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29화 (329/1,277)

##  329화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리처드에게 돌려주었다.

리처드는 화면이 꺼진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내가 한승우와 나눈 대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다.

말없이 기다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예. 리처드.”

리처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물어온다.

“뭐래?”

앞뒤를 다 잘라먹은 짤막한 물음이었지만, 난 리처드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도와줄 필요는 없다고 하네요.”

내 욕심으로 무리해서 무언가 하려고 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승우가 결정을 내렸다면 돕고 싶다는 일념으로 물어보았던 권유는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나로서도 굉장히 어려운 각오로 꺼낸 말이었는데, 거절당했음에도 기분이 나쁘기보단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

“그래도 통화하다가 조금 갈피를 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혼자 돈을 모은다길래 그건 반대했어요.”

“뛰쳐나오는 쪽으로 마음을 정해 놓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예. 그래요.”

“타티아나 너도 참…….”

사정은 여의찮고, 도울 방법은 요원하다. 뛰쳐나오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일단 그렇겐 하지 말아 달라 말했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닌데, 정말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상적인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한승우나 리처드가 듣기엔 답답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난 그러한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난 이 애들이 앞으로도 큰 상처 없이 피아노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마음에 남은 상처는 절박한 동기가 되기도 하고 때론 도움이 되지만, 대체로 섬뜩하게 심장을 옥죄이며 아프게 한다.

반드시 아파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진 않는다고, 난 믿는다.

리처드는 그런 내게 무언가 말하려 입을 달싹이다가, 짧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옳겠지.”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래.”

리처드는 나와 한승우가 나눈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들으면서 아무 표정 없이 있었지만, 속으론 정말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난 너처럼 올바르게 부모님을 설득해 보라고 말해 준 적이 없었어. 그냥…… 짜증나는 집에서 뛰쳐나오라고 직접적으로 종용한 적은 있었지만. 그놈이 집을 버린다면 적어도 친구로서 무언가 도울 수 없을까 그런 것만 생각했었지.”

“…….”

“그런데 그건 나쁜 친구나 할 발상이었지. 타티아나 네가 했던 것처럼…… 정말 좋은 친구였다면 부모님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해 줬어야 했어.”

“리처드는 좋은 친구예요.”

“고마워.”

열다섯 살이면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했다.

집에서 나와 버릴 수 있으면 나와 버리는 것이 무엇이 겁나고 무섭냐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난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것이 일종의 유혹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리처드는 좋은 친구였다.

그는 점잖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 녀석이 네 조언을 무시할 것 같진 않아.”

“부모님과 다시 이야기를 할까요?”

“글쎄. 잘 모르겠어. 요 며칠간은 계속 부모님과 이야기가 전혀 안 된다고 답답해하고 거의 체념하고만 있었거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어른, 그것도 권위적인 부모와 이야기를 해 보려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뭘 해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도 다시 이야기해 보려고 노력은 하겠지.”

“그의 부모님도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희망적인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승우가 얼마나 설득력과 진정성을 지닐 수 있을지, 그리고 그의 부모가 얼마나 이해심과 존중을 보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보면 정말 어려운 일로만 보인다.

난 우리 학교를 올려다보았다.

국립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 클래식 음악으로는 독일과 쌍벽을 이루는 러시아에서 최고의 음악가들을 키워 내기 위해 설립된 최고의 음악학교다.

전교생 400명 남짓한 중앙음악학교의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전 세계에서 이 학교에 자식을 보내려는 부모가 얼마나 많을지 미처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런 부모가 있는가 반면, 이 학교의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스카우트를 받아 입학할 수 있었는데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반대를 하는 부모도 있었다.

각자 입장들이 있고 제각각이기 마련이지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무작정 비난하거나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상식적인 생각이 들다가도, 불쑥 부아가 치밀다가 또 가라앉다가 들쑥날쑥한다.

“…….”

그래도 이젠 믿고 기다릴 때였다.

“바람이 차다. 들어가자. 타티아나.”

“예. 리처드.”

리처드의 부름에 난 그를 따라 교내로 들어섰다.

교실로 들어서자 이미 한 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친구들은 반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곧바로 창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엔 올해도 함께 다니게 될 테니 잘 부탁한다고 말했던, 에르네스트가 앉아 있었다.

“…….”

순간적으로 그가 지금 이 교실에 있지 않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난 에르네스트가 시크하게 손을 흔드는 것에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에르네스트.”

“안녕.”

그는 손을 내리고 날 뒤따라오는 리처드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난 언젠가 그에게도 한승우에 대한 일을 말해 주어야겠단 생각을 했지만, 그 이야기를 언제 꺼내야 할진 애매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한승우와 에르네스트는 근래 와서 조금 친해지긴 했어도 처음엔 서로 상당히 분위기가 안 좋았었다.

물론 지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믿지만, 만약 에르네스트가 한승우의 이야기를 듣고 속이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기라도 한다면, 난 굉장히 슬퍼질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교실에 없는 한 사람과 나와 나갔다 온 리처드만 보고 상황을 파악해 낸 한 친구가 있었다.

“승우 한에 대한 이야기였어?”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아나스타샤가 넌지시 물었다.

어차피 다 드러난 일이니 숨기거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꽤 심각한가 봐?”

“다시 못 올……지도 몰라요.”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답할 수 없는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불길한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난 내가 말해 놓고도 섬뜩함을 느꼈다.

“이제야 러시아어 좀 하나 싶었더니…… 허탈하네.”

아나스타샤는 한승우가 말을 하게 된 이후로 그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분명하게 아쉬워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한승우에게 약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혹시…… 무언가 할 거야?”

“……아무것도요.”

아나스타샤는 또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싶어 물어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한승우에게 딱 한 번 물어보고 나서는 직접적으로 무언가 하진 않기로 결정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언가 해서 문제없이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제발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아나스타샤는 미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그녀도 약간 곤란해 보였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살짝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데?”

난 조금 놀랐다. 에르네스트가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분명하게 한승우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는데, 에르네스트는 턱을 짚더니 재차 말했다.

“아니다. 리처드, 네가 나와 봐.”

“뭐?”

“나와 보라고. 이야기 좀 하게.”

“…….”

리처드는 가만히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다가, 따라오라는 듯 등을 돌렸다. 앙숙인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시비를 걸고 싸우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 복도로 나갔다.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인다.

리처드는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는 약간의 걱정을 가지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지금은 모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

간단한 교과목 설명 등으로 첫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서, 난 가장 먼저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두 분은 내가 방학 동안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에 대해 두어 곡 정도 들어 보신 뒤에 칭찬해 주셨다.

더 강렬하고 깊어진 터치에 대한 칭찬은 그간 몇 번 들었던 것이지만 이번엔 구세프 선생님이 혀를 내두르시면서 하신 칭찬이라서 조금 와닿는 바가 컸다.

방학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놀기도 많이 놀았지만,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미친 듯이 연습에 몰두하기도 한 보람이 있었다.

그 후에 레슨은 없었지만 이번 학기엔 무엇을 할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상의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회 일정과 프로그램 등에 상당히 신경이 쓰이시는 듯했다.

선생님들과의 첫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그다음 곧장 스터디룸으로 향했다.

스터디룸엔 저번 학기에 함께 공부했던 아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리처드, 아나톨리, 류보비, 사샤. 이렇게 총 여섯 명이었다.

한 명이 자리에 없긴 했지만 난 미리 빅토르에게 부탁해서 준비했던 선물들을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제외한 네 명에게 전달했다.

모두들 너무나 좋아했다. 류보비가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내게 달려와 안겼다. 사샤도 경쟁적으로 와서 안겼고, 난 두 아이를 품에 안고 꽉 안아 주었다.

중앙음악학교에 내가 남아 있고 싶은 이유들은 이곳에 이렇게나 많이 있었다.

그 후엔 이번 한 학기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의 작은 파티가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 답답한 것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우울해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함께 우울해하기에, 나는 일부러라도 낙천적으로 행동했다.

조금 더 즐거운 이야기들을 하고, 많이 웃었다. 리처드는 아이들에게 잘 치지 않던 장난까지 치기도 했다.

때문에 류보비가 한국인 유학생 오빠는 왜 안 보이냐고 물었을 때, 우린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잠시 문제가 생겨서 못 오고 있지만 아예 못 오는 것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둘러대는 것으로 넘겼다.

난 리처드가 왜 방학 동안 내게 한 마디도 못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첫 날이 지나갔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난 새벽에 일어나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가서 오전엔 수업을 듣고 오후엔 레슨을 받거나 연습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하고, 밤이 되어 어두워지면 일반 교과에 대한 예습과 복습을 하고 책을 조금 읽다가 잠이 들었다.

평상시의 이런 흐름은 거의 깨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있는 학교는 나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강력한 인연들이 날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리처드와 한승우는 연락을 주고받는 듯했다.

나와 전화 통화를 하고 나서도 직접적으로 내게 상담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지, 한승우는 보통 가장 친한 친구인 리처드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것까진 괜찮았다. 한승우는 내가 그에게 왜 약간의 애착과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난 그가 내게 상담을 부탁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승우가 에르네스트와도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이 많이 친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게 했던 이야기보다 더 깊은 이야기들을 할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어쨌든 좋은 일이긴 하니 큰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난 한승우가 돌아오기만 하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나고 일주일쯤 되었을 때, 난 리처드로부터 현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어렵나 본데.”

“……그런가요.”

리처드는 책상에 걸터앉아서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되도록 짜증스럽게 말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였다.

“나도 에르네스트도 둘 다 부모님이랑 한바탕해 본 경험이 있어서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 줬었거든. 각각 국적은 다르지만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지.”

“아, 에르네스트도요?”

“응. 그 자식도 부모님의 반대가 상당했다고 하더라.”

난 에르네스트라면 어려서부터 굉장한 기대 속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성장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상상과 조금 달랐다.

개인적인 이야기에 대해 깊게 묻지 않는 것이 친구들 간에도 예의이긴 했지만, 이렇게 전해 들으니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에르네스트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어 보고 싶다.

리처드는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하다 말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되돌렸다.

“어쨌든, 그렇게 여러 경험들을 종합해서 이래저래 작전을 짜 보기도 하고, 굶으면서 강경 수단을 써 보기도 하고 정말 별짓을 다 해 봤는데…….”

기어이 짜증이 얼굴에 드러나고 만다.

“들은 척도 안 하시나 봐. 유별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조금 심해.”

“…….”

“지치게 하더라.”

리처드와 에르네스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조언을 하고 응원을 했을지 난 안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세 사람은 모두 국적도 다르고, 평소엔 뭉쳐 다니는 일도 별로 없었지만 적어도 피아노 연주자라는 공통점 아래에 뭉쳤을 땐 서로가 서로에게 그 누구보다 강력한 동료이자 지지자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간 이렇다 할 해결 방안이 없는 듯했다. 리처드가 내게 이렇게 답답하다는 듯 말할 정도라면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가 말했다.

“타티아나. 네가 바랐던 상황은 이렇지 않았겠지만…….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예브게니아 선생님에게 들었는데 이젠 시간도 별로 없거든. 그 뒤로도 몇 번이나 학교로 자퇴서는 어떻게 되었냐며 문의가 들어왔다고 해.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렇겠네요. 일주일도 길었어요.”

러시아의 행정 처리는 그리 빠른 편이 아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들쑤신다면 무작정 늦어질 수도 없었다.

결국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를 자퇴시킬 자퇴서에 서명을 해야 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무 진척도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흘러가게 될 것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무서워져서 어깨를 떨었다.

리처드는 날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오늘 내일 중으로 결판을 내 볼 거래.”

“결판이라 하심은……?”

“그 자식 말로는 죽는 한이 있어도 관철시키겠다고 하던데……. 죽으면 끝인데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미친 놈.”

“…….”

그의 험한 소리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드러난 것이었다.

난 그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잘 이해되어서 당장 리처드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엔 위로할 만한 마땅한 말도 없었다.

“…….”

도움이라 할 만한 것도 전혀 못 주고 그러면서도 올바르게 해결을 봐야 한다고 뻔뻔한 조언이나 하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이제 그것도 막바지였다.

난 급격히 쏟아지는 무기력함을 느끼며 날 붙잡고 있던 인연 중 한 명이 아예 이곳에서 사라져 버린 광경을 떠올렸다.

걷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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