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화
영국의 클래식 매거진, 인터내셔널 피아노는 수십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높은 신뢰도와 자부심을 갖춘 클래식 피아노 전문 월간지였다.
매월마다 전 세계 클래식 피아노에 대한 콩쿠르나 연주회, 연주자, 음반 등을 정리하고 리뷰하면서 클래식 피아노 애호가들이 지닌 정보에 대한 욕구를 해소시켜 주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때문에 매거진의 업무는 일방적이지 않았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수많은 구독자들은 매거진 측으로 원하는 정보를 요청하기도 한다.
{…….}
인터내셔널 피아노의 편집장 애슐리 길라드는 그렇게 매월마다 어떻게 하면 전 세계의 클래식 피아노 애호가들이 원하는 정보를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보여 줄 수 있을까 고민해 왔다.
그런데 이번 달은, 시작부터 일이 꼬였다.
{알아봤나?}
의자에 앉아 있던 애슐리는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커다란 편집장의 책상 너머, 편집자 중 한 명인 존스가 대답했다.
{그게…… 아직입니다.}
{존스. 일하기 싫나?}
{……죄송합니다.}
존스가 사과했고, 애슐리는 더 화를 내지도 못했다.
그가 자신 휘하의 편집자에게 요청한 일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는 것쯤은 지시하기 전부터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하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쉬엄쉬엄 하라고 토닥일 순 없었다. 편집장의 일은 편집자들을 어떻게든 쥐어짜서 매거진을 만드는 데에 있다.
애슐리가 물었다.
{하, 음반사에서 뭐라 하던가? 그, 어디라고 했지? 에하르테르?}
{러시아의 에우테르페 레코즈입니다.}
{그래, 거기. 빌어먹을. 살다살다 처음 듣는 음반사로군.}
{러시아에선 꽤 규모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존스는 러시아어를 수준급으로 하는 편집자였으므로, 클래식 업계에서 독일과 양대 산맥인 러시아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을 처리하곤 했다. 그 업무 중엔 이렇게 러시아의 음반사에 문의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어봤냔 말이지.}
{예. 전화로 직접 접촉했습니다. 평론이든 음반상이든 받고 싶다면 일단 연주자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 고집불통 러시아인들이 말을 안 들었겠지.}
하지만 문의를 한다고 해서 항상 답이 오진 않았다.
특히 러시아인들은 더더욱.
편집장 애슐리가 존스에게 이 일을 맡기면서도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애슐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치들은 우리가 뭐라든 보드카나 마시면서 신경 쓰지 않는 족속들이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존스, 이보게 존스. 지금 맞장구칠 게 아니라, 그렇다면 자네 나름대로 방도를 궁리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네 통장으로 매월 꼬박꼬박 들어가는 월급은 그러라고 지불되는 것이라는 걸 잊었나?}
{……죄송합니다.}
안 된다고 해서 쉽게 그만둔다면 편집자 일은 포기해야 한다. 방법이 없어 보여도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었다.
애슐리가 매섭게 질타하자 존스는 묵묵히 그 질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저도 러시아인들을 만나 보면서도 그렇게 갑갑한 사람은 또 처음이라.}
{얼마나 갑갑했기에?}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연주자에 대한 것을 문의했더니 그날만 해도 그런 전화를 서른 통도 더 받았다면서 들은 척도 안 하더군요. 저희가 인터내셔널 피아노의 편집부라는 것을 듣고도 말입니다.}
존스는 유창한 러시아어로 2년간 러시아의 연주자들이나 에이전시, 매니지먼트 들과 접촉해 온 경력이 있었다. 그런 그가 혀를 내둘렀다.
{그쪽도 클래식 레이블인데 앞으로 음반을 내면서 어떻게 하시려고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글쎄 신경 쓰지 말고 매거진이라면 매거진의 역할에나 충실하라고…….}
{존스.}
{……하는 태도가 너무 답답…… 예?}
{정말 그런 소리를 했나?}
애슐리는 존스에게 물으면서도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터내셔널 피아노라고 이름을 대고,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게 들릴 수도 있는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애초에 그 음반사가 연주자를 숨기고 음반을 낸 것은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었다. 무턱대고 알려 달라고 해서 알려 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일단 물어보고 안 된다면 우회하든지 달리 접촉할 방법을 찾아서 알아봐야지, 정면으로 이름을 대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심지어 같은 영국 음반사도 아니고 러시아의 음반사라면 더더욱.
애슐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다.
{나가게.}
{저, 편집장님. 전 취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존스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애슐리는 이 어린 친구가 이렇게까지 무능하진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도 짧고 허파에 바람만 가득 찬 것 같다는 데에 너무 실망이 컸다.
물론 실수야 할 수도 있지만, 폭발한 화를 멈출 순 없었다.
{지금 장난하나!? 러시아인들을 그렇게 잘 알면서 그딴 식으로 대하면 대체 어쩌자고!}
{죄, 죄송합니다.}
{음반사와 이야기하는 건 이제 글렀군! 자네 때문에!}
{죄송합니다, 편집장님. 전 최선을 다하…….}
{최선을 다해서 일을 망쳤군! 나가게 당장!}
존스는 벌벌 떨더니 도망치듯 편집장실에서 나갔다.
애슐리는 부글부글 끓는 머리를 식히며 의자에 기대었다.
해고라고 하고 싶었지만 클래식에 대한 소양이 있으면서 러시아어에 능한 직원은 상당히 구하기 까다로웠다. 간신히 구한지 겨우 2년 되었는데 잘라 버렸다간 결국 편집부 전체가 귀찮아진다.
{하, 빌어먹을…….}
애슐리는 화를 참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의욕도 있고 문장은 좀 쓰는 편이니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다. 잘 교육시키면 될 것이다. 잘.
불쑥불쑥 짜증이 나지만, 애슐리는 인터폰을 들고 자신의 짜증을 가라앉혀 줄지도 모르는 다른 직원을 불렀다.
{대니, 들어오게.}
잠시 후 호출을 받고 대니라는 이름의 남자가 편집장실로 들어왔다.
그는 셔츠단을 바로 하며 똑바로 섰다. 애슐리가 무엇을 물어볼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부르셨습니까. 길라드 편집장님.}
{자네밖에 없네, 대니. 젠장. 제발 잘되고 있다고 말해 주게.}
{죄송합니다.}
{돌아 버리겠군.}
무엇을 물어볼지 안다면 무엇을 대답해야 할지도 정해져 있었다. 대니는 정말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너무 단서가 부족합니다.}
{단서라면 음반에 있잖나. 세 곡이나. 그것도 아주 깔끔한 녹음과 높은 완성도를 갖춘 어마어마한 대곡들로.}
{저도 그래서 처음엔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베토벤의 소나타 24번,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한 음반에 실린 곡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슈만과 라흐마니노프는 정말 피아노 솔로로 연주할 수 있는 최상급의 대곡들이었고, 연주자의 색이 굉장히 짙게 묻어난다.
때문에 누군지 모를 연주자가 음반에는 처음 실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연주회나 콩쿠르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면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제가 요 며칠 음원을 제공하고 견해를 구한 사람이 평론가와 피아니스트, 교수 등을 합쳐 27명입니다. 그리고 그 모두의 의견을 종합해 봤는데…….}
대니는 침통하게 결론을 말했다.
{연주자에게서 러시안 피아니스트 특유의 버릇이 느껴진다고는 하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이었습니다.}
{대니. 장난하나? 러시아의 음반사에서 도전장을 내던졌으니 당연히 러시아인이겠지. 그래, 그건 됐고. 그리고?}
{그 외엔…… 곡들의 해석을 따져 보면서 누구에게 사사했을지 알아보는 것도 워낙 많이 갈려 무의미했고, 나이는 낮게는 스무 살에서 많게는 예순 살까지. 성별도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정체불명이라는 것이군.}
{세 곡을 각각 세 명의 연주자가 연주한 것이라는 주장도 꽤나 있었습니다.}
애슐리는 끄응 소리를 냈다.
대니는 27명이나 되는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그것들을 모아 왔다.
대니도 애슐리도 클래식 업계에서 꽤 오래 머문 베테랑들이지만 진짜 선수라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생을 피아노와 함께 한 이 전문가들은 거의 초인적인 영역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는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고, 때문에 음반에서 한 소절만 듣고도 음반사와 곡, 연주에 사용된 피아노의 브랜드를 짚어 내거나 피아니스트를 바로 특정해 내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피아니스트들에겐 누구에게 사사했느냐에 따라 특유의 해석과 뉘앙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피아니스트라면 이 사람들의 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의견이 갈렸다. 그야말로 유령 같은 연주자였다.
할 말이 없었다.
{하……. 이번 달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나? 대니.}
{……다른 편집부들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들 머리 터지기 직전일걸세.}
다른 매거진과 연락도 해 봤다.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애슐리는 아마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이 무명의 음반은 뭐란 말인가? 무료로 음반 매장에 깔린 것을 보면 러시아에서 전 세계에 도전장을 던졌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리뷰를 써야 하는데, 막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주자의 이름을 모르고 무작정 좋게 써서 냈는데 문제가 있는 연주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혹평을 했는데 아주 명성이 높은 연주자일 수도 있었다.
연주자가 누군지 알 수 없다면 리뷰를 쓸 수가 없다.
곡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상당한 부담이 있었다.
{…….}
애슐리는 사무실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거대한 매거진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반의 판매량과 연주자의 이름값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 새삼 자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정면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을 강요당했을 때,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기준과 긍지가 없다는 것은 애슐리를 하여금 조금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대니가 조심스레 고언을 했다.
{그냥 리뷰를 내는 건 위험부담이 조금……. 아예 저희는 빼는 것이 어떻습니까? 다른 쪽에서 하도록 두고.}
{손 놓고 있자? 그래서 다른 쪽에서 맞추면? 정확하게 특정해 내면? 우리는 완전히 물 먹는 거야. 매거진의 신뢰도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것 모르나? 모른 척 지나갈 순 없어. 젠장, 요 며칠 그 음반을 리뷰해 달라는 전화가 몇 건이나 왔는지 아나?}
멍하니 있던 애슐리가 짜증스레 답했다.
보통은 이렇게 머리 아플 일이 아니었다.
겨우 몇 천 장밖에 안 되는 물량, 심지어 판매한 것도 아니니 판매량도 아니다. 한 달에도 전 세계에서 수천 장씩 쏟아져 나왔다가 사라져 버리는 음반들과 별다를 바 없었다. 이런 거대 매거진에서 신경 쓰고 리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장기 독자들에게서 일괄적인 문의가 쏟아졌을 때, 애슐리는 화재의 음반을 간신히 구해서 들어 보고는 이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러시아에서 던진 이 음반은 앞으로도 계속 이슈화될 것이 분명했다.
베토벤 소나타 24번 테레제에선 베토벤에게 이 곡을 헌정받은 소녀 테레제의 활기찬 에너지와 발랄함이 느껴졌고,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에선 당시 사랑을 갈구하던 슈만의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적 대비가 아주 적나라하고 조화롭게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곡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파우스트.
애슐리는 파우스트 소나타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그 정체를 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음악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몇 번이고 충분히 감상하기 위해서.
별 볼일 없는 음반이었다면 그냥 무시해 버렸겠지만, 이 음반은 음악 애호가라면 그 누구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완성된 음반이었다.
편집장으로서 이번 달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달이었다. 무시해 버린다면 그간 쌓아온 신뢰를 상당부분 잃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뭐라도 하긴 해야 한다. 하지만 대니의 말대로 위험부담이 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최대한의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혹여나 러시아인들의 수작에 놀아나는 꼴이라도 난다면 망신을 당하는 정도로 끝나진 않는다.
애슐리는 고민하고, 고민했다.
대니가 고민하는 편집장을 불렀다.
{길라드 편집장님.}
{뭔가.}
{제 사견으로는…… 아마 베테랑이나 몇 명의 팀이라기보단, 러시아의 신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뭐?}
애슐리는 조금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대니가 덧붙였다.
{아예 새로운 신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워낙 요즘 러시아 연주자들은 어려서부터 기량이 뛰어나니…….}
{어이가 없군.}
기가 차는 말이었다. 애슐리가 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자네 지금 장난하나? 그냥 기량이 뛰어난 수준으로 들렸나?}
{…….}
대니의 말대로 아예 세계 무대에 발을 디딘 적도 없는 무명의 신인이라면 누구도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추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런 추리로는 이 음반의 완성도가 설명이 안 된다.
에우테르페 레코즈라는 작은 음반사에서 만들었다기엔 깜짝 놀랄 정도의 녹음 수준, 까다로운 대곡들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는 실력.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모자란 것은 딱 하나. 연주자의 이름뿐.
이런 음반을 가지고 신인의 음반이라 추리하기보단 차라리 러시아 정부에서 비밀리에 진행한 특수 프로젝트라고 하는 쪽이 더 신빙성 있게 들렸다.
애슐리가 시큰둥하게 받아들이자 대니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러시아어가 되는 유디트, 존스와 러시아로 가 볼까요.}
{하하, 가서 인터내셔널 피아노가 아니라 코스믹 피아노라고 하게.}
{……예?}
{됐네. 그래도 계속 알아보게. 레이더 바짝 세우고 말일세.}
{알겠습니다.}
러시아로 직접 찾아가서 취재를 한다고 해도 별 소득은 없을 것 같았다. 그 강경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
애슐리는 생각에 잠겼다.
러시아의 에우테르페 레코즈와 무명의 연주자의 목적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음반이 무료라면 연주자의 이름이라도 있어야 이름을 알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무명 음악가들이 사비를 써서 그렇게 음반을 발매하는 일은 꽤나 많았으니 약간 특이 케이스로 치면 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가격도 없고 연주자도 없고.
그저 이 세상에 음악만 덜렁 던져 놓는 듯한 이 음반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애슐리는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설명을 강요받는 기분을 느끼며, 애슐리는 다른 매거진의 편집장들과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며 전화기를 들었다.
***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는 자신의 방에서 침대에 누워 헤드폰으로 음반을 들으며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열다섯 살처럼 게임도 좋아하고 동생과 놀아 주기도 하는 에르네스트였지만, 그는 사실 다른 그 무엇을 하는 것보다 혼자서 조용히 헤드폰을 끼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때문에 그의 방 안에는 책이나 게임CD, 잡지 등을 모두 합친 것보다 음반이 더 많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든 음반들을 몇 번이고 듣고 또 들었다.
“…….”
그리고 오늘,
에르네스트는 며칠 전 주말에 타티아나와 함께 외출해서 사 온 음반들을 듣기 시작했다.
사 놓고는 던져 놔서 며칠 걸리긴 했지만, 일단 들어 보고 음반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고 나서야 음반 컬렉션 사이에 꽂을 수 있으니 필수적인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영 수확이 별로라는 것을 느꼈다.
인터넷에서 보고 꽤 기대했던 음반들이었는데, 총 4장 중 건질 만한 것은 1장뿐이었다.
“열 받네.”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리며 들을 만하다고 생각한 1장의 음반을 자신의 컬렉션 사이에 꽂아놓고 나머지 3장을 구석의 박스에 던져 넣었다. 다시는 듣지 않게 될 음반들이었다.
“…….”
약간 기분이 안 좋아진 에르네스트는 투덜거리며 일어나다가, 종이백 안에 아직 1장의 음반이 남아 있음을 떠올려 냈다.
매장에서 덤으로 줬던 음반이었고, 타티아나가 가지라고 줬던 것이었다.
연주자의 이름도 없고 밋밋한 재킷을 보니 영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가뜩이나 오늘 음반을 한 장밖에 건지지 못해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이것마저 귀를 어지럽힌다면 기분이 더더욱 안 좋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이 음반을 건네주던 타티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환하게 웃으면서 가지라고 주던 그 모습은 며칠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왠지 별로라도 딱히 저 상자에 던져 버리진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헤드폰을 다시 쓰고, 이름 없는 음반을 재생시킨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뭔가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익숙한, 아주 익숙한 연주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테레제. 베토벤의 모든 소나타 중에서 가장 밝고 상냥한 선율이 아름답게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
에르네스트는 이 선율의 주인공을 안다.
“????”
끝까지 들어 봐야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트랙을 넘겼다. 다음 곡은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이다.
웅장한 울림이 먹먹하게 뇌리를 흔든다. 에르네스트는 혼절할 것 같은 장렬함을 느끼면서 이런 강렬한 피아노를 어디에서 들어 봤는지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까지 들은 에르네스트는, 다시 처음으로 트랙을 되돌려 처음부터 차분히 한 시간 넘게 음반을 듣고는,
확신했다.
“……하, 하하…….”
밋밋한 음반을 보며 에르네스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정말 언제나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준다.
에르네스트는 어떠한 확신을 느끼면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창을 열었다. 그리고 가끔 들어가곤 하는 클래식 관련 사이트에 접속했다.
게시판엔 여러 사람들이 피아노에 대한 글 등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굳이 찾을 것도 없이 원하는 글을 찾아냈다.
음반 매장에서 무료로 받은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피아노 독주곡 음반의 연주자를 찾는다는 글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한참을 더 게시판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비슷한 글을 열 개도 넘게 찾아내었다. 댓글들도 모두 읽었다. 하나같이 다 엉뚱한 이름들을 대고 있었다.
“…….”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나 분명하게 들리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에르네스트에게 묘한 충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에르네스트는 바로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이렇게 멋진 선물을 받았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전화뿐일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