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화
한승우는 어디 있냔 말에 리처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서늘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고민 어린 눈빛이 날 바라만 본다.
난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리처드는 결국 버티지 못했다. 그가 허벅지를 툭툭 털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잠깐 나가서 이야기할까. 타티아나.”
“좋아요.”
난 앞서가는 리처드를 따라갔다.
막 나가려는데 아나스타샤가 날 부른다.
“어디 가? 타티아나.”
“아……. 잠시만요. 리처드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뭔데?”
“아하하, 금방 돌아올게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더니 아나스타샤도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웃고 있지만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
아직 복도엔 학생들이 많았다. 개학식이 막 끝나고 첫 수업 전의 학교는 방학 동안 못 본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장난을 치는 목소리들로 소란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저 학생들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인사하고, 앞으로 또 1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9학년 진급 시험에 통과했다고 그토록 기쁘게 메시지를 보내왔으면서, 왜 첫날부터 보이지 않는 건지.
가슴이 답답하다.
답답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리처드 역시 표정이 밝지 않았다. 무표정한 그는 약간 무섭기까지 하다. 하지만 난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리처드는 복도 끝의 휴게실을 보더니, 거기에 학부모님들이 앉아 계신 걸 보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결국 우리가 향한 곳은 작은 연습실이었다.
좁고 어두운 연습실은 대화 공간으로써 리처드가 좋아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연습실 구석의 의자를 꺼내 와서 내 옆에 놓아주고, 맞은편에 또 하나 놓은 그는 의자에 털썩 앉더니 대뜸 한숨부터 길게 내쉬었다.
“후…….”
그러더니 그는 허리를 펴고 손으로 가슴팍을 툭툭 쳤다. 얼마나 답답하면 가슴을 칠까 싶었지만, 난 그 행동의 의미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리처드. 설마 평소에 담배 피우시나요……?”
“뭐?”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리처드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갑자기. 타티아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찾으시려는 것 같아서요.”
“……어,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나 담배 안 피워.”
“정말요?”
“안 피워. 내가 담배 피우는 거 봤어?”
“숨어서 피우고 계실지도 모르잖아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 과연 내가 담배를 숨어서 피울까?”
“…….”
듣고 보니 그것도 그랬다. 리처드는 늘 깔끔한 신사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가 만약 흡연자였다면 한참 전에 내게 들켰을 것이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리처드가 돌연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만약 내가 흡연자였다면 지금 피우고 있었을 것 같네.”
“…….”
“농담이야. 그렇게 보지 마.”
“속상하게 하지 마세요.”
“미안.”
리처드가 손을 들며 짧게 사과했다.
공기가 조금 편안해졌다.
쓸데없는 말이 오간 것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느끼고 있던 긴장감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이다.
리처드가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아, 진짜 모르겠다.”
“……?”
“이 이야기를 너한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돼.”
“…….”
난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리처드가 먼저 말해 주길 기다렸다.
리처드는 날 보더니 이제 와서 뭘 숨기겠냐는 듯 털어놓았다.
“한승우 이야기야.”
“역시 그렇군요.”
“단순한 문제는 아니야.”
“단순한 문제였다면 그렇게 고민하실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잘 하고 있고……. 사실 별것 아닐 수도 있어서 말야. 굳이 네가 자세히 알 필요까진 없…….”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말을 잘랐다.
“지금 러시아에 있나요?”
“…….”
리처드가 굳는다.
하지만 짧은 질문에 짧은 대답이 되돌아온다.
“아니.”
그 대답을 듣자마자 갑자기 화가 났다.
안 좋은 예감을 확인받았을 뿐이지만, 그 기분 나쁜 예감이 콱 틀어쥐고 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카맣게 물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싸늘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제가 자세히 알 필요 없는 이야기인가요? 리처드, 정말 너무하시네요.”
“나도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 타티아나 너 정말 화났어?”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요?”
진정해야 하는데, 리처드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두 분 다 너무하세요. 그간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었을 땐 이런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잖아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나요?”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그 자식도 나도 몰랐으니까.”
“곤란한 이야기에 굳이 끼우고 싶지 않았단 건가요?”
“아니 그게…….”
리처드가 살짝 인상을 썼다.
내 기분은 갈수록 더욱 어둡고 차가워진다.
왜 난 아무것도 몰랐지? 한승우는 복잡하고 곤란한 일에 사로잡혀서 러시아로 오지 못했다.
이 상황에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손을 내밀었다면 절대 그 손을 뿌리칠 일은 없었을 텐데, 왜 난 빼놓은 거야?
배신감과 짜증이 번갈아가며 옆머리를 짓눌러 왔다.
그리고 리처드가 쐐기를 박았다.
“그래, 맞아. 특히 한승우는 더더욱 그랬을 거야.”
“왜요?”
“타티아나. 모르는 거야? 그 자식은 네게 부채감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예?”
날카로워진 내게 난감해하던 리처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그는 똑바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학교에 시험 쳤을 때부터 시작해서 쭉. 계속. 네가 일방적으로 도와준 것들이 얼마나 많았어?”
“하지만 그건…… 유학생이고, 힘들 테니까…….”
“학교에 유학생이 그놈 하나야? 아니잖아.”
“그래도 말도 제대로 못 익히고, 가장 힘든 유학생 중 하나였다는 건 분명해요.”
“그래. 그건 맞아. 그래서 나도……. 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할 말은 해야겠단 식으로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리처드는 날 탓하거나 내 잘못이라고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미안하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말을 잘못한 것 같다. 부채감이 아니라 고마움이라고 할게.”
“……어떤 말씀이신진 알았어요.”
난 두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내게 아무 말 않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까. 내겐 친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호의였지만 그것이 부담스러움으로 쌓인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한승우는 그것을 조금 무겁게 생각하는 듯했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는 몇 번이고 내게 툭하면 출세해서 갚겠단 말 따위를 하곤 했었으니까. 늘 장난으로 넘기긴 했지만 분명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해했다는 듯한 눈빛을 보이자 리처드가 한풀 죽은 모습으로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가뜩이나 바쁜 너한테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했어. 나 역시 동의했고.”
“…….”
“사실 잘될 줄 알았으니까.”
한승우가 오늘 학교에 오기만 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거다. 때문에 그 전에 미리 약한 소리 하긴 싫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난 다시 사과했다.
“화내서 미안해요. 제가 두 분 마음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넌 화내도 되는 입장이긴 해. 그럴 것 같았고.”
“…….”
내 성격을 잘 아는 리처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한다.
그리고 난 지금, 그가 내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이유 그 자체를 느낀다.
“리처드.”
“그래.”
“저에게 일부러 아무 말 않았다는 건 이해했어요. 그런데 이젠 설명해 주실 건가요?”
“……그래.”
“마음이 바뀌신 건가요.”
리처드가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네가 물어봐도 그냥 걱정 말라고 곧 올 거라고 널 속였다가…… 만약 그 자식이 아예 못 오게 되면 네가 더 큰 배신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
“…….”
그리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최악의 예감이 리처드의 입에서 나왔다.
한승우는 중앙음악학교로 아예 돌아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 말을 들으니 뇌리가 싸늘하게 식는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난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었다.
난 이 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면 그렇게 바보 같은 일도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어떤 일이 있는 건가요.”
“하…….”
내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본 리처드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한 달쯤 전인가.”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이전까지의 이력을 보는 듯 화면을 슥 넘기며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지. 그 자식은…… 아, 타티아나. 그건 알아 둬. 한승우네 집에선 피아노고 유학이고 모조리 엄청나게 반대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알고 있었어?”
난 한승우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는데, 그 이유엔 그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피아노를 배우려 한다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그가 믿고 있던 학원 선생은 부모의 반대에 동조하여 한승우에게 잘못된 입시곡과 요강을 알려 주고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유도하기까지 했다. 상당히 힘들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알고 있다면 됐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그렇게 방학 시작하고 두 달 정도는 부모님과 싸우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 하지만 조금 낙관적인 생각이 있긴 했지. 왜냐면 이미 러시아에서 1년을 보냈고, 적절한 결과도 있었고, 방학은 길었으니까. 방학 내내 열심히 설득하면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나 봐. 나도 조금은 그랬고.”
“그렇겠네요.”
한승우의 부모님은 러시아에 가서 중앙음악학교의 시험에 떨어지고 한국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겠지만, 한승우는 편입에 성공하여 예브게니아 교수님의 집에서 한 달간 숙식한 뒤 그대로 기숙사에 들어가 1년을 보냈다.
그사이 러시아에서 지내면서 한승우는 이대로 있을 수 있다는 관측을 가진 듯했다. 리처드도 그랬다고 하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비슷한 의견이었다.
1년 동안 러시아 최고의, 즉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에서 수학했고 러시아어도 훌륭하게 배웠으며 콩쿠르 등에서 결과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안 좋은 소리를 하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과한 낙관이 아니라 상식적인 바람이었다.
하지만 한승우의 부모님들은 여름방학 석 달 중 두 달을 설득에 나섰는데도 들어 주시지 않았다.
우울한 기분과 예감이 든다.
리처드가 이어 설명했다.
“그런데 어떠한 일단락도 나지 않았는데, 그 자식이 먼저 러시아행 비행기표를 예매해 버린 것이 그쪽 부모님에게 들키면서 사달이 났지.”
“어떻게 되었나요……?”
“비행기표는 취소. 가진 돈은 다 빼앗기고, 여권도 뺏겼다고 들었어.”
“여권까지요?”
“그래.”
한승우는 허락을 받지 않더라도 일단 8학년 때 그랬듯 러시아에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리 쉽지 않았다. 아마 감정적인 문제도 많았을 것이다. 한승우의 부모님들이 분노로 폭발해 버리고, 그가 꼼짝도 할 수 없도록 지갑과 여권을 빼앗는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얼굴도 모르는 분들을 이렇게나 잘 떠올릴 수 있다니, 이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하지만 헛웃음은 찰나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 난 한층 더 우울해져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지금은…….”
“꼼짝없이 한국에서 중학교라는 곳에 수속을 밟았다던데.”
거의 끝난 것 아닌가. 끔찍했다.
내 표정에서 절망감을 읽어 냈는지 리처드가 빠르게 덧붙였다.
“그런데 학교에 나가고 있진 않대. 나름대로 반항 중인가 봐.”
“…….”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정말 얼마나 갈지 모르는 일이다.
돈도 여권도 아무것도 없이 무력해진 열다섯 살이 학교 수속까지 마쳤는데 방 안에서 웅크리고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한승우는 심지도 굳고 자주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열다섯 살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지쳐서 타협하거나, 더더욱 거세게 반항하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그의 정신이 망가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난 다른 것이 아니라, 한승우가 증오심을 품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
우울함과 불안감. 나와 리처드는 등을 켜도 어둑한 연습실에서 같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그도 나도 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말이든 꺼내기가 너무 어렵다.
침묵이 무겁게 바닥에 쌓여 갈 무렵, 리처드가 말했다.
“이제 너한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네가 날 죽이겠지.”
“……당연하죠.”
“하지만 신경이 가더라도…….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타티아나.
그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우린 너무 무력해.”
“…….”
“네가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강압적인 환경에 뭘 할 수 있겠어?”
리처드는 내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안다. 한승우 역시 잘 알 것이다. 그리고 난 그들이 아는 것 이상으로 내가 무엇을 휘두를 수 있는지 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외국에 있는 외국인이다. 그와 나의 연결고리는 단지 1년간 함께 지낸 친구라는 것뿐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전용기로 무작정 데려오기?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건 도움이 아니라 되레 어마어마한 피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전화로 그의 부모님을 러시아어로 설득이라도 할 수 있을까? 난 여전히 한국어를 사용할 수 없다. 난 그저 머나먼 타국의 이상한 여자애일 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나도 생각해 봤어. 그런데, 없는 것 같아.”
리처드는 내게 도와 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고, 이미 충분히 생각해 본 것이다.
무력함의 안개가 나와 그 사이에 내려앉는다.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부모의 반대로 하던 공부를 그만두게 되는 일이 세상에 어디 비단 한승우뿐이겠는가. 어쩔 수 없는 케이스 중 하나가 될 뿐이다.
하지만,
난 양손을 꾹 모아 쥐었다.
아무것도 안 하긴 싫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 봐요.”
“……뭔데?”
난 자리에서 일어나서 리처드에게 손을 뻗었다.
나보다 훨씬 크고 센 그가 내 손을 잡는들 일어나기 편해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내민 손 역시 편하게 일어나라는 뜻은 아니었다. 내 손을 잡고 일어서 달란 뜻이다.
리처드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스스로 일어선다.
난 그에게 짧게 말했다.
“따라오세요.”
먼 외국의 외국인에게 할 수 있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우리나라, 우리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조금은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