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화
우리 집 정문에서부터 본관까지 뻗어 있는 산책로를 걸으며 에르네스트와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 점심 식사는 했는지, 했다면 뭘 먹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이야기들을 하며 산책하는 것은 느긋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난 마냥 느긋하지 못했다.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대화들로 입은 움직이고 있지만, 머리는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에르네스트로부터 내 음반에 대한 평을 들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이미 내 것이란 것을 알아차려 주길 기대하는 건 포기했으므로 어떻게든 객관적인 평을 들어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지난 일주일 넘게 기다린 내가 불쌍해서라도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
“타티아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잠깐 입을 멈추었더니 에르네스트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본다.
난 빠르게 종이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음반…… 잘 들을게요. 듣고 꼭 감상평도 메시지로 보낼게요.”
“아니, 그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그가 음반들에 대한 감상을 나와 길게 나눌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라도 그렇게 하게 만들 생각으로 살짝 유도했는데, 에르네스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뭔가 반응이 있어 줘야 다음 대화를 이어 나갈 텐데 그는 아예 음반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나와 그리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샤에 대한 이야기나 오늘 먹은 식사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꽤 잘 답해 주면서, 음반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살짝 옮겨 가려고 하니 바로 칙칙하게 대답해서 더 말을 못 하게 만든다.
“…….”
일부러 잠깐 있다 가라고 불러들이기까지 했는데 시작부터 우울해진다.
일방적이고 막연한 기대들이었을 뿐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그냥 대놓고 물어볼 것이 아니라면 실망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맥이 빠졌다.
애초에 저번 주에 그와 놀러 나갔을 때, 음반 매장에서 내 음반을 보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그에게 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쓸데없이 전전긍긍하거나 풀이 죽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왜 그때 에르네스트라면 알아봐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난을 쳤는지 모르겠다.
정말 바보같이.
“……됐어요.”
“?”
“아니에요.”
난 괜히 신경질을 내지 않도록 마음을 갈무리했다.
그냥 좋게 생각하자. 내 음반 이야기는 됐고, 오늘은 그냥 에르네스트가 우리 집에 놀러와 준 것만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니까 그에게 부당하게 화를 내거나 하는 건 못할 짓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면서 그와 본관으로 향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따라왔다.
혼자서 10분 남짓 걸렸던 길은 에르네스트와 함께 조금 느긋하게 15분 정도 걸렸다.
그와 함께 본관에 들어섰다. 응접실엔 아무도 없었다.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바쁜 일 없이 모두들 한적하게 쉬고 있는 것 같다. 잘된 일이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차를 내올게요.”
“알았어.”
에르네스트를 손님용 소파에 앉혀 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찻잔과 다과들을 세팅했다. 에르네스트는 남자애니까 너무 아기자기한 것들로 잔뜩 꾸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 적당히 찻잔도 심플한 것으로, 과자들도 부담스럽지 않은 것들로 차렸다.
“…….”
세팅을 마치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서 초점 없이 불꽃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불길을 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리니 타바스코 소스가 눈에 들어왔다.
에르네스트, 매운 건 잘 먹던가?
“…….”
자꾸만 심술 맞고 유치한 생각들이 들어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장난을 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마음으로 치고 싶진 않다.
물이 다 끓었다. 정성스레 홍차를 내려서 에르네스트에게 가져다주었다.
에르네스트는 찻잔을 받아 들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타티아나.”
그의 웃는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난 마주 웃으며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그는 뜨거운 홍차를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맛있다.”
“다행이에요.”
“요즘 계속 커피만 마시다가 제대로 끓인 홍차를 마시니까 조금 살 것 같네.”
“커피를 많이 드시나요?”
“어……. 요즘 좀 그랬어.”
커피를 아예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에르네스트는 홍차를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커피를 많이 마셨다니, 피곤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난 캐모마일차를 살짝 마시면서 에르네스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수려하고 깔끔한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눈 밑으로 약간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약간 피곤해 보이세요. 잠을 설치셨나요?”
“그, 그래 보여?”
“예. 지금 보니까요.”
“……아니야. 별로 신경 쓰지 마. 이젠 괜찮으니까.”
“그래도…….”
무슨 일이 있다면, 혹은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었지만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일견 후련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 힘들 일이 있었더라도 이미 지나간 것 같다.
난 쓸데없이 더 캐묻지 않고 얌전히 찻잔을 기울였다. 에르네스트는 날 바라보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정신이 드는 맛과 향이야. 고마워.”
“아하하, 찻잎이 좋아서 그럴 거예요.”
“글쎄, 난 좋은 잎을 가지고 끓여도 영 별로더라고. 확실히 끓이는 사람의 실력 차이가 있긴 한 것 같아.”
“그럴까요.”
“당연하지.”
예전에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난 아직 내가 실력을 논할 정도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부끄러울 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친구들이 좋아해 준다니 다행이다.
에르네스트는 홍차에 이어 과자도 한 입 물더니 물었다.
“과자도 맛있네. 어, 설마 이것도 타티아나 네가 만든 거야?”
“예? 아뇨. 독일에서 사 온……. 아.”
난 그에게 잠깐 들렀다 가라고 한 이유를 떠올렸다.
“에르네스트. 선물 드리겠다고 했었죠. 드릴게요.”
“기념품이라고 했던 것?”
“예.”
여행에서 돌아온 지도 한참이나 되었는데 이제야 주는 것도 조금 우습긴 하지만, 안 주는 것보단 나았다.
난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기다려 주세요. 가지고 올게요.”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기대하는 것 같은 눈빛이 보인다. 난 생긋 웃으며 내 방으로 향했다.
내 방 구석엔 아직도 여행용 트렁크와 상자가 몇 개 쌓여 있었다.
막상 여행하는 내내 한 번도 내 손으로 끌어 본 적이 없는 트렁크였지만, 저 안에는 내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사 온 기념품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많이 샀는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청소년 콩쿠르에서 받았던 돈은 이 기념품들을 사면서 정말 거의 다 떨어졌다.
음반 대금을 정산받지 못했더라면 난 정말 아버지가 주신 카드 말고는 쓸 수 있는 돈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산 기념품들을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물론이고 우리 집의 고용인 분들에게도 나누어 드렸고, 여행에서 돌아와서 만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미하일 선생님, 구세프 선생님에게도 드렸다.
사실상 드릴 분들에겐 거의 다 드렸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이 남아 있었다. 모두 학교 친구들을 위한 것이었다. 개학을 하면 나누어 줄 생각이었는데, 에르네스트에겐 이렇게 조금 빠르게 주게 되었다.
“……음.”
난 에르네스트를 위해 샀던 선물을 챙기다가 잠시 고민했다.
딱 그를 위해 준비한 것 외에도 이것저것 많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줄 수 있는 만큼 주고 싶었다.
상자를 하나 빼내어 에르네스트에게 줄 만한 것들을 마구 챙겨 넣었다. 상자는 정말 금방 찼다. 조금 더 큰 상자로 할 걸 했나 싶었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냥 이 정도로 하기로 했다.
완성된 상자를 들고 나오자 에르네스트가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 뭐야 그게?”
“선물이요.”
내가 양손으로 든 상자는 그렇게 작다고 할 순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놀랄 만도 했다.
“조금 많지 않아……?”
“괜찮아요. 음, 한번 보시겠어요?”
“지금 봐도 돼?”
“예.”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뚜껑을 열자 에르네스트의 놀라움은 곧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너무 많아. 타티아나.”
그는 약간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부담되는 모양이다. 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양이 많아 보일 뿐이지 가격으로 치자면 그리 비싸지 않다. 나도 에르네스트에게 과한 부담을 지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 많지 않아요. 에르네스트도 제게 이 음반을 선물해 주셨잖아요? 답례라고 생각해 주세요.”
“…….”
“아, 다른 것보다 이게 중요해요.”
상자 안에서 가장 비싸고, 에르네스트를 위해 골랐던 선물은 딱 하나였다. 난 그것을 꺼내어 에르네스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듯 눈으로 묻는 그에게 난 활짝 웃으며 말해 주었다.
“메트로놈 고장 났다고 하셨죠?”
“!”
에르네스트는 깜짝 놀라더니 내게서 새 전자 메트로놈을 받아 들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내가 말했었어?”
“예. 저번에요. 전자식 메트로놈이 고장 나서 여분으로 가지고 계시던 기계식을 쓰고 계시다고 하셨죠. 어…… 설마 새 전자식 메트로놈 사셨나요?”
“어? 아니, 아니. 안 샀어. 아직 기계식 쓰고 있어.”
“혹시 기계식이 편하신가요?”
“아니? 전혀. 불편해 미치겠어. 귀찮아서 그냥 쓰고 있었을 뿐이야.”
연주자들은 대체로 박자 감각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연습 도중에 여러 이유로 박자가 어지러워지는 일은 수없이 많았고, 그때마다 메트로놈으로 잠깐 박자를 들어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메트로놈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었다.
삼각형 모양으로 생겨선 추가 왔다 갔다 하는 기계식 메트로놈은 조금 불편했기 때문에 작은 전자시계처럼 생긴 전자식 메트로놈을 편하게 쓰곤 했다.
에르네스트는 기존에 쓰던 전자식 메트로놈이 고장 난 뒤 집에 두고 안 쓰던 기계식 메트로놈을 꺼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혹시 그 후로 안 샀거나, 샀더라도 여분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전자식 메트로놈을 사 왔는데, 잘한 것 같다.
에르네스트가 약간 감격한 것처럼 말했다.
“정말 필요했던 거야. 고마워. 잘 쓸게, 타티아나.”
“사용하실 거라니 기뻐요.”
“하하……. 진짜 필요했던 건데…….”
연신 필요했던 물건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잘 써 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선물해 준 물건을 잘 써 준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보며 말했다.
“독일제 전자 메트로놈은 또 처음이네.”
“불편하실까요?”
“아니. 스위치는 영어로 되어 있어서 괜찮아.”
그는 한참이나 메트로놈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다시 포장 안에 넣고는 내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요.”
난 그에게서 느꼈던 약간의 섭섭함도 완전히 사라짐을 느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난 메트로놈 말고도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모두 그리 비싸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소비품들이었다.
“그리고 이건 과자랑 초콜릿이랑 차랑 껌이랑…….”
“초콜릿이 많네.”
“예. 그리고 이건 샴푸……. 아, 이건 여성용이네요. 남성용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잘못 가져왔나 봐요. 바꿔 올…….”
“아니, 괜찮아. 어머니 드리지 뭐.”
“그렇다면 아예 에르네스트의 부모님들께 드릴 것을 따로…….”
“뭘 그렇게 많이 주려고 해?”
“……드리고 싶은 걸요.”
난 무언가 이유를 떠올려 보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에게 여행지에서 사 온 기념품을 주는 데에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주고 싶으니까 줄 뿐이다.
“부담 가지지 말고 받아 주세요.”
나도 바보는 아니다. 마음 같아선 값비싼 것들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이 그런 행위에 얼마나 부담감을 느끼는지 잘 안다.
때문에 난 양으로 승부하기로 했고, 이 상자에 있는 모든 내용물들을 합쳐도 정말 얼마 안 했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 정도는 느꼈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
“다시 말씀드리지만 답례일 뿐이니까요.”
먼저 선물을 들고 찾아온 것은 에르네스트였으니, 이 정도는 납득해 줄 만했다.
그렇게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아예 음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즐겁게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아예 신경을 끄니까 어색할 일도 없고 좋았다.
얼마나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에르네스트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이만 가야겠다고 말했다. 난 그를 너무 오래 붙잡아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 이만 보내 주기로 했다.
“차로 데려다 드릴게요.”
“아니야. 이번엔 정말 괜찮아. 집으로 갈 게 아니라 요 앞에 볼일 더 봐야 하니까. 걸어갈게.”
“그치만…….”
“괜찮다니까.”
저번에도 억지로 차에 태웠던 것을 기억하는지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머뭇거리며 그를 따라 나갔다.
본관 입구에서, 그는 살짝 뒤돌며 인사했다.
“갈게.”
“아……. 잘 가요, 에르네스트.”
언제나 그렇지만 친구들을 보낼 땐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난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정문까지라도 따라가 주고 싶었지만 그는 그것도 만류했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며 훌쩍 온 것처럼 훌쩍 떠나 버리려던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날 불렀다.
“그런데, 타티아나.”
“예?”
“하나만 물어볼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뜬금없이 묻는다.
“너 나한테 실망했지?”
“……??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그런데 왜 이렇게 잘 해 주는 거야?”
기겁해서 무슨 말이냐는 내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질문을 던져 왔다.
난 순간 머리가 멈춰 버리는 바람에 흔들던 손을 뻣뻣하게 세우고는 굳었다.
그가 내 음반에 대한 아무 멘트도 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한 건 사실이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지금은 정말 괜찮아졌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그에게 티를 냈던 걸까?
영문도 모르고 내게 실망스러운 눈치를 읽어 냈다면, 에르네스트도 약간 화가 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거나 이유를 묻지 않고 조금 이상하게 돌려서 물었다. 뭔지 모르겠다.
내가 멍하니 있자 그가 피식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됐고.”
“……글쎄요.”
난 그가 내 생각을 정확하게 읽고 있진 못한다고 생각하며, 그냥 내가 생각하는 바를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기다리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니깐요. 그냥, 그런 거예요.”
“…….”
대답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상한 말이었다.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을 에르네스트는 묘한 시선으로 계단 위의 날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넌 역시 특이해.”
“……실례이신데요.”
“알면서 하는 말이야.”
“안녕히 가세요. 에르네스트.”
“하하, 그래. 안녕. 타티아나.”
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삐딱하게 다시 손을 흔들었고, 에르네스트는 예민하지 않게 받아넘기며 웃었다.
어쩐지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다.
“…….”
그를 보내고, 응접실로 돌아온 나는 찻잔과 접시들을 다시 부엌에 치워 놓고 정리를 한 다음, 에르네스트가 가져온 세 장의 음반을 손에 쥐었다.
갑자기 생각나서 사 왔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난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기쁘지 않을 순 없었다.
무슨 음반일까. 에르네스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제목도 보지 못했던지라 이제야 난 음반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베토벤 소나타 1장, 슈만의 소나타 1장, 그리고 리스트 소나타가 1장이다.
세 작곡가 모두 레퍼런스라고 할 만한 연주들은 어지간해선 다 가지고 있지만, 에르네스트가 추천하는 곡이라면 흥미가 돋는다.
“…….”
난 그대로 음반들을 가지고 연습실로 향했다.
바로 듣고, 약속했던 대로 장문의 감상평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음반을 세팅하고, 감상에 들어갔다.
베토벤은 신선했다. 스페셜리스트도 많고 그에 따른 해석도 다양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여러 음반을 들어 볼수록 좋다.
오늘 받은 음반은 완성도도 높고 꽤나 독특한 해석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공부가 될 것 같았다.
슈만도 좋았다. 러시아적인 뛰어난 비르투오시티와 절제미가 돋보이는 음반이었다. 마치 에르네스트가 자신의 취향이 이러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 주려는 듯했다.
난 이미 그가 어떤 취향의 음악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그간 지켜보면서 알고 있지만, 이렇게 다시금 느끼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2장의 음반을 흡족하게 감상한 나는 마지막 1장의 음반 케이스를 열고,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
케이스를 열자 겉면의 재킷과는 다른 CD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표시도 없이, 밋밋한 CD는 잘못된 CD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음반은 어디로 간 거람?
바로 사 왔다는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있다니 이해가 안 간다.
조금 의아했지만 난 혹시 CD 겉면만 인쇄가 안 되었을 뿐이지 내용물에는 이상이 없을까 싶어서 일단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그냥 음악이 재생만 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음악 플레이어는 3개의 트랙을 감지해 내고, 자동으로 첫 트랙을 재생했다.
“……아!?”
첫 소절을 듣자마자 난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뭐야 이거, 뭐야?
완전히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날아가 버린 머릿속으로 음반에서 재생되는 음악만이 파고들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머리로 이해할 순 없었지만, 난 이 음악을 너무나 잘 안다.
아직도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침대에 누워 듣곤 하는 곡인데, 모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에르네스트.”
리스트의 연주회곡 연습곡 3번. 탄식.
그 절묘한 선율이 울린다.
곡 자체는 흔하다. 하지만 그 해석과 연주는 결코, 절대 흔하지 않다. 난 이 연주자를 안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스마트폰을 통해 통화 녹음한 아주 저음질의 곡이 아닌,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이 분명한 깔끔한 음질의 음악은 한층 더 거세게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멍하니 음악만을 감상하고 있자 탄식이 끝나고, 그다음 리스트의 위안 6개의 곡 중 3번째 곡이 흘러나왔다.
홀로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위안이 되었던 곡인지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알까. 알고 이 곡을 녹음해 준 걸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도 단지 내가 혹여나 자신의 연주를 못 알아볼까 봐 이전에 보여 줬었던, 심지어 리스트 스페셜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던 프로그램을 그대로 녹음한 것 같다. 내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
점점 조각들이 맞아 들어갔다. 그간 연락 한 번 없다가 왜 찾아왔는지, 갑자기 지나가다가 선물이라면서 음반은 왜 주었는지, 커피는 왜 자주 마셨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르네스트 역시 내 음반에서 내 연주라는 확신을 얻었기에 이렇게 음반으로 화답한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난 오늘 에르네스트가 보였던 이상한 행동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쩐지 음반에 대한 이야기는 회피하려는 기색이었는데, 그게 다 이 음반을 마지막 순간까지 감추기 위해서였다.
저번 주에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살짝 내 음반을 전해 준 것처럼, 오늘은 에르네스트 나름대로 이 전체가 일종의 답례이자 장난이었던 것이다.
“……정말.”
난 중얼거리면서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일주일간 무턱대고 기다리면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냥 에르네스트가 모르고 넘어갔으리라 생각하고 체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정확하게 내 음반을 알아봐 주었고, 이렇게 답해 주었다.
심지어 이 음반은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리퀘스트를 할 수 있다면 꼭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항상 음질이 안 좋은 녹음본으로 듣다 보면 감질나고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직접 밤마다 듣게 녹음해 달라고 할 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부분인데.
너무나 멋진 퀄리티의 음반으로 요 반년의 기다림 역시 보상받았다.
감동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이 잦아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위안의 선율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 실수로라도 에르네스트에게 짜증을 내지 않아 다행이다. 그를 기다리기로 해서 다행이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가 연주하는 리스트의 녹턴 사랑의 꿈 3번이 흐르면서 이 프로그램의 절정을 이루었다.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함께 내 음반을 세상에 던져 놓고, 유명한 평론가나 음악가들 모두에게 받을 엄격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음반에 대한 답례로 이 음반이 돌아온 것이라면, 난 아무 미련도 없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