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시간을 보낼수록 우리는 올빼미들에게 익숙해졌다.
작은 아이들은 별다른 도움 없이도 쓰다듬을 수 있었고, 큰 아이들은 두꺼운 가죽 장갑과 직원의 도움을 필요로 하긴 했지만 그래도 별문제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공격적인 모습이 보였다면 무서웠을 텐데, 가끔 푸득거리는 것을 빼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배 부분이나 발을 만지지 말라는 주의 사항만 잘 지켜 주면 올빼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순했다. 기본적으로 맹금류이긴 하지만 이 카페에서 태어나서 사람의 손을 타 왔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공격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약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땡그란 눈을 보고 있자면 우리 집에도 한 마리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리라.
“……벨카가 화내겠죠?”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집에서 올빼미를 한 마리 키우는 상상을 하다가 고개를 저어 훨훨 날려 보냈다. 지금 내겐 벨카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튼 그렇다면 귀여운 올빼미들과 놀 수 있는 건 지금 뿐이었고, 난 최대한 만끽하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작고 하얀 아이와 많이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친밀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사진도 몇 장이나 찍으면서 한참이나 데리고 놀다가 에르네스트에게 건네주었다.
“에르네스트. 그 아이랑 같이 서 보세요. 사진 찍어 드릴게요.”
“아니, 괜찮다니까.”
“어서요.”
나도 혼자서 사진을 찍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나보다 더 싫어했다.
자존감 높고 돋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면서 왜 사진을 꺼려하는지 몰라 몇 번 물어보았으나 에르네스트는 그냥 별 이유 없다고 할 뿐이었다.
그 또한 그의 성격이겠거니 싶어서 더 강요할 마음이 들진 않았다.
대신 그런 그를 사진으로 남기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자, 여기요.”
“……뭐야?”
“에르네스트가 팔이 더 길잖아요. 찍어 주세요.”
그리고 난 그에게 스마트폰을 넘기고는 옆으로 다가가 가까이 붙었다.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팔을 쭉 뻗었다.
이전에 갔었던 디저트 뷔페에서도, 기부금을 전달하고 오는 차 안에서도 에르네스트는 다 같이 찍는 사진이라면 피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쭉 팔을 뻗자 카메라 안에 그와 나, 작은 올빼미까지 모두가 들어왔고, 그가 셔터 버튼을 눌러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또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기록으로 남았다. 지금 우리에겐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난 활짝 웃으며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에르네스트에게도 보내 드릴게요.”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를 입을 대더니 미지근하다며 인상을 쓴다. 난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안에 있는 올빼미들은 거의 한 번씩 다 만져 본 것 같다. 수십 마리도 넘었는데 꽤나 알차게 보낸 느낌이다. 시간도 거의 다 되었고, 우리는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재미있었죠?”
카페 밖으로 나와서 에르네스트에게 묻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곳 처음이라서 조금 놀라기도 했는데, 좋았어. 넌?”
“전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즐거웠어요.”
귀여운 올빼미들과 노는 것도 좋았지만 에르네스트가 신기해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그를 괜히 방어적으로 만들긴 싫었기에 난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다음에 또 오도록 해요.”
“……타티아나 올빼미 좋아하나 봐? 몰랐네.”
“예? 아, 좋아하긴 하지만…….”
다음에 또 오자는 말이 이곳에 국한된 이야기로 들린 듯하다.
난 그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덧붙였다.
“꼭 이곳 말고 다른 곳들도 많잖아요?
“다른 곳?”
“피아노 연습실 말고 저희가 같이 놀 수 있는 곳이요.”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네.”
말은 이렇게 해도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중앙음악학교에서 같은 반 친구로 있는 이상 가장 많이 모여서 같이 놀게 될 공간은 학교 연습실이 될 것이다.
둘이서 번갈아 연습을 하기도 하고, 서로 의견을 내거나 피드백도 하고, 속주 대결이나 레퍼토리 대결을 하기도 할 때 우리는 가장 생기 넘치고 열정적인 사람이 된다.
우리는 단둘이 연습실에 있을 땐 그리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단지 음악만으로도 통하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서 자주 연습실에 갈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늘 기적 같은 시간만 보내는 것보다, 가끔은 이렇게 평범한 친구처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겁다.
그 역시 그러하리라 믿는다.
***
우리는 트베르스카야 대로를 따라 걸으면서 매장에 들러 내 모자를 사기도 하고, 에르네스트의 여름옷을 봐 주기도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중간엔 살짝 삐치기도 했었다.
이따가 헤어지기 전에 선물로 줄 것이 있으니 잠깐 우리 집에 들르자고 했더니 에르네스트가 지금은 싫다고 거절한 것이다.
당장 급하게 주지 않으면 안 될 선물도 아니었고 독일에서 사 온 기념품 정도였으니 다음에 만나서 주면 될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약간 뿔이 났다. 저번에 사샤와 함께 우리 집에 와서 놀다 간 적도 있으면서, 아직도 부담스러워하는 태도가 잘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금 주니 내일 받니 하다가 급기야 나는 그에게 그렇다면 택배로 부쳐 주겠다고 말실수를 했고, 그 말을 뱉자마자 바로 사과하는 것으로 결국 짧은 티격태격을 마무리 지었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심한 말을 했다고 사과하자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면서 조금 어이없어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역시 미안했는지 내게 사과했다. 우리는 짧게 투닥거렸던 것보다 훨씬 길게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그렇게 웃기도 하고 핀잔을 주기도 하면서 우리는 거리를 걸어 내려간다.
이 거리의 끝이 어딘지는 그도 나도 너무나 잘 알고, 그곳에 다다르면 자연스럽게 오늘 이 짧고 즐거웠던 시간을 마무리하게 될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인지하고 있으면서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이 시간에만 충실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걷던 와중,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적어도 저 끝 광장까지 갔으면 좋겠는데.
“에르네스트?”
“타티아나.”
에르네스트는 날 내려다보더니, 다시 손을 들었다.
난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음반 매장이 있었다.
“아하하, 살 음반이라도 있으신가요?”
“조금 있어.”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간다더니. 지금 에르네스트가 딱 그랬다. 어쨌거나 그는 뼛속부터 음악가인 것이다.
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구경 좀 할게요. 음반 추천도 해 주실 거죠?”
“물론이지.”
에르네스트는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음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유서 깊은 트베르스카야 대로에 위치한 음반 매장이니 만큼 상당히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매장이었다. 그리 내부가 크진 않았고, 사람도 몇 명뿐, 사장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혼자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안녕하세요.”
책을 보고 계시던 주인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며 인사해 주셨다. 난 웃으며 답인사를 했다.
내 인사를 받더니 할아버지는 잠시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손을 들어 안경을 고쳐 쓰고는 다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냥 답인사를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쳐다보시는지 모르겠다.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초면에 미안하네만, 자네 혹시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아닌가?
“……절 아십니까?”
“알다마다!”
할아버지는 난데없이 카운터를 손바닥으로 탕 치더니 호탕하게 소리쳤다. 온 가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러시아에서 음악계에 발 담근 사람 중에 자네 모를 사람이 있으려고?”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겸손하기도 하지.”
에르네스트는 나라에서 밀어 주는 신예 연주자였고, 수상 경력이나 연주회 경력도 많아서 자연스레 매스컴 등에 얼굴이 나간 적도 많았으므로 아는 사람이 많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진짜 이렇게 누군가 에르네스트를 알아보는 것은 처음 봤는데, 조금 놀랍다.
“아무튼 이것 참 반가우이. 반가워.”
“저야말로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지. 인터넷이나 신문에 나와 있는 그대로이지 않나?”
“인터넷에서 절 보셨습니까?”
“손녀딸이 자네 팬이라서 말일세. 옆에서 봤네.”
“아.”
인터넷엔 에르네스트의 영상도 굉장히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걸 보고 팬이 된 사람들도 많은가 보다. 주인 할아버지는 손녀가 얼마나 에르네스트의 팬인지 한참을 열성적으로 말씀하셨다.
“매일같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 보면서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의 음반은 가게에 안 들어오냐고 아우성인데, 나라고 세상에 없는 음반을 구할 수는 없어서 항상 곤란했지. 그나저나 자네 음반은 안 내나?”
“조만간 낼 것 같긴 합니다.”
“오호, 그런가? 음반 내고 혹시 이 근처 올 일 있으면 꼭 한 번 다시 들러서 사인 좀 해 주게. 내가 섭섭잖게 챙겨 줄 테니.”
“하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약속을 했으니 다음에 오긴 분명히 올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는 손녀에게 줄 사인이라면 지금 당장도 해 줄 수 있다면서 할아버지가 꺼내온 용지에 자신의 사인을 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정말로 기뻐하면서 몇 번이고 고맙다고 했다.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에겐 저 사인 한 장이 정말 절실했던 모양이다.
그 후에 에르네스트는 매장 안에 있던 손님들과도 인사했다.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로 인사를 주고받는 그에게선 평소 모습과는 또 다른 면모가 느껴졌다.
그의 친구일 뿐인 나는 옆에 가만히 있을 뿐이었지만 기분은 정말 좋았다. 내가 인정하고 아끼는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을 보면서 순수한 기쁨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유명인사이시네요? 에르네스트.”
“별로…….”
에르네스트는 괜히 말끝을 흐리며 부끄러워했다. 지금은 그냥 잘난 척 좀 해도 내가 알아서 맞춰 줄 텐데, 혹여나 내가 면박이라도 줄까 눈치를 보는 것 같다.
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뜻으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론 더 유명해지실 테니까요.”
“너야말로.”
“예?”
나도 모르게 되묻자 그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저 주인장도 널 전혀 못 알아본 것 같지만, 내가 장담하건데 중앙음악학교 졸업 전엔 반드시 널 알아보게 될 걸.”
“……갑자기 부끄러운 말씀을 하시네요.”
“구세프 선생님도 했던 말이야.”
“……?”
구세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선생님은 내 앞에선 한 번도 유명해질 것이라든가 그런 말은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 앞에선 하신 모양이다.
에르네스트는 내 표정을 보더니 아차 싶었는지 말을 돌렸다.
“아무튼 앞으로도 실력 없이 이름만 떠도는 쭉정이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해야겠어. 오늘 좀 놀랐네……. 밖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진짜 별로 없는데 말야.”
“아하하…….”
“뭐……. 됐으니까 음반 찾아보자.”
그는 정말 더 이상은 신경 쓸 생각 없다는 듯 음반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연주자들은 악보도 많이 보고 피아노 건반도 많이 만지지만, 동시에 음반도 정말 많이 듣게 된다.
단순한 감상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연주자의 음반을 듣고 곡을 연구하는 목적도 있었다.
특히 각 곡마다 대표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음반들은 꼭 한 번쯤 들어 보고 공부를 해 보는 것이 좋았다. 수많은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해석이라고 인정받은 해석은 언제나 들어 볼 가치가 있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이게 제일 낫더라고. 너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은데. 타티아나.”
에르네스트는 클래식 음반들에 대해 상당히 깊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선반을 슥 훑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음반 몇 장을 짚어 내며, 어떤 연주자의 어떤 곡을 어떤 음반사가 녹음한 것이 좋은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깊게 생각 안 하고도 곧바로 툭툭 설명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이미 그의 머릿속엔 그간 그가 들었던 모든 곡들과 연주자들이 정리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가 천재라고 하더라도,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 음반 같은 경우는 제아무리 천재라도 해도 노력하지 않고는 무엇이 좋은지 곧바로 추려 낼 수 없었다. 그냥 듣는 데에도 시간이 들기 때문이었다.
평소 그가 기가 막힐 정도로 레퍼토리가 넓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만큼 많이 듣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연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하는데 실력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단하세요. 에르네스트.”
“뭐가……?”
“그냥요.”
에르네스트는 묘한 눈으로 돌아보더니, 다시 음반을 살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난 절대 자만하지 말고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반칙덩어리인 나와 달리 에르네스트는 순수하게 자신의 시간으로만 저 실력을 이루어 낸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잘해 나가겠지. 과연 그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정말 기대된다.
그렇게 난 에르네스트의 추천을 받아서 음반을 몇 장 골랐고 에르네스트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랐다. 스크리아빈과 쇼스타코비치. 가만 생각해 보면 작년 위클리 무대에서 스크리아빈을 연주했었는데.
음반을 다 고른 우리는 카운터로 와서 주인 할아버지에게 계산해 달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돈 안 받을 테니 그냥 가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물건을 파시는데 그냥 주시면 어떻게 하냐고 끝끝내 우겨서 계산을 했다.
대신 할아버지는 카운터 옆에서 음반을 하나 더 꺼내서 우리에게 주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웃으며 가져가라고 하셨다.
“이벤트성으로 하는 걸세. 원래 일정 금액 이상 사는 사람들에게 주려고 했던 건데, 그냥 가져가게.”
“아……. 감사합니다.”
이런 호의까지 무시할 순 없어서 감사히 받았다.
그런데 음반을 받자마자 난 고개를 갸웃했다.
“?”
무미건조한 음반 재킷엔 수록곡 세 곡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베토벤 소나타 24번 테레제와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파우스트.
굉장히 익숙한 곡 제목들이었다.
난 음반을 돌려 보며 연주자의 이름을 찾아 보려 했다. 하지만 그 어딜 봐도 연주자의 이름은 없었다. 단지 음반사의 이름만 찾아낼 수 있었다.
에우테르페 레코즈.
“……!”
순간 모든 정보들이 종합되면서 난 이 음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지금 내 손에 들어와 있는 이 음반은 내 음반이었다.
난 기쁘기도 하고 동시에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곡만 내가 녹음하고 디자인이나 판촉 등의 다른 모든 전권을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그 후는 모두 그를 믿고 맡긴 것이었지만, 그래도 음반이 나왔다면 가장 먼저 나한테 보내 주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여행 중이라서 나중에 줘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도 이렇게 뜬금없이 내 음반을 처음 보게 되니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파리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분명 곧 나온다는 연락을 받긴 했어도, 벌써 이렇게 음반 매장에 뿌려져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날 깜짝 놀라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아주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한 셈일 것이다.
“…….”
그렇게 처음 내 음반을 접한 나는 약간 당황스러워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정말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인 할아버지도 손님들도.
난 내 음반에 내 사진도 이름도 그 무엇도 넣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것이 정상이었다.
솔직히 말해, 정말 흥미진진했다.
이것이 바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기획했던 프로젝트의 첫 걸음인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무명 연주자의 음반이 각 매장에 뿌려지고, 사람들이 그걸 우연히 손에 넣게 되어 들었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
그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 체감되자, 흥분되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이걸 하기로 했을 때 들었던 기분과 비슷했다.
그리고 다른 그 누가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는 이 음반을 어떻게 들어 줄까. 정말 궁금했다.
에르네스트도 아직 내지 않은 음반을 내가 냈다는 건 조금 앞서나간 게 아닌가 싶은 기분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귀가 밝은 그의 감상을 듣고 싶다는 것이 내 본심이었다.
매장 밖으로 나온 나는 이름 없는 내 음반을 에르네스트에게 건네주었다.
“에르네스트. 이건 에르네스트가 가져가세요.”
“……? 괜찮은데.”
“에르네스트가 더 많이 사셨잖아요. 그러니까 가져가셔도 돼요.”
“알았어. 그런데 이거 뭐지? 그냥 샘플 녹음한 곡들 모아 놓은 건가?”
에르네스트는 음반을 앞뒤로 뒤집어 보면서 뭔지 모르겠다는 듯 들여다보았다. 난 나한테도 없는 내 첫 음반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숨죽여 쿡쿡 웃었다.
그는 음반을 종이 가방 안에 챙겨 넣었고 우리가 음반매장에서 할 일은 끝났다. 난 기운 좋게 앞장서 나가며 그를 불렀다.
“자, 가요.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따라왔다.
잠시 동안 음악가로 돌아갔던 우리는 다시 평범하게 놀러 나온 친구로 돌아갔다. 이 자연스러움이 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