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방에 온 루슬란 오빠는 우리가 노는 걸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나가려 했지만 아나스타샤가 붙잡았다. 그녀는 오빠에게 아까 말했듯 같이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고, 루슬란 오빠는 받아들였다.
가볍게 샤워를 한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응접실로 가자 고용인 분들이 티파티를 위한 준비를 다 해 놓은 상태였다. 차와 곁들일 수 있도록 3단으로 준비된 핑거푸드들과 다양한 종류의 차, 언제라도 따뜻하게 준비되어 있는 포트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
루슬란 오빠는 앉아서 기다리다가 우릴 보고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그 맞은편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오빠는 옆에서 대기 중인 분들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가 보셔도 좋아요.”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루슬란 님.”
“그렇게 하죠.”
가만히 앉아서 차를 서빙받고 즐기기만 할 수도 있겠지만, 루슬란 오빠는 그렇게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오빠가 말했다.
“첫 차는 내가 타 줄게.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무슨 차가 좋겠어?”
“아……. 전 캐모마일이요.”
“전 홍차로 부탁드릴게요. 루슬란.”
“알았어.”
각각 뭘 마시고 싶은지 이야기했더니 루슬란 오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모마일차와 홍차를 타 주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우리에게 차를 끓여 대접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루슬란 오빠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찻잔을 들었다. 루슬란 오빠의 차 끓이는 솜씨도 상당히 뛰어났다. 찻잎도, 물의 양도 아주 적당해서 맛있었다.
가볍게 칭찬이 오가고, 자연스럽게 담소가 이어졌다.
다섯 살이나 많은 루슬란 오빠와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공통분모는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가 오빠의 생활 같은 것을 화제로 삼아 봐야 제대로 이야기가 될 리 없었고, 그 반대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리 세 명에겐 함께 공유할 만한 기억들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것으론 밤새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일과 그 후에 아나스타샤가 우리 집에 와서 며칠이나 묵었던 일 정도였다.
특히 음반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중간에 얽혀 있는 이야기라 할 말이 많았다. 루슬란 오빠는 내 음반에 대한 사업적인 뷰 같은 이야깃거리 등을 꺼냈고, 아나스타샤 역시 그간 알아본 것이 많은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만 아무 생각 없이 맹하니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난 음반 이야기가 내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며칠 전 루슬란 오빠와 약속했던 올빼미 카페에 갔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아나스타샤가 깜짝 놀랐다.
“정말요? 올빼미 카페에 가셨다고요?”
“타티아나가 데려다줬었지. 그리고 타티아나는 네가 데리고 가 줬다고 하던데?”
“그랬었죠.”
그녀는 저번 학기에 나와 함께 갔었던 기억이 나는지 키득거리며 말했다.
“남매끼리 데이트도 꽤 자주 하시나 보네요?”
“가끔은.”
“부럽네요. 저희 오빠는 제가 데이트하자고 하면 도망갈걸요?”
“하, 하하……. 하하하. 그래……?”
루슬란 오빠는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아나스타샤의 시선을 피했다. 작년에 자신이 날 어떻게 대했었는지 기억하는 듯했다.
그때의 루슬란 오빠는 너무 신중하게 내 주위를 맴돌았을 뿐이고, 날 믿기로 한 지금은 정말 잘 대해 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작년의 태도가 오빠에겐 아직도 약간의 죄책감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나 모르겠어요.”
“그…… 내가 여동생을 가진 오빠들의 대표라 할 순 없지만, 보통 오빠들은 그렇지 않을까 싶네.”
내가 옆에서 보고 있기도 하고, 죄책감 때문에 아무래도 당당하게 말하긴 어려운지 루슬란 오빠는 묘하게 일리야를 두둔하는 듯한 말을 했다.
같은 오빠 된 사람들끼리 그렇게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살짝 다른 견해를 보였다.
“두 분 역시 남매답네요.”
“……?”
“아니에요. 아까 타티아나도 비슷한 말을 해서.”
“타티아나가?”
“아, 오해 마세요. 흉보거나 한 건 아니니까요. 저 애는 늘 자기 오빠가 얼마나 잘해 주는지 자랑하느라 바쁜 애거든요.”
“아나스타샤!”
“그에 비해 전 맨날 일리야 흉이나 보고 있어서, 가끔은 조금 그래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리야의 자업자득이지. 불만이면 동생한테 잘하든가. 안 그래요?”
아나스타샤의 장난스러운 어투에 루슬란 오빠는 다시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내게 살짝 눈짓했다. 고맙다는 것 같다. 난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그렇게 따뜻한 차와 함께 단란한 한때를 보냈다. 관심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 놀러 갔었던 이야기 등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야기는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아나스타샤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내기 등에 무척 강하단 이야기도 나왔다. 루슬란 오빠가 흥미를 보였다.
“못 하는 게 없다면서?”
“못 하는 건……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말 나온 김에 아무거나 게임 하나 할까요?”
모든 게임의 신이나 다름없는 아나스타샤가 가볍게 말했고, 루슬란 오빠는 웃으며 받아 주었다.
“고전적인 게 좋겠지?”
“뭐든지요.”
루슬란 오빠는 적당한 걸 찾아오겠다며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모든 게임의 초보인 나는 긴장해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말할 것도 없고 루슬란 오빠도 게임이라면 굉장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뭘 하든지 내가 제일 위험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빠지겠다고 말해서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난 그냥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얌전히 앉아서 어떤 종류의 게임이 내 목에 칼을 드리울지 기대하며 차를 마셨다. 패배주의자적인 마인드는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었는데, 사실 피아노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선 그렇게까지 승부욕을 불태우고 싶진 않았다.
그저, 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잠시 기다리니 루슬란 오빠가 긴 상자를 하나 가지고 왔다. 오빠는 우리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 자리에서 세 명이 할 수 있는 고전적인 게임으로 오빠가 선택한 것은 바로 젠가jenga였다.
“젠가?”
“처음 봐? 타티아나.”
“아뇨, 보긴 봐서 뭔진 알아요. 탑을 무너뜨리지 않고 블록을 하나씩 빼내면 되는 게임이었죠?”
“응. 다른 규칙이랄 것도 없이 간단하지.”
젠가는 기다란 블록을 한 층당 3개씩 쌓아올린 탑을 가운데에 놓고, 게임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블록을 하나씩 빼는 게임이었다. 자신의 차례에 블록을 빼다가 탑을 무너뜨리면 패배하게 된다.
실로 간단명료한 규칙의 게임이라서 딱히 배우거나 할 것도 없었다.
나도 아나스타샤도 흥미를 보이자 루슬란 오빠가 경쾌하게 말했다.
“재미있을 거야. 여기 테이블에 놓고 해 보자고.”
“그래요.”
오빠가 상자를 들어 올리자 그 안에서 가지런히 쌓여 있는 젠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 젠가라는 것을 실제로 처음 해 보기에 조금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별로 신기해할 건 없었다. 그냥 블록 탑일 뿐이다.
루슬란 오빠가 말했다.
“위에 쌓기로 할까?”
“그럼 어려우니까 빼는 것만 하죠.”
“벌칙도 있는 게 좋을까?”
“뭐가 좋을까요……? 간단하게 매운 것 먹기 어때요?”
“좋아. 순서는?”
“루슬란 먼저 하세요. 그다음 제가 하죠.”
“알았어.”
복잡한 규칙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벌칙과 순서만 정하면 되었고, 루슬란 오빠가 바로 먼저 손을 뻗었다.
오빠는 탑 중간 정도에서 옆의 블록을 하나 빼내었다. 빼낸 블록은 옆에 내려놓았다. 뺀 블록을 가장 최상층에 쌓는 룰도 있는 모양인데, 두 사람은 초보자인 날 배려해서 쉽게 하자는 것 같았다.
그런데 쉽게 하잔 것치곤 처음부터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첫 시작부터 묘한데요? 작전이라도 있으신가요?”
“젠가에 무슨 작전이 있겠어?”
“뭔진 몰라도 나중에 역이용당하는 수도 있답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실력이겠지.”
루슬란 오빠는 늘 아나스타샤와 내게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게임에 들어가선 승부에 집중하고 싶은 듯했다. 그건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루슬란 오빠에겐 늘 상냥하고 살가운 편이었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서늘했다.
승부는 시작된 것이다.
“난 이거 빼야지. 자, 타티아나. 네 차례야.”
“아……. 예. 어떤 블록이 좋을까요?”
“이제 처음인걸. 그냥 아무거나 괜찮아.”
딱히 알려 주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세 번째이니까 아무거나 빼도 탑이 무너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란 말이었다. 그리 위태로워 보이지 않긴 했다.
그래도 난 이전에 루슬란 오빠와 아나스타샤가 빼낸 블록들을 살펴보고, 한쪽 면의 블록들만 비게 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골랐다.
그리고 고른 블록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설렁설렁 하진 않는다. 루슬란 오빠와 아나스타샤에게 이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진 않지만, 그래도 어설프게 해서 져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난 허술한 성격이 아니었다. 뭐든지 최선을 다해서, 져도 미련이 남지 않도록.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서서히, 정확하게 손가락을 내밀어 블록을 만진다. 나무 블록 특유의 재질이 손끝에서 전해진다. 살짝 밀어 본다. 약간의 저항과 함께 블록이 움찔했다.
손가락 끝으로 세상의 움직임을 컨트롤하는 것에 대해 난 약간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블록이 움직이는 각도와 간섭을 생각하며, 내가 노리는 블록의 위나 옆으로 힘이 전달되어 탑이 불안해지지 않도록 절묘하게 힘을 집중하여 그대로 손가락을 밀었다.
아직 견고한 탑에서 블록 하나를 빼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톡 소리와 함께 블록이 떨어졌다.
난 숨을 들이쉬며 허리를 들었다.
주변이 조용했다.
“…….”
“왜 그러시나요?”
“아니…….”
아나스타샤가 멍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젠가 프로 선수 같았어. 타티아나.”
“선수가 있나요?”
“없다면 네가 첫 번째 선수일 거야.”
내가 집중해서 게임에 임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루슬란 오빠도 말했다.
“후, 타티아나. 난 가끔 네가 그렇게 무섭도록 집중하는 걸 보면 숨은 쉬고 있나 걱정될 때가 있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쓸데없는 농담이었어. 숨은 쉬겠지.”
“안 쉬는데요.”
“……?”
루슬란 오빠는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더니 곧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은 정말 재미있었지만, 오빠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아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놀라니까 그런 농담 하지 마.”
“나도 정말인 줄 알았어…….”
루슬란 오빠와 아나스타샤가 한마디씩 했다. 난 싱긋 웃기만 했다.
순서는 다시 돌아 루슬란 오빠의 차례가 되었고, 간단히 해낸 후엔 아나스타샤, 그리고 다시 내게 돌아왔다.
게임은 빠르게 진행되면서 블록 탑을 군데군데 파내었다. 처음엔 빽빽하게 차 있던 탑은 게임이 상당히 진행되자 빈 공간이 많아지면서 허술해졌다.
자연스레 게임 진행 속도로 느려졌다.
루슬란 오빠가 천천히 집중해서 블록을 빼내었고, 아나스타샤 역시 서두르지 않고 블록을 뺐다.
난 젠가를 보다가 어딜 빼내야 무너지지 않을지 고민했다. 아나스타샤와 루슬란 오빠는 아직까지 여력이 있어 보이는 층과 블록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여서, 신중하게 손가락을 뻗어 빼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긴 나는 블록을 내려놓으며 소감을 말했다.
“손끝의 감각과 속도, 그리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네요. 좁고 긴 막대를 터치한다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피아노 건반 터치 감각을 키우는 데에 훈련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아까 젠가 프로 선수 같다는 거 취소할게. 넌 뼛속까지 피아노 연주자야.”
“아하하하.”
아나스타샤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고 난 그저 웃었다. 즐거웠다.
어쨌든, 이다음은 루슬란 오빠의 차례였다.
위태로워진 탑을 놓고 루슬란 오빠가 어떻게 할지 기대하고 있는데, 오빠가 선언했다.
“자, 그간 즐거웠지만 이제 슬슬 게임을 끝낼 때가 왔네.”
“갑자기요?”
“잘 봐.”
난 의아했다. 이 게임이 끝낸다고 끝낼 수 있는 게임인가?
스스로 탑을 무너뜨려 버린다면 자신의 손으로 게임을 끝낸 것이 되겠지만, 오빠는 그런 걸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마치 체스에서 체크메이트를 선언하듯 그렇게 말한 오빠는 손을 내밀더니 밑쪽에 위치한 블록의 끝을 살짝 밀고는 잡는다.
그러고는 그대로 슥 빼내다가, 거의 마지막 순간에 블록을 살짝 비틀어서 잡은 블록 위쪽의 탑 전체를 비틀어 놓았다.
“!?”
그대로 탑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루슬란 오빠가 블록을 비틀며 빼내면서 넘어질 것처럼 뒤틀어진 젠가는 약간 흔들리는 것 같더니 제자리에 섰다. 하지만 훨씬 더 위태로워진 균형은 이다음을 버티지 못할 것 같이 보인다.
일부러 위험 요소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젠가에도 기술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루슬란 오빠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해 놓고는,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다음 네 차례인데 이런 난관을 던져 줘서 미안해, 아나스타샤. 대신 벌칙은 살살 해 줄게.”
“…….”
아나스타샤는 테이블 앞에 서서는 팔짱을 끼고 젠가를 바라보았다. 정말 무자비하게 뒤틀어진 젠가는 손도 못 댈 것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 불안해 보이진 않았다. 단지 루슬란 오빠가 한 일이 조금 놀랍다는 듯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젠가를 볼 뿐이었다.
“이건 확실히 어려워 보이긴 하네요.”
“손만 대면 쓰러질걸.”
“그러게요.”
그녀도 순순히 인정했다. 난 아나스타샤가 그 많은 내기와 게임들을 하면서도 이렇게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나스타샤가 지고, 매운 것을 먹는 벌칙을 당하게 되나 싶어서 난 조마조마해졌다. 어차피 게임을 하는 이상 여기 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벌칙을 당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루슬란 오빠가 만들어 놓은 체크메이트적인 상황을 보고도 도전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빠르게 과감하게 할 필요가 있죠.”
“과감? 어떻게?”
“이렇게요.”
그 말과 동시에 아나스타샤가 손을 뻗는다.
“!”
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저편으로 날아갔고, 젠가는 한 층이 통째로 주저앉아서 낮아졌다.
난 내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튕겨서 하나의 블록을 재빠르게 쳐내는 것으로 층 전체가 그대로 밑으로 떨어지게 하고 블록만을 제거한 것이다.
식탁 위에 물건들을 올려놓고 식탁보만 빠르게 빼내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란 것은 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라도 아나스타샤가 한 일은 말도 안 되는 마술처럼 보였다.
나와 루슬란 오빠는 넋이 나가서 가만히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응접실 구석으로 가선 멀리 튕겨나간 블록을 주워 왔다.
그녀는 손에 들린 블록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흔들흔들 하며 말했다.
“어때요, 살았죠?”
“…….”
루슬란 오빠는 할 말이 없는지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시선이다. 아나스타샤는 매력적으로 웃어 보이곤 블록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런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난 아나스타샤가 내 친구라는 데에 뿌듯함을 느끼다가도, 조금씩 불안해진다. 그녀가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그런 그녀를 나 혼자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상충한다.
언제나 그랬다. 난 언제나 이중적이고, 부조리했다.
“…….”
아무튼 그런 건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었고. 난 조용히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응?”
“그런데 다음인 제가 죽었는걸요.”
난 샐쭉하게 젠가를 가리켰다.
아나스타샤가 한 층을 통째로 날려 버린 젠가는 더 불안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당장 손을 댈 곳이라곤 두 군데 정도 밖에 없는데, 둘 다 손을 대는 순간 탑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도 주의 깊게 젠가를 살펴보면서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찾아봐 준다.
하지만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벌칙은 살살 해 줄게.”
“왜 맨날 저만 괴롭힘 당하는 것 같죠? 예?”
이렇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억울해진다.
괜히 징징거리자 아나스타샤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난 오기가 생겼다. 정말 살면서 이렇게 집중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최고로 집중해서 블록을 잡았지만 살짝 빼는 순간 탑이 꿈틀거려서 그대로 정지했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다른 블록을 잡았다. 하지만 그 블록 역시 천천히 빼려고 하니 탑이 통째로 끌려오는 느낌이 분명하게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방법이 전혀 없었다. 루슬란 오빠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이 온갖 기술을 부려 놓은 젠가는 숨만 잘못 쉬어도 그대로 무너질 판국이었다. 난 울상이 되어 다른 블록에 손을 댔다가, 그대로 탑을 무너뜨렸다.
거짓말쟁이 루슬란 오빠는 살살 하겠다고 했으면서 부엌에서 매운 소스를 받아 와선 카나페 위에 무자비하게 뿌렸다. 오빠가 날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오빠가 날 죽이려는 것 같으니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이 늦은 밤엔 경찰이 일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핑계를 들며 거절했다. 여기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처절한 배신감과 원망 속에서 난 카나페를 입에 넣었고, 혀가 불타는 듯한 느낌을 맛보며 정말 아파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가뜩이나 혀가 약해서 매운 걸 잘 못 먹는데, 매워도 너무 매웠다.
뒤늦게 루슬란 오빠가 미안하다며 우유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게임도 좋고 승부도 좋지만 너무 아프다 보니 억울하기만 했다. 정신없는 머릿속에선 복수를 향한 갈망만이 맴돈다.
루슬란 오빠는 내가 아침마다 식사 준비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남매간의 복수 혈전이라는 것이 이렇게 시작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매워?”
그 와중에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내가 먹었던 것과 똑같은 카나페를 만들더니, 입에 넣었다.
난 경악해서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 나, 진짜, 윽…….”
얼굴이 새빨갛게 된 아나스타샤가 비틀거리면서 우유를 찾았다. 그녀 역시 눈에 눈물이 핑 돌아 있었다.
난 그녀가 왜 벌칙을 자처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게 나 때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괜히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미안하고, 고마웠다.
졸지에 루슬란 오빠는 나와 아나스타샤가 둘 다 울먹이는 걸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자기도 똑같은 카나페를 만들어 먹고는 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웃긴 오빠다 진짜.
그렇게 우리 세 명은 모두 매운 맛이 혀에서 가실 때까지 오두방정을 떨며 고통스러워 해야만 했다.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