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타티아나의 정중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했다.
“하셨던 말씀을 모두 전해 듣진 못했지만 저희가 스포츠 선수들과 비슷한 고위험군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어요. 그런가요?”
「의사로서의 의견입니다.」
한성회는 타티아나가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아서 그렇게만 답했다.
과연 어떤 식으로 반론할지 생각했다. 말도 안 된다고 답할 확률이 높았다. 피아노 건반을 치는 일이 어떻게 밖에서 격렬하게 뛰는 스포츠와 같은 고위험군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반론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성회는 거기에 다시 재반론할 말이 백 가지도 더 있었다.
그렇게 수백발의 총탄을 장전해 놓았는데, 타티아나는 싱긋 웃으며 한성회를 무장 해제시켰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요.”
「……?」
여기서 논리 없이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했던 한성회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서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는 손을 들어 흘러내린 백금색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는 이어 말했다.
“저희들은 음악을 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감금당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거든요. 음악에 미쳐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 미쳤다는 것이 단순히 집중해서 파고든다에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저도 종종 해요.”
고상한 어투였지만 그냥 미쳤으니까 미친 사람들끼리 놀게 두란 소리같이 들렸다. 한성회가 기가 막혀 물었다.
「그냥 그러니까 내버려 두란 말입니까?」
“특히나 더 약하다는 부분도 말씀해 주셨죠. 자살……. 그래요. 자살은 물론 나쁜 일이죠.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해당 병원에도 큰 손해를 입혔을 테고요. 그렇지 않나요?”
「……적나라하군요. 타티아나. 괜한 소리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실일 테니까요.”
어린 소녀에겐 큰 상처처럼 느껴질 말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 대화가 오갔을 때 타티아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힘들어하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엔 무언가 결연함이 서려 있어서 한성회를 하여금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하나하나 버리면서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있겠죠. 착각이라 하더라도, 죽기 전까지 그게 착각이란 것조차 자각할 수 없어요.”
「무슨…….」
“그리고 그런 사람은 피아노를 떠나선 지독하게 비참해지죠. 잘 알아요. 결국엔 마지막 하나를 잃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잃는다면 살 수가 없게 되고, 죽어서도 미련이 남아 세상에 머물게 될 거예요.”
한성회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 크게 눈을 뜬 채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은 그만큼 섬뜩하면서도 처연한 애수를 띠고 있었다. 강렬한 호소력이 완전하게 모두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숨소리도 안 들리는 정적이 잠시 내려앉았다가, 타티아나의 미소에 풀어졌다.
“하지만 모든 피아노 연주자가 그런 막다른 곳에 몰린 상황에 처해 있진 않아요.”
그녀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천천히 말했다. 푸른 두 눈동자가 한성회를 바라보았다.
“피아노를 삶의 전부로 하지 말라 하셨죠? 그렇다면 그 삶의 일부에 아버님도 함께해 주셔야 해요. 어머님도. 여기 할아버님도요.”
「……무슨 말입니까?」
“저 애를 고독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타티아나는 진지한 확신을 담아, 말한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피아노 연주자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놀라실 정도일 거예요.”
한성회는 그토록 강하게 먹었던 마음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통역이 없이 러시아어로만 듣더라도 한성회는 진심 그대로의 그 뜻을 최소 절반 이상 이해했을 것이다. 그만큼 타티아나가 보인 호소력과 설득력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한성회가 펼쳤던 여러 가지 이론과 논점들은 제대로 파고들지조차 않는다. 어차피 그렇게 맞서 봐야 반론에 반론만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타티아나는 철저하게 자신이 할 말만 했다. 논점과 닿아 있지만,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밀어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 소녀가 보통내기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한성회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괜한……. 아, 통역하지 마세요. 후, 괜한 소리로 어설프게 반론하면 진짜 본때를 보여 주려 했는데……. 승우야, 어떻게 저런 친구를 뒀느냐? 믿을 수가 없는데.」
「아버지…….」
이번엔 괜한 소리가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한승우는 아직도 그런 소리냐는 듯 눈을 흘겼다. 이미 최악에 다다른 부자관계였지만 여기에서 더 잃을 것도 있겠다 싶어서 한성회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 눈 하지 마라. 내가 그리 녹록해 보이느냐?」
정말 감동적이었다.
같은 한국인 친구가 있더라도 지금 타티아나처럼 감동적으로 친구를 위해 말해 주진 못했을 것이다.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능력인진 모르겠지만, 한성회는 분명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아직도 할 말은 많았다.
「타티아나. 무슨 말인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어쩌죠. 전 그래도 승우가 되도록 제 병원을 물려받고 안정된 삶을 살았으면 하는군요. 부모로서 가지는 이런 욕심도 이해해 주실 수 있겠죠?」
“물론 이해해요. 하지만 이미 음악을 포기하고 살긴 어렵게 되었다는 것도 이해해 주셔야 해요.”
타티아나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맞섰다. 한승우에게 음악을 포기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말로 나온 것이다.
한성회는 약간의 부족함을 발견했다.
「이미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는군요. 타티아나. 아직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음악은 취미로도 얼마든지 영위할 수 있죠.」
하지만 그 논리에도 타티아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즉답했다.
“그건 일반인이나 가능한 일이에요.”
「일반인?」
“예. 절대음감으로 6성부 청음을 해내는 천재에겐 해당사항 없는 말이죠.”
「……?」
“그렇지 않나요? 구세프 선생님.”
그렇게 이야기의 끝이 사나운 인상에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지닌 러시아인 음악 선생, 구세프에게 향했다.
구세프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확실하게 말했다.
“몇 번을 말했지만, 한승우는 천재입니다. 수백만 분의 일, 수천만 분의 일 같은 확률로 따지는 게 우스운 소리가 될 정도로.”
선생의 확인을 다시 받은 타티아나가 이어서 한성회에게 질문했다.
“한 번 물어보신 적 있나요? 저 애가 세상을 어떻게 듣고 있는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저나 아버님은 상상도 못 할 것들을 듣고 있을 거예요.”
한성회는 절대음감이 뭔지 이론적으론 알아도 그게 어떤 느낌인진 모른다. 6성부 청음이 뭔지는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반인은 할 수도 없고,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들릴 정도로 엄청난 재능이라는 말을 듣고도 한성회는 무작정 그런 건 알 바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한성회는 아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는 이토록 극찬을 받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한성회는 다시 과거를 회상했다.
그간 음악적 재능이라는 것에 대해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만 늘어놓았지, 실제로 한승우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고는 전혀 하지 않았었다. 한 번 피아노를 들어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타티아나는 두 부자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음악을 업으로 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정말 누가 뭐라 한다고 해도 별수 없을 것이라는 듯,
신이 정해 놓은 것이니 인간이 막을 생각 말라는 듯, 강력하게 확정 짓는 듯한 말이었다.
푸른 눈에 살짝 색이 바랜 듯한 백금발을 지닌 소녀는 무엇이든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해 온다. 한성회는 이러한 타티아나의 화법에 반론을 하고 싶다가도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그대로 말려드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희한한 기분이었다.
한성회는 그래도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래서, 전 일반인이니까 아무것도 모른다?」
“무조건 아드님이 천재라고 추켜세워서 현혹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뿐이에요. 당장 시험을 쳐 봐도 좋아요. 저 애가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엔 5분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말이에요.”
「……빈틈이 없군.」
잔뜩 비아냥거릴 수도 있었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정신력이 약한 소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아까 전 분위기에 짓눌려 위태로워 보이던 모습은 그저 잠깐 있었던 일이었던 것 같다. 지금 타티아나는 어떠한 결의를 지니고 서 있는 것처럼 똑바르고, 올곧다. 한성회는 헛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한낱 일반인이 되어 버렸군.」
수백 개의 병상과 의사를 지닌 대형 병원의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다는 생각은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눈엔 그런 자신도 결국 일반인에 불과했다. 소셜 포지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소녀는 음악이라는 종교의 신자로서 다른 모든 가치를 잰다.
한성회는 타티아나를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순수한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애초에 이해도 잘 안 갑니다. 대체 그게 뭐길래? 그렇게까지, 정말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되도록 준비된 성공과 미래를 포기하고서까지 하고 싶습니까? 타티아나라면 대답해 주실 수 있을 것 같군요.」
“……음.”
타티아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떤 대답이든 시원시원하게 해 버리지만 어느 하나도 거짓 없이 진지한 그녀는 짧게 생각한 뒤에 말했다.
“음악의 힘을 허황된 망상으로 보신다면 그렇게 생각하실 수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아닌 오락으로만 여기신다면……. 우습게 여기실 수밖에 없죠.”
그녀는 약간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잘못 알고 계시는 거예요. 사람이 지닌 힘 중에 음악만큼 강력한 것은 없어요.”
「클래식 전공자다운 대답이 드디어 나오는군.」
한성회는 감탄하면서도 약간 실망했다.
사람이 지닌 힘 중에 음악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참 뻔한 대답이었다.
현실과 굉장한 괴리감을 지니고 있지만, 막상 거기에 심취한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환상과도 같은 말이었다.
한성회는 비웃지 않고 싶었지만 조금 젠체할 수밖에 없었다.
「전 의사입니다. 검증된 것만 믿죠.」
“음악이 사람의 정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의사들께서도 많이 증명해 주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그런 의사들도 있지만 전 신경정신과가 아니라서.」
실제로 어떠한 영향이야 끼치긴 하겠지만 그것이 사람을 좋게 만든다는 건 아직 제대로 된 의학에 비하자면 한없이 뒤떨어지는 이야기였다.
만약 음악이 그토록 강력하게 사람에게 작용한다면 뭣하러 독한 약과 수술 등을 하겠는가? 병석에 뉘여 놓고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만 들려주면 되지.
꼭 병을 치료하는 것만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한성회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락 외에 다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 딱히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감동 같은 걸 느끼는지도 잘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이것도 제가 무지한 일반인이라 그런 겁니까?」
“아뇨. 음악을 행하는 데엔 차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리는 데엔 차별이 없죠.”
「음악을 정말로 사랑하시나 보군요. 부럽습니다. 하지만 일반인인 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유감입니다.」
짧게 딱 잘라 말하자 타티아나가 다시 물었다.
“단 한 번도 없으세요?”
「없습니다.」
“…….”
타티아나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예의 바르지만 당돌하고 멋진 아이가 이번엔 무슨 대답을 할지, 한성회는 약간 기대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정말 실례입니다만, 아버님. 제가 한 가지 진찰을 해 봐도 괜찮을까요?”
「뭐라고요? 진찰?」
전혀 예상도 못한 말에 한성회가 어이가 없어 되묻고,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래 걸리진 않아요.”
「하하하!」
다시 한 번 한성회는 크게 웃었다. 살면서 별일을 다 겪었지만, 지금 의사인 자신을 이렇게 진찰해 보겠다며 말한 것이 동료 의사가 아니라 아들의 친구라고 하는 러시아인 학생이라는 데에 굉장한 유쾌함을 느꼈다.
어이가 없어 화가 나야 정상이었는데 웃음이 나왔다.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좋습니다. 그다음은 제가 정말 비싼 진찰을 해 드리죠.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기본 소양은 있어서.」
“좋아요. 저도 한 번쯤은 받아 보고 싶기도 했어요.”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정말.」
상대적으로 의료가 낙후된 이 러시아 땅에서, 진찰 같은 것과 전혀 관계없는 소녀가 대체 무슨 일을 할지 한성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