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며칠 뒤 우리 집에 방문했다.
아버지 대신 집에 있던 루슬란 오빠가 나와 함께 마카로프 프로듀서 앞에 앉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음반에 대해 현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 등을 브리핑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황은 꽤 뜨거운 편이었다. 수많은 매거진 등에서 문의 등이 쇄도했다. 아무 대답도 주지 않자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전화가 온 곳도 있다며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웃었다.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앞으로 전망도 고무적이었다. 내 음반의 초도 물량이 다 나가고 매장에서 구할 길이 없게 되자 추가 발주를 해 달라는 요청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난 기존 계약대로 수십 만 루블의 금액을 받은 터라 음반사가 너무 손해만 감당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추가 발주에는 가격을 붙일 것이므로 이제 음반사에도 수익이 될 것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가 소장하고, 친구들에게 줄 음반도 10장이나 주었다. 프로젝트 특성상 누구에게나 다 나누어 줄 순 없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무언가를 계속 받기만 하는 것 같은 시간이었으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연주한 세 곡의 곡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자신이 한 일은 그것을 되도록 손실 없이 음반에 담아내는 것뿐이었다고 겸허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혼자선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가진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완벽한 레코딩 시설과 프로듀서의 레코딩 엔지니어링 실력이 아니었다면 내 음반의 퀄리티는 지금보다 훨씬 나빴을 것이다. 모든 것은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함께 이루어 낸 것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기분 좋게 웃으며 클래식 평론지 등에서 음반에 대한 평론이 실리면 그것들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오겠다며 떠났다.
***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받은 음반을 들고 가장 먼저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을 찾아갔다. 우편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분 한 분 자택으로 직접 찾아갔다.
음반을 직접 전해 드리자 미하일 선생님은 이 음반에 대한 이야기가 향간에만 떠도는 것이 아니라 프로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종종 들린다면서 응원해 주겠다고 하셨고, 구세프 선생님도 무슨 꿍꿍이인진 모르겠지만 잘 해 보라며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들 역시 내가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무엇을 할 건지 상당히 흥미롭게 지켜봐 주시는 것 같다. 지금까진 큰 문제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난 조금 더 안도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에게도 음반을 전해 주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음반이라면서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나스타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라흐마니노프뿐만 아니라 베토벤과 슈만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서 혹시 괜찮다면 연습실에서 실황 연주를 들려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난 당연히 흔쾌히 승낙했다.
저녁엔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도 연달아 전화와 메시지로 내 음반에 대한 평을 전해 주셨다.
선생님들은 학생의 음악에 대해서 지극히 비판적인 입장에 서는 경향이 짙었고, 특히 구세프 선생님은 조금 더 날카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무슨 혹평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예상과 달리 두 분 모두 호평을 해 주셨다.
난 구세프 선생님이 내 라흐마니노프를 그렇게 칭찬하시는 건 근 1년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음반을 전해 주고 당일 날 바로 모두에게 감상을 전해 받았다.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던 내게 안도감을 줌과 동시에 감동까지 안겨 주었다. 적어도 하루는 있다가 전화가 올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모두들 바로 들어 주었던 것이다.
음반을 가져가고도 일주일이 한참 넘도록 전화 한 통 없는 누구와는 다르다.
“…….”
늘 기다리는 데에 익숙한 나였지만, 이젠 슬슬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트에겐 아직도 전혀 연락이 없었다.
그가 나쁜 건 아니었다. 음반 매장에서 덤으로 끼워 넣어진 음반을 듣고도 특이한 점을 느끼지 못했고, 또 굳이 내게 전화를 해서 이러쿵저러쿵할 생각도 없을 뿐이었다. 내 음반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그냥 한 번 듣고 끝인 것 같다.
그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음반 판매점에서 서로 음반을 추천하고 추천받기도 하긴 했지만, 그 후에 서로 감상을 교환하기로 약속한 적은 없다. 그렇게 따지려면 나야말로 에르네스트에게 추천받은 음반들에 대한 감상을 먼저 전화를 걸어 전해 주어야 했다.
“…….”
진짜 먼저 전화를 걸어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가 추천해 준 음반은 다 들었고, 충분히 감상을 말해 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먼저 화두를 꺼내고 그가 자신의 감상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게 하는 건 꽤 괜찮은 발상인 것 같았다.
“…….”
그런데 너무 속보이는 짓 같아서 생각만 해도 창피했다.
지금이야 그렇게 해서 내 음반에 대한 객관적인 감상을 들을 수 있다고 쳐도, 나중에 그게 내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면 내가 은근하게 그에게서 감상을 유도했다는 것이 모두 탄로 나기 때문이었다.
철판 깔고 하면 못 할 것 무어겠냐마는, 그래도 먼저 전화는 못 하겠다.
연습실에 잠시 앉아 쉬면서 나는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먼저 해 볼지, 그냥 포기할지 수없이 고민했다. 이래도 저래도 문제였다. 결정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발작적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 개학까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연습이나 해야겠다.
그렇게 의무적으로 몸을 움직여 피아노 앞에 앉으려는데, 거기 서라는 듯 스마트폰이 울었다.
“……어?”
아나스타샤겠거니 싶어 아무 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든 나는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는 멈칫했다.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에르네스트로부터의 전화였다.
맹하게 풀려 있던 머리가 순식간에 활력을 되찾는다. 난 그와 대화를 하면서 음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면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빠르게 정리했다.
정확하게 벨이 세 번 울리는 사이 모든 준비가 끝났고, 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에르네스트.”
- 안녕. 타티아나.
간만에 듣는 목소리는 너무 반가웠다. 그는 특유의 시크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가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걸까? 음반에 대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뭉글거리며 솟아나지만 꾹 눌렀다. 지금은 일단 무슨 일인지 모른다.
에르네스트가 어떤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 미안한데 혹시 집에 있나 해서.
갑자기 집에 있는진 왜 묻는 건지 모르겠다. 난 연습실 벽면을 돌아보고는 그대로 답했다.
“예. 집이에요. 쉬고 있었어요.”
- 아 그래?
묘하게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가 이어 말했다.
- 그럼 잠깐 문 밖으로 나올 수 있어?
“……?”
- 저택 정문 있잖아. 잠깐 줄 게 있어서.
“그게 무슨……. 설마 에르네스트 지금 정문에 계신 건가요?”
- 응.
“예!? 이렇게 갑자기요?”
- 응. 갑자기. 그냥 지나가다가 생각나서.
그냥 지나가다가 줄 것이 있어서 친구 집에 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초대를 하지도 않았는데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난 바로 내 옷차림부터 내려다보았다. 일상적으로 집에서 입는 원피스와 카디건이다. 이대로 괜찮으련지 모르겠다.
약간 걱정되긴 하지만 만나서 물건만 주고 싶다는 것 같고, 그를 정문 앞에서 너무 기다리게 할 순 없어서 바로 답했다.
“자, 잠시만요. 바로 나갈게요.”
- 기다릴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난 급히 움직였다.
그와 같이 외출을 할 것도 아니고 집에서 편하게 있다가 마중하는 것이니 되도록 편한 상태가 자연스럽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나갈 순 없었다.
바로 별관의 욕실로 가서 거울을 보며 머리만 빠르게 한차례 빗어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말끔해진 것 같다. 화장은 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기초 제품들만 조금 썼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준비를 마쳤다.
별관에서 나온 나는 정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별관에서 우리 집 정문까진 내 걸음으로 15분 정도 걸린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10분이 조금 넘게 걷자 저택 정문이 보였다.
이렇게 빨리 정문까지 와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단지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올랐지만, 에르네스트 앞에서 볼썽사납게 힘든 모습을 보이긴 싫어서 조금 천천히 걸으며 심호흡을 했다. 버틸 만해졌다.
그렇게 숨을 가다듬으며 자동차가 드나드는 거대한 정문 옆의 작은 문의 시큐리티 시스템을 해제하고 밖으로 나갔더니 CCTV 카메라가 날 따라 스르르 움직였다. 더 멀리 나간다면 빅토르가 따라올 것이다. 어차피 멀리 나갈 계획은 없었으니 괜찮았다.
정문 앞에선 에르네스트가 서성이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네스트!”
“안녕.”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난 그 앞까지 다가갔다.
그는 청바지에 셔츠라는 가벼운 사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냥 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깜짝 놀랐어요.”
“하하하하, 미안. 너무 난데없었지.”
“별로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요!”
에르네스트의 얼굴을 보니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듣고 싶은 것도 많았다. 요 며칠간 거의 포기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를 보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문득 미안하다는 듯 말한다.
“그나저나 괜히 나오라고 했나 보네. 걸어온 거야?”
“아……. 약간이요.”
“약간이 아니잖아 너희 집은.”
“괜찮아요. 요즘은 운동하고 있으니까.”
“……그래?”
숨이 차올라 있다는 것을 그가 느낀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꼴사납게 보이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벨카가 날 운동시켜 줘서 다행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백을 내밀었다.
“아무튼. 자, 받아.”
“……? 이게 무엇인가요?”
“너한테 줄 것.”
뭐냐고 물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답이 안 되는데요…….
종이백을 들여다볼 수도 있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고 일부러 에르네스트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는 답잖게 조금 멋쩍어하더니 설명했다.
“별건 아니고……. 이 근처 지나가다가 음반 매장에 들렀는데 추천해 줄 만한 음반들이 보여서. 그냥 몇 장 집었어.”
“와……. 정말요?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생각도 못 한 선물이었다.
음반 매장에서 내게 추천할 만한 음반이 보여서 사 왔다는 것은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그는 정말 별것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게 있어선 충분히 별것인 일이다. 너무 고맙다.
에르네스트는 내 눈빛을 보더니 시선을 피하면서 툭 물어 온다.
“음, 저번에 샀던 건 어땠어?”
“모두 좋았어요.”
“그건 다행이네.”
그는 정말 순수하게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난 잠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다음은요? 에르네스트도 음반을 가져가셨잖아요?
하지만 그는 별로 그 이상 말할 것이 없어 보였다. 난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심스레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떠셨나요?”
“나도 꽤 좋았어.”
“그래요?”
“그래.”
“그랬군요.”
“응.”
짧은 단답들이 오가고, 다시 대화가 끊겼다.
“…….”
약간 불만족스럽다.
그의 입에서 나온 좋다는 평가는 상당히 고평가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너무 짧다. 그렇게 할 말이 없나요? 조금 길게 해 주어도 좋잖아요?
내가 평을 너무 짧게 해서 에르네스트도 길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도 이 정도로 그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했을 줄은 몰랐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조금씩 우울해져 가던 나는 약간의 오기가 생겼다.
제대로 객관적인 감상도 못 들어 보고 이렇게 흐지부지 지나가는 건 싫었다. 차라리 대형 매거진에서 평론 없이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에르네스트에겐 반드시 평을 받아 보고 싶었다.
약간의 침묵이 우리 사이에 생겨나면서, 몇 초 후면 그가 그만 가 보겠다고 돌아설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진짜 물건만 주고 그냥 갈 생각이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난 잠깐 사이 그를 붙잡을 좋은 명분을 떠올려 냈다.
“아, 에르네스트. 잘됐네요. 잠깐 들어오세요.”
“어? 왜?”
갑자기 찾아온 그에게 내가 놀랐던 것처럼, 갑자기 들어오라고 하자 그 역시 조금 놀랐다.
여기까지 와서도 진짜 집 안엔 들어올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독일에서 사 온 기념품으로 드릴 것이 있다고 말이에요.”
“아……. 기념품.”
그때 바로 안 주길 잘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때 나와 한바탕 했었던 것을 떠올렸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난 이번엔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빠져나갈 생각을 못하도록 약간 토라진 투로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가지고 나오라고 하시면 저 정말 화낼 거예요.”
“……그런 생각은 안 했어.”
“그렇다면 들어오세요. 차라도 한 잔 드리고 싶어요.”
“……알았어.”
“바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없어.”
아니라고는 말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별로 나랑 길게 있고 싶지 않은 것처럼 대답했다.
바쁜 일이 있다면 내가 가지 말라고 할 것도 아닌데, 바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라면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난 일부러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약간 화가 났다.
이렇게 내 생각을 해서 추천 음반을 고르고 직접 찾아와 선물까지 했으면서, 왜 잠깐 집에 들어와서 내 선물을 받아 가는 건 이렇게 꺼려 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간다.
그는 길게 이야기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난 일단 그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