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난 나는 바로 평상시처럼 연습실로 가는 대신 침대에 앉아 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아나스타샤가 곁에 있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난 그녀를 지켜보고 싶었다.
해가 뜬 뒤엔 곤히 잠든 아나스타샤를 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드미트리와 특별히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아침 식사를 만들고, 시간에 맞춰 아나스타샤를 깨우러 갔다.
아침잠이 많은 편인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난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아나스타샤,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으응……?”
파자마 차림으로 뒤척뒤척하던 아나스타샤는 내가 다시 한 번 어깨를 흔들며 속삭이자 눈을 떴다. 드물게 몽롱한 표정의 그녀는 정말이지 귀엽다.
자주 없는 기회였다. 난 어린 아이를 달래듯 아나스타샤를 안아서 일으켜 세우고 토닥였다.
아나스타샤는 잠이 부족한지 한참이나 멍하니 있더니 부르르 어깨를 떨고는 눈을 비볐다. 그러고 나서야 눈빛에 힘이 조금 돌아온다.
그 직후 아나스타샤가 한 것은 내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어린애처럼 다뤄진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지 그녀는 날 확 잡아당기고는 이리저리 뒹굴거리면서 간지럼을 태웠다. 막 일어난 그녀도 난 감당하기 힘들었다. 강제로 웃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우리는 침대 위에서 한참을 웃고 떠들고 나서야 식당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가족 모두와 아나스타샤까지 함께 하자 식탁 위가 북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늘 에너지 넘치는 아나스타샤 덕분에 가능한 분위기였다.
식사 후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회사 일로 나가고, 아나스타샤와 티 가든에서 햇살을 만끽하며 티타임을 가졌다. 오가는 대화는 대부분 잡담에 가까웠지만 귀중한 시간이었다.
“아, 잠시만요.”
“전화야?”
“예.”
대화 도중 갑자기 내게 전화가 왔다. 양해를 구하고 확인해 보니 마카로프 프로듀서였다. 지금 이 시기에 그가 내게 전화할 일이라곤 하나뿐이었다.
평온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해이해져 있던 태세를 고친다. 음반이라면 내가 진행하고 있는 것 중 일에 속하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아나스타샤의 앞에서 그러는 것처럼 바보처럼 있어선 안 된다.
전화를 받아 보니 용건은 단순했다. 시중에 있는 거의 모든 클래식 잡지들의 9월 호를 모두 구했으니 직접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괜찮다고 대답하고 잠시 기다리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도착했다. 미리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던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깔끔한 예의로 인사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도 계셨군요.”
“어서 오세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안녕하세요.”
말로만 그치지 않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다가와서 직접 우리와 악수도 나누었다.
본 지도 한참 되었고 서로 전문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음악인이라는 공통분모로 보면 한참이나 선배인 마카로프 프로듀서였지만, 그는 언제나 나를 학생이나 어린애로 대우하지 않고 연주자로 대해 주었다.
“유리 세르게예비치는 계십니까?”
“아뇨. 출근하셨어요.”
“음……. 뭐 괜찮겠지요. 오늘은 단순히 보고만 드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니까요.”
그는 아버지를 찾긴 했지만 없다는 말에 별 상관 없다는 듯 웃었다. 음반사의 사장으로서 아버지가 얼마나 중요할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조차 늦게 미뤄 놓고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그쪽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음반뿐이었다.
난 프로듀서에게 소파에 앉아 달라 청한 후 직접 홍차를 끓여 내왔다. 그는 목을 축이자마자 잠깐 숨 돌릴 틈도 아깝다는 듯,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이번 9월에 발간된 클래식 매거진들입니다.”
“이렇게 많나요……?”
“저도 평소에 이렇게까지 보진 않습니다만, 그냥 모두 가져왔습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가지고 온 커다란 가방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꺼내어 쌓았다. 척 보기에 스무 권도 넘어 보이는 잡지들이었다.
우리 중앙음악학교의 도서관엔 이런 클래식 관련 잡지들이 있는 곳도 있어서 자주 보곤 한다. 때문에 아는 이름도 많았지만, 잘 모르는 이름의 잡지도 많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말 그대로 시중에 풀려 있는 클래식 잡지들 중 음반이나 피아노에 관련된 것들을 모조리 사 온 듯했다.
“…….”
난 조금 흥미롭게 산더미 같은 잡지들을 보다가, 약간 긴장됨을 느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아예 언급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아예 세상에 그런 무명 음반 따위는 없었다는 듯, 배제되었을 수도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가만히 있는 날 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도 한 권도 안 읽어 봤습니다.”
“안 보셨다고요?”
“타티아나와 같이 보려고 말입니다.”
난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원하지 않았거나, 최악의 결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미리 이 모든 잡지들을 검열하고 내게 전달하고 싶은 좋은 평가들만 선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의 태도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다. 우리가 할 일은 끝났고 이제 그 대답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그 의지가 너무나 잘 느껴져서, 난 긴장을 풀고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면 평가 역시 공정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죠?”
“하핫, 전 타티아나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제 생각이 읽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공정하신 분이시니까요.”
“뭐, 그렇게 봐 주신다면 감사합니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든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어도 막상 닥치니 긴장되었는데, 마카로프 프로듀서 그리고 아나스타샤와 함께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의 준비도 끝났고, 잡지 하나를 펼쳐 보려는데 갑자기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막았다.
“그런데, 이제 하나씩 읽어보기에 앞서서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예, 무엇인가요?”
“혹시 라예프스키 레코즈의 표트르 발레예비치 모로조프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습니까? 타티아나.”
라예프스키 레코즈? 표트르 발레예비치 모로조프?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멍하니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바라보다가, 나는 곧 그 이름을 확실하게 떠올려 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콩쿠르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 보자며 내게 제안했던 음반사와, 그 사장이었다.
같이 일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사업가적 유능함은 단 한 번 만나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질 정도였다.
모든 음악가들이 나처럼 금전적으로 풍족한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다만 나와 인연이 없었고, 때문에 헤어진 이후로는 잊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 갑자기 여기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단순히 그 이름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연주자의 이름을 적지 않은 음반을 낼 계획이라고 말한 적이 있냐고?
있었다.
“……아.”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말했다.
“있었나 보군요.”
“그게…… 실수였어요. 계약을 하자고 찾아온 그분에게 거절하는 이유를 말하려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타티아나는 처음부터 저희 레이블 자체보다는 음반의 조건에 관심이 있었으니 말이죠.”
“……아, 마카로프 프로듀서.”
난 갑자기 약한 현기증이 이는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문제가 생겼나요……? 저 때문에?”
애초에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으면, 다른 곳에서도 말을 삼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난 바보처럼 표트르 발레예비치에게 계획에 대해 말했었고, 그는 지금 세계에 나온 무명의 음반을 보고나서 몇 달 전의 날 떠올렸을 것이다.
야심가로 보이는 그가 이걸 놓칠 리 없었다.
어차피 영원히 숨길 순 없을 테고, 언젠가 밝혀질 일이긴 했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되어서 내 실수로 밝혀지는 건 계획 밖이었다.
난 재빠르게 표트르 발레예비치와 교섭하는 것을 떠올렸다. 아직 기회가 있다면 수습하고 싶었다. 그는 사업가적 기질이 뛰어난 사람처럼 보였으니 교섭 기회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각해진 나와 달리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평온하기만 했다. 내 실수로 일이 어그러질 상황에 놓였는데 어떻게 저렇게 태평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타 음반사의 사장이 내 정체를 알아 버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멀거니 되묻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만 불안하게 만들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타티아나.”
“그게 아니라, 제 잘못으로 비밀이 새어 나갔다면 그건…….”
“아닙니다, 아니에요.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타티아나에 대해 밝힐 생각이 전혀 없다고 제게 전했습니다.”
“……예?”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난 표트르 발레예비치를 잘 모르지만 그는 자비롭고 이해심 많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무언가 했나 싶어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천천히 말했다.
“라예프스키 레코즈는 저희와 같은 클래식 레이블이지만 세부 카테고리에서 다루는 장르가 조금 달라서 이야기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그쪽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사장이 직접 말이죠.”
“표트르 발레예비치…….”
“예. 사업적인 수완은 탁월하지만 그 때문에 논란도 꽤 있는 사람이죠. 어쨌든, 그 사람이 제게 그러더군요. 지금 클래식 비평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음반의 주인공이 혹시 타티아나 아니냐고 말입니다.”
“……읏.”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내 실수 한 번에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정확하게 날 특정해 낸 것이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말을 이었다.
“그간 저희 음반사로 수없이 많은 문의가 있었고, 특정 연주자를 확신한다며 전화를 해 온 사람도 수 백 명에 달했습니다만, 이렇게 확실하게 정답을 맞힌 사람은 처음이어서 저도 조금 당황했죠. 그래서 처음엔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말도 안 되는 정보통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천재적인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건 아닐 거예요. 제가 다 말해 버렸으니까.”
“재미있는 건 그렇게 절 속일 수 있음에도, 그가 사실대로 다 말했다는 겁니다.”
난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교묘하게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그렇게 해서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그가 뛰어난 사업가라면 나같이 무지한 사람은 미처 상상도 못하는 것들을 얻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조용히 말했다.
“속임수도 협박도 폭로도 가능했겠죠. 전 그중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어떤 카드든 꺼내 들리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는 순전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맞는지 확인만 하고 싶어 했습니다.”
“확인만요?”
“예. 확인만. 연주자가 타티아나가 맞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그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겠다며 알아서 맹세까지 하더군요.”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이야기는 점점 이상해졌다.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전화를 해서 확인까지 받고는, 그것 자체만으로 만족해 버렸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나와 달리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진지한 눈빛을 했다.
“전 이해가 갑니다.”
“……?”
“그는 사업가로 명성이 높은 사람이지만, 어쨌거나 음반 제작자인 겁니다. 이 바보같이 보이는 도전적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곳과, 생각보다 성공적인 과정을 지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순수한 감탄과 응원을 보내더군요.”
“……아.”
“표트르 발레예비치가 우릴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괜찮을 겁니다.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
사적인 이득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 전에 음반 제작자로서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이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음반 자체엔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해도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프로젝트의 진행을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음악계에 업을 둔 사람으로서 지켜봐 주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순간, 나는 부끄러워졌다.
표트르 발레예비치의 첫인상만으로 그를 무슨 괴물처럼 생각하고 경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무차별적으로 훼방을 놓을지도 모른다고 겁부터 먹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표트르 발레예비치 역시 클래식 음악이라는 이 거대하고 오래된 장르를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끌어 나가는 데에 일조하는 한 사람이었다.
창피함에 고개도 못 들고 있는데,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를 스스로 맹세까지 하도록 만든 건 바로 타티아나입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걸요?”
“하하, 타티아나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설득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표트르 발레예비치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말 말아 달라고 설득한 적이 없었으니 내가 할 수 있고, 한 것이라곤 하나뿐이다.
“……음악인가요?”
“바로 그렇죠.”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정답이라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내 음악이 형편없었더라면, 표트르 발레예비치는 어떠한 기대도 않고 멋대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이 또한 음악으로 그에게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쌓여 있는 잡지들 중 하나를 집었다.
“자, 그렇다면 볼까요. 그 까다로운 사람도 매료시킨 음반에 대해 매거진들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반대편에 앉은 그는 잡지를 90도로 돌려 나와 아나스타샤도 볼 수 있게 한 뒤에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