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아침 연습을 마치고, 가볍게 벨카와 산책을 하고 샤워를 한 뒤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엔 이미 드미트리가 식재료들을 손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날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드미트리.”
난 싱글벙글 웃으며 앞치마를 차고 드미트리의 옆에 섰다. 슬쩍 보니 내가 뭘 도와야 할지 알겠다.
난 프라이팬을 준비하고 계란들을 꺼냈다. 계란 프라이도 처음엔 정말 못했는데 이젠 예쁘게 잘 만든다.
벌써 몇 달이나 드미트리에게 요리를 배우면서 난 아직 요리사는 못 되어도 조수로서는 간단하게 할 일들을 꽤 잘 해내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자잘한 일까지 내가 알아서 할 필요는 없다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지만, 무언가 하나를 배우더라도 차근차근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계란 프라이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고급 요리들을 할 순 없는 것이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계란을 부치고 있자, 야채를 썰던 드미트리가 힐긋 날 보더니 물었다.
“아가씨.”
“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기분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가 보기에도 내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듯하다.
“그렇게 보이시나요?”
“뭔가 있으셨군요?”
드미트리는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난 간단하게 내가 어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친구에게 음반을 선물해 주고 요 며칠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감상이 아니라 음반으로 답례를 받았거든요.”
“오호……. 음반으로요?”
“예. 그것도 리퀘스트라도 하고 싶었던 곡들만으로요.”
에르네스트가 살짝 끼워 준 그의 음반은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훌륭한 음반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깔끔한 녹음에 좋은 연주로 마음에 들었는데, 거기에다가 반년 가까이 원해 왔던 프로그램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난 혹시나 나중에 음반에 문제라도 생길까 봐 플레이어에 넣고 컴퓨터 디지털 파일로 옮기는 리핑 작업까지 해 놓았다.
이렇게 보관하면 만에 하나 CD가 훼손되더라도 다시 복구할 수 있었다.
사실 리핑은 꽤 귀찮은 일이라서 내가 이렇게 해 놓은 음반은 손에 꼽는데, 에르네스트의 음반은 고민할 이유도 없이 바로 리핑했다.
CD가 아닌 고음질 음원 파일은 스마트폰으로 옮겨서 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밤에 잠도 잘 잤고요.”
난 여전히 잠은 그리 길게 자지 않는 편이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자면 그냥 잘 때보다 훨씬 포근하고 개운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약간 습관처럼 되어 가는 듯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기분. 그건 내게 정말 큰 위안이 되었다.
드미트리는 내 심정이 이해하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도 요리를 배우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친구들과 완성된 요리를 나누고 평가를 하거나 답례를 하기도 했었죠.”
“드미트리도 그랬었군요?”
“같은 분야를 배우다 보면 그런 일은 많지 않겠습니까.”
평범하게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나 드미트리처럼 한 가지 분야에 파고든 사람들은 그 기술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나눌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니 말입니다.”
난 그가 이런 말을 해 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정말이에요.”
드미트리도 자신의 기술에 자긍심을 가진 예술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때문에 직종은 다르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잘 통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요리가 예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다 드미트리 덕분이었다.
난 그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면 출근하시는 아버지를 배웅하고, 난 다시 연습실로 들어간다. 그것이 내 하루 일과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난 내 방으로 돌아와서 옷장을 열었다.
“…….”
가만 옷들을 올려다보다가 일단 느낌상 손이 가는 대로 몇 벌을 꺼냈다.
“으음…….”
옷들을 침대에 펼쳐 놓고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그래 봐야 조합이 다양한 것도 아니었고, 난 여기에서 더 다채롭게 구두와 가방, 모자 등을 매치시키는 센스도 전무했다. 하지만 그래도 신경을 쓰고 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8월의 날씨에 어울릴 법한 투피스와 카디건을 준비했다.
아나스타샤가 괜찮다고 해 주려나, 잘 모르겠다.
오늘 난 아나스타샤와 신아르바트 거리로 놀러 나갈 약속을 잡았다.
그간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긴 했어도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로 딱 한 번 만나서 차를 마셨을 뿐, 그녀도 나도 요 일주일간은 연습 삼매경으로 각자 자기개발에 몰두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루 날을 잡고 놀러가는 건 꽤 오랜만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발렌티나도 함께였다.
발렌티나는 방학 내내 콩쿠르 준비 때문에 저번에 친구들 모두를 집으로 초대했을 때도 오지 못했고 여행도 같이 가지 못했지만, 이젠 콩쿠르를 끝내고 방학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발렌티나가 메시지로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면서 울먹이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는데 거의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발렌티나는 물론 피아노 연주자로서 늘 열심히 하지만, 평범하게 노는 것도 그만큼 좋아했다. 그런 그녀가 꼼짝도 못하고 몇 달을 연습만 했으니 앓는 소리가 나올 만도 했다.
오늘은 그런 그녀를 위한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난 옷을 입고, 발렌티나를 위한 선물들이 들어 있는 종이가방도 들었다. 전날 특별히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챙겨 넣었기 때문에 분명 건네주면 좋아해 줄 것 같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빅토르에게 부탁해서 외출하겠다고 전했다. 빅토르는 몇 분도 되지 않아 자하르와 함께 저택 앞에 차를 몰고 등장했다.
그도 준비를 해야 할 것이 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늘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난 그렇게 빅토르, 자하르와 함께 약속 장소인 신아르바트 거리로 향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고마워요.”
약속 장소 근처에서 날 내려 준 빅토르에게 인사하고, 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찻집을 찾았다.
이미 몇 번이나 가 본 곳이라서 잘 아는 곳이다. 골목을 따라 조금 들어가자마자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왔어?”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게 차려입은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와 나는 그저 자연스럽게,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난 아나스타샤를 놓고, 옆에 있는 발렌티나도 꼭 안아 주었다.
갈색 머리를 찰랑이는 발렌티나는 해맑게 웃으며 날 더 강하게 껴안았다. 정말 방학 내내 한 번도 못 보다가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다.
“반가워요!”
“응. 나도. 타티아나. 와, 뭐야. 타티아나 너 못 본 사이 키 컸니?”
“어…… 제가요? 모르겠어요. 안 재 봐서.”
발렌티나는 날 안은 손으로 어깨를 톡톡 쳐 보더니 무언가 가늠하는 듯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원래 스스로 크는 키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긴 하지만, 두 달 사이 커 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아직 더 클 여력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자각할 만큼 크게 자라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발렌티나가 보기엔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그녀는 안고 있던 날 놓아주더니 아나스타샤도 돌아보고는 대뜸 인상을 썼다.
“아나스타샤도 키 큰 것 같던데. 여행 가서 뭐 좋은 것 먹고 왔니? 나도 좀 줘.”
“그, 그런 거 없는데요……. 아, 거기에서 선물은 사 왔어요.”
“아 진짜? 진짜로?”
“예.”
“뭘까나.”
인상을 썼던 것이 거짓말처럼 발렌티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너무나 기뻐했다. 오늘은 나도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를 위해 선물들을 준비해 온 것이다.
그리고 비단 선물만 사 온 것은 아니었다. 난 그녀를 불렀다.
“발렌티나.”
“응? 왜?”
“콩쿠르에서 수상하신 것 다시 한 번 축하드릴게요.”
발렌티나가 콩쿠르에 나가서 거둔 성과를 제대로 축하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미 전화와 메시지로는 충분히 축하해 주긴 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보고 직접 해 주는 건 또 다른 느낌이기 때문이다.
발렌티나는 괜히 투덜거렸다.
“아 그거……. 2등인데 뭘. 작은 콩쿠르였고……. 아 몰라. 1등이던 애 너무 잘 치더라. 말도 안 돼 정말. 그 실력으로 왜 그런 작은 콩쿠르에 나오는 거야?”
“아하하…….”
투덜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 아쉽다는 투였을 뿐, 진심으로 기분이 나빠서 투덜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콩쿠르라고 했지만 발렌티나가 나갔던 콩쿠르는 모스크바에서 꽤 권위 있는 청소년 콩쿠르였고, 거기에서 2등이라면 상당한 쾌거였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1등은 하지 못했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비관할 것 없다.
언제나 제한된 스포트라이트를 두고 겨루어야 하는 콩쿠르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발렌티나라면 다음엔 분명 1등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말들을 구구절절 위로처럼 하는 것도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겐 쓸데없는 짓이라서, 나는 발렌티나에게 미소를 지어 주기만 했다.
발렌티나는 지나간 일들은 시험이고 콩쿠르고 화끈하게 잊는 성격답게 말했다.
“그래도 2등 상금은 잘 받아 왔거든. 바로 오늘을 위해서 말이지.”
“다 쓰시면 안 돼요. 발렌티나.”
“어차피 쥐꼬리만 해서 아낄 것도 없어.”
“…….”
그래도 상당한 금액일 텐데 너무 가볍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요? 발렌티나.
약간 걱정이 되기까지 했는데, 발렌티나는 신경 쓰지 말자는 듯 웃었다.
“어쨌든, 오늘은 놀기만 할 거야. 그간 연습실에서 너무 힘들었어. 곰팡이 피는 줄 알았다구.”
“열심히 연습했으면 곰팡이 안 펴. 연습 안 할 때나 생기는 거지.”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나스타샤 넌 어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맨날?”
“아, 그래? 미안해. 앞으론 상냥하게 해 줄게.”
“진짜 싫다.”
아나스타샤를 보며 발렌티나는 질색했고, 아나스타샤는 즐겁게 웃었다. 그녀는 발렌티나와 티격태격할 때 정말 즐거워한다.
난 저번 학기 때도 이렇게 세 명이서 자주 놀러 다녔던 것을 떠올리며, 가슴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
빅토르에게 부탁해서 모스크바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갈 수도 있겠지만,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그냥 편하게 신아르바트 거리에서 놀기를 원했다.
우리는 찻집에 들어가서 간단한 디저트와 차를 즐기면서 우리는 그간의 근황 등을 나누었다.
항상 연락을 주고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시시콜콜하게 자세히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시시콜콜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정말인가요!? 일리야가요?”
“정말이야.”
깜짝 놀라 묻자 아나스타샤가 다시 말했다.
“9월엔 대학생이 되겠네.”
아나스타샤가 전해 준 소식은 정말 깜짝 놀랄 소식이었다. 그녀의 오빠인 일리야가 미술대학에 붙은 것이다.
저번에 거리에서 만났을 땐 대학 합격에 대해서 그리 자신 있어 보이는 태도는 아니었던지라 일리야가 원하는 대학교에 갈 수 있길 진심으로 기도했었는데, 그 기도가 통한 모양이다. 세상에, 그런데 정말 이렇게 잘될 줄이야.
발렌티나 역시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말했다.
“너희 오빠도 대단하네. 그 미술대학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데.”
“예게는 필기도 논술도 구술도 몽땅 못 봤는데 실기 시험을 말도 안 될 정도로 엄청 잘 쳤다나 봐. 그간 한 게 있어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실기에 영향을 주었겠죠?”
“그간 한 거? 그게 뭐야?”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의 오빠는 일리야를 알기는 하지만 일리야가 그래피티를 하기도 했다는 사실까진 몰랐던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일리야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 왔다고만 말해 주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일리야는 11학년 졸업반이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진로도 잘 모르고 집과 갈등을 빚던 사람이었다.
겉으론 유쾌하고 명랑해 보이지만 사실 꽤 불안정해 보였더랬다.
하지만 마음을 잡은 뒤에 이 짧은 시간 만에 자신의 길을 찾아낸 것이다.
물론 그 길이 일리야가 원하는 길일지는 가 봐야 알겠지만, 이후에 다른 길을 찾아가더라도 지금 미술대학에 가는 것은 일리야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난 진심으로 웃으며 말했다.
“정말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응.”
아나스타샤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 눈빛은 똑바로 내게 향해 있었다.
내게 어떠한 종류의 감사를 표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져 온다.
일리야가 마음을 잡기까지 어떠한 계기와 영향이 있었는지 아나스타샤는 정확히 모르고, 나 역시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함을 아는 듯했다.
난 그저 생긋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아나스타샤의 오빠인 일리야가 앞으로도 잘된다면 난 바랄 것이 없다. 이렇게 좋은 소식을 전해 받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
모든 것이 잘 되어만 가는 기분이었다.
일리야는 졸업 후 미술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고, 에르네스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바로 진학하지 않고 중앙음악학교에서 구세프 선생님에게 조금 더 배우기로 했다. 그 두 선택 모두 내가 바랐던 대로였다.
내 음반 상황은 나쁘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 듯했고, 에르네스트는 내게 음반을 직접 만들어 선물해 주기까지 했다.
발렌티나는 콩쿠르에서 2등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아나스타샤는 근래 연습량을 많이 늘려서 부쩍 실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난 내 친구들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다 같이 모스크바 음악원에 가면 좋겠다고.
세계 최고의 음악가들만 꼽는 만큼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으니 굉장히 노력해야겠지만, 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지닌 실력과 재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도 내게 친구들과 계속 함께할 운명이 허락되어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그렇게 몇 년 후를 생각하며 찻잔을 기울이면서 난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