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06화 (306/1,277)

##  306화

문 위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대답하자 문이 열리고 루슬란 오빠가 들어왔다.

깔끔한 셔츠에 조끼까지 당장 무대에 올라도 될 정도로 정말 멋진 차림이었다. 루슬란 오빠가 스타일리시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더 신경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케스트라와 회의를 한다고 했더니 정말 중대한 회의에 가는 사람처럼 입고 왔다.

난 뭐라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툭 내뱉었다.

“편한 옷으로 가셔도 되는데요…….”

“그럴 순 없지.”

“정말 괜찮아요. 절 보세요.”

“……?”

루슬란 오빠에 비해 나는 블라우스에 긴 뷔스티에 원피스 차림이었다. 회의는 회의였지만 루슬란 오빠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기에 이 정도면 되리라 생각했다.

루슬란 오빠는 짧게 평했다.

“나들이 가는 사람 같네. 회의를 한다면서 그렇게 가도 돼?”

“그렇게 포멀한 자리는 아닐 거예요.”

“그렇다고 공원에 나가서 드러누워서 이야기할 건 아니잖아.”

“연습실을 빌렸다고 했으니 아마…… 거기서 하겠죠?”

저번에 만나 본 느낌으로는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루슬란 오빠를 보니 갑자기 내 확신에 자신이 없어졌다. 난 누군가를 만날 때 어느 정도 격식을 차려야 하는지 가늠하는 데에 있어서 그리 센스가 뛰어난 편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볼까 고민하는데, 루슬란 오빠가 픽 웃었다.

“뭐, 상관없지.”

“그런가요?”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 내가 보기엔.”

오빠가 보기에 괜찮아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기도 싫었고, 루슬란 오빠를 귀찮게 만들기도 싫었다.

괜찮다고 하니까 괜찮겠지. 난 그런 물렁한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까요.”

“그래.”

더 까다롭게 이야기할 것 없이 우리 남매는 저택을 나왔다.

빅토르가 리무진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 함께 모시겠습니다.”

루슬란 오빠의 에스코트를 받아 차에 올랐고, 미리 말했던 대로 우리는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향했다.

***

프랑스에서 회의를 했을 때, 루이 디아라의 도움을 받아 파리 음악원의 연습실을 빌릴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엔 베르너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연습실을 빌렸다고 한다. 수완이 참 좋은 사람이다.

“…….”

차에서 내려 모스크바 음악원을 올려다보았다.

오다가다 몇 번 보면서도 계속 느끼는 점이지만, 러시아 최고의, 즉 세계 최고 반열에 오른 음악원답게 세월과 무게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물이다.

나중에 음악원에 간다면 여기로 가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좋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기대나 소망에서 비롯된 생각은 아니었다.

난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 직후, 이곳의 교수님에게 당장 입학하라는 러브콜을 직접 받기도 했었으니까.

거절했지만.

“…….”

절대 후회하진 않는다. 편입 1년 만에 음악원 교수의 러브콜을 받고 음악원으로 조기 입학 하는 건 연주자로서 훌륭한 선택일지 몰라도 난 그렇게까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음악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내겐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다시 제안을 받는다고 해도 다시 거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스크바 음악원이 싫은 것은 절대 아니었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반드시 가고 싶었다.

언젠가 때가 된다면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아련하게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해?”

루슬란 오빠가 가만히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슬쩍 물어 왔다.

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입이 움직이는 대로 말했다.

“제게 몇 년이나 남았는지……. 그런 생각들이요.”

“몇 년? 음, 이제 9학년이니 3년 정도 되겠네.”

“3년…….”

난 중얼거렸다.

중앙음악학교의 선생님들과 내 친구들은 그 자체로 날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들이었다. 언젠가 졸업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날 것을 알아도 끝내기 싫은 것이 사람 마음인 것처럼, 아무 곳에도 가기 싫은 마음도 있었다.

여전히 나약한 마음이 두리번거리다가 찾아낸 것은 그나마 합리적으로 보이는 숫자였고, 그 숫자는 3년이라는 기간을 알려 주었다.

솔직히 숫자로 보아도 잘 모르겠다. 적당한가? 글쎄. 그럼 짧은가? 그렇지도 않다. 긴가?

그야말로 막연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손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말했다.

“타티아나, 네가 지금처럼만 한다면 꼭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러시아 최고의 음악원이 쉬운 목표는 아니겠지만, 너라면 할 수 있으리라 믿어.”

루슬란 오빠는 내가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교수님에게 직접 러브콜을 받았다는 건 미처 모르는 것이다.

여기서 으스대면서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난 걱정해 주는 오빠에게 감사하며 답했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 음, 오늘 만나는 오케스트라와 하는 협연도 네게 도움이 되겠지?”

“그렇죠? 커리어로 모두 남게 되어 있으니까요.”

“열다섯 살에 커리어라니 조금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뭐 넌 음반도 녹음했고, 안 될 것도 없으니까.”

루슬란 오빠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부터 세상에 뛰어들어 연주자로서 활동을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처럼 일곱 살부터 연주회 경력이 있는 연주자들도 있다. 난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이 또한 일반인인 루슬란 오빠와의 관점 차이지만, 난 구태여 에르네스트의 예시를 들며 짚어 주지 않았다.

“안 될 건 없죠.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널 보고 있자면 나도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이 들곤 해.”

“루슬란 오빠는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요?”

“글쎄. 노느라 바쁜데.”

“아하하핫, 정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루슬란 오빠는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베르체노프의 후계자로서 경영 수업으로도 바빴다.

나야말로 가끔은 루슬란 오빠가 걱정되었다. 다 큰 어른같이 보이긴 하지만 오빠도 겨우 스무 살인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고 노련한 사업가들 사이에서 무언가 하려면 얼마나 스스로를 잘 무장해야 할 것이다.

“…….”

내가 지금 만나려는 음악가들도 당장은 날 인정해 주고 굉장히 협조적이지만, 사실 훨씬 나이 많고 노련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에게 난 정말 여러 가질 배우기도 하지만 때때론 집어삼켜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지금 보니 오빠나 나나 어렵긴 매한가지인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동질감이 느껴져서 난 루슬란 오빠의 손을 잡고 말했다.

“힘내요, 우리.”

“……어?”

“저도, 오빠도 잘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루슬란 오빠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상냥하게 웃었다.

“그래, 오늘 잘 해. 옆에 있어 줄 테니까.”

“예.”

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루슬란 오빠와 잡은 손을 당겼고, 루슬란 오빠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일요일임에도 교내엔 학생들이 남아 있었고, 두리번거리고 있자 몇 명이 도움을 주겠다며 다가왔다. 난 연습실 위치를 안내받아서 금방 찾아갈 수 있었다.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낯익은 분들이 앉아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쪽을 돌아본다.

“왔는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 타라소프가 홍차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서 와. 타티아나. 어머나, 옆의 분은 누구?”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 수석 주자, 곧 악장인 크리스티나 안드레예브나 나미코바도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해 왔다. 더없이 친근한 어투다.

몇 명의 단원들도 일어서서 날 맞아 주었다. 난 그들과 악수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조금 늦었네요.”

“늦긴요? 약속 시간 15분 전인데.”

“우리가 조금 일찍 왔지.”

“할 일이 없어서.”

푸하하하 하고 웃음이 터진다.

정말 일이 없다면 웃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작은 오케스트라가 정말 바쁘게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연주회를 한다는 것을 아는 나는 그 농담에 따라 웃을 수 있었다.

웃음소리가 흘러가고, 잠시 뒤 모두의 관심은 내 옆의 루슬란 오빠에게로 향했다. 난 오빠를 소개했다.

“제 오빠 되세요.”

“루슬란 유리예비치 베르체노프입니다. 타티아나의 보호자로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루슬란 오빠도 스타니슬라프와 악수했다. 스타니슬라프는 별말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 같다.

다른 단원들도 루슬란 오빠와 악수를 하며 한마디씩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루슬란.”

“보호자……. 그러네요. 타티아나는 열다섯 살이니까. 보호자가 필요하죠.”

“보호자로 오빠가 따라오시는 것도 멋지네요.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그 말에 루슬란 오빠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냥 그렇습니다.”

“말이 아닌 표정으로 답하시는군.”

“좋은 오빠네요.”

“부러워라.”

아무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시점에서 루슬란 오빠는 무슨 말을 해도 설득력이 없었다.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그렇단 말을 듣긴 했지만 남들 앞에서 쑥스러워서 한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루슬란 오빠도 참 묘한 부분에서 귀엽다.

그렇게 모두와 인사를 마치고, 오빠는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앉기로 했다. 이 회의에 무언가 발언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보호자 신분이니 지켜보는 것만 충실히 하겠다는 것 같다.

편안한 사복 차림의 단원들은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아니라 마치 이 음악원의 학생인 것처럼 저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제로 이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도 많기도 할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그사이 직접 주전자가 있는 쪽으로 가선 홍차 두 잔을 타서 나와 루슬란 오빠에게 주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받자 그녀는 날 자신의 옆쪽에 앉히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저번의 친구도 그렇고. 타티아나는 좋은 사람이 많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후후후……. 아무튼, 그간 잘 지냈어?”

“예. 덕분예요.”

난 가볍게 그녀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크리스티나는 편하게 말하면서 날 정말 가깝게 대해 주었다. 그녀가 오케스트라의 악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홍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크리스티나가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베르너에게 듣기론 우리 일정 때문에 여행 일정을 줄여서 맞췄다고 하던데……. 정말인 거야?”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여행 자체의 시작과 끝이 전부 얽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렇진 않아요. 여행은 독일에서 마칠 생각이었고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휴우……. 난 또 혹시나 해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파리까지 왔을 때도 얼마나 놀랐는데?”

난 기존의 여행 계획에 파리 여행이 잡혀 있어서 운 좋게 연주회를 관람하고 미팅을 잡은 것이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내 쪽에서 조정을 했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아는 듯했다.

약간 미안하다는 듯, 하지만 확실하게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그래도 타티아나가 이렇게 맞춰 주니까, 빠르게 두 번째 미팅을 잡을 수 있었네.”

크리스티나는 날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도 최대한 협조해서 해 볼 테니까……. 정말 잘 했으면 좋겠어. 타티아나와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크리스티나.”

“우후후후, 좋아, 좋아.”

그녀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뜨렸고, 곧 살짝 눈을 흘기며 스타니슬라프를 바라보았다. 악장인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데 지휘자도 한 마디 해 달라는 것 같았다.

스타니슬라프는 짧게 말했다.

“잘 해야 잘 되겠지.”

정말 무섭도록 올바른 말이라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이 무뚝뚝한 지휘자가 음악적으로 얼마나 진지한진 잘 알기 때문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니슬라프의 얼굴에 일순간 만족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정말 순간이었고, 곧 진지함이 연습실을 장악했다.

좋은 사람들과 홍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난 여기 놀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 역시 정말 할 일이 없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지휘자 스타니슬라프의 주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의 연주회에 대한 2차 회의가 시작되었다.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저번에 이야기했던 프로그램을 어떻게 변동하면 좋겠나. 후보가 많지. 크리스티나.”

“여기요.”

크리스티나는 미리 준비해 왔는지 이번엔 서류를 내밀었다. 내게도 건네주기에 받아 봤더니 오케스트라가 가능한 장르와 변동 가능한 인원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난 그 내용을 다시 체크해 보고는, 이전에 나왔던 프로그램에서 하나를 콕 짚었다.

몇 번이나 들어 보고, 혼자서 읽어 보고, 저번에 들었던 챔버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가늠해 보면서 떠올린 것이었다.

“쇼스타코비치를 생각해 봤어요. 제 생각엔요……. 혹시 첼로를 더 추가할 수 있나요?”

“가능은 하지.”

“그렇다면…….”

“하지만 추천은 안 하네.”

첼로를 더 추가하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스타니슬라프는 고개를 저었다. 안 하는 게 낫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우린 의견 교류를 시작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곡들 중 아무거나 두어 개 골라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도 최선을 다해 잘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도 잘할 수 있는 곡을 좁혀 나갔다.

저번에도 했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한쪽으로 균형이 기울어지는 것도 좋지 않았고, 또 프로그램이란 그 구성 자체도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클래식은 한 장르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대에 따라 바로크, 고전, 낭만. 그리고 나라에 따라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세부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모든 클래식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의 청중들은 어느 한 시대나 음악가 부류를 좋아한다. 때문에 1부와 2부의 티켓을 따로 팔 것이 아니라면 주제를 일관성 있게, 혹은 선형적인 스토리를 가지게끔 구성하는 편이 좋았다.

예를 들자면 러시아의 현대 클래식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 같은 음악가를 프로그램 1부에 편성했다면 2부 역시 현대 클래식의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에프 같은 음악가를 편성하는 것이다.

나와 스타니슬라프, 크리스티나, 그 외 단원들도 모두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진행했다.

“모차르트로 시작해서 베토벤으로 끝내는 건 어때?”

“정석 중의 정석이네. 하지만 타티아나의 실력이라면 조금 더 내다봐도 될 것 같은데.”

“쇼팽에서 시작해서 슈만은?”

“그것도 여기 안에 있어.”

“라흐마니노프에서 메트너까지도?”

“라흐마니노프는 보류라니까. 저번에 이야기했잖아.”

“몇 명 더 데려와서 2관으로 가면 안 되나?”

“그게 되겠어?”

“저번엔 했잖아.”

“그땐 정말 특이한 경우였고.”

나와 달리 다른 모두는 실력 있고 경력 있는 음악가들이었다.

이야기가 마구마구 달려 나가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렸다.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배우고, 확실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확실히 했다.

다행히 모두들 내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하진 않고 잘 들어 주었다. 어리니까 그냥 들어 준다는 느낌이 아니라, 확실히 내 말을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여 준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난 너무 앞서 나가지 않으며 적절하게 피아노 연주자인 내 위치에 충실했다.

한참이나 그렇게 회의를 진행하다가, 스타니슬라프가 손가락으로 종이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차이코프스키……. 이건 한 번쯤 맞춰 봤으면 좋겠군.”

이렇게 말로만 회의를 할 것이 아니라, 아예 한 번 연주를 해 보고 싶다는 것 같았다.

스타니슬라프가 날 바라보았다.

“할 수 있다고 했던가?”

“예.”

“어느 정도로?”

“인템포로 완주할 수 있어요.”

“지금?”

“예. 곧바로도 가능해요.”

이곳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연습실이었고, 저 옆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다. 못 할 것도 없다.

즉답했더니 스타니슬라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말했다.

“미안하네만 3악장만 한 번 보여 줄 수 있겠나. 지금. 피아노 솔로만 일단 들어 보도록 하지.”

오늘도 프로그램 회의만 하고 돌아가게 되나 싶었는데, 피아노를 만지게 될 기회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예.”

하지만 미처 몰랐어도 상관없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피아노라면, 난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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