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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298화 (298/1,277)

##  298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미팅은 오후 3시로 잡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때까지 오늘 하루정도는 호텔에서 빈둥거리고 놀자고 제안했다.

“나가지 않고요?”

“응.”

아나스타샤는 나른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선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밖엔 비가 오고 있었다. 7월의 파리는 비가 잦았다.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밖에 비도 오고…… 나가기 싫어. 타티아나 넌 괜찮아?”

“곧 그치지 않을까요?”

“그래도.”

“그래도라뇨.”

“그쳤다가 또 올지도 모르잖아.”

드물게 아나스타샤가 칭얼거렸다. 그녀는 비를 정말 싫어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그냥 싫다는 대답뿐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꼬치꼬치 물어볼 것 없이, 평소 활동적이고 에너지 넘쳐, 태양 같다고 느껴지는 그녀가 비에 약하다는 것은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떻게 봐도 아나스타샤는 비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비가 오면 컨디션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해서 그리 안 좋아하는 편이다. 결론이 났다.

“아하하, 좋아요. 그렇게 해요. 오후에 나가기 전까진 호텔에 있도록 하죠.”

“응.”

“커피 어때요?”

“응.”

난 비 때문에 축 늘어져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웃다가, 부엌 쪽으로 가서 커피포트를 세팅했다.

찬장엔 고급 찻잔과 원두가 어메니티로 제공되고 있었다. 스위트룸답게 세심한 부분까지 잘 갖춰져 있었다.

“커피예요.”

“아! 고마워.”

커피를 끓여 가져다주자 아나스타샤가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내가 건네는 잔을 받았다. 카페인을 섭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든다는 얼굴이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맛있어.”

“기뻐요.”

“역시 네가 내려 주는 게 제일 좋아. 왤까?”

“전 아나스타샤가 타 주시는 게 가장 좋은걸요.”

“정말? 난 내가 끓인 건 별로던데.”

“그럴 리가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입에 넣을 것을 스스로 만드는 것보단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을 더 맛있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도 내가 만든 걸 혼자 먹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으니, 아마 아나스타샤도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짧은 티타임을 즐기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고 소음이라곤 오로지 창밖에서 후두둑 소리를 내며 내리는 빗소리뿐이었다. 그녀도 나도 비를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빗소리 자체는 이 티타임의 배경음악으로 훌륭했다.

“프랑스의 빗소리는 러시아의 것과 다른 걸까요?”

“그럴 리가 있니.”

“하지만 약간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나요? 지금 들어 보세요. 약간 가느다랗게 들려요.”

“그런가?”

“그렇지 않나요?”

“그러네?”

“뭐가 그런가요?”

“그게 그렇네.”

아나스타샤는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서 귀를 기울이다가 창밖을 내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분명히 언어를 주고받고 있는데 대화가 아닌 듯한, 하지만 결코 답답하지 않은 서로의 말소리를 교환하면서 그저 이 시간을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그 느낌만을 주고받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아나스타샤가 제대로 된 언어를 꺼내 들었다.

“있잖아, 타티아나.”

“예.”

“네가 꽤 많이 언급되는데?”

“예?”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더니 그녀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 쪽으로 보여 주었다.

받아 들어 보니 인터넷의 한 페이지가 떠 있었다.

평소 클래식 공연 등을 관람하면서 그에 대한 리뷰 등을 쓰는 사람의 홈페이지인 것 같은데, 어제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있었던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게 올라와 있었다.

리뷰에는 연주회의 주인공인 루이 디아라와 오케스트라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인터미션에 대한 이야기도 몇 줄이나 언급되어 있었다.

내가 인터미션 때 했던 인테르메조 때문이었다.

리뷰어는 이름 모를 소녀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연습곡이 여태껏 들어 본 것들 중 가장 빠르고 강렬한 연습곡이었고, 마지막 피날레에서 피아노의 현이 두 줄이나 끊어지기까지 했다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연주로 남았다고 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 모를 연주자가 누군지 너무 궁금하다며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보를 공유해 주길 요청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게만 봤을 거야.”

“제가 그렇게 보이게 했으니까요.”

난 음악성이 아닌 퍼포먼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것은 절대 사양하고 싶다.

하지만 연주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면 후회하고 싶진 않다.

“괜찮아요.”

“누군가 다시 한 번 보여 달라고 할지도 몰라.”

아나스타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스마트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말하는 귀찮은 일이 무엇인진 나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 심정을 잘 모를 테고, 쉽게 와서는 일부러 현을 끊는 것을 보여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일반인들부터 연주회 흥행을 원하는 관계자들까지 얼마나 보여 달란 사람이 많을지 상상도 안 간다.

난 괜히 아나스타샤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연주 중에 현이 끊어져서 깜짝 놀랐다고만 할 테니까요. 제가 다시 피아노를 망가뜨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난 네가 하는 말은 못 믿겠는데. 타티아나.”

“믿어 주세요……!”

난 찻잔을 내려놓고 아나스타샤를 붙들었지만 그녀는 어제 내가 무대 위에 올라가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겁했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토해 냈고,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그녀 앞에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

호텔방에서 아나스타샤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까지 룸서비스를 불러 먹었다.

식사하고 뒹굴고 차 마시고 뒹굴고 텔레비전 보면서 뒹굴고 하다 보니 점점 사람이 아니라 나무늘보 같은 것으로 퇴화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큰일 난다.

“일어나야겠어요. 아나스타샤.”

“으응? 왜?”

아나스타샤는 세상 귀찮다는 듯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안아 달라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그대로 잡혀서 끌려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난 거부했다.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약속 시간? 아……. 맞다.”

그녀는 시계를 보고 나서야 오늘 내게 스케줄이 남아 있다는 것을 떠올린 듯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오케스트라랑 미팅 가야지…….”

“아나스타샤는 호텔에 계시겠어요?”

“아니. 나도 갈래.”

단호하게 답하고 나선 기지개를 쭉 켠다. 그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의 눈빛은 평소의 예리함을 꽤나 되찾았다. 비가 그친 지도 꽤 되었고, 그녀도 슬슬 움직일 때인 것이다.

본모습을 되찾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내 손을 잡았고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대신 내 쪽으로 끌려와 주었다. 하나도 무겁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아나스타샤를 일으켜 세워 주고,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욕실에 가서 씻고,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화장을 마쳤다. 어차피 제대로 된 스타일링은 여기서 할 일이 아니었다.

“갈까.”

“예.”

그리고 우리 둘은 호텔에 있는 헤어 살롱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는 것은 정말 편리했다.

딱 30분쯤 후에 우리는 다시 스위트룸으로 돌아갔다.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미 우리 방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에서 공수해 온 옷장이 통째로 들어서 있었고, 이번엔 아나스타샤의 것들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옷에만 집중했다.

“이거 어때? 오늘은 인사하고 미팅만 할 거잖아? 인사는 어제 하긴 했지만.”

“그렇겠죠?”

“그냥 청바지 입고 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 칠부 슬랙스나.”

아나스타샤는 내 몸에 옷들을 대 가면서 심각하게 고민에 잠겼다. 그녀의 천부적인 패션 감각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하이웨이스트 슬랙스와 블라우스로 평범하게 코디를 마쳤다.

아나스타샤는 2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샹젤리제 거리에 나가서 길거리에서 봤던 파리지앵 스타일로 해 봤을 것이라며 한탄했지만, 난 우린 러시아 사람인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며 그녀를 말렸다. 그녀는 무슨 패션쇼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1시간쯤 걸려 약속 시간에 알맞게 우리는 준비를 마쳤고, 빅토르에게 부탁해서 리무진을 불렀다.

호텔 밖으로 나가니 빅토르가 우릴 보더니 말했다.

“오늘도 아리따우시군요. 아가씨들.”

“아하하, 고마워요. 빅토르도 멋져요.”

“전 매일 이 옷입니다만.”

“그래서 매일 멋지시잖아요.”

키득거리며 인사를 주고받고, 빅토르가 물었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파리 음악원이에요.”

미팅 장소에 대해선 베르너가 미리 알려 주었다. 열 명이 넘는 오케스트라와 미팅을 하기 위해 원래는 연습실을 구하거나 할 생각이었지만, 파리 음악원에 재학 중인 루이 디아라의 도움으로 파리 음악원의 연습실을 빌릴 수 있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프랑스 최고의 음악학교인 파리 음악원을 한 번쯤 보고 싶기도 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난 태블릿PC를 꺼내 파리 음악원에 대한 정보들을 조금 찾아보았다.

정식 명칭은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설립일은 1795년. 유럽 역사상 최초의 음악원으로서 1866년 설립된 모스크바 음악원보다 더 오래되었다.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샤를 구노, 카미유 생상, 샤를 발랑탱 알캉 등 유럽의 클래식 문화를 견인한 음악가들을 굉장히 많이 배출한, 정말 유서 깊고 훌륭한 학교였다. 현재도 1200명의 재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유럽 최초의 음악원을 직접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였다.

이 파리 음악원은 파리 19구의 라 빌레트 공원 안에 있어서 어제 갔었던 필하모니 드 파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다 왔습니다. 아가씨.”

잠시 후 빅토르가 말했고, 창밖을 보니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유럽 최초의 음악원이라서 굉장히 낡았으리라 예상했는데, 예상을 깨고 현대식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한참 전에 새 건물로 증축을 했다고 한, 세련된 느낌의 파리 음악원은 필하모니 드 파리의 현대 예술과도 같은 감각과도 일부 통하는 데가 있어서 통일감마저 느껴졌다.

파리가 예술의 첨단을 걷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크네요…….”

“그러네. 모스크바 음악원보다 큰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보다는 작은 것 같고.”

아나스타샤나 나나 기준은 결국 러시아의 음악원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파리 음악원의 외부를 구경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상당히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아마 혼자서 와야 했다면 굉장히 쭈뼛거렸을 것 같다.

“가 볼까요.”

“응.”

난 아나스타샤, 빅토르와 함께 파리 음악원으로 발을 내디뎠다.

음악원 입구에서 스마트폰으로 미리 베르너에게 받은 연습실 위치와 용건을 보여 주니 들여보내 주었다.

이왕에 들어온 거, 파리 최고의 음악원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조금 일찍 올 걸 그랬다.

아쉽지만 살짝 둘러보다가 약속 시간 5분 전에 연습실로 향했다.

조심스레 노크를 두어 번 하자 안에서 기척이 있었다. 살짝 열고 들어서니 어제 봤었던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딱 맞춰 오셨군요.”

아직 낯선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니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깨를 폈다.

난 지금 다음 연주회를 위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쓸데없이 긴장하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첫 만남이 아니지만 첫 만남인 자리이다. 내가 할 일은 분명히 알았다. 난 적당히 모두가 보이는 위치에 서서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분들. 전 중앙음악학교 피아노과 8학년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요!”

“어제 멋졌습니다!”

“예쁘기도 해라.”

“환영해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여기저기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선배 음악가들이었다. 난 희미하게 웃음으로 답했다. 다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이 오케스트라의 주축인 두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다시 뵙네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예. 크리스티나 안드레예브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악장 크리스티나 안드레예브나 나미코바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산뜻한 인사다. 난 그 악수를 받으며 인사했다.

그런데 그녀는 산뜻했던 첫 인상과 달리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냥 크리스티나라고 불러 줘요. 그래도 되니까.”

“아……. 알겠어요. 크리스티나도 절 타티아나라고 불러 주세요.”

“아하하하, 고마워 타티아나.”

거의 미리 합을 맞춘 것처럼 나와 크리스티나는 금방 친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제 봤을 때 첫 인상은 루이와 브뤼노에게 실망해서 싫증 난다는 듯한 느낌이 강했었기 때문에 어쩐지 약간 쌀쌀맞은 사람처럼 느껴졌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살가운 사람이었다.

싱글벙글 웃는 크리스티나가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고, 그다음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다란 남자였다.

“…….”

난 이 인상 깊은 남자를 어제 무대에서 봤기 때문에 그가 이 오케스트라에서 무슨 직책을 맡고 있는진 잘 알고 있었다.

“반갑네. 지휘자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 타라소프일세.”

“반갑습니다, 지휘자님.”

이번에도 우리는 악수로 인사했다. 그 손은 정말 크고 두꺼워서 사람의 손이 아니라 무쇠 같은 기분이었다.

살짝 긴장된다. 어젠 말 한마디 없이 무뚝뚝하게 저편에서 날 바라보기만 했던 두 눈이 날 내려다본다. 제발 부탁이니 무섭게 바라보는 건 그만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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