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차를 마신 뒤엔 종합 쇼핑몰이라고 할 수 있는 류비그로 향했다. 이전에도 우리는 함께 몇 번이나 류비그에 가 본 적이 있어서 굉장히 익숙했다.
그 류비그의 쇼핑몰에서 우리는 발렌티나가 원하는 옷을 찾아 쇼핑을 하고, 예쁜 모자도 하나씩 샀다.
눈에 보이는 대로 족족 집어 담는 루슬란 오빠와 쇼핑할 때와는 달리 친구들과 함께할 땐 매장을 꼼꼼히 돌아보면서 마음에 드는 한 가지를 찾아내서 사는 재미가 있었다.
쇼핑을 마친 뒤엔 2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잠시 쉬기도 했다.
하지만 쉬는 것은 잠시뿐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놀거리 많은 류비그에서 쉬고만 있을 우리들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다시 쇼핑몰에 갔다가 네일숍에도 가고, 게임센터와 방탈출 카페에서 놀기도 했다. 순식간에 4시간이 흘러 있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짧게만 느껴진다.
류비그에서의 마지막으로 미리 예약해 두었던 스파에 가서 마사지와 스킨케어를 받았다.
발렌티나는 테라피스트의 손에 마사지를 받으면서 거의 죽어 가는 소리를 냈다.
열다섯 살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도 되는 건지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두 달 내내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씨름을 했던 발렌티나로선 이런 마사지가 절실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아나스타샤 역시 테라피스트의 손이 어깨와 목 뒤에 닿자마자 신음 소리를 내며 축 퍼졌다.
늘 스트레칭을 하고 몸의 밸런스와 릴랙스를 신경 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문 테라피스트의 실력은 혼자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말 의료용으로 마사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미용 목적으로는 스킨케어가 있었다. 우리 세 명 모두 피부는 좋은 편이었지만, 사춘기 때라 피부에 트러블이 생기기 딱 좋은 나이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방심했다간 한순간에 망가질 수도 있다면서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서비스를 모두 받고 나온 우리는 사람이 극도로 개운해지면 반대로 힘없이 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카페로 가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셨다.
그리고 쉬는 사이, 나와 아나스타샤는 미리 빅토르에게 맡겨 놓았던 선물을 꺼내어 발렌티나에게 전달했다.
“발렌티나. 여기, 받으세요.”
“나도 줄게.”
“와, 뭐야.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발렌티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도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를 위해 준비해 온 선물이 꽤 많았다.
내가 말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사 온 선물들이에요. 발렌티나도 함께 갔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 되었으니…….”
“나? 아니, 난 괜찮아. 대신 너네 둘이 오붓하게 잘 갔다 왔잖아?”
“다음엔 꼭 같이 가요.”
“그래, 그래. 다음엔. 그보다 뭔지 한 번 볼까?”
아나스타샤와 나만 둘이서 여행을 갔다 온 것에 대해선 그리 신경 쓰지 않는지, 발렌티나는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내심 섭섭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발렌티나는 종이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맞혀 보겠다며 고개를 돌리고 손을 넣어서 뒤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모두 박스 포장이 되어 있는 데다가 물건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제대로 확인하라고 핀잔을 놓았고, 발렌티나는 깔깔 웃으며 받은 선물들을 살폈다.
난 그녀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까 굉장히 고민했었다. 너무 싼 물건을 선물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너무 비싸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선물을 할 땐 그런 부분의 적정선이라는 것이 항상 어렵긴 했다.
하지만 이번엔 신경을 조금 썼다. 독일에서 찾은 찻잔 세트는 너무 예뻐서 안 살 수가 없었고, 발렌티나는 특히 찻잔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선물한 찻잔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거 정말 예쁘다.”
“눈에 띄기에 발렌티나도 좋아하실지 몰라 사 왔는데…… 마음에 드시나요?”
“응!”
발렌티나는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날 돌아보았다.
“정말 고마워 타티아나.”
“별말씀을요.”
나도 덩달아 기뻐진다. 잘 고른 것 같았다.
발렌티나는 아나스타샤가 준 스카프도 펼쳐 보고는 어떻게 이렇게 자기 취향에 딱 맞는 것을 골랐냐면서 놀라워했다.
“아나스타샤도……. 고마워.”
“나야말로 고마워.”
“……응?”
“넌 좋아하는 게 뻔해서 뭐 사 줄지 고르는 데에 별로 안 어려웠거든. 그래서 고마워, 발렌티나.”
“뭐지? 욕하는 것 같은데?”
“착각일걸.”
“아닌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는 너무 감동적인 분위기는 달갑지 않다는 듯 농담을 했고, 발렌티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난 그런 두 사람이 너무 좋았다.
우리는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물건들을 올려놓고 어디에서 어떻게 사 온 것들인지 발렌티나에게 설명해 주었고, 자연스럽게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
발렌티나는 독일도 프랑스도 가 본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크게 아쉬워하진 않는 듯했다. 그녀는 단지 우리가 선물을 준비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다.
“어쨌든. 잘 쓸게.”
아나스타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대부분 먹을 것들이 많고 쓸 건……. 여기 샴푸 있네.”
“샴푸?”
“샴푸도 먹을 건 아니지?”
“무슨 소리야 진짜!?”
끝까지 농담을 하는 아나스타샤가 얄밉다는 듯 발렌티나가 그녀의 팔뚝을 때렸다.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피하는 시늉을 했다.
“아, 아. 알았어. 그만해.”
“아나스타샤 너나 그만 좀 해!”
“알았다고……. 아, 잠깐만. 큰일 났다.”
“또 뭔데?”
“이 샴푸 남성용이네.”
“일부러 그랬지!?”
난 결국 웃어 버렸다.
독일에서 산 샴푸가 여성용인지 남성용인지 비단 아나스타샤만 헷갈렸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하하하, 아나스타샤도 저랑 똑같은 실수를 하셨네요. 겉모양만 봐서는 구분이 잘 안 가더라고요.”
“같은 실수? 너도 얘한테 남성용 샴푸 챙겨 줬니?”
“아, 아뇨.”
“그럼? 미하일 선생님한테 뭐 잘못 드렸어?”
“그게…….”
난 에르네스트에게 그 실수를 했었지만,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어지간해선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야기를 해 봐야 길게 할 것도 없었고, 특히 발렌티나는 예민해질 수도 있다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저번 에르네스트의 생일 파티 때 발렌티나는 내가 뭐라 하든 별로 의식하여 반응하는 것 같지 않긴 했다.
그냥 대충 둘러댈까 생각하다가, 그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에르네스트에게 여성용 샴푸를 잘못 줬었어요.”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도 그건 미처 생각도 못했다는 듯 멀거니 되묻더니, 다시 평이한 투로 말했다.
“걔 것도 사긴 했었지. 전자식 메트로놈도 있었지?”
“맞아요.”
“벌써 줬어?”
“예……. 우연찮게 드릴 기회가 생겨서요.”
그와 있었던 일들을 구구절절 이야기하자면 길고 길었지만 그걸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았다. 있는 그대로 말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고, 발렌티나는 잠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더니 다시 날 돌아보고는 생긋 웃었다.
“에르네스트한테도 이렇게 초콜릿이랑 과자같이 이것저것 챙겨 줬어?”
“작은 상자에 채워서요.”
“그랬구나.”
여행지에서 사 온 기념품들을 발렌티나와 에르네스트는 물론이고 리처드나 다른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줄 것이라고 말했더니 발렌티나는 나라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
스파를 마지막으로 류비그에서 즐거운 한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저녁 식사까지 마친 우리는 이쯤에서 오늘은 헤어지기로 했다.
더 놀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우리는 밤늦게 노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리무진으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기로 했고, 가장 먼저 제일 가까이에 있는 발렌티나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갈게, 얘들아.”
“잘 가.”
“안녕히 가세요. 발렌티나.”
발렌티나가 양손 가득 종이 가방들을 들고 내렸다. 짐이 무거우면 도와주겠다고 빅토르가 제안했지만 발렌티나는 괜찮다고 사양하고는 직접 짐을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올랐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가 완전히 아파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차 밖에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다음은 아나스타샤의 아파트로 갈 차례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십여 분만 가면 금방이었다.
“…….”
아나스타샤는 잠시 무엇을 보는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난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두운 차 안에서 조명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그림 같았다.
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으응?”
막상 불렀는데 아나스타샤가 시선을 이쪽으로 향하니 뭐라고 해야 할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발렌티나는 에르네스트를 아직 좋아하고 있겠죠?”
“……어?”
아나스타샤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그건 왜?”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렌티나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이전에 아나스타샤에게 듣기도 했고, 겉으로도 보이기 때문에 잘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다시 아직도 그런지 확인하는 투로 물어본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발렌티나가 그 마음을 접은 것 같다는 대답을 듣는다면?
“아,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답을 듣기가, 그리고 그 대답에 따라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기가 두려워서 난 대충 얼버무렸다.
애초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야 할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바보처럼 말실수를 하는 걸까.
그냥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집어넣고는 날 바라본다. 내가 친구들의 연애사에 관심이 생긴 것처럼 구는 건 처음 본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다시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 입을 열었다.
화제가 살짝 바뀐다.
“그나저나 타티아나. 에르네스트랑은 이미 만났다고 했었지? 어디서 만났는데?”
“저번 주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요.”
“저번 주? 너 거기에 연주회 회의 때문에 갔다고 하지 않았어?”
“예. 맞아요.”
아나스타샤는 내 스케줄을 거의 알고 있었다.
난 에르네스트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만났었던 이야기를 했다.
“제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연습실을 빌려서 회의를 하는 사이 에르네스트는 교수님에게 레슨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
“안 놀라시네요?”
“예전에도 교수님께 레슨 받는다고 몇 번 그런 적 있었으니까.”
“전 에르네스트가 콘탁을 받고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진학해 버리려는 줄 알았어요.”
“그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있던 거야. 안 가고 있지만.”
“그 이유도 설명 들었어요.”
“아직 중앙음악학교에서 배워야 할 게 많다고 하지 않았어?”
“정확하게는 구세프 선생님에게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했지만요.”
“그 애도 참……. 대단하긴 해.”
“그렇죠?”
“그리고 타티아나 너도 그렇잖아.”
“……예?”
갑자기 이야기가 왜 내 쪽으로 튀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콩쿠르 마치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에게 조기 입학 제의를 받았던 것, 난 아직 기억해.”
“아…….”
“그때 넌 가기 싫다고 거절했었지.”
“그랬었죠.”
“보통은 그런 제의를 받자마자 바로 덥석 물었을 거야.”
“저 역시…… 아직 학교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니까요.”
말을 하면서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 난 에르네스트처럼 당당하게 선생님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우지 못해서 음악원에 갈 생각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직 미하일 선생님, 구세프 선생님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심이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 역시 내가 중앙음악학교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 데에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불성실하고 이기적이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아나스타샤에게 전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기적인 마음은 살짝 숨긴다. 비겁하게.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으면서 이상한 말을 했다.
“에르네스트랑 너, 묘하게 닮았어.”
난 하마터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라고 부정할 뻔했다. 정말 멋지게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향하는 에르네스트와, 나같이 나약한 사람이 닮았을 리가 없다.
아나스타샤는 특유의 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실제로 그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읽어 낼 순 없을 텐데, 난 읽혀지고 있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참을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예!? 아뇨, 전혀요. 괜찮아요.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아요.”
“…….”
아나스타샤는 묘하게 삐딱한 눈을 하더니, 그렇다면 하나 묻겠다는 듯 말했다.
“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무엇인가요?”
“타티아나. 너에게 에르네스트는 어떤 사람이야?”
그리 진지한 어투는 아니었다. 그냥 같이 있는 김에 가볍게 물어본다는 투였다.
대답도 가볍게 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괜히 고민하고 갈등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난 이런 질문을 받고 진지하게 답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발렌티나라고 생각하…….
이 대화의 화두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더라?
“…….”
난 이전부터, 발렌티나가 에르네스트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둘 사이가 잘 되었으면 좋겠단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애초에 나같이 이상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자격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 편이었고, 굳이 따지자면 발렌티나처럼 착한 아이가 행복해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물론 에르네스트에겐 에르네스트의 생각이 있을 테니 그가 발렌티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 어쩔 수 없는 일을 바라고 있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본다. 당장 내일이라도 발렌티나가 진지하게 에르네스트에게 고백이라도 해 버린 다음 에르네스트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얼마든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축하해 주어야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거기에 충실해야지.
하지만 역할과 의무감에 사로잡힌 마음이 아닌, 난 어떻지.
“…….”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어차피 가벼운 질문이었고 저 옆에선 빅토르도 지켜보고 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정답은 정해져 있으니 그대로 하면 된다.
“친구죠.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와 그러하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예.”
“그래? 그렇구나.”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별생각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 그대로 묘한 말을 했다.
“안 되겠네. 오늘은 반칙 좀 해 볼까.”
“……?”
“타티아나.”
“예.”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자고 갈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주무시고 가신다고요?”
“안 돼?”
아나스타샤는 내 쪽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오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럼 왜?”
자러 오겠다는 아나스타샤를 거부할 생각은 절대 없었지만, 그 전에 그녀가 한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갑자기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것처럼 구는 이유를 알아야겠다.
“가, 갑자기 집에 들어가시기 싫은 이유가 있으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부모님을 속상하게 만들면 안 돼요, 아나스타샤.”
“어, 어?”
“무슨 반칙 말씀이신데요……?”
“아, 그거? 아하하하.”
부모님이 속상해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당황해하던 아나스타샤는 내가 무단가출은 안 된다는 뜻으로 말하자 갑자기 빵 터졌다.
그녀는 한참을 웃더니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우리 집 이야기 아니니까 걱정 마. 엄마한텐 전화할 거고.”
“정말이죠?”
“나 그 정도로 신용이 없니?”
“아뇨, 그건 아니지만요.”
“그럼 어때?”
“물론 환영이에요. 집에 들렀다 가시진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응. 괜찮아. 그냥 가자.”
방학이니까 내일 어딘가 갈 계획도 없고, 아나스타샤가 와 준다면 난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저번처럼 며칠이고 머물러도 괜찮았다.
말없이 경호원의 자리를 지키던 빅토르도 피식 웃더니 말했다.
“유리 님도 아나스타샤 아가씨라면 언제든 환영이실 겁니다.”
“언제나요?”
“언제나 말입니다.”
난 물론이고, 아버지도 루슬란 오빠도 아나스타샤를 너무나 좋아한다. 항상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한 그녀의 매력은 베르체노프가의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어쩐지 약간 서글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