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호텔로 돌아온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는 스파를 즐긴 뒤 방으로 돌아왔다.
타티아나는 오케스트라와 회의를 한 후 휴식으로 몸이 노곤해졌는지 아나스타샤와 프랑스 방송을 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소파에서 잠들었다.
머리를 가누지 못해 옆으로 쓰러지거나 침을 흘리진 않을까 생각하며 지켜보고 있어도, 타티아나는 잠들어 있을 때조차 크게 흐트러짐이 없었다.
“…….”
잠들어 버린 타티아나를 두고 아나스타샤는 홀로 차를 조금 더 따랐다. 천천히 찻잔을 기울이던 그녀는 타티아나 덕에 평소 잘 마시지도 않던 차를 마시게 되었음을 떠올렸다.
다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함께 파리에서 공유했던 좋은 추억들이 하나둘 생각난다.
그 기억들 속에 있는 작은 편린들이 떠올라서 얽히고 뭉치며 하나의 답을 형언해 냈다.
저 애는 나를 좋아하고 있겠지.
아나스타샤는 그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를 거의 가족처럼 여기며 믿고 따랐다. 뭘 가르쳐 주든 의심하지 않고 무슨 말이든 신뢰한다. 그 모습은 종종 맹목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나는 저 애를 좋아한다.
처음엔 스스로도 잘 모를 감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만약 타티아나가 자신의 정체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번 학기가 거의 끝나 갈 무렵 타티아나가 해 온 고백은 아나스타샤가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
타티아나가 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당장 내일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겐 왜 엄하고 평가가 박한지, 이성과 동성에 대한 개념이 왜 모호하게 보이는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왜 무엇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지.
“하…….”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아나스타샤는 분명하게 느꼈다. 그녀는 타티아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여성으로서 기본적으로 무방비하고 상식이 부족한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가 하는 말이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믿곤 했다.
아나스타샤는 진실과 거짓이 섞인 교묘한 말로 타티아나를 제멋대로 하고 싶다는 충동을 몇 번이고 느꼈다. 발렌티나가 딱히 부추기거나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정말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 명석한 머리로도 아직까지 혼란스러워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마음을 쥐락펴락하고, 생각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아나스타샤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악마 같은 이기심으로 타티아나를 대하는 것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악랄하고 비열한 생각들은 정말 짧은 순간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죽고 싶어질 정도로 괴로워했다.
애정이라기엔 너무나 어두운 감정들. 그녀도 사람이기에 저열한 소유욕 같은 욕망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중한 친구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양심의 문제라고 말하면 너무 가볍다.
그것은 아나스타샤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이해한 아나스타샤는 오랜 시간 고민했고, 타티아나가 단지 아나스타샤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서 좋아하고, 마음의 선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그녀가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존중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왜 세상엔 좋은 남자가 없는지 15년을 두리번거리며 살아온 아나스타샤도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긴 했었는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는데, 겨우 1년을 산 타티아나가 무언가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타티아나에게 선택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이 친구로서 아나스타샤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가깝고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나스타샤에게 맹목적일 뿐이라면, 그건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라 절망해야 할 일이었다.
“…….”
때문에 더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 사이에 하듯 일부러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타티아나를 자극했다. 스스로 맹목적이라는 자각조차 없다면 자각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사이 아나스타샤도 혼란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봤다. 친애인지 사랑인지 뭐든 상관없다 생각하지만 나중에 착각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지 않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색했다.
타티아나는 미처 아나스타샤의 의도를 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금 섭섭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계속해서 타티아나가 접하는 것들의 균형을 맞춰 나가고 싶었다. 그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고 속편한 남자들을 보면 다 그만두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타티아나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흐릿한 눈으로 무지와 타성에 기반한 선택을 하길 바라지 않았다. 올곧고 맑은 눈으로 스스로의 목소리로 내어 주었으면 한다.
때문에 꾸준히, 스스로의 목을 조를지도 모르는 일을 자처한다.
지옥에 살지만, 악마가 되지 못했다.
“……어렵네.”
아나스타샤는 테이블 위에 머리가 닿도록 엎드렸다. 차가운 테이블의 냉기가 머리를 조금 식혀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누워 있는 아나스타샤의 머리 안으로 강렬한 진동이 파고들었다.
“……윽.”
아나스타샤는 머리가 죽도록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신음 소리를 냈다. 고개를 드니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스마트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것은 아니었다.
“…….”
타티아나의 스마트폰이 울리는 것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별생각 없이 집었다. 혹 집에서 온 것이라면 안심시켜 주면 될 일이었다. 타티아나의 아버지는 아나스타샤의 말이라면 믿어 줄 것이다.
그 믿음이 언젠가 최악의 벽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순간 든 어두운 생각을 지워 버리며 아나스타샤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에르네스트라고 밋밋하게 저장된 이름이 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고는, 받았다.
“안녕.”
- 어, 안녕……. 뭐야,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는 예상했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당황했는지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나야. 에르네스트.”
- 음, 좋은 밤이네.
“응. 멋진 밤이야.”
- 지금 몇 시지? 11시쯤 되었나?
먼저 걸어 놓고 시간을 묻는 건 희한한 매너처럼 느껴졌지만, 시차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짧게 대답했다.
“10시네.”
- 아, 그렇군. 어딘데?
“프랑스. 파리.”
- 멋진 곳이지.
“가 본 적도 없잖아 너?”
- 그냥 국제적인 사람인 척해 보고 싶었어.
아나스타샤는 어려서부터 에르네스트가 어느 나라에 가 봤었는지 알기 때문에 피식 웃으며 말했고 에르네스트 역시 농담으로 받았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에르네스트는 러시아어와 영어, 이탈리아어까지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국제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이 머리 좋은 소꿉친구가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전화를 걸었는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인데?”
- 어……. 아나스타샤. 지금 타티아나랑 같이 있는 거지?
예상한 질문이긴 했다.
“응.”
- 계속 같이 다녔어?
계속 자기가 묻고 싶은 것을 묻긴 하는데, 전화를 건 용건은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빠르게 답했다.
“같이 다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음. 그래.
“지금은 자고 있는데. 그래서 내가 대신 전화 받았고. 왜, 할 말 있어? 깨워 줄까? 목소리 듣고 싶니?”
-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주저하더니 용건을 꺼냈다.
- 어제 이야기를 조금 듣고 싶어서.
“어제 이야기?”
- 그래.
혹시나 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아나스타샤가 잠시 기다리자 에르네스트가 설명했다.
- 아까 내가 아는 지휘자에게서 전화가 왔어.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라는 분인데…….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고, 예전에 한 번 같이 협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꽤 괜찮았었거든.
“그래서?”
- 갑자기 생각이 났다면서 전화가 왔길래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지. 그런데 통화를 하다 보니 스타니슬라프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타티아나라는 중앙음악학교 학생과 협연을 할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실력을 봤다고.
“…….”
- 놀랍다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더라.
전체적인 이야기는 알고 지내던 지휘자로부터 친구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는 그리 축하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가 조용히 물었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자세히 못 들었어?”
- 대충 들었지. 하지만 못 믿겠어. 연주회 중간에 나가서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로 피아노 현을 끊어 놓았다고?
에르네스트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물었다.
타티아나가 연주로 피아노의 현을 끊었다는 일 자체를 믿지 못하겠단 말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보여 준 것은 직접 본 아나스타샤조차 흉내는커녕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절한 기술의 발로였다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당연하게 타티아나가 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다만, 타티아나가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 자체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 왜?
“그럴 이유가 있었어.”
- 난 이해가 안 가는데. 대체 무슨 사정이 있어야 관계도 없는 연주회에서 그렇게 되는데?
“그래서 지금 뭔데. 설명을 해 달라는 거야, 따지려는 거야?”
- …….
점점 목소리가 취조하는 듯이 바뀌어 가는 것을 살짝 꼬집자 에르네스트가 조용해졌다가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들려줘. 알고 싶어.
“…….”
가만 보니 타티아나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아도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했는진 못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궁금했으면 스타니슬라프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한이 있어도 물어볼 것이지, 갑자기 말해 주기 싫어졌다.
하지만 어차피 타티아나와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올 이야기였다. 아나스타샤는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면 설명해 주기로 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지.”
그리고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말해 주었다. 문제가 있던 피아노, 피아니스트와 스테이지 매니저 사이에 있었던 갈등, 해결될 가망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그대로 2부까지 망쳐 버릴 위기에 처해 있던 연주회.
간단히 축약하자면 프랑스인들이 어른스럽지 못한 돼먹잖은 짓들을 하고 있는데 타티아나가 나서서 2분 만에 해결해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된 거야.”
- 하……. 프랑스, 이 개……성적인 나라.
“그냥 욕해도 되는데.”
- 너희가 아직 그곳에 있잖아.
어쨌거나 여행 중인 친구들의 기분을 더 망치고 싶지는 않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배려가 마음에 들긴 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에르네스트가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 어쨌든, 상황은 이해했어.
“알겠어?”
- 알지. 하……. 타티아나 그 애는…… 피아노에 있어선 굉장히 터프하니까, 계기가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대에 올라가겠지.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의 짧은 설명만을 듣고도 마치 모든 것을 같이 본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타티아나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연주자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그 말투에 아나스타샤는 시니컬하게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바로 이어지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 하지만 정말, 정말 싫었을 거야.
“…….”
- 분명 자기 의지로 올라갔겠지만, 싫었을 거야. 특히 불필요하게 주목받는 것을 안 좋아하고 피아노를 끔찍하게 아끼는 그 애라면.
알은척이 아니라 정말 알아주는 거구나.
물론 에르네스트는 남자였고 타티아나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같은 연주자로서, 너무나도 타티아나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본 아나스타샤만큼이나.
아나스타샤는 그런 에르네스트에게 네가 대체 뭘 아냐고 말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아.”
- 그런데도 웃었겠지.
“그것도 맞아.”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혹시나 싶어 몇 번쯤 자극해 보려 해도 정말 둔감하게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주제에, 타티아나와 관련된 일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에르네스트가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항상 에르네스트에게 느끼는 이중적인 평가는 늘 균형을 맞추며 아나스타샤를 돌아 버리게 했다.
약간의 신경질과 짜증, 허무함 등을 느끼고 있을 때, 에르네스트가 재차 말을 이었다.
- 아나스타샤.
“……말해.”
- 넌 타티아나의 가장 좋은 친구지. 타티아나는 널 믿고 있어.
“…….”
- 네가 말렸어야 했다고 생각해.
“…….”
- 나 또한 너의, 그리고 타티아나의 친구로서 하는 말이야.
친구, 믿음, 친구로서의 조언.
그 자체는 정말 높게 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머리가 딱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가장 좋은 친구로 아나스타샤를 꼽았다.
당연하게 그리 보일지도 모르지만, 가끔 이럴 때마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경악하는 얼굴이 보고 싶기도 했다. 그것이 굉장히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욕구라는 자각만 없었다면, 아나스타샤는 정말 무엇이든 저질러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는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괜찮은 친구니까.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타티아나 대신 네가 받았길래 나도 모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해 버렸네.
아무리 걱정이 되더라도 이성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말을 하긴 정말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해야 할 말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움이 되기 위해서.
이런 배려심 깊고 정이 많은 면은 어떻게 보면 타티아나와 상당히 닮아 있기도 했다.
약간 짜증이 나서, 아나스타샤는 도전적으로 내뱉는다.
“괜찮아. 네 말대로 타티아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나니까.”
- ……?
약간 의아해하는 기색이 전화 너머로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어차피 부질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충동을 느꼈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말이 없다가, 화제를 돌렸다.
- 뭐……. 어쨌든 여행은 잘 즐기고 있어?
“이제야 묻는 거야? 참 빠르네.”
- 까먹진 않았잖아?
“참 잘했네요.”
용건은 끝난 듯하지만 안부 전화로 넘어갔다고 해서 바로 전화를 끊을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프랑스 여행에 대해 말했다.
“프랑스는 그냥 그래. 사람 많고 복잡하고. 타티아나는 재미있어하는 것 같지만.”
- 처음이면 재미있을 수밖에 없지.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으로 한쪽 머리를 빙빙 꼬았다.
순간적으로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프랑스 남자들에게 헌팅당하기도 했다고 하면 넌 뭐라고 할까?
어두운 충동이 계속해서 아나스타샤의 뒷머리에서 꿈틀거렸다. 그냥 한 번 해 봐. 해 보고 장난이었다고 하면 되잖아.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궁금한 건 사실이잖아.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그만큼 미쳐 있다고 여기긴 싫었다. 그녀는 이 소꿉친구를 미워하려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자제력이 고개를 들자 끔찍한 충동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타티아나와 이곳저곳 구경했던 이야기, 연주회 이야기 등등 즐거운 이야기들뿐이다.
성실하게 모든 이야기를 들어 준 에르네스트가 대답했다.
- 며칠이나 남았는진 모르겠지만 타티아나랑 좋은 시간 보내.
산뜻한 목소리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반대로 에르네스트가 다른 남자 친구와 여행을 간다고 해도 아나스타샤가 놀라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성 친구 간에 그런 일은 너무 자연스러웠고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으니까.
이젠 차분해져서 괜찮았지만, 조금 슬퍼졌다.
그 모든 감정들을 꽁꽁 숨기며,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더더욱 장난스레 말했다.
“조금만 더 놀다 갈게. 너 사다 줄 기념품은 우표면 돼?”
- 그걸 어디다가 쓰라고.
“모아 보든가.”
그렇게 전화상으로 이어진 대화는 대부분 별 의미 없는 잡담에 불과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십여 분 정도 통화가 흐르고, 아나스타샤는 슬슬 끊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에르네스트.”
- 어.
“안 자?”
- ……자야지.
퉁명스레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먼저 자야겠다고 끊어 버리지 않는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말했다.
“이만 끊을게.”
- 그래. 좋은 밤 되길.
“으엑.”
- 뭐가 으엑이야.
에르네스트는 투덜거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나스타샤는 전화가 끊어진 스마트폰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화면이 까매지자 몸을 일으켰다.
“…….”
테이블을 치우고 나서, 불편하게 자고 있는 타티아나를 깨워야지. 화장도 지워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기도 해야 하니까. 그게 친구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