명이고 알지만 저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처음 보았다.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현을 끊어 버리는 것이 대체 무슨 마술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일부러 끊은 거죠? 말이 되나요?”
“연주나 연습 중에 끊어지는 건 몇 번 보긴 했지만 저건…….”
“저 애 대체 뭘 한 거야? 피아노를 돌면서 주문이라도 외웠나?”
“믿을 수가 없군.”
“피아노 교체해야겠군요.”
상황은 완벽히 끝났다.
피아니스트와 스테이지 매니저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수십 명의 사람이 있었음에도 끝끝내 해결을 찾지 못해 결국 연주회를 망쳐 버릴지도 몰랐던 일을, 타티아나는 단신으로 무대에 올라 2분 만에 해결해 버렸다.
현이 끊어진 피아노는 교체될 것이며, 30분 정도의 지연을 청중들은 즐겁게 이해해 줄 것이고, 연주회 2부는 1부와 다를 것이다.
너무 완벽한 해결이라 할 말이 없었다.
오로지 단 한 명, 자신이 피아노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는 타티아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베르너는 왜 그녀가 이렇게 해결할 것이라 설명하지 않았는지도 깨달았다. 보고도 믿기 힘든 이런 기적은 말로 해 봐야 아무도 믿지 않는다. 미리 설명을 들었다면 베르너가 앞장서서 타티아나를 뜯어말렸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그것을 안 것이다.
“……하.”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꼴사나운 어른들 사이에서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제대로 된 해결책을 떠올리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책임을 감내하고 밀어붙여서 결국 해낸 타티아나에게 대체 무슨 찬사를 보내야 할까.
찬사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라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베르너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러시아의 신성, 타티아나는 정말 굉장한 연주자였다. 앞으로 그녀와 연결해 주고 싶은 오케스트라가 열 곳도 넘게 생각난다. 굉장한, 정말 굉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무대를 보다가 움찔했다.
일어나서 환호에 응대하는 타티아나의 얼굴엔 성취감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웃고 있기는 하지만 공허한 미소였다.
그녀는 내켜 하지 않았다.
“타티아나…….”
뒤편의 아나스타샤가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를 냈다.
친구가 보여 준 대단한 성공에 가장 기뻐해야 할 그녀도 타티아나가 지금 상황을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베르너는 생각을 달리해 보았다.
피아니스트들 중엔 연습 중에 끊어 먹은 피아노 현을 트로피처럼 벽에 걸어 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끊어진 현은 자신이 그만큼 피아노를 혹사시켰고 열정적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런 것으로 충족감을 느끼는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그녀는 피아노를 잘 다뤄서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야 할 피아니스트가, 그 기술을 현을 일부러 끊는 데에 사용했다는 것 자체에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필요해서 한 일이고, 성공적이었다. 다른 그 어떤 방법도 이렇게 효과적이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힘든 결정이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베르너는 곧 대기실로 돌아올 타티아나를 축하해야 할지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갈등하기도 잠시, 타티아나가 무대에서의 인사를 짧게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인테르메조임에도 불구하고 커튼콜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앙코르 곡을 연주할 생각이 없었다. 할 수도 없고.
살짝 우울한 미소를 띤 그녀는 힘이 없어 보였다.
“대단해!”
“멋지게 일을 해결했군요! 타티아나!”
“환호가 끊어질 생각을 안 하는군.”
“앙팡 테리블다운 실력이군!”
“당신과 할 다음 무대가 기대되네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저마다 찬사를 보냈다. 나쁜 의미는 전혀 없었다.
프랑스에서 어린 러시아 연주자가 해낸 일에 대한 순수한 감탄과 칭찬이었다. 러시아 단원들에겐 뿌듯한 일이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타티아나는 차분히 응대했다. 이어지는 칭찬 세례에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너는 머리가 아팠다. 그냥 어린애답게 우쭐해하거나, 우울해하거나 어느 한쪽이었다면 차라리 대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시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친구에게 다가가더니 팔을 벌려 포옹해 주었다. 잘했다는 칭찬 같기도, 괜찮다는 위로 같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만이 가능한 그 표현에 타티아나는 편안함을 느끼는 듯 그녀를 마주 안았다.
베르너는 조금 안심했다. 저렇게 서로를 잘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을 것이다.
약간 부산스러워진 대기실에서, 모두는 타티아나에게 칭찬을 건넨 뒤, 브뤼노를 찾았다.
절대 피아노 교체는 있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던 그 스테이지 매니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금 기다리자 브뤼노가 대기실로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브뤼노에게 향했다.
브뤼노는 그 시선들을 받고, 타티아나를 보더니 결국 헛웃음을 흘리며 양손을 들었다. 항복한다는 뜻이었다.
『아가씨가 이겼소.』
그의 말은 프랑스어였지만 모두가 알아들었다.
브뤼노가 이어 말했다.
『인터미션을 연장하고 피아노를 교체하도록 하겠소. 하……. 디아라 씨. 그렇게 하면 되겠소?』
『……예.』
『피아노는 두 번째 후보로 말씀하셨던 야마하로?』
『예.』
『알겠소.』
『감사합니다. 베르트랑 씨.』
루이 디아라는 훨씬 차분하고 점잖게 말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승승장구하면서 자신만의 고집과 자존심을 세워 나갔는진 모르겠지만, 오늘 겪은 끔찍한 트러블과 러시아에서 온 어린 연주자의 일은 평생 그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루이의 태도를 본 브뤼노도 결국 고압적이었던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아가씨였군.』
“……?”
타티아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브뤼노를 바라보았다. 베르너가 통역해 주었고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피아노 현을 망가뜨려서 죄송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피아노의 노후화를 주장하고 있었다.
브뤼노는 피식 웃더니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든 상관없소. 아가씨가 왜 그랬는지는 알겠으니까. 명백하게 내가 졌고.』
“아……. 감사합니다.”
타티아나는 사과를 받고도 자신만만해하지 않고 얌전히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은 브뤼노에게 상당히 인상적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나 참, 정말 놀랍군. 러시아 연주자들이 전반적으로 강인하긴 하지만 이런 어린 아가씨도 이 정도라니. 프로코피에프의 나라답다고 해야 하는지……. 러시아 음악학교에서는 피아노를 치는 것뿐만 아니라 부수는 법도 가르치는 거요?』
베르너는 움찔했다. 브뤼노는 단순히 감탄하고 있는 거겠지만, 청중들이나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브뤼노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냥 대충 칭찬이었다고 전하려는데, 하필이면 브뤼노가 양손으로 건반을 쾅쾅 찍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고, 타티아나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위넬. 지금 스테이지 매니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확히 알려 주시겠어요?”
“…….”
베르너는 무척이나 고민했지만 이미 타티아나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고, 브뤼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분노가 깃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