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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321화 (321/1,277)

##  321화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집에 놀러 온 아나스타샤를 환영해 주셨다.

“어서 오거라.”

“안녕하세요. 유리 아저씨.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죄송할 것 무어 있겠느냐? 네 집이라 생각하고 언제나 편하게 와도 좋단다.”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으셨다.

아버지는 아나스타샤를 정말 좋아하셨다. 편하게 와도 좋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정말로 아나스타샤가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겠다고 해도 바로 허락해 주실 분이었다.

“저녁 식사는?”

“하고 왔어요.”

“아쉽네. 같이 식사 했으면 좋았을 텐데.”

루슬란 오빠도 아나스타샤를 간만에 봐서 반가운 것 같았다. 저녁 식사는 하고 간다고 미리 말했는데도 또 묻는 것을 보니 정말 아쉬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티타임 정도는 같이 할 수 있겠죠?”

“티타임? 그거 좋지.”

두 사람도 내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함께 밤을 샌 이후로 많이 친밀해진 것 같았다.

난 루슬란 오빠와 아나스타샤를 꽤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다.

나도 일리야와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뭐라고 할 자격은 없지만, 날 사이에 두지 않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면 이따금 어찌해야 할 줄 모르겠는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못되게 굴어서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고 각각 독차지하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웃으면서 지켜보지도 못하는, 그런 혼란의 도가니 같은 것이 지금 내 머릿속이었다.

“…….”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당장 아나스타샤는 즐거워 보인다. 그렇다면 나도 행복하다.

잘 놀고 편히 쉬었다 가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로 짧은 인사가 끝나고,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난 아나스타샤를 이끌고 내 방으로 데리고 갔다.

“앉아요, 아나스타샤.”

“응.”

언제나 약간 서늘한 내 방 침대에 일단 아나스타샤를 앉혀 놓았다. 그리고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는 것이 순서겠지만, 지금 아나스타샤를 두고 씻으러 가고 싶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평소처럼 활발하게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고 오도카니 앉아선 내 방을 둘러보았다.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 앞에서 보였던 미소는 희미해져 있었다. 오늘 놀러 오겠다고 했을 때부터 느낀 점이지만 오늘 그녀는 조금 기운이 없어 보인다.

오늘 놀러오겠다고 한 것이 내게 위로받기 위해서라면 난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들더니 방구석을 가리켰다.

“저거 뭐야?”

“캐리어요?”

“응.”

“아하하, 저번에 사 온 선물들이 아직 남아 있어서요. 보관 중이에요.”

“발렌티나랑 에르네스트한텐 줬으니까 나머지 애들?”

“예. 다음 학기면 학교에 돌아올 한승우와 리처드 것도 있고요……. 다른 아이들도요.”

“애들이 좋아하겠네.”

“그렇겠죠? 기대하고 있어요.”

이제 개학까지 한 달도 안 남았으니 머잖아 모두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다.

난 늘 개학을 기다리면서 방학을 보냈다. 일반적으로 보통 학생이라면 방학이 지나가는 것에 아쉬워해야 정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정말 기대되는 학교생활을 기대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나스타샤는 캐리어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보았다.

“넌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 타티아나.”

난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안 그런 사람이 있겠어요?”

“있기도 하거든.”

“있기도 하겠죠?”

“그런데 넌 약간 특별하지. 알고 있니?”

“아하하, 유별나다는 건 알아요.”

반박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난 그간 잘못했던 것이 너무 많았고, 게다가 그 잘못은 2인분이기까지 했다. 그걸 조금이나마 청산하려면 정말 최선을 다해 모두에게 잘 해야만 했다. 난 그것이 내 의무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피아노와 함께 존재의 목적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인정하자 아나스타샤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데 사실 난 별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남들이 좋아하건 말건…… 잘 모르겠더라고. 평소에도 그렇고, 피아노도 내가 잘 친다는 것이 중요하지 남들이 즐거워하는 건 부가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고.”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게 보통인 것 아닐까요?”

“보통이라고?”

내게 맡겨진 의무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지, 사실 아나스타샤가 못난 점은 어느 한 가지도 없었다. 난 그녀가 얼마나 상냥하고 사려 깊은지 잘 안다.

그런 그녀에 비해 난 어떤가. 내 과거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로지 피아노 하나만을 위해 달려온 기억으로 변명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알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스스로를 폄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난 따뜻하게 웃으며 머리를 기울였다.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날 바라본다.

그녀가 말했다.

“보통이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고는 조금 더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런데 나도 널 만나고 나선 많이 바뀌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

“나만 좋아서 될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좋아했으면 좋겠고, 이기적으로 할 순 있지만 옳지 않은 걸 할 순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돌이켜 보기도 하고 말이야.”

아나스타샤가 내게서 좋은 영향을 받는다면, 그건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나 역시 그녀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닮아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친구끼리 나쁜 영향을 받아 물든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나와 아나스타샤는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그녀가 빠뜨릴 뻔했다는 듯 덧붙였다.

“아, 연습량도 많이 늘렸고.”

“부쩍 테크닉이 좋아지신 게 느껴져요.”

“정말?”

“예. 정말요.”

연습량을 늘렸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가끔 그녀의 연주를 들어 보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난 그것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긍정해 주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약간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너나 에르네스트에 비하면 갈 길이 멀겠지만 말야.”

아나스타샤는 마치 농담처럼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라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건 말을 내뱉은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날 바라보았다.

“…….”

우리는 동등한 친구였고 연주자 동지였지만, 정글 속에서 최고를 지향하며 달려 나가야 하는 맹수들이기도 했다.

누가 더 강한지, 그러한 기준이 사실 중요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수면 위로 끌어올릴 필요는 없다. 지금 대충 농담처럼 넘기면 아나스타샤도 넘어갈 것이다. 그녀도 굉장히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고, 지금 스스로 말한 것에 대해 약간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그냥 못들은 척해 주는 것이 친구로서 옳은 도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멀다고 느껴지시나요? 아나스타샤.”

“……응.”

“얼마나요?”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시선은 아득히 멀다. 난 문득 슬퍼졌다.

불과 몇 년이다. 난 확신하고 있다. 아나스타샤가 날 앞지르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시선과 그녀가 보는 시선은 다르다. 때문에 그건 말로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하면 놀리는 것처럼 들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난 설명하지 않았다.

무한한 믿음만을 그녀에게 똑바로 전했다.

“멀지 않아요. 자, 보세요.”

난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아나스타샤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아나스타샤는 내가 당기는 대로 손을 내어 주며 물끄러미 고개를 올려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로 닿잖아요?”

“……이 말이 아니야. 타티아나.”

“이 말이 맞아요.”

아나스타샤가 말하는 것이 비단 피아노만인지, 아니면 그 전에 말한 스스로의 평가에 대한 것인지 확실하진 않다. 그래서 지금 내가 전하려는 것은 그녀의 입장에선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무조건 내 말이 맞다고 우겼다.

“제가 이렇게 가까이서 아나스타샤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아나스타샤.”

열다섯 살의 아나스타샤는 빛나는 보석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조금 힘겨워 보이지만, 난 그녀가 모두 이겨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웃어 주시면 안 될까요.”

난 늘 그녀를 천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하곤 했지만, 오늘의 그녀는 그런 말을 바라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웃어 달라고 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웃는다면 금방 좋아질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당황스럽다는 듯 날 바라본다. 곧 혼란, 의심, 두려움 등의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난 똑똑히 목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내게 잡혀 있는 손을 내려다본다.

“미안해. 타티아나.”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야, 그냥.”

목소리가 교차하면서, 약간의 삐걱이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어긋난 건진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뒤틀림을 느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젠 괜찮다는 듯 손을 빼내려고 했다.

난 놓아주지 않고 억지를 썼다.

“미안하시다면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지요.”

“부탁? 무슨 부탁.”

“방금 했는걸요?”

그제야 내가 웃어 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는지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넌 그냥 막 웃니?”

“저도 혼자 있을 때 웃진 않죠.”

“혼자 있을 때 웃으면 의사 찾아가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사람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우울한 생물이라서 혼자 있을 땐 보통 웃지 않고 무표정하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거나 울지만, 두 사람이 되면 웃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고집스럽게 얼굴 표정을 굳혔다. 난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히죽 웃었다.

“안 되겠네요. 특단의 처방을 내려야겠어요.”

“뭐?”

억지로라도 웃기면 내 승리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난 아나스타샤의 손을 놓고는 기습적으로 그녀의 옆구리로 손을 뻗었다. 제아무리 아나스타샤가 평정을 가장하려고 하더라도 간지럼을 태우면 웃지 않곤 배길 수 없을 것이다.

“!?”

하지만 미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기도 전에 내 양 손목은 아나스타샤에게 붙잡혔다. 반사 신경이 얼마나 빠른 건지 저항할 틈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내 양팔을 꼼짝도 못 하게 고정시키곤 날 내려다보았다. 난 나도 모르게 헛숨을 토해 냈다.

“……아.”

“뭐 하려고?”

“그게…….”

“이거 하려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나스타샤는 말 그대로 번개처럼 움직였다.

어떻게 반항도 한 번 못해 보고 난 기절할 듯 웃으며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하하학, 하핫, 아, 잠시만요! 제발!”

“잠깐은 무슨 잠깐이야.”

“아나스타샤! 으후훗……. 힘들, 잘못했어요!”

“시끄러워.”

“아학, 흐, 그만해 주세요!”

“싫어.”

난 아나스타샤를 간지럽히려 했던 것에 대해 용서를 빌며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지만 부질없었다. 단순히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것에 대한 응보라기엔 너무 심할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날 괴롭혔다. 어쩌면 평소 쌓인 게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만히 당해 주기엔 너무 힘들었다. 난 너무 웃다 못해 배가 아프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거나 기절하겠단 생각이 들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되레 아나스타샤의 흥만 돋우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그렇게 또 몇 초간 고문을 당했더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살려 주세요!”

“아하하하.”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거의 숨넘어가는 울음 섞인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온몸이 아프다. 그냥 만사 포기하고 기절하고 싶어졌다.

아나스타샤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날 간지럽히다가 자기도 힘든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날 놓아주었다.

그녀가 힘들 정도였으니 난 거의 반쯤 죽다 살아난 상태였다. 탈진 상태로 웅크리고 투덜거렸다.

“흑……. 흡, 너무해요……. 정말…….”

“살살 한 건데.”

“이거 보세요! 눈물 났다고요!”

“웃자고 한 건데 왜 울었니?”

“정말!”

바락 소리를 치자 아나스타샤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난 아직도 벅찬 호흡을 조절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목을 제대로 못 가눌 지경이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앉자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있었다.

난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어졌지만, 막상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은 조금 나아지셨나요?”

“넌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곧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난 아나스타샤가 다시 날 간지럽힐 거라 생각하고 잔뜩 움츠렸으나, 그녀는 그런 날 그대로 끌어안았다.

내 옆머리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응. 너무 좋아졌어. 고마워. 타티아나.”

“다행이에요.”

아나스타샤는 후후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우린 친구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아나스타샤. 친구라고 해서 마음껏 고문해도 괜찮은 법은 어디에도 없는걸요.”

“네가 먼저 하려고 했잖아?”

“전 미수였잖아요.”

“응. 넌 미수로 괜찮아.”

아나스타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다시 날 한 번 꼭 안아 주고는 놓았다.

난 그녀가 한결 나아진 것 같아서, 함께 웃을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뒹굴고 웃고 났더니 더워졌다.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방문에 퉁퉁 노크 소리가 일었다.

“얘들아.”

굉장히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루슬란 오빠였다.

들어오시라고 했더니 루슬란 오빠는 방 안으로 들어오다 침대에 앉아 있는 우리 둘을 보더니 멈칫한다. 하지만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루슬란 오빠?”

“어, 음…….”

대뜸 한숨부터 쉬는 이유가 뭔지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하자 루슬란 오빠가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말한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이 노는 건 상관없는데 말야. 목소리 좀 낮춰 줄 수 있을까.”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아닌데……. 타티아나 네가 살려 달라는 목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리더라고.”

“……예?”

난 흠칫 놀랐다. 그 절규가 온 복도에 울렸다고?

루슬란 오빠가 왜 이렇게 난감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루슬란 오빠는 다시 부탁해 온다.

“목소리가 커질 수도 있단 건 알겠는데, 그래도 살려 달라는 말은 조금…… 무슨 말인지 알겠지?”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 놀라셨나요?”

“깜짝 놀랐지. 아나스타샤와 같이 있다는 걸 아니까 애써 무시했지만.”

“…….”

난 할 말이 없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고 웃기만 했다. 정말 너무했다. 같이 창피해 주진 못할망정 웃는다는 게 말이 되는지 난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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