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화
9월 중순을 넘어가면서 낙엽은 거진 다 떨어졌고 날씨는 갈수록 추워졌다. 정말 하루하루 추워진다는 것이 체감이 될 정도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코트를 입어야 할 것 같다.
“…….”
일주일 사이 빠르게 날씨가 변하는 것과 별개로 내 생활엔 그리 큰 변화가 있지 않았다. 평범하게 학교에 와서 공부하고 연습하고 레슨을 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평범한 학교생활도 정말 절실하게 원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다.
“……하아.”
난 창밖으로 보이는 황량해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승우는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학교에 나오기 시작한 지 2주가 되었고 정말 하루하루를 열심히, 치열하게 보내고 있었다.
피아노 외엔 엉망인 나와 달리 한승우는 리처드와 놀러 다니거나 게임을 하는 것도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애였지만 학교로 돌아온 후 그는 한 번도 학교와 기숙사 그리고 내가 빌려준 연습실 외의 다른 곳으로 샌 적이 없었다.
미치려면 피아노에 미치는 것이 좋다는 내 조언은 농담이 아니라 앞으로의 한승우를 위한 분명한 진담이었으나, 막상 그가 이렇게 모든 에너지를 피아노와 학교에 쏟아붓는 것을 보니 뿌듯함보단 짠한 마음이 앞섰다.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격도 크고 건강했던 한승우는 몇 주 사이에 굉장히 수척해져 있었다.
비단 학교생활에 대한 피곤함뿐만 아니라 그는 마음고생까지 함께 하고 있을 테니 더더욱 안쓰럽다.
그리고 무섭다.
“…….”
날이 갈수록 한승우는 웃음이 줄어들고 무표정하게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몇 번인가 집에 전화도 해 봤다는 것 같지만 좋은 이야기가 오간 것 같진 않다.
한승우의 부모님들은 기어이 학교로 오겠다는 입장인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간다.
집을 박차고 나온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한승우는 한층 더 진저리 난다는 듯한 적대감을 표출하곤 했다.
분노와 증오를 넘어서 경멸과 혐오까지 다다른 그 감정들은 내가 마주하기엔 너무나 짙었다.
그리고 그런 한승우를 볼 때 내가 나도 모르게 멈칫거린다는 것은 그도 눈치챈 것 같았다. 때문에 그는 내게 괜한 말을 걸어오거나 하지 않았다.
바보처럼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무언가 힘이 될 말이라도 한 마디 더 해 주어야 하는데, 난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 대신 리처드가 한승우를 외톨이로 두지 않고 봐 주고 있었단 점이었다. 리처드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
우울함이 스멀거린다. 가을을 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많은 것들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 서 있는데, 내가 서 있는 복도 저편에 있는 문이 열렸다.
“안녕히 계세요!”
“하하하, 잘 가라. 잘 가고, 다음에도 열심히 연습해 와야 한다?”
“예! 선생님!”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3학년쯤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막 레슨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그 아이를 레슨한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도 따라 나오셨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제를 보며 나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뒤로 한 여성분이 따라 나오셨다.
그리고 그 여성분이 선생님에게 인사했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 어머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난 저 세 사람의 관계를 이해했다. 학생과 그 학부모, 그리고 지도 선생님임이 분명했다.
이건 중앙음악학교에서 있는 조금 특별한 케이스였다.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고 나면 학부모가 따라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중앙음악학교에선 레슨 시간에 한해 학부모가 같이 레슨실에 참관하여 공책이나 레코더 등으로 지도 선생님의 지도를 기록해서 연습할 수 있게 돕는 경우가 있었다.
학부모가 따라와서 레슨 받는 사제 뒤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지만, 그것이 허용된 중앙음악학교에선 실제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들이 있었다.
조금 특별하긴 하지만 크게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오늘 레슨해 주신 것은 다음 레슨 때까지 꼭 완성해 올 수 있도록 연습시키겠어요. 하아, 그런데 참……. 선생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예. 무엇이든지요.”
“혹시 청음에 대해서 제가 달리 해 줄 수 있는 연습 방법 같은 것이 없을까요?”
“청음 말입니까?”
“예. 저희 아이가 학교에서 청음 숙제가 나오면 너무 힘들어해서요.”
학생의 어머니가 정말 고민이라는 듯 도움을 청했고, 지도 선생님이 거기에 응했다.
“흐음……. 어디 보자, 일단 많이 듣는 것이 최고이긴 합니다만, 노하우가 없지도 않죠.”
“역시 그런가요?”
“예. 음, 좋습니다. 다음 레슨 땐 제가 청음에 대한 레슨도 준비해서 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니 잘 배우면 금방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재능이 많은 아이니까 말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비로소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학생 어머니가 감사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며 껄껄 웃었다.
“그래도 느끼고 계실 겁니다. 하루하루 실력이 부쩍 늘어난다는 것을 말이죠.”
“예. 맞아요. 그것도 분명 선생님의 지도가 훌륭하기 때문이겠지요.”
“하하, 이것 참. 금칠을 해 주시는군요.”
웃음소리와 환담이 오갔다. 난 멀리서 두 분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 대화가 이어지다가, 선생님 쪽에서 먼저 말했다.
“아무튼,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고맙습니다. 선생님.”
짧은 작별 인사가 끝나고 아이와 어머니는 손을 잡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고, 선생님은 다시 레슨실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
다시 복도는 고요해졌다.
난 조금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착 가라앉음을 느꼈다.
지금 내게 어머니가 안 계시고 아버지가 바쁘셔서 저렇게 부모님과 함께 레슨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난 지금 아버지와 오빠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저렇게 희생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노력으로 서포트를 해 주시는 어머님이 계신데 반해 그에 대한 대척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처럼 기를 쓰고 방해하는 분도 계시다는 것이 조금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물론 저마다 가정 상황은 모두 다르니 딱히 불합리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한승우도 나도 저런 서포트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허락만 해 주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
무의미한 기대다.
난 점점 축 처지는 기분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
늘 가는 스터디룸에 도착하자 그곳엔 두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왔어? 타티아나.”
“오늘은 두 분만 계시네요?”
아나스타샤와 리처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 스터디룸은 늘 자율 참석을 모토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정이 있다면 안 나온다고 해도 큰 상관은 없다.
리처드가 태평하게 말했다.
“다른 애들은 연습 있나 보지.”
“넌 연습 안 하니? 리처드.”
“나중에 하지 뭐.”
리처드는 정말 피아노를 전공으로 하는 학생이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드렁하게 대꾸했고 아나스타샤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리처드는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그거 들었어? 한승우 부모님 내일 오기로 했다는 것.”
“……!”
난 미처 몰랐던 정보에 깜짝 놀랐다.
“내일인가요?”
“그렇게 비행기 표를 예약해 두었다고 들었어.”
“아…….”
비행기 표가 예약되었다면 확실한 일이었다.
난 작게 탄식했다.
그간 한승우는 한국으로 전화를 몇 번이나 걸어서 이제 내버려 두라고 사정했다.
친구들 옆에서 전화를 한 것은 아니라서 그것을 직접 옆에서 들어 보진 못했지만, 난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한승우가 얼마나 지금 학교생활을 지키고 싶어 하는지, 부모님이 찾아와서 모든 것을 부숴 버리게 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통하지 않았다. 한승우의 부모님들은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로 와서 기어이 한국으로 그를 데려갈 작정이었다. 얼마나 집요한 의지인지 무서울 정도다.
리처드는 내 얼굴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마중 나갈 건 아니지?”
“…….”
난 그런 리처드에게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어렵네요.”
“어렵지.”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편하게 모셔 왔을 테지만…….”
해외에서 오는 친구의 부모님이다. 내게 소중한 친구들만큼이나 정중한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했다간 당장 한승우가 가장 상처받을 것 같았다.
“어쩐지 환영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같이 느껴질까 봐, 그건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아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괜찮아. 아니, 애초에 네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세상에 누가 친구 부모님이 오신다고 해서 공항에 마중을 나가 주냐?”
“전 리처드의 부모님이 영국에서 오신다면 그렇게 할 건데요?”
“……오, 고마워.”
찰나의 생각도 안 하고 그렇게 말했더니 리처드가 잠시 벙 쪄서 더듬거리더니 고맙다고 말했다.
고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난 정말 진심이었는데 리처드는 내가 장난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조금 장난기가 차올라서 그에게 말했다.
“인사도 드리고 리처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 드려야죠.”
“잠깐만, 뭔가 악의가 있는 것 같은데. 타티아나. 나 너한테 뭐 잘못했어?”
“아뇨? 전혀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무서운데.”
리처드는 내가 농담을 한다는 것을 알고 히죽거리며 받아 주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냉철하고 시니컬한 어투를 쓰지만 내 친구들 중에선 내 농담을 가장 잘 받아 주는 사람 중에 속했다.
괜히 그렇게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리처드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당장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내일 그러면 선생님들하고 상담하게 될 거야. 그리고 결정이 나겠지. 지금도 연습 중인 그 자식이 여기서 자퇴당하는 꼴은 안 봤으면 좋겠는데.”
“불길한 말은 하지 마. 리처드.”
“나도 이런 말 하기 싫어.”
아나스타샤가 눈을 흘기자 리처드가 중얼거리며 말을 맺었다.
그도 불길한 말을 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작정하고 비행기를 타고 정말 이곳까지 오겠다는 부모님은 강적 중에서도 강적으로만 느껴졌다. 말이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잘 안 든다.
잠시간의 정적이 우리 사이에 있는 불길함을 전달하는 와중, 리처드가 짜증을 걷어 내듯 툭 말했다.
“아, 내일 진짜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찾아가서 한 번 볼까.”
“보신다고요?”
“인사나 하지 뭐. 영어가 얼마나 통할진 모르겠지만. 그 집 아저씨 영어를 좀 하신다니까.”
리처드는 한승우의 부모님과 만날 생각인 것 같았다.
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야기하실 건가요?”
“글쎄.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순간 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예브게니아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이 상담에 나설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난 내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실제로 친구로서 끼어든다고 해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가슴 속 답답함을 품고 있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리처드를 보고 나서야, 내가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겁먹고 움츠러들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황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한승우의 증오 어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던 내가 이성을 차리고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
하지만 내가 그의 친구라면, 가만히 있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한승우에게 제대로 위로를 해 주지도 못하고, 잘했다고도 잘못했다고도 하지 못했다.
금전적인 문제는 에르네스트가 대신 도와주었고, 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러워지면서, 동시에 오기가 생겼다.
늘 조심하고 신중하게 내 삶과 다른 모든 것들을 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움츠러들고 스스로 목을 조르는 것은 그리 옳은 일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리처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친구라고 하면서 인사했는데 적어도 침을 뱉진 않을 것 아냐.”
“나쁜 친구들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죠?”
“내가 인상이 그렇게 안 좋아?”
“아뇨? 굳이 말씀드리자면 점잖고 신뢰할 수 있는 분처럼 보이죠.”
“가, 갑자기 웬 칭찬이야? 그냥 욕을 하지. 아니, 뭐 나쁘다고 생각하면……. 어?”
또 농담처럼 받아치던 리처드가 웃다가 말고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타티아나. 너 친구들이라고 했어 방금?”
“예.”
난 마음속으로 내렸던 결정을 입 밖으로 내었다.
“리처드가 가신다면 저도 따라가 보려고요.”
“…….”
“안 되나요?”
“아니? 당연히 괜찮지. 사실 나보단 타티아나 네가 훨씬 도움이 될걸. 그쪽 부모님들이 보시기에도 말야.”
“……?”
“적어도 넌 노는 애들처럼 보이진 않거든.”
“음……. 칭찬을 되돌려 주시는 건가요?
“어쨌든, 조금 의외네.”
“의외……요?”
난 리처드가 그렇게 말할 줄은 미처 몰라서 약간 당황했다.
리처드는 꽤나 고민하더니 지금은 솔직히 말해야 될 때라는 듯 천천히 말했다.
“내가 느끼기엔 네가 요즘 그 자식을 조금 피하는 것 같았는데.”
“예? 아, 그…….”
“오해는 하지 마. 네가 그 자식을 쫓아내고 싶어 한다거나 그렇게 네 진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단지……. 조금 무서워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
“못 들은 걸로 해 줘. 미안.”
점점 어두워지는 한승우의 모습을 내가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것은 맞다.
한승우가 그걸 느끼고 알아서 나와 거리를 두어 줄 정도였으니 옆에 있던 리처드가 못 봤을 리가 없었다.
하나부터 끝까지 다 정답이었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다. 아니어야 했다.
“오해였다고 말씀드릴게요.”
“응. 알았어.”
리처드는 이러니저러니 따지지 않고 내 말에 수긍해 주었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리처드와 함께 하기로 한 나는 아나스타샤에게도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도 가 줄게. 말이 통하든 안 통하든 잘 모르겠지만 리처드 말마따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그녀는 흔쾌히 승낙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솔직히 답답해서 한마디 해 주고 싶기도 하고.”
“그, 그거 큰일 나요. 아나스타샤. 정말로요.”
“뭐 어때. 진짜 수틀리면 한마디 할 거야. 러시아어로 하면 모르지 않을까?”
“어감으로 알 수 있잖아요…….”
“웃으면서 하지 뭐. 자신 있어.”
“아나스타샤…….”
그녀도 은근히 답답했던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많았고, 원래 직설적인 성격이지만 요 근래 성정을 차분히 죽이고 눌러 참는 모습이 자주 보이던 아나스타샤는 만약 이번에 친구로서 할 말이 있다면 참지 않겠다는 듯했다.
난 제발 그런 일이 없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
여느 때와 같은 금요일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 식당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교내 스피커에서 학생을 호출하는 방송이 있었다.
“…….”
난 교내 방송을 듣자마자 뒤를 돌아보았고, 한승우는 이미 각오했다는 듯 이글이글 불길이 솟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간 등은 굽었지만 어깨는 완전히 펴져 있다. 그야말로 전투를 앞둔 병사의 모습이었다.
그와 짧게 눈이 마주쳤으나, 나도 그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과 결착을 내기 위해 가는 그에게 잘 싸우라고 격려를 하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난 말없이 한승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곧 등을 돌려 반에서 나갔다.
“…….”
스스로가 정말 끔찍한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리처드와 아나스타샤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도 가 볼까.”
“그래요.”
이 걱정되는 마음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보일 수 있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난 리처드, 아나스타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상담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예브게니아 선생님의 레슨실이었다.
어쩌면 교무실에서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원래 예로부터 지도 선생님이 상담을 할 땐 레슨실에서 한다고 한다.
“…….”
레슨실은 그리 멀지 않았다. 레슨실 근처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어쩌지.”
“그냥 들어갈까?”
“……어제 예브게니아 선생님에게 말씀을 드렸어야 했던 게 아닐까요.”
우린 만약 친구로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하겠다는 심정으로 여기에 섰지만, 막상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을 장소에 무턱대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니 섣부르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상당히 애매했다. 일단 우리는 레슨실 바로 앞까지 가 보기로 했다.
“……들리시나요?”
“그래. 이야기 중이네.”
가까이 갔더니 레슨실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하필 방음 처리가 잘 되어 있는 레슨실이라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정확히 알 순 없고 그저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 정도만 들리는 수준이었다.
이래서야 언제 들어서야 할지 타이밍을 정하기도 어렵다.
리처드와 아나스타샤가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역시 여기 있었네.”
“!?”
속닥거리던 우리는 갑자기 옆에서 부르는 말에 화들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에르네스트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지?”
그는 예브게니아 선생님의 레슨실을 손짓하더니 그 앞에 모여 있는 우릴 다시 보고는,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들어가지 그래.”
“실수하게 될까 싶어서요…….”
한 번에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는데, 정말 고민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들어가긴 들어가야 한다. 난 한 명 늘어난 친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에르네스트도 걱정이 되어서 오신 건가요?”
“걱정?”
에르네스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묻더니,
곧 날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이 된 건 맞아.”
그렇게 우리는 네 명이 되었다.
우리는 레슨실 앞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짧게 회의했다.
“레슨실을 빌리려고 온 것처럼 말해 볼까?”
“연습실도 아니고 레슨실을?”
“그렇네. 말이 안 되네.”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는 어떻게 저 상담 중인 곳에 쳐들어갈지 각자 특이한 아이디어 콘테스트라도 하듯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어떤 것도 그리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결국 내가 말했다.
“그냥 노크하고 들어가도록 해요. 그게 가장 나을 것 같네요. 단순하고 솔직하고.”
“……그래.”
모두가 동의했고, 리처드가 문을 노크하기로 했다. 우리 중에 대표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승우와 가장 친한 그가 앞장서고 싶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막 노크를 하려는 찰나,
「허흠…….」
묵직한 헛기침이 리처드의 행동을 제지했다. 우리 네 명 중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 헛기침을 낸 것은 풍채 좋으신 할아버지였다. 연세는 일흔 정도 되어 보이시는데, 깔끔하고 댄디한 스타일로 멋쟁이라는 말을 꽤나 많이 들으셨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인이 아니었다. 서양인조차 아니다.
할아버지가 우릴 천천히 돌아보시더니 말했다.
「그 안에 볼일이 있니?」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