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34화 (334/1,277)

##  334화

날 제외한 세 명은 낯선 할아버지와 낯선 언어에 바짝 긴장했다.

「그 안에 볼일이 있니?」

나 혼자만 크게 경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냥 레슨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릴 보고 궁금해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난 한국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내색하지 않고 아나스타샤와 가까이 붙었다.

통역을 해 줄 수 있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내겐 그런 편함보다 훨씬 중요하고 무겁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머뭇거리는 우리 네 명을 보며 할아버지가 약간 난감한 듯 어깨를 으쓱하셨다.

「흠, 생각해 보니 외부인은 나로군.」

할아버지는 실수했다는 듯 말씀하시면서 우리 한 명 한 명을 다시 돌아보았다. 통하지 않는 말로 대뜸 말을 걸었으니 우리가 당황해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이해하시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분 누군지 아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누군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이야?”

“다들 그럴걸요.”

나처럼 상황을 조금 더 잘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물론이고 에르네스트와 리처드도 앞에 계신 할아버지가 한승우의 할아버지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인지했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야 확정지을 순 없다.

“뭐라고 하시는 거지.”

“…….”

리처드는 한승우와 있으면서 한국어에 조금 익숙해지긴 했지만 알아듣기까지 하진 못했다.

그가 대충 말했다.

“일단 우리가 싫다고 욕을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아니에요.”

“그렇지?”

지금 그냥 할아버지가 취하는 태도와 뉘앙스만 보더라도 우리에게 호의적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만 조금 난처해하고 계실 뿐이다.

「어쩐다. 러시아 아이들은 영어를 잘 배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한국어로 중얼거리는 말을 나 혼자 캐치해 냈다.

상황이 답답해져도 앞에 나서서 무언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살짝 대화가 될 만한 방향으로 이끄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리처드.”

“응.”

“영어로 한번 여쭈어 보세요.”

“영어로?”

“예. 대화가 될지도 몰라요.”

러시아인들이 영어에 조금 약하다는 것을 언급하셨다면, 반대로 영어가 통한다면 대화가 가능하다는 기대를 하신 것이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리처드에게 부탁하자 그가 영어로 말했다.

{영어를 하십니까? 어르신.}

{오, 영어!}

할아버지는 그래도 러시아어보단 익숙한 영어를 듣고 반색하셨다.

{난 할아버지다.}

“…….”

우리는 조금 얼이 빠졌다.

기초적인 영어를 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유창하게 하시진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얕은 영어 실력이나마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것이 굉장히 멋졌다.

리처드가 웃으며 말했다.

{한승우의 할아버지 되십니까?}

{옳지. 옳지.}

우리와 드디어 말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 기분 좋은지 할아버지는 손짓으로 제스처를 섞어 가며 커뮤니케이션을 이어 나갔다.

대화 전면에 나선 리처드는 조금 답답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한승우를 상대해 본 전력이 있어서인지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짧게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왜 찾아왔는지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할아버지가 영어로 말씀하셨다.

{음……. 이 방. 들어간다?}

{예. 친구들과 들어가도 될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들어가지. 들어가지.}

굉장히 편하게 말씀하시지만 우린 그렇게 편한 마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우릴 다시 슥 바라보시더니 한국어를 하시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승우의 친구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한 번은 봐야 생각이 고쳐지지 않겠나.」

생각이 고쳐져야 한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한승우의 할아버지는 손자가 하고자 하는 대로 지원하고 싶어 하시는 듯했다.

이번엔 한승우나 그의 부모님의 편을 드는 일 없이 침묵하고 계셨다고 들었는데, 속사정을 자세히 알 순 없어도 아들과 손자 사이에서 상당히 고민 중이신 것 같았다.

이해하지 못한 리처드가 우리에게 물었다.

“들어가도 된다고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환영해 주시는 것 같지 않나요?”

난 적당히 선을 지키며 말했다. 다들 비슷하게 느낀 것 같았다.

리처드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들어가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모두들 준비되었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

구세프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어졌다.

“…….”

한승우의 지도 선생인 예브게니아의 레슨실에서 이루어진 학부모 상담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구세프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구세프에게 이런 상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앙음악학교에서 선생으로 수십 년간 있었던 구세프는 최소한 그 햇수만큼 이런 상담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러시아는 클래식 강국이었고 때문에 자식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부모들은 대부분 자랑스러워하며 자식들을 학교에 맡기곤 했지만, 그 재능을 저주로 여기는 부모들도 없잖아 있었다.

반짝 피어나려던 재능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면 금방 빛을 잃곤 한다.

구세프는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그러한 재능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부모들을 설득한 경험이 많았다.

하지만 수십 년간 그렇게 많은 상담들을 국적불문으로 해 오면서도 이렇게 답답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구세프는 한국인 부모를 상대해 본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참 좋은 공부 한다고 탄식을 발했다.

구세프는 앞을 바라보았다. 예브게니아의 제자 한승우의 아버지인 한성회. 그리고 어머니인 최연희가 차분한 표정으로 홍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한국에서 굉장한 재력과 명성을 지닌 의사라고 들었다. 그 말마따나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부모처럼 보이진 않았다. 고급스러운 옷과 장신구가 눈에 확 띈다.

어느 정도 기반을 가지고 있는 집안들이 으레 그렇듯, 이 부모들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기대가 많은 듯했다. 설득하기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예브게니아와 한승우의 의지가 확고한데도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듯한 태도엔 구세프가 울분이 치솟을 정도였다.

살다살다 이렇게 꽉 막힌 부모들은 처음이었다.

구세프는 결국 근질거리는 입에 담배를 무는 대신 독설을 토해 냈다.

“아버님. 그렇게 미래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왜 현재는 전혀 보지 못하시는지 도통 모르겠군요.”

어떤 반응이라도 끌어내려면 결국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구세프의 말을 동시통역사가 한국어로 전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서도 한승우의 아버지 한성회는 이렇다 할 표정 변화가 없었다.

대신 옆에 있는 한승우의 어머니 최연희는 약간 전전긍긍하는 표정이었다.

구세프는 저 어머니 쪽은 지금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어지간해선 아들인 한승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고, 부모자식 간에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빠지게 만들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한성회는 달랐다. 아들과 끝장을 보려는 태도였다.

구세프는 이야기를 어떻게 더 해야 하나 생각하며 날카롭게 한성회를 바라보았다.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

레슨실의 문이 열렸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거기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나갔던 한승우의 할아버지 한대철 외에 4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리처드였다.

구세프는 살짝 인상을 썼다. 지금 상황에 저 애들이 친구로서 무엇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구세프가 느끼기에 지금 친구들이 들어오는 건 시한폭탄을 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냐, 너희들은. 당장 나…….”

“구세프.”

나가라고 하려는 구세프의 말을 예브게니아가 가로막았다. 구세프가 잘 생각하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예브게니아는 곧게 구세프를 바라보았다.

“…….”

예브게니아의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을 보면서 구세프는 입을 다물었다. 이성은 저 애들을 내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예브게니아의 무언의 설득을 무턱대고 거스르긴 힘들었다.

결국 구세프도 고개를 끄덕였고, 한승우의 친구로서 4명의 학생들은 상담에 함께하게 되었다.

상담이라기엔 상당히 살벌하게 진행되었던 분위기는 갑자기 약간 어색해졌다. 그때 할아버지인 한대철이 껄껄 웃으며 먼저 화두를 열었다.

「승우의 러시아 친구들이라고 하더구나. 어멈아.」

「어머, 세상에.」

먼저 감탄사를 토해 낸 것은 최연희였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연신 감탄하며 4명의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구세프는 저 애들을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큰 힘이 됨을 느꼈다.

에르네스트도 아나스타샤도, 그리고 리처드도 아직 열다섯 살로 어린 나이였지만, 모두 수천 명의 관객들 앞에 서서도 문제없이 당당할 수 있도록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었다.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확연하게 눈에 띄는 타티아나는 작년에 편입해 왔을 때부터 다른 학생들과는 격을 달리했다. 베르체노프가에서 대체 무슨 교육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타티아나가 지닌 특유의 분위기는 학생들이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승우의 어머니 최연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한승우에게 물었다.

「그…… 어떻게 인사해야 하니? 스파시바?」

「……즈드랏스뜨부이쩨라고 하시면 돼요.」

「즈드…… 뭐라고 했니?」

한승우는 방금 전까지 대립하고 있던 어머니가 호들갑스럽게 물어 오는 것에 대해 조금 어이없어 하는 것 같긴 했지만, 낯선 러시아 발음에 당황해하는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가르쳐 주어도 러시아어를 처음 듣는 사람이 바로 따라 하긴 어렵다.

그때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합니다.”

“…….”

타티아나가 한 걸음 나와서 우아하게 인사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기습적으로 선수를 쳤다고도 할 수 있었다.

조금 어수선해졌던 분위기는 그 인사말 한마디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최연희는 물론이고 일부러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듯 외면하던 한성회조차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러시아어였지만 언어와 상관없이 그것이 인사와 자기소개라는 것 정도는 확실하게 전해졌다. 동시통역사는 통역을 할 생각도 않고 입을 다물었다.

타고난 품위와 격조 높은 태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타티아나를 기다렸다.

타티아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한승우의 친우로서 이 자리에 섰답니다. 그의 부모님 되시나요?”

이번엔 정신을 차린 통역사가 그 말을 전해 주었고, 최연희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 ‘최연희라고 합니다’는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한국어로 하세요…….」

어차피 통역이 있으니 한국어로 해도 상관없었다. 한승우가 중얼거렸지만 최연희는 꼭 러시아어로 인사를 하고 싶다며 러시아 인사말을 그 자리에서 배워서 타티아나에게 인사했다.

타티아나는 생긋 웃으며 작게 묵례했다.

구세프는 기가 막혀 웃음을 흘렸다. 타티아나는 단지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완벽하게 좌중과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저 애들이 무엇을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첫인상이 이렇게 괜찮다면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기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구세프는 약간은 자신의 학생들을 믿고 싶기도 했다.

최연희는 지금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잊었는지 아들에게 물었다.

「승우야. 저 아이는 누구니? 친구니?」

「친구죠.」

「세상에…….」

그 대답만으로도 이미 드라마를 서너 편은 쓰고 있다는 것이 눈에 훤하게 보일 정도였다. 남녀 간에 친구라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세상 모든 것을 얼마나 쉽게 연애만능주의로 풀어 나가는지 한승우는 익히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드라마의 광팬이기도 했다.

한승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인진 알겠지만 그는 타티아나와 친구 이상은 바란 적도 없었다.

「어머니. 지금 그런 말씀 하실 때 아니잖아요.」

「그래도. 인사는 해도 되잖니?」

「…….」

상황이 어떻든 타티아나가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곧이어 에르네스트와 리처드, 아나스타샤도 인사를 마쳤다. 모두 한 치의 흠잡을 곳도 없이 완벽했다.

할아버지 한대철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착한 애들 같지 않느냐? 본데 있어 보이고.」

「그러게 말이에요.」

「요 밖에서 모여선 머리를 맞대고 있더구나.」

「밖에서요?」

「친구들이라 했으니 궁금했던 모양이지. 승우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

한대철은 기특하다는 듯 네 명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고, 최연희는 더더욱 마음이 약해진 듯 한층 누그러진 눈빛을 했다.

어머니 쪽은 충분히 시간을 들여 설득하면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다. 구세프는 확신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쪽도 부모 편에 서서 여기에 오긴 했지만, 잘 보면 손자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아들보단 손자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해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남은 장애물은 단 한 명.

아버지 한성회였다.

「…….」

하지만 한성회의 얼굴은 마치 거대한 빙산처럼 보였다. 타티아나와 친구들의 힘으로 분위기를 우호적으로 끌어오긴 했지만, 저 완고한 아버지를 잠깐 흔드는 것에 불과했다.

한승우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지.」

「…….」

「다시 말씀드릴게요. 전 돌아갈 수 없어요.」

한승우의 한국어는 러시아어와 목소리와 어투가 완전히 달랐다. 익숙지 않은 러시아어와 성조로 말하는 목소리는 약간 둔해 보이고 아이 같아 보이는 느낌이 많았지만, 그의 한국어는 정말 점잖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저기 제 친구들 중 리처드와 에르네스트는 철저히 자신의 실력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쟁취한 친구들이에요. 정말 놀랍고, 또 제가 존경하는 친구들이죠.」

한승우는 뒤를 슬쩍 돌아보는 것으로 친구들과 눈을 마주치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한성회와 한승우. 두 부자는 서로 공격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나운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그 진지함은 무의미했다.

이 두 사람은 이미 충분히 대립했었고, 지금 한승우가 러시아로 뛰쳐나온 것을 한성회가 직접 끝을 보겠다며 따라온 것으로 최악에 닿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승우가 음울하게 말했다.

「알아요, 무슨 말씀 하실지. 저 애들과 제가 같냐고 말씀하시고 싶으시겠죠. 답답하네요. 제가 세상을 잘 모르면서 짧은 치기로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전부터 계속 말씀하시곤 했지만,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에 대해선 제가 더 잘 알아요. 그걸 부정하시면서 절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

「전 저 애들과 동등하게 서고 싶어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한승우가 다시 말했다.

「아버지.」

「그래.」

「이렇게 말씀드려도 소용없나요.」

침묵이 있었다.

한성회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승우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지치네요. 정말.」

「내가 더 지치는구나.」

「……아버지가 힘드실 것이 뭐가 있죠? 제가 말을 안 들어서? 그것 참 쉽고 편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말이긴 하겠지만, 제가 무슨 마약이라도 했나요? 아니잖아요. 그저 단순히 절 마음대로 못 휘둘러서 힘들다고 말씀하실 거면 그만두세요.」

차갑고 냉정하게 시작했던 말은 말과 문장을 더해 가면서 열기를 올렸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호적에서 파셔도 돼요.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제발 부탁이니까.」

「승우야…….」

최연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한승우를 불렀다. 한승우 역시 순간 마음이 약해지는지 날카롭던 눈빛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말을 거두진 않았다.

구세프는 한승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순 없었지만 지금 그가 정말 잔인할 정도로 확고하게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사실 보통 부모들은 자식을 이기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한성회는 그렇지 않았다.

「친구들이 왔다고 기세등등해졌구나, 한승우.」

그간 잠자코 있었지만, 사실 이 모든 갈등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남자가 지독할 정도로 모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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