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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97화 (297/1,277)

##  297화

청중들이 신기한 러시아 서커스라도 봤다는 듯 열광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실제로 내가 했던 건 서커스나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퍼포먼스나 쇼맨십 등은 언제나 연주자들에게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연주자로서 난 최선을 다해 잘 해낸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가 피아노의 현을 끊어 놓은 것은 인기를 끌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무대에서 피아노를 내리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의 프레임에 새롭게 상처가 새겨진 것을 본 내가 얼마나 속상하고 우울해졌는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피아노 현을 끊으면 되겠단 생각이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착잡한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서 실행한 일이었으므로 변명할 말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낼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웃었다. 나 혼자 묻어 두고 가기로 했다.

“…….”

그렇게 감정을 삭이고 있는데, 브뤼노가 한 말은 날 굉장히 자극했다.

내가 당신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데.

불쑥 나올 뻔한 말은 책임 전가였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쪽이었다. 그가 내게 나가서 피아노를 해결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지와 독단으로 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피아노 연주자로서 피아노와 연주회만을 생각하여 벌인 일이다.

그걸 알아주는 것까진 기대도 하지 않았다. 사과를 받고 인정을 받을 것이라곤 생각조차 안 했다. 그냥 아픈 피아노를 내리고 2부의 베토벤을 잘 해내기만 바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브뤼노는 내게 신기하다는 듯한 말을 하지 않아 주었으면 했다.

왜 다른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망가뜨리기까지 해야만 했는지, 정말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또한 기대였던 걸까. 내가 바보였던 걸까. 힘이 빠진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

베르너가 미안하다는 듯 내 이름을 부른다. 악기를 일부러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연주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런 베르너를 보니 욱해서 언성을 높이고 싶다가도,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적어도 아나스타샤와 베르너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므로 화를 내려 해도 러시아어로 해야 하고, 임시 통역사를 맡아 주고 있는 베르너를 거치게 된다. 그에게 내 분노를 옮기고 싶지 않았다.

“…….”

아무리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긴 싫어서, 브뤼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한참이나 연장자이자 선배인 사람에게 할 예의는 아니었지만, 예의라면 그부터 내게 갖춰야 했다.

브뤼노는 내 싸늘한 시선을 받고서야 찔끔했는지 눈치를 살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베르트랑 씨.”

『……말씀하시죠.』

“러시아의 음악학교에선 피아노를 가르쳐요. 오로지 어떻게 하면 피아노로 예쁜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배우고 연구해요. 다른 음악학교들이 그렇듯이.”

똑바로 바라보며 잔뜩 날을 세워 말하자 브뤼노는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정말 어쩔 줄 몰라 하며 더듬거렸다.

『미안합니다. 그, 그냥 농담이었습니다. 놀라운 러시아 연주자들에 대한 농담. 아가씨가 보여 준 것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겁니다.』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절대 그렇게 안 했을 테고요.”

『…….』

“악기를 잘 부수는 연주자라는 말이 어떻게 칭찬이 될 수가 있나요?”

『……아니죠.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브뤼노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 생각 없는 말에 난 굉장히 기분이 상했지만, 그 괴팍하고 완고하던 사람이 순순히 사과하니 더 이상 쏘아붙이기도 뭐했다. 중간에 껴 있는 베르너에게도 미안했고.

이쯤 하기로 했다.

“스테이지 매니저님.”

조용히 브뤼노를 부르자 그가 헛기침을 했다. 날 똑바로 보기 어려운 모양이다. 난 아랑곳 않고 말했다.

“저희 피아니스트들은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조율사님과 스테이지 매니저님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압니다.』

알고 있다면 그걸 권력으로 삼으면 안 되잖은가.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난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그냥 지금 내 가슴 속에 콱 틀어박혀 있는 진심을 힘겹게 꺼내 놓았다.

“아신다면 제대로 부탁드려요……. 어른이시잖아요…….”

『…….』

브뤼노는 침묵했다.

그는 내가 큰 소리를 내어 신경질적으로 퍼붓는 것보다 어른이라면 제대로 해 달라고 부탁하는 쪽이 훨씬 견디기 힘든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전체적으로 대기실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옆을 볼 것도 없이 루이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물론이고 내 말을 전해 준 베르너까지도 고개를 떨궜다.

약간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들어 준 것 같다.

어쨌든 이제 할 일도 끝나고 할 말도 다 했으니 내가 있을 객석으로 갈 생각으로 등을 돌렸다.

“저는 이만 나가 볼…….”

『베르체노바 양.』

더 있어 봐야 방해만 될 테니 얼른 빠져나가려 하는데, 루이 디아라가 날 불렀다. 마드모아젤 베르체노바. 꽤나 낯선 어감이다.

내가 돌아보자 그가 정중하게 예를 갖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통역 없이도 사과와 감사의 프랑스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루이 디아라. 오늘 있었던 트러블의 앞뒤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실 그리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주회를 위해 먼저 브뤼노에게 사과했던 것도 그렇고, 성격에 큰 문제가 있는 사람 같진 않았다.

난 그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베토벤을 멋지게 연주해 주세요.”

내 말을 전해들은 루이는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행히 내가 한 일은 헛되지 않았다. 모두 잘 되었다.

루이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2부 프로그램,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정말 1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굉장한 연주였다.

피아노가 악기로서 제 성능을 내어 주니 루이는 그야말로 날개를 단 것처럼 화려한 연주를 뽐냈다.

거기에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굉장한 실력도 한층 더 높아진 것 같이 느껴졌다. 1부에서 보여 주었던 실력도 제 실력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렇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하나 되어 최선을 다한 연주는 정말 열정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이 연주만으로도 나는 모든 것을 충분히 보답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약간 놀랐다.

루이는 쏟아지는 박수 세례를 받으며 나갔다가 커튼콜을 즐기며 다시 들어오는, 연주자가 누릴 수 있는 찬사를 다 누리지 않고 그대로 지휘자와 악장과 악수를 나누고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렇게 그는 잠시 박수가 잦아들길 기다린 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루이는 몇 곡이나 앙코르 곡을 연주했다. 이미 지나간 1부에 대해 변명을 할 순 없지만, 이렇게나마 사죄한다는 의미 같았다.

같은 연주자로서 그의 의도가 느껴져서 난 밝게 웃을 수 있었다.

청중들은 커튼콜도 한 번 없이 앙코르를 선보이는 연주자에게 놀랐으나, 기쁘게 받아들였다. 아무리 배부르게 식사를 마쳐도 디저트를 마다할 손님은 없었다.

총 7곡이나 다채로운 앙코르 곡이 연주되었고, 연주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밖에 나왔을 땐, 브뤼노와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난 깜짝 놀랐다. 한창 바쁠 스테이지 매니저가 왜 나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진지한 눈은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아나스타샤가 비스듬하게 내 옆에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브뤼노는 정말 진지하게 내게 사과했다. 옆에 베르너가 없어서 긴 대화가 오갈 순 없었고 프랑스어로 사과한다는 뜻만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연주회를 보며 느낀 바가 없잖아 있는 듯했다.

난 사과해 오는 사람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독하지 못했다. 프랑스어에 답해 대충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이자 그도 씁쓸하게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났다.

파리에 하나뿐인 이 대형 콘서트홀의 스테이지 매니저라는 직책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부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기분은 나아졌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잘 일단락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후회가 없진 않았다.

“□□…….”

“?”

옆을 보니 낯선 남자가 프랑스어로 중얼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 □□ □□? □□□?”

프랑스어였지만 뭘 묻는 것인진 한 번에 알아들었다. 무대에 올라갔던 날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 객석에 앉았을 때도 옆에 있던 여성분이 프랑스어로 비슷하게 물어보셨던 것을, 딱 잡아떼고 앉아 있느라 힘들었는데 밖에 나와서도 비슷한 일을 겪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내가 할 말은 똑같았다.

“프랑스어 할 줄 몰라요. 죄송합니다.”

“□□□□□□□?”

난 싱긋 웃어 주고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빠져나갔다. 남자는 내게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내가 러시아어로 빠르게 말하며 도망치자 따라올 생각까진 없는 듯했다.

그렇게 난 아나스타샤와 함께 일단 테라스로 나왔다.

아나스타샤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도망칠 것까진 없지 않았어?”

“……으.”

내가 올려다보자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미안할 건 없었다. 그냥 내가 저질러 놓고 감당을 못 할 뿐이니까.

난 그냥 인터미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잊히길 바랐다. 그렇게까지 해 놓고 잊히길 바라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내 음악을 충분히 피로한 것도 아닌데 관심을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

모르겠다. 앞뒤 생각 않고 저질러 놓은 일이니 앞으로도 생각하지 않을 테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금방 잊힐 것이다.

그렇게 테라스에서 잠시 바람을 쐬면서 흐릿흐릿한 파리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저편에서 호리호리하고 안경을 쓴 남자가 다가왔다.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아, 위넬.”

난 반갑게 베르너를 맞았다.

방금 있었던 일은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는 날 거기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기도 했지만 난 되레 그가 조금 더 좋아졌다. 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착각이 아닌 것 같다.

베르너가 말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전 야유를 받아 내느라 정신없이 두들겨지고 있었을 겁니다. 머리로는 본사로 보낼 시말서의 서두를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는 그러면서 주먹으로 턱 부근을 툭툭 치는 시늉을 했다. 물론 정말 분노한 청중에게 폭행을 당하진 않겠지만, 말로 얻어맞는 것도 결코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다.

난 다행이라는 뜻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제가 위넬에게 그간 몇 번이고 호의를 받았던 것에 대해 조금은 답례가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푸하하하, 이미 넘쳤습니다. 넘치고말고요. 저와 크리스티나는 물론이고 디아라 씨, 그리고 베르트랑 씨까지 모두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 물론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할 겁니다. 그건…….”

“제발…… 안 해도 괜찮으니까요…….”

“크흠, 부담스러우시다면…….”

내게 감사하는지 어쩐진 잘 모르겠지만 무슨 연주회를 구해 낸 사람 취급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창피해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격하게 거부하자 베르너도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그가 약간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무튼, 2부는 어떠셨습니까? 소감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1부가 끝나고 있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때 난 안타까웠다고 대답했다.

이번엔 달랐다.

“멋졌어요.”

“그렇습니까?”

“예. 오케스트라 분들은 말할 것도 없이 대단했죠. 루이 디아라 연주자 역시 다시 보게 되었어요. 테크닉도 뛰어나고 음악성도 베토벤다운 장렬함이 있었고, 음향적으로는 잔향이 조금 긴 홀의 특성까지 고려해서 터치를 조절하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에요.”

나쁜 연주엔 제각각의 짚어 낼 이유들이 있어서 평이 길어지지만, 좋은 연주는 지적할 것이 없으므로 평이 짧다. 난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좋은 평을 말해 주었다.

그런데 베르너는 묘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물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실례되지 않는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어쿠스틱 엔지니어링에까지 신경 쓰려면 연주자로서 경험도 꽤 많아야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아는 겁니까?”

세상에 홀의 음향을 신경 쓰지 않는 연주자는 없다. 콘서트홀이란 악기와 더불어 정말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홀의 음향이란 어쿠스틱 엔지니어링에 속하는 분야고, 사실 연주자들의 분야는 아니었다. 때문에 그걸 직접 공부하지 않는 이상 많은 경험으로 터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공부도 했고, 대충 알기도 알았다.

하지만 길게 설명할 일은 아니라 짧게 말했다.

“귀로 듣고 알지요.”

“……할 말이 없군요.”

“죄송해요. 설명이 궁색하네요.”

“아, 아닙니다.”

베르너는 괜한 것을 물어봤다는 느낌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흠, 요컨대 마음에 드셨단 말씀이시죠?”

“루이 디아라는 좋은 연주자예요.”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어서 그렇지 괜찮은 사람입니다. 음, 그 자기중심적인 성격도 오늘은 조금 고쳐졌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럴까요?”

“같은 남자인 제가 장담하죠.”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베르너는 확답을 주었다.

난 빙그레 웃었다.

“기쁘네요.”

“하하핫, 좋습니다.”

베르너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내가 꽤나 만족했듯, 그 역시 만족한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고, 그는 나와 아나스타샤를 차례로 바라보더니 경쾌하게 제안했다.

“마음 같아선 오늘 근사하게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아…….”

일반적으로는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그렇습니까? 디아라와 제가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대접할 생각입니다만.”

그건 더 싫었다. 루이 디아라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된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말도 안 통하는 데다가 베르너를 통해선 어차피 인터미션 때 이야기가 반드시 나오게 될 텐데, 부담스럽다.

그가 딱히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만난다면 모를까 오늘은 싫었다.

“죄송합니다.”

“음…….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베르너는 딱히 더 제안하지 않았다. 내가 거절하리란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긴 하다.

깔끔하게 제안을 거둔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

무슨 말이지?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오늘을 거절했더니 그럼 당장 내일은 어떻겠냐고 묻는 건가? 아니, 그렇다면 제안을 해야지 왜 확정된 일처럼…….

의심스럽다는 듯한 내 눈빛을 보더니 베르너가 말했다.

“잊으셨습니까? 내일 연주회 미팅 하셔야 합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아.”

애초에 파리를 여행지로 잡은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이었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일정과 프로그램 등을 회의하기 위해서였기 않았나.

“예, 그…… 맞아요. 기억하고 있어요.”

난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베르너는 내게 뭐라 하진 않았지만 당장 도망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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