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중앙음악학교 피아노과 9학년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는 기숙사의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공허했다.
2인실의 기숙사 방을 홀로 쓰고 있는지라 작은 소리도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
공부를 하자니 심란해서 못 하겠고 게임을 하고 놀자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리처드는 저녁을 먹고 2시간째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만 뒤적이고 있었다. 세상엔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았다. 시간은 잘 갔다.
그렇게 저녁 8시 무렵.
책상 위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스마트폰이 바르르 진동했다. 국제전화였다. 리처드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 리처드.
“야, 어떻게 됐어.”
오늘 끝장을 보겠다고 했었던 한승우였다. 지금 모스크바는 저녁 8시. 그렇다면 한국은 새벽 2시경이다. 결판이 났다면 났을 무렵이긴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리처드에게 한승우는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너무 세게 맞았나 봐. 아파 죽겠다.
“이런 개……. 아니, 맞았어?”
- 어. 그런데 억울하진 않아. 솔직히 내가 좀 세게 말했거든.
그렇게 우울하거나 화가 난 듯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고저 없이 평이하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목소리다.
그런데 리처드는 아주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한승우가 말했다.
- 도저히 좋은 말이 더 안 나오더라.
“…….”
-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잘 해 보려고 했는데……. 오늘이 가장 최악이네. 아버지도, 나도.
불안한 느낌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점심나절에만 하더라도 한승우는 보다 절실하게 말해 보겠다며 다짐하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정면으로 마주 보겠다는 각오와 기대. 타티아나가 그에게 불어넣어 준 용기는 상당히 강력했고, 한승우는 요 일주일간 허락을 얻어 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분노로 화했다가, 다 타고 잿더미만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리처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야. 너희 아버지 영어 좀 잘하시냐?”
- 영어는 잘하시지.
“진짜 내가 거기로 갈까? 같이 설득하면 좀 낫지 않겠냐.”
리처드는 약간 농담조로 그렇게 그간 몇 번 했었던 제안을 다시 툭 던져 보았다.
하지만 한승우의 목소리는 회색빛으로 낮게 깔린다.
- 고마워. 그래도 이젠 됐어.
“됐다니?”
- 그만하려고. 지쳤거든.
“…….”
피아노를 그만두든, 허락을 구하는 일을 그만두든 둘 중 하나였다. 한승우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좋다 나쁘다 말하기보단, 그냥 일이 이렇게 되리란 것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리처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승우의 부모님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간 몇 번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도저히 설득이란 것이 먹혀들 상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승우가 이어 말했다.
- 지금 밖에 나왔어.
“……진짜냐.”
- 어. 그러기로 했었잖아.
“그래도 음…….”
- 준비는 다 되어 있고 말야. 너와 에르네스트가 도와줘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고, 때문에 오늘 일종의 승부를 보려고 준비하면서 한승우는 만약의 사태의 준비도 마쳤다.
재발급받은 여권과, 예약된 비행기 티켓.
설득이 되든 안 되든 한승우는 무조건 한국을 떠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리처드는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여권을 재발급 받는 데엔 사흘이 걸렸고 비행기 티켓 값은 에르네스트가 빌려주었다.
한승우의 준비를 그렇게 도와주면서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친구의 가출을 지원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나쁜 짓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어느 정도 당당함으로 상쇄되긴 했지만, 타티아나가 올곧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후로는 약간의 죄책감이 리처드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한승우 역시 친구들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
- 에르네스트에겐 미안하네. 경비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이 도와주었는데.
“그야 그랬지.”
에르네스트가 왜 갑자기 한승우를 돕겠다고 나선 것인지에 대해 리처드는 여러 가지 드는 생각들이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에르네스트가 돕지 않으면 타티아나가 나설 것이 불 보듯 뻔하니 미리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끼어든 것 같다고 여겼었지만, 며칠간 같이 이야기를 해 보면서 어떻게 그가 생각하고 말하는지 유심히 지켜보니, 꼭 그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한승우가 피아노를 타의로 그만두게 되는 것을 막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건 꽤 의외면서도 에르네스트를 새로이 보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리처드는 일주일 동안 에르네스트와 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 싸운 적이 없었다.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세 명의 음악가 동료들이 갖은 방법을 써서 상황을 극복해 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이렇게 되어 버렸다.
- 솔직히 이만하면 할 만큼 한 것 같아.
“…….”
- 타티아나에겐 미안하네. 내가 덜떨어져서.
“그 애한테 전화는 해 봤어?”
- 아니.
“왜?”
- 혼날 것 같아서.
진짜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았지만 리처드는 더 묻지 않았다.
타티아나 역시, 한승우가 지쳐서 그만두고 러시아로 오고 싶다고 말한다면 겉으론 화를 내고 혼을 낼지도 모르지만 그리 오래 화를 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 애가 얼마나 친구들에게 애정이 많은지, 리처드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리처드는 괜히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멍청한 소리 하네. 그럼 돌아와서 이야기하게?”
- 그러려고.
정말 멍청한 소리 하네.
리처드는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진 못했다.
- 아무튼…… 러시아로 갈 거야. 가서 생각할래.
“…….”
- 여기에 있기 싫어.
한승우가 이를 악무는 소리를 냈다.
- 갈게.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리처드는 기숙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 자식이 일단 여기 오면,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야, 몇 시 비행기인데. 그거나 말해. 공항에 나가 있을 테니까.”
- …….
굳이 그럴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리처드는 마중을 나가 주겠다고 말했다.
한승우는 더 이상 잿더미 같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 고마워.
“됐어.”
좋은 친구란 무엇일까. 리처드는 고민했다.
***
날씨가 흐릿흐릿하다.
난 창밖을 내다보다가 어쩐지 의욕이 뚝 꺾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 이런 적은 잘 없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냥 집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책이나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기분이 우울한지 생각하다가, 난 복도 저편에서 막 걸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다. 두 사람 다 워낙 키가 크고 눈에 띄는 외모라서 멀리서도 발견하기 쉬웠다.
난 혼자 있기 싫어져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디 가시나요, 두 분?”
“타티아나.”
리처드가 날 보더니 우뚝 멈춰 선다. 그러고는 순간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난 살다살다 리처드가 에르네스트의 눈치를 보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조금 신기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와 눈을 마주친 리처드는 다시 날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공항에.”
“……?”
그가 무어라 하기 전에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난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이 간다고 해도 점심시간이니 식당에 가거나 아니면 연습실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공항이라니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난 몇 초 후에 상황을 깨달았다.
“……!”
일주일 사이 저 두 사람의 큰 숙제는 바로 유학생 한승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공항에 간다니, 딱 하나뿐이었다.
난 놀라서 말했다.
“설마 한승우가 왔나요?”
“곧 온다고 해.”
“하지만…….”
일단 한승우가 온다는 말엔 기뻤지만, 난 그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다시 스마트폰을 열어 확인해 보았다. 한승우에겐 메시지 하나 없었다.
일이 잘 풀렸다면 이야기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반대였다.
“설득에 실패했군요…….”
“그런 것 같아.”
“…….”
어떻게든 설득을 잘 해서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길 기원했는데, 결국 한승우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시하고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오리란 생각은 했지만, 막상 닥치니 울적했다.
하지만 그가 이제 러시아에 온다면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저도 가겠어요.”
“……알았어.”
“제 차로 가도록 하죠. 괜찮죠?”
“그래.”
지금까진 멀리 타국의 일이었지만, 러시아에 온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의 범위가 훨씬 넓어질 것이다. 일단 지금 당장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것부터 난 책임지고 돕기로 했다.
오후는 조퇴하겠다고 조퇴서를 제출하고, 아나스타샤에게도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같이 가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일행은 나와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리처드로 4명이 되었다.
세레메티예보 공항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차량으로 약 50분 정도 달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국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쏟아져 들어왔다. 우리 4명은 눈을 크게 뜨고 그중에 한승우가 있는지 찾기로 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난 저쪽 입국심사대에서 걸어오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이라기엔 키도 크고 덩치도 산만 해서 옆의 성인 남성들에게도 안 밀리게 보이지만, 얼굴은 앳되고 순하게 생겼다. 실제로도 순한 그는 평범한 열다섯 살이다.
하지만 지금,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평소의 순수함을 조금 잃어버린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소리를 쳐서 불러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승우는 우릴 발견하고는 반가움을 크게 드러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리처드, 에르네스트,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그리웠다는 듯,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가 미소 짓는다.
“오랜만이야.”
“후, 개자식.”
가장 먼저 리처드가 욕설을 뱉어 내며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탁 잡고 악수를 하더니 짧게 포옹했다. 분명하고 확실한 우정의 표시였다.
그다음 한승우는 에르네스트와도 포옹했다. 에르네스트는 리처드와 함께 그간 한승우를 정말 많이 도와줬다. 심지어 비행기표 등의 경비도 모조리 빌려주었다고 들었다.
에르네스트가 툭 말했다.
“고생했다.”
“미안해. 모두들 많이 도와줬었는데.”
한승우가 에르네스트와 리처드에게 사과했다. 그로서는 잘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날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
난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약간 화가 나는 부분도 있었다. 굉장히 불합리하고 일방적인 감정이지만, 난 지금 한승우를 마냥 기뻐하면서 바라볼 수 없었다.
“미안. 설득하지 못했어. 그래도 한국에 있긴 싫어서……. 왔어.”
“…….”
하지만 못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
난 얼마나 이기적이고 한심한 사람인가. 한승우는 돌아왔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외국인이고, 심지어 지금은 부모님과 자기 나라를 등지고 온 것이었다.
그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순 없었지만 영영 연을 끊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진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런데 단지 내 눈앞에 있다는 것에 기뻐하다니,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난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리 와.”
한승우가 가까이 다가왔고, 난 팔을 뻗어 그와 포옹했다. 키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허리를 끌어안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난 위로와 감사라는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감정을 드러내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이 편해지길 바란다.
아나스타샤도 포옹을 하는 것으로 그렇게 짧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곧바로 학교로 향하기 전에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각각 홍차와 커피 등을 주문하고, 가장 먼저 화두를 연 것은 에르네스트였다.
“학교엔 이야기했어?”
사실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애매했는데, 에르네스트가 사무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분위기가 조금 편해졌다.
한승우가 대답했다.
“내일부터 바로 등교할 거야.”
“일주일 동안 별로 한 건 없어. 따라오기에 어렵진 않을 거야.”
“다행이네 그건.”
한승우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으니 일주일 교과 과정 정도를 따라오는 건 하루 이틀 정도면 될 것이다.
문제는 피아노 연습일 텐데, 방학 동안 한국에서 제대로 피아노를 만지진 못 했을 테니 아마 제대로 실력을 끌어 올리려면 꽤 오래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한승우가 개학 후 학교에 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리처드는 거기에 대해서 조금 아쉬워했다.
“일주일 만에 와서 다행인 건 아니지. 사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 무슨 시간.”
“네 부모님을 설득할 시간.”
리처드의 말에 한승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난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응은 약간 달랐다.
한승우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글쎄. 하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나아지진 않았을 거야. 아버지에겐 나보다 병원이 중요하니까.”
난 내가 모르는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되물었다.
“병원?”
“……타티아나. 몰랐어?”
리처드가 대신 말해 주었다.
“저 자식 집에서 반대하는 이유가 의사로 키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야. 아버지는 병원장이고 어머니도 의사시거든.”
“그랬나요……?”
일반적인 가정집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긴 했지만 딱히 물어본 적도 없고 한승우가 먼저 말해 준 적도 없어서 모르고 있었다.
미리 물어봤어야 했는데, 약간 후회가 된다.
“그래서 반대를…….”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내게 꼭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시곤 했어.”
한승우도 내게 자신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야 하는 게 조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막 나온 커피로 목을 축이고, 그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처음엔 잘 몰랐어. 그리고 한국에선 의사가 굉장히 좋은 직업이기도 하고. 난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내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
“하지만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난 음악을 하는 것이 좋은 인생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란 것을 알아 버렸어.”
난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았다.
특히 한승우처럼 6성부 청음을 한 번에 해내고 그 자리에서 외워서 답안지에 적어 낼 정도로 무시무시한 절대음감과 기억력을 지니고 있는 천재라면, 어려서부터 세상 모든 것이 음악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펼쳐 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열망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사는지 그 목적을 깨닫는 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고민이고 의문이기도 했지만, 세상엔 그것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허락해 주실 줄 알았어. 왜냐면 두 분 모두 내 행복을 바라실 거라 생각했거든.”
한승우가 그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길을 걷고자 했다.
차라리 평범한 집안이었으면 그 엄청난 재능과 열망을 가로막을 방해물이 없었을 것을,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이 만든 도로 위에 올라야 했다.
“꿈같은 소리였지.”
그의 목소리에 차가운 분노가 쌓인다.
착하고 순했던 눈빛엔 진절머리 난다는 듯한 경멸이, 증오가 스며 있었다.
신랄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아버지는 내 삶 따위엔 관심 없어. 결국 아버지에게 있어서 내 가치는 병원을 유지시키는 데에 있을 뿐이니까. 아버지는 나보다 병원이라는 건물이 더 중요한 사람이야.”
이제 그 사람에 대해선 잘 알겠다는 듯 단정 짓는 목소리.
난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우려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싶진 않았다. 난 격렬한 절망과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지쳐 버린 나머지 증오에 합리를 맡겨 버린 열다섯 살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가 낮게 씹어 뱉듯 말했다.
“알고 있었던 것을 확인했을 뿐이야. 그리고 뛰쳐나왔으니 솔직히 이젠 시원하네. 지긋지긋했거든.”
“벗어난 기분이야?”
리처드가 가만히 물어본다. 그의 표정도 그리 좋진 않았다.
한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렇게 되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행?”
“그래.”
의아하다는 듯한 물음에 다시 긍정하며, 이번엔 그가 날 돌아보았다.
모든 것을 뿌리치고 외길을 택한 사람 특유의 섬뜩한 광기가 넘실거린다. 난 피아노에 미쳐야 하는 연주자에겐 그런 면모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끄집어내진 광기는 피아노가 아닌 사람에게 공격적이고, 위험하게 보인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내겐 그럴 자격이 없다.
한승우가 위험한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타티아나. 네겐 고마워.”
“……?”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설득해 보려 했다는 경험이 남았거든, 때문에 별로 후회가 없어.”
“후회가 없다고?”
“그래. 할 만큼 했으니까.”
얼핏 후련하다는 듯 들리지만, 지독하게 차갑고 냉정하다.
한승우는 가출 같은 느낌으로 한국과 집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실망하고 절망한 끝에 독한 결정을 내려 버린 것이다.
“…….”
난 찻잔을 쥔 내 손이 작게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 온다.
“정말 안 해 본 것이 없는 것 같네. 진지하게 이야기도 해 보고 빌어도 보고.”
“다 해 봤지.”
“그리고 아버지는 보통 화를 내거나 협박을 하셨던 것 같아.”
“협박?”
“뭐 이것저것…….”
리처드가 묻자 한승우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지 잠시 말을 죽이다가, 분위기가 심각하게 무거워졌다는 것을 느끼고는 어색함을 지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웃긴 사람인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재미있는 이야기라니.”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 내가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못 치면 손이 멋대로 움직이고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고 그랬거든.”
“뭐 너나 우리는 그런 족속들이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다면 내 손을 부숴 버리면 되겠다면서 망치를 가져오겠다는 거야.”
“……뭐?”
리처드가 얼떨떨하게 말했고, 난 아예 찻잔에서 손을 놓았다. 더 쥐고 있다간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약한 공황이 인다. 요즈음 좀 덜해졌었는데, 한승우가 하는 말의 섬뜩함은 내가 견딜 수 있는 어느 지점을 순식간에 지나쳤다.
이를 꽉 물고, 양손을 모은 채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미처 모르는 사이 한승우가 부모님과의 사이에서 겪었을 일들이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스쳐 지나간다. 우울함을 넘어 공포가 뇌리를 잠식했다.
그만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목소리는 용서 없이 내 귀를 파고든다.
“어이가 없지. 그래서 내가 그랬어. 손이 부서지면 피아노만 못 치는 게 아니라 의사도 당연히 못 하고 장애인이 될 텐데, 그럼 나도 아버지도 모두 손해 아니냐고.”
“…….”
“차라리 그러지 말고 망치로 내 머리를 때리라고 했지. 운 좋게 피아노에 대한 기억만 지워진다면 적어도 아버지 원하는 대로는 될 테니까.”
“미친 놈.”
“다행히 뺨만 맞았어.”
마치 모험담을 이야기하듯 한승우는 그렇게 말하며 웃기까지 했다. 절대 웃을 이야기가 아니었고, 특히 말하는 당사자가 겪은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괴하기까지 느껴지는 일이었지만, 한승우는 잔인하게 조소했다.
난 숨을 못 쉰 지 너무 오래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서 내가 더 했……. 타티아나?”
“…….”
나도 모르는 사이 시야가 흐릿해져 있었다. 내 양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숨을 쉬지도 못해서 흐느끼지도 못하고, 난 소리 없이 입을 앙다물고 눈물만 흘렸다.
어른거리는 시야에 당황한 한승우와 에르네스트, 리처드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들 충격에 빠진 듯했다.
“잠깐만, 울지 마. 제발.”
한승우를 휘어잡고 있던 증오와 분노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고, 언제나 착하고 순수했던 그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승우는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랐는데.
어찌할 도리도 없이 그는 증오로 자신을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손수건을 들고 직접 내 눈가를 닦아 주었고,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도 괜찮냐는 말로 날 달래 주었다. 지독하게 창피했지만, 그보다 훨씬 큰 감정의 격류가 내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왜 또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무분별한 분노. 우울함과 탈력감이 목을 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난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다 싫어지려 한다.
에르네스트가 딱 잘라 말했다.
“그 이야기는 이쯤 하자.”
“……알았어. 미안.”
어쩔 줄 몰라 하는 사과가 이어졌다.
한참 후에야 난 진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