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03화 (303/1,277)

##  303화

나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경우가 드물다.

보통 눈을 뜨면 어둑어둑한 새벽인 경우가 많았고, 연습실에 가서 잠깐 연습을 하다 보면 해가 뜨는 것을 보곤 했다. 난 시간을 한순간도 허투로 쓰기 싫었으므로 일찍 일어나는 생활은 평범한 내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끔 늦게 일어날 때면 아침 햇살에 눈을 뜨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

약간 멍한 기분으로 눈을 뜬 나는 곧바로 일어나지 않고 뒤척이며 옆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자고 있어야 할 침대다.

하지만 옆 침대엔 호텔 룸 클리닝이 왔다가도 그냥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이불만이 보였다.

정말 너무 늦게까지 자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밑으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이불을 정리한 뒤에 거실로 나왔다.

“…….”

소파엔 이미 아나스타샤가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못 알아듣는 프랑스 방송을 무슨 재미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내 기척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돌리며 인사해 왔다.

“일어났어?”

“아나스타샤.”

자연스럽게 아나스타샤는 내가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살짝 내주었다.

같이 앉아서 프랑스 방송을 보니까 막 물러갔던 잠기운이 다시 찾아드는 기분마저 들었다. 난 습관처럼 손을 스트레칭하면서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응. 그냥, 잠이 잘 안 오더라고.”

덜컥 걱정이 들었다. 갑자기 잠을 못 자다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먼 여행지라서 잠자리가 불편했던 걸까?

가까이에서 보니 눈이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하다. 난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요? 잠을 잘 못 주무셔서 어떻게 해요? 괜찮나요?”

“아하하하, 괜찮아.”

아나스타샤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그냥 오늘은 어딜 갈까 생각하다보니까 그랬어.”

“…….”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나스타샤가 기대감에 부풀어 잠을 못 이룬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난 그녀와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즉흥적으로 이곳저곳을 짚으면서 날 데리고 다닐 생각에 즐거워했으면 즐거워했지, 이렇게 혼자서 잠을 못 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걱정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내가 그런 기색을 내비치자마자 아나스타샤는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배고프지, 타티아나. 씻고 조식 먹으러 갈래?”

“……나가지 말고 룸서비스 시킬까요?”

“응? 그럴까?”

“예. 어제 괜찮았죠?”

프랑스 최고 호텔의 최고 스위트룸의 룸서비스는 확실히 수준이 높았다.

물론 조식도 훌륭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룸서비스를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피곤한 아나스타샤를 데리고 식당으로 내려갈 기분이 들진 않았다.

몇 분 후, 스위트룸의 커다란 식탁 위에 호텔 룸서비스가 차려졌다. 아침 식사라 그런지 기름진 음식 없이 담백하고 가벼운 음식들이었지만 어느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프랑스의 음식들은 하나하나가 너무 예쁘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예술품들을 잠시 감상하고, 심미안을 충족시킨 만큼 미각도 충족시키기 위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날 보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

고개를 드니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타티아나. 네 폰으로 어제 전화 왔었어.”

“전화요?”

“응. 네가 자고 있어서 내가 대신 받았어.”

전혀 기억에 없지만 밤중에 누군가 전화를 한 모양이다.

어차피 내 번호를 아는 사람은 한정적이었고, 아나스타샤가 받는다고 하더라도 별 문제될 건 없었다.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물었다.

“상관없어요. 누구였나요?”

“에르네스트.”

“……? 에르네스트요?”

아버지나 루슬란 오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인물이었다.

프랑스로 여행을 오기 전에, 잘 갔다 오라며 짤막한 메시지만 하나 보내고 그간 한 번도 연락이 없던 그가 무슨 일로 밤중에 전화를 걸었단 말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아나스타샤를 보니 그녀가 피식 웃었다.

“스타니슬라프가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했었나 봐. 그리고 엊그제 있었던 일도 모두 말했고.”

“아…….”

무슨 상황이었는지 이해했다.

스타니슬라프는 에르네스트와의 협연을 상당히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고 친구라고 표현할 정도로 인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회의 중에 내가 중앙음악학교 수석이라고 하자 곧바로 에르네스트를 떠올렸던 것이다.

생각난 김에 전화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파리에서 내가 한 일들도.

그거 사실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 스타니슬라프.

어쨌거나 잘못은 프랑스인들이 했고 러시아인인 내가 해결했으니 자랑할 만한 일이라 생각할지도…… 잘 모르겠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이었을 테니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왜 에르네스트가 내게 전화를 했는지 안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 때문에 전화까지 하셨던 건가요.”

“뭐……. 걱정이 되었나 보지.”

“걱정해 주시던가요?”

“그러던걸.”

내가 아는 에르네스트라면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예상, 혹은 기대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그리 관심을 가지거나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말을 해야겠다고 판단을 했을 땐 누가 뭐라건 말을 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내가 한 일은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서커스였으므로 에르네스트가 기막혀할 만도 했다.

분명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무대에 올라가서 어떤 기분으로 피아노 건반을 내리쳤을지 생각했을지 알기도 했을 것이고.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난 알 수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단지 그가 전화를 했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그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말을 했을지 떠올랐다.

난 작은 치즈를 포크로 가르면서 중얼거렸다.

“절 깨워 주셨어도 좋았을 텐데요…….”

“잔다고 하니까 굳이 널 깨워 달라고 하진 않더라고. 그래서 그냥 중간에 통화 소리에 네가 일어나면 바꿔 주려고 했지. 결국 통화 끝날 때까지 넌 못 일어났지만.”

“나중에 아나스타샤가 절 흔들어 깨워서 씻고 자라고 해 주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로 소파에서 잤을 거예요…….”

결국 옆에서 통화를 하든 말든 곤히 자 버린 내 잘못이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다.

아나스타샤는 날 보더니 킥킥 웃었다.

“어쨌든 에르네스트랑 네 이야기는 조금밖에 안 했어. 걱정하지 마.”

난 걱정 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조금 아쉬울 뿐이다.

두 사람이 나누었을 이야기는 뭐든 괜찮았다. 아나스타샤도 에르네스트도 내가 무대에 올라 피아노의 현을 끊었어야 했던 사정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저 잘했다고 생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 심정을 알아준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그 일로 조금 침울해 할 것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는 전화까지 해 주었다. 그 중요한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잠시 생각해 본 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냥…… 메시지를 보내야겠어요.”

“메시지?”

“예. 짧게나마.”

그냥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심 어린 걱정을 전해 오는 친구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난 냉담하지 못했다. 뭐라도 답을 해야 했다.

“…….”

그런데 뭐라고 하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전화도 못 받고 자고 있던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말 할 말이 궁색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한참을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베르너 위넬.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에이전시, 라파의 에이전트였다.

난 눈짓으로 아나스타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위넬. 좋은 아침이에요.”

- 좋은 아침입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짧게 통화 가능하겠습니까?

베르너 위넬은 깍듯한 태도로 인사했다. 본래도 내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이었지만 저번 일 이후로 더더욱 그런 것 같다.

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무슨 일로 전화 주셨나요?”

- 아, 다름이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일정 때문에 말입니다만.

사소한 잡담을 나누기 위해 에이전트가 전화를 걸진 않는다. 당연히 연주회 일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이 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오늘 오케스트라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고, 다음 주엔 모스크바에 연주회가 있지 않습니까?

“예. 들었어요.”

- 그 연주회가 끝나고 사실 바로 다음 일정이 있긴 했습니다만, 그 일정을 며칠 늦추고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말입니다.

“아, 정말인가요?”

오케스트라는 오늘 비행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주회를 하나 하고, 곧바로 모스크바에서 또 연주회가 있다고 했다. 정말 바쁜 오케스트라인 것이다.

그 후에도 일정이 빡빡해서 한참 후에나 할 수 있을 내 연주회의 준비는 되도록 빨리, 하지만 차차 일정을 잡아 보자고 했었는데, 다음 주에 바로 회의를 하자는 것을 보니 오케스트라도 에이전트도 일을 많이 늦추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음 주에 오케스트라가 모스크바에 있을 예정이라면 좋은 기회이긴 했다.

베르너가 물었다.

- 때문에 실례지만, 혹시 여행 일정이 언제까지이십니까? 방학 내 몇 주간 여행을 하실 생각이라면 모스크바에 오케스트라가 가더라도 회의를 할 순 없으니 말이죠.

“그게…….”

난 잠시 고민했다.

아나스타샤와 떠난 이 여행은 정말 계획이라곤 전혀 없었다. 며칠 머물지에 대한 계획도 없었고, 파리에서 계속 있을 계획은 아니었기에 다음 여행지도 찾아봐야 했지만, 다음엔 어디로 갈지도 계획이 없었다. 그냥 적당히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지면 갈 생각이었다. 비행기 표를 끊지 않고 전용기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호사였다.

그리고 그러한 무계획 여행에 계획을 세우려면 당연히 나 혼자서 멋대로 굴 순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베르너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청하고,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

“응. 편한 대로 해.”

“……예?”

말을 걸자마자 그녀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말했다.

통화 내용은 내 말만 들렸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대충 유추한 듯하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확실하게 말했다.

“난 괜찮아.”

“…….”

“이번 여행에서 전 유럽을 다 돌면서 방학을 몽땅 써야 할 계획도 아니었고, 적당히 놀다가 돌아가면 좋지 뭐. 넌 네가 할 일도 있는 거고.”

“아나스타샤…….”

“그렇게 보지 말고.”

난 그녀가 약간은 싫은 티를 낼 줄 알았다. 여행을 하다 말고 내 일 때문에 오케스트라와 회의를 하더니, 심지어 내 일정에 맞추어 모스크바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내가 스스로 내 목에 채운 의무의 사슬이었고, 그래서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하든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단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따뜻하게 말해 주었다.

“결정한 대로 해. 타티아나.”

더 이상은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예. 고마워요.”

“고맙긴. 적당한 때에 잘 되었네.”

“그래도요.”

그녀의 말마따나 2주가량의 여행은 결코 짧은 여행은 아니었고 적당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내 일정을 이해해 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난 다시 한 번 아나스타샤에게 감사를 표하곤 다시 전화를 들었다.

“위넬, 다음 주 언제인가요?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렇습니까?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회의는 늦추면 되니까 무리해서 맞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빨리 진행하고 싶긴 해서요.”

- 그러시다면야.

그리고 베르너는 다음 주 금요일에 오케스트라의 모스크바 연주회가 있으며, 그다음 날인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프리하게 모스크바에서 시간을 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보면 될 것이다.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게 정리되었고, 베르너가 경쾌하게 말했다.

- 좋습니다.

“예.”

- 그럼,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모스크바에서.

“예, 모스크바에서.”

전화를 끊자, 어쩌면 정말 적당히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의무가 제 역할을 해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서 협연에 대한 아무 일정도 갖지 않았더라면, 난 정말로 계획 없이 무작정 아나스타샤와 유럽을 떠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행복한 일일 테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 또한 있었지만, 계획이 생긴 지금에서야 드는 안심 또한 분명히 있었다.

어쨌든 남은 일주일 동안 아나스타샤와 즐겁게 지내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

차분해진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난 문득 스마트폰에 띄워 놓은 작성 중 메시지를 발견했다. 에르네스트에게 무어라 보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메시지였다.

일단 문제를 간단하게 하기로 했다.

[다음 주에 돌아가면 찾아뵐게요.]

에르네스트에게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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