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작별하고, 우리는 곧바로 리무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빅토르는 내 회의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파리 음악원을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빅토르에게 메시지를 보내 조금만 더 돌아보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았더니 마음대로 하라는 답장이 왔다. 그렇게 나와 아나스타샤는 잠깐 파리 음악원을 산책할 수 있었다.
정말 넓고 현대식으로 새로 지어진 파리 음악원은 깔끔하면서도 예술적이었다. 현대예술적인 느낌도 많았지만 그래도 클래식을 가르치는 음악원답게 고전적인 분위기도 물씬 풍겼다. 이러한 건물의 분위기도 학생들에게 분명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파리 음악원의 복도를 살짝 돌아보았다. 연습실이나 교실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프랑스어를 쓰는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이곳에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쏘다니고 싶진 않았다.
사실 지금도 누군가 프랑스어로 말을 걸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별 걱정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길도 모르면서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정원처럼 꾸며진 테라스로 나왔다. 답답한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던 학생들이 나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비가 잦은 파리라 그런지 지붕이 있었고, 의자와 탁자도 몇 개 놓여 있었다. 지금은 운 좋게도 아무도 없었다.
볕 잘 드는 곳에 서서 꽃들을 구경하며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회의를 지켜본 입장에서 어떻게 보였는지 말해 주었다.
“오늘 회의하는 거 보니까 생각보다 빨리 할 수도 있겠던걸?”
“그렇게 보셨나요? 전 사실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잘 한 걸까요?”
“아무렴? 스타니슬라프도 그랬잖아. 네가 도전적이라고. 또 뭐였지? 아 맞다. 태양.”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태양을 직접 바라볼 순 없지만, 난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불타고 있는 것 같진 않네요.”
“불타는 것처럼 덥지만.”
“아하하하. 로만. 그분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런 사람은 처음 봐.”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늘 본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휘자 스타니슬라프, 악장 크리스티나, 그리고 단원들. 모두 개성적이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실력은 확실했다.
스타니슬라프를 중심으로 단원들은 분명하게 결속되어 있었고, 크리스티나는 그 모두를 한 가족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난 오케스트라를 그리 많이 만나 보진 못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는 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오케스트라의 형태에 꽤나 부합하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모두 괜찮은 사람들 같다며 그 사람들과 같이 협연을 해야 할 날 안심시켜 주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어제와 오늘 단 이틀 보았을 뿐인 오케스트라이지만 우리들은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잠시 이야기가 사그라들 것 같으면 곧 나나 아나스타샤 어느 한쪽이 받아서 이어 나갔다. 우리는 멋진 오케스트라를 만나서 잔뜩 흥분한 학생들 같이 신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난 목 안 깊숙이 어딘가에 무언가 뭉쳐 있는 것을 느낀다. 사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
“응?”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가, 도로 거두어 들었다.
대체 그녀를 왜 부른 걸까. 묻고 싶은 것이 있긴 하지만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을 마구잡이로 내뱉을 순 없어서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도 책망처럼 들릴까 봐 겁이 난다.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내 목에 차오른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져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았다.
종종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워 보인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듣곤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따뜻한 미소를 지을 줄도 아는 단정한 얼굴이 날 바라본다. 눈이 마주쳤다. 긴 속눈썹이 두어 번 깜빡이고는, 가늘게 휘어진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예.”
“그 남자 어땠어?”
“그 남자요?”
“루이 디아라.”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차오르던 불안감이 짜증으로 변했다.
“……별생각 없는데요?”
“그래?”
아나스타샤는 여기에서 말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뭔가 더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난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말했다.
“관심 없어요. 별로.”
“단호하네?”
“말도 안 통하잖아요?”
“연주자잖아? 그리고 그 사람은 다음엔 러시아어를 배워 오기라도 할 기세던데.”
“……제가 신경을 써야 하나요?”
입 밖으로 뱉고 나서야 내가 과하게 짜증스럽고 날카로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나스타샤는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프랑스에서 피아노 연주자 친구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도 드물었다. 꼭 여행지에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다른 나라의 음악가와 교류하는 것은 정말 특별하고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것이다. 굳이 따져 볼 것도 없이 그건 확실했다.
같이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부터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다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보여 주겠다고 했었다. 지금 역시 그 연장선일 뿐이다.
그렇다면 되레 내 쪽에서 조금 적극적으로 루이 디아라와 친해지려 했어야 했다. 프랑스인인 그와 말이 안 통하면 구글 선생님의 도움을 빌어서라도 이야기를 해 보고, 파리 음악원을 안내받아 구경하기도 하고, 비쥬라는 인사 문화를 배우기도 하고. 정말 프랑스의 문화를 배우고 친구로 사귀려 했어야 했다.
그게 제대로 여행을 즐기는 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지금은 별 흥미가 일지 않았다. 왜일까. 루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어제 첫인상은 거의 최악에 가깝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싫진 않았다. 다음에 만나면 웃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러시아어를 배워 온다면 정말 친구라도 못 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단지, 지금 난 아나스타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기억들.
일전에 거북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요?
“…….”
정말 유치하다.
아나스타샤에게 혹시라도 신경질을 낼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어렴풋하게 있어서,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부질없는 짓이었다. 난 왜 이럴까 정말.
지금이라도 제대로 해야 했다. 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을 비집고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래서 비쥬도 안 받아 준 거야?”
아나스타샤는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단지 궁금하다는 듯 물어 온다.
반성하는 쪽으로 기울던 마음이 다시 반대로 튕겨졌다. 난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안 받아 준 것이 아니라 못 받아 준 것이에요.”
“왜?”
“전 살면서 한 번도 볼 인사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있는 그대로를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내가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녀는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 지금 내 자신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정말 이렇게밖에 못 하겠어? 유치하게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초면인 선배 음악가들을 앞에 두고 억지를 써서 2400명 앞에 나가 서커스를 할 때도 후회한다거나 부끄럽다거나 하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후회스럽고 부끄럽다.
변명하지 않으려 했는데, 머리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기분이다. 미리 생각해 둔 것들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보면서 난 바보 같은 소리밖에 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 처음이라서 틀리면 어색하잖아요? 실례가 될지도 모르고요.”
“모를 수도 있지 무슨 실례야.”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리면서 무언가 고민하는 듯 날 내려다보았다.
만약 아나스타샤가 귀찮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면 난 두말없이 바로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고 이 이야기를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짜증이나 귀찮음이 서린 눈빛은 아니었다.
다만 약간의 갈등과 애정.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타티아나. 내가 알려 줄까.”
그 말을 듣자마자, 난 내가 아나스타샤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지금요?”
“별것 아니니까. 응.”
내게 또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겠다는 그녀는 묘하게 기뻐 보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두서없이 비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나도 잘 몰라. 그냥…… 이건 나라마다 정말 다르기도 하고…….”
서로 닿지 않는 에어키스이며 여자끼리나 남자와 여자는 하지만 남자와 남자는 거의 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사항부터 각 나라에 따라 어떤 나라들이 하는지, 몇 번씩 하는지.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아는 볼 인사 문화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려 주었다.
한 번 듣고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할 리도 만무한데,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떠올려 보면 예전에 왈츠를 가르쳐 주었을 때도 그렇고, 수영을 가르쳐 줄 때도 그렇고, 아나스타샤는 내게 무언가 가르쳐 줄 때 정말 기뻐하며 최선을 다한다.
나 역시 그녀에게 무언가 배우는 것이 좋았다. 그녀의 방식과 방법을 배워서 조금씩 닮아 간다는 기분이 든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서 음악을 배울 때 드는 기분과 비슷했다.
상식적으로, 프랑스에서 자주 하는 인사 예의를 익히는 건 프랑스인인 루이에게 배우는 것이 낫다. 난 전혀 방법을 모르지만 루이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가면 될 일이다. 루이는 아나스타샤만큼이나 열성적일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난 지금 같은 기분을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의 설명을 들으면서, 불안했던 마음이 서서히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는 두 번이야.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는요?”
“우리는?”
“예. 우리는.”
프랑스 사람들이 볼 인사를 많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프랑스가 몇 번이건 그건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대답했다.
“우리는 세 번.”
“그래요?”
“응.”
러시아인인 우리는 세 번.
하지만 세 번이라고 해도 잘 모르겠다.
아나스타샤가 날 바라본다. 난 그녀가 내게 무언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 난 조용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나스타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리 와 볼래.”
그녀가 조심스레 요청했다.
난 한 발자국,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보다 가깝게 설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어색하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인사를 알려 주는데 어색할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웃으면서 살며시 내 팔을 붙잡았다.
“자, 정면을 보고. 오른쪽 뺨부터. 이탈리아는 왼쪽부터야.”
선생님 같은 말투로 말하면서, 아나스타샤가 머리를 뻗어 온다. 키 차이가 조금 나서 그런지 머리를 숙이는 것이 느껴진다. 난 한껏 고개를 들어서 그녀와 균형을 맞췄다.
어깨도 뺨도 닿지 않는 미묘한 거리감이 약간 거리가 있는 포옹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포옹과 다른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입으로 쪽 소리를 내는 거야.”
“입으로요?”
“허공에 소리만.”
아나스타샤가 다시 당부하며, 내 귀 옆에서 짧게 키스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면서 그런 소리를 내 본 적이 없어서 잘 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따라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가, 이번엔 왼뺨을 마주했다. 입으로 소리를 내고 마지막으로 다시 오른쪽. 쪽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아주 짧은 시간, 나와 아나스타샤는 러시아식 볼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마치고 떨어진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소리만 내는 것인데도 상상 이상으로 부끄럽다.
아나스타샤도 비쥬가 익숙하진 않은지 내 팔을 놓고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간단하지?”
“간단하네요.”
막상 해 보니 정말 별것 아니긴 했다. 고개를 좌우로 교차하며 내밀다 보니 왜 크리스티나가 딱따구리 같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가고, 많은 사람들과 이렇게 인사하면서 빠르게 하거나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사고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론 그저 인사일 뿐이었다.
그래도 간단한 것과는 별개로, 친구인 아나스타샤와 하는데도 이렇게 부끄러운데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이렇게 인사할까 싶기도 했다.
누가 와서 하자고 하면 받아 줄진 모르겠지만 내 쪽에서 먼저 다가가서 하는 건 정말 어려울 것 같다. 문화적으로 자주 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의 인사가 익숙해지려면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약간 변명조로 말했다.
“타티아나, 넌 몰랐겠지만…… 음, 평소에는 안 해. 특히 요즘 들어 더더욱 안하는 추세고. 부활절이나…… 생일이나, 정말 친한 친구끼리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렇게 특별할 때만.”
그녀는 내가 한 번도 이런 식의 인사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난 대충 대답했다.
“그렇군요.”
“응. 사실 그냥 포옹이 더 쉽잖아?”
“그러게요.”
이번에도 대충 대답하며 난 약간 벌어진 거리감을 무시하고 양팔을 뻗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갑자기 달려들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랐지만, 곧 해맑게 웃으며 날 마주 안아 주었다.
난 프랑스인이 아닌 러시아인이었으므로 볼 인사가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팔 외엔 어디도 닿지 않고 규칙에 따라 에어키스를 반복하는 볼 인사보다는 이렇게 온몸으로 끌어안는 쪽이 내게 있어선 조금 더 친밀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흔하고, 쉽고, 가깝고, 따뜻하다.
약간 복잡하게 꼬여 있던 기분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난 아나스타샤나 아버지와도 포옹으로 자주 인사하곤 했다. 그런데도 다른 형식이 부족하다는 기분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조금 더 강하게 아나스타샤를 안으며 말했다.
난 정말 바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