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순간 레슨실의 공기가 바짝 얼어붙었다.
“…….”
모두의 시선이 한승우의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나 역시 뒤편에서 가만히 서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한승우와 참 많이 닮았다. 나이는 50세쯤 되어 보이시는데 한승우가 나이를 먹는다면 꼭 저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순수하고 낭만적인 면모가 있는 한승우와 달리, 지적인 아집과 깐깐함으로 그려 놓은 듯한 눈과 이마에선 강인한 성격이 엿보인다.
빗어 넘긴 머리와 안경은 마치 의사의 전형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상당히 큰 병원의 병원장이시라 들었는데, 그만한 위엄을 지니고 계셨다.
그 한승우의 아버지가 의자에 바로 앉으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네 친구들과 동등해지고 싶다고 했나?」
「……예.」
「그것 참 소박한 마음가짐이군.」
약간의 비웃음. 한승우의 태도가 사나워진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네가 피아노가 아닌 의대를 지향한다면 훨씬 쉽게 동등, 아니 그 위에 설 수 있다.」
그러고는 눈만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말이다.」
「…….」
한승우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동시통역사가 난감해하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된 상담을 위해선 저 부모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선생님들도 모두 전해 들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해야 하지만, 그 말은 굉장히 도발적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약간 갈등하던 동시통역사는 결국 우리 쪽엔 잘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구세프 선생님과 예브게니아 선생님 쪽으로만 빠르게 전달했다.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도 끔찍하게 일그러진다.
통역 없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나는 한승우의 아버지의 고압적인 태도에 기가 질렸다. 권위와 능력을 지닌 사람 특유의 독선이 숨을 막히게 한다.
「네가 그렇게나 존경하는 러시아 친구들의 위에 서 보는 것은 어떠냐? 사내자식이 그 정도 포부도 없는 것이야?」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한승우는 정말 화가 났지만, 이 자리에서 고함을 지르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간신히 참아 내는 듯했다.
그가 어금니에 힘이 들어간 어투로 말했다.
「아버지. 우위라는 건 그렇게 정해지는 것이 아니죠.」
「아니라고? 네가 대체 뭘 알고 그런 말을 하지?」
「당연히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한승우는 더 흥분하지 않고 말했다.
「의대라는 곳을 아무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간다 한들 6년간 잘 할 수 있을지 장담도 못 해요.」
「공부로는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서 피아노에 한해선 그리도 자신이 넘치고?」
「실제로 입학해 있잖아요?」
계속되는 공격에도 한승우는 차분하게 현실을 짚어 냈다. 그제야 한승우의 아버지가 조용해졌다.
그 말대로였다. 한승우가 지금부터 공부를 해서 한국의 의대에 갈 수 있을진 아무도 모른다. 물론 그는 머리도 좋고 성실하므로 의지가 있다면 잘 해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지만, 이미 들어와 있는 이 음악학교의 수준을 본다면 이후에 한국의 의대보단 음악원으로 가는 쪽이 훨씬 현실적으로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한승우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지 예브게니아 선생님을 바라보고는 이어 말했다.
「제가 판단하기엔 그 듣기 좋은 미래에 대한 안정성만을 놓고 보더라도 제가 피아노를 계속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나요.」
「그건 시야가 좁은 네가 짧은 현재만을 보고 할 수 있는 소리에 불과하지.」
하지만 한승우의 아버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하게 한승우를 시야가 좁은 사람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네가 본 것보다 훨씬 길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봐 온 내가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
그러고는 홍차로 목을 축이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 그간 악기 등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병원을 찾은 것도 많이 봐 왔고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안다. 의사인 내 눈으로 보기에 악기 연주자들은 기본적으로 스포츠 선수와 비슷하다.」
어떠한 규칙 안에서 재능과 노력으로 일구어 낸 실력으로 다른 사람과 극히 미세한 차이를 두고 다툰다는 점에선 비슷할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예술과 스포츠가 같을 순 없지만 난 저런 견해도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승우의 아버지가 한 마디 더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취약하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동시통역사가 뒤편의 우리에게 들리지 않도록 선생님들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고, 구세프 선생님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평소 선생님의 성격으로 보자면 지금 발끈하신 것 같았다. 당장 고함을 안 치시는 것이 놀라웠다.
대신 한승우가 신랄하게 아버지의 말에 반박했다.
「아버지가 뭘 모르시는군요. 일단 스포츠 선수들과 비슷하다고 보신 것부터 잘못 보셨고요, 우리는 강해요.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대체 어딜 봐서? 손가락 한 마디만 부상을 입어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게 피아니스트 아닌가?」
「아버지와 제발 이 지겨운 논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 제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으시죠?」
「네가 나와 부자간 연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피아노에 모든 것을 바치고 싶어 하는 것이, 강하다고 말하는 것이냐?」
「…….」
「멍청한 소리도 적당히 해라.」
어느 한 가지에 목숨을 거는 행위를 강인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승우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듯했다. 난 저분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타당한 논리가 갖춰져 있을 것 같다고 직감했다.
한승우의 아버지가 말했다.
「스포츠 선수들이 부상을 입고 재활에 실패하여 비참해지는 일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악기 연주자들의 경우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비참해지는 일이 많다. 일례로 작년엔 큰 사건이 있기도 했었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에서 경고를 발한다. 난 이 자리에서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우리 병원 옆의 정형외과로 유명한 병원에 한 피아니스트가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적이 있었다. 한국 최고의 수부사지외과 전문의들이 달라붙었고,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는 수준 높은 수술로 손을 재건해 냈다.」
「…….」
「정교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긴 힘들겠지만 재활을 잘 하면 일상생활은 할 수 있게 될 수 있었겠지.」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등줄기로 싸늘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한승우의 아버지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런데 수술을 마친 당일 날, 그 피아니스트는 자신에게 피아노가 없다면 살 이유가 없다는 것처럼 자살해 버렸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아들에게 그 진로를 걷던 다른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잔혹하고 지독하게 보였다.
그리고 난 그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끔찍한 이야기가 퍼져 나가 이 한승우의 아버지에게도 전해졌고, 지금 이 순간 한승우를 공격하게 되는 무기가 되었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은 얽혀 있다고들 하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우울한 정도가 아니라 끔찍한 기분으로 가까스로 서 있는데, 한승우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잔인하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야구선수나 축구선수 중에서도 부상으로 은퇴하고 비관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일구어 보려고 노력하다가 좌절하여 그렇게 되는 경우다. 그런데 수술 당일 날 그런 선택을 하다니, 그건 내게도 그리고 동료 의사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지. 왜 취약하다는 건지 이해했느냐?」
몸을 사용하여 어느 한 분야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사람들이 강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극도로 취약하기도 하다는 이야기는 쉽게 인정하기 싫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다.
난 창백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몸에 힘이 빠져서 쓰러질 것 같았다. 지금 그럴 순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았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나뿐만 아니라 동시통역사도 다시 당황시켰고, 때문에 구세프 선생님이 닦달을 하고 나서야 통역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조금 커서 우리에게도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움찔하다가, 매섭게 눈을 치켜뜬다. 한승우의 아버지의 배려 없음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한마디 할지도 몰라서 간신히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내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는지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썼다. 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잡았다.
아나스타샤를 진정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녀의 온기에 나 역시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이가 없네요.」
한승우는 이런 언쟁은 익숙하다는 듯 싸늘하게 말했다. 자살이라는 섬뜩한 어휘에도 그리 큰 감흥이 없는 듯하다.
「지금 그런 특수한 한 예시로 무슨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전 의사를 지망하다가 좌절한 사람의 이야기들을 해 볼까요?」
「취약하다는 말을 이해조차 못 하는군.」
「당연히 이해가 안 가죠. 전 그렇지 않으니까요.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런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시면 곤란하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피아노를 못 치면 정신병에 걸려 자살할 것 같다고 했던 것은 어디의 누구였지?」
난 움찔했다.
한승우가 자살이라는 단어에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가 먼저 이전에 했었던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한승우의 아버지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듯했다.
변명이 뒤따랐다.
「그건…… 그냥 언성을 높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어요.」
「자기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도 진심은 섞이지. 그리고 그때 네가 뺨을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집을 뛰쳐나와 독단에 가득 찬 결정을 내렸던 것도 넌 네가 강해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아.」
「독단? 지금 독단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세요? 아버지가?」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난 의사다.」
「그래서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염두에 둬라.」
한승우가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승우의 아버지는 한 번도 져 줄 생각이 없었다. 철두철미하게 아버지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태도는 한승우가 집요하게 굴면 굴수록 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 엉겁결이든 어쨌든 자살이란 단어를 꺼낸 것은 정말 나쁜 일이었고, 그건 확실하게 한승우를 압박했다.
아들에게도 의사로서의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비난하고 싶었다. 해 주는 예시나 단어 선택이 하나같이 다 상처가 되고 가슴에 박힐 것들이었다.
하지만 난 한승우의 아버지가 아무 논리 없이 무조건적으로 큰소리만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독하지만, 악독하다고 할 순 없었다.
그냥 꽉 막혀서 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어른이었다면 마음속으로 욕이라도 실컷 했을 텐데, 난 대체 저 아버지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한승우 역시 그런 생각은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간의 대화를 떠올리며 우회하여 아버지를 공격할 방법을 찾아낸다.
「진짜 어이가 없네요. 빌어먹을, 그래서 그렇게 손이 망가져서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도 제 손을 망치로 치겠단 말을 했어요?」
「아직 초기일 테니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거 아시죠? 기어이 절 정신병자로 몰아가시네요? 여기 선생님들도, 제 친구들도?」
「비약하지 마라. 난 저 사람들도 모두 극단적일 거라 생각진 않으니까. 단지 네가 점점 극단적으로 나갈수록 위험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지금처럼 말이지.」
아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아버지로 몰아 공격하려던 한승우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상황은 점점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승우의 아버지 옆에 앉아 계신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난 두 사람을 보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치열하고 잔인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끔찍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을 가지고 서로 예의를 갖추고 조곤조곤 이야기 하여 대타협을 이뤄 내자는 것도 멍청하고 이상적인 망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책이 없다.
난 심적으로 굉장히 몰린 상태에서 간신히 숨을 쉬며 상황을 지켜보았고, 한승우의 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미 충분히 했던 이야기를 왜 또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들이 벌써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승우의 아버지는 앞으로도 몇 번이고 할 작정이었다.
「피아노를 하지 말라곤 하지 않았다. 다만 피아노를 네 모든 것으로 삼지 마라, 한승우. 악기 연주 같은 건 취미로 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까.」
악기 연주에 미쳐 있는 사람들뿐인 이곳에서 툭 던져진 그 말은, 지금 클래식 연주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얼마나 큰 인식의 차이가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