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는 학교의 레슨실이었고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두 대나 있었다.
타티아나가 물었다.
“선생님. 피아노를 잠시 써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하세요. 타티아나.”
예브게니아는 흔쾌히 허락했고, 구세프는 조금 근심 어린 눈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구세프는 선생들이 해야 할 일에 타티아나가 깊게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해 끝까지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건방지다는 생각이 아니라, 선생들이 너무 못난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허나 계속 고착되어 있어서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던 막막한 상황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것은 타티아나의 공이었고, 그녀가 또 다른 방법으로 한성회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구세프는 중간에 끼어들어서 중단시킬 권한이 없었다.
타티아나는 빙그르 돌아선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교복 치마를 정돈하고, 의자를 세팅하기까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았다.
「……흠.」
그 몇 초 사이 한성회는 타티아나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타티아나는 클래식 음악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성회에게 직접 한 곡 들려주려고 하고 있었다. 음악의 힘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믿고 신뢰하는 신자로서 타티아나가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건 열다섯 살의 학생다운 참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생각이었지만, 동시에 정말 얕고 우스운 생각이기도 했다.
세상엔 타티아나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클래식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리 높은 가치를 두려고 해 봤자 결국 예술, 오락에 불과하다. 한성회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타티아나가 무슨 짓을 하든 수십 년간의 지론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차라리 한성회를 설득하기 위해선 클래식 콩쿠르나 콘서트로 금전적 이득, 사회적 지위 등 어떠한 실질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늘어놓는 편이 나았다.
그것이 어른을 설득하는 방법이었다.
전공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음악에 대한 가치로 방향이 틀어진 순간, 타티아나는 논리적으로 설득할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약간은 가르치는 투로 한성회가 말했다.
「타티아나. 뭘 하려는진 알겠다만 별 소용 없을 겁니다. 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졸리기나 하고, 심지어 음치인 일반인이라서.」
마지막은 약간 경고성의 악의 어린 말이었는데, 통역사로부터 말을 전해 들은 타티아나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녀가 말했다.
“아드님은 저렇게나 귀가 좋은데 음치이실 것 같진 않아요.”
「실제로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음……. 이건 어떠신가요?”
그렇게 말하며 타티아나가 손가락을 들었다.
그저 손을 들어 올리는 것뿐인데도, 한성회는 어쩐지 그 자세가 평범하게 피아노를 치는 것과 조금 다른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손가락이 건반을 때렸다.
현과 음향판이 진동하며 레슨실에 음을 가득 채웠다.
「…….」
지금은 상담실로 쓰고 있지만, 피아노 소리는 이 레슨실의 목적에 맞게 굉장히 크게 울렸다. 사람의 목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웅장한 소리.
하지만 단 하나의 음으로도 타티아나의 터치로 이루어진 절묘한 배음들은 마치 그녀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한성회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직접 그랜드피아노의 소리를 들어 본 것이 대체 몇 년 만인지 떠올려 본다. 결혼하기 전에는 클래식 콘서트에도 갔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피아노라는 악기의 소리가 이렇게 온몸을 진동시킬 정도로 강렬한 소리를 내는 악기일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
타티아나는 인간에게 주어진 힘 중 음악이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말을 했었다. 한성회는 그야말로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팔짱을 낀 그의 팔과 어깨엔 방어적으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한성회는 절대 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팔짱을 더 굳게 꼈다.
타티아나는 하나의 음에서 발산된 모든 배음과 잔향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는, 손을 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한성회를 돌아보았다.
“도레미파솔라시 중에 어떤 음인 것 같으시나요?”
「…….」
한성회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진찰을 해 준다고 피아노 앞에 앉기에 무슨 감동적인 피아노곡이나 한 곡 치려나 했더니 정말 무슨 의사라도 된 것처럼 진찰을 하고 있다.
제대로 검증된 진찰법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한낱 학생이 진짜 의사에게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은 한성회의 자존심을 약간 건드리는 일이었다.
「모릅니다. 음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계이름을 모르실 뿐일지도 몰라요.”
팔짱을 낀 채 조금 사납게 말해도 타티아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해보라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피아노로부터 음이 폭사되었다. 그리고,
“라, 파, 레, 시.”
이번엔 피아노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직접 입을 열어 따라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가사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그저 자신이 연주하는 간단한 선율의 계이름을 따라서 부르고 있을 뿐이다. 고운 목소리가 피아노와 함께 한다. 즉흥적이고, 비체계적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소리란 무엇인지 고민해 온 수많은 음악가들의 과실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이 단순한 선율엔 지난 수백 년간 쌓여 온 음악이론과 화성학에 기반한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해 살면서 화성학이라는 것 자체를 아예 접해 보지도 못한 한성회를 아주 깊은 본능에서부터 자극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음들이 차례로 한성회의 뇌리에 쌓여 갔고, 타티아나가 직접 목소리로 그 음들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음악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한성회도 타티아나가 피아노로 한 선율을 연주하면서 노래로 설명을 덧붙이고 지나가자, 이 짧은 음악이 어떤 흐름을 가지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가 인도하는 대로 음의 징검다리를 통해 냇가를 건너간다. 사실 별로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강제로 한성회의 손을 붙잡고는 앞으로 이끌었다. 거기에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강제로 움직이게 할 수는 있었다. 묶고 가두어서 데리고 가거나, 아예 완력으로 끌고 가거나, 혹은 권력을 이용한 협박으로 강제할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런 힘은 어린 소녀가 성인 남성에게 행사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한성회는 정말 맥없이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타티아나에게 끌려갔다.
듣기 좋은 피아노 소리와 노랫소리는 마음에 파고들어 휘저어 놓는다. 이렇게 마음 그 자체를 강제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에, 한성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레미파솔라시 모든 음들을 사용한 짧은 연주가 끝나고, 징검다리의 마지막에서 타티아나가 물었다.
“다음은 무슨 음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미……겠지요.」
이렇게 뚜렷하게 보이는 것을 놓고도 모른다고 하면 그건 스스로가 바보라고 인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한성회의 대답에 타티아나가 활짝 웃었다.
“맞아요. 아버님은 음치가 아니세요.”
「…….」
한성회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손해만 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한승우는 진지한 눈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아버지가 어떤 상황일지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약간 괘씸하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음악이라면 무언가 더 복잡하고 화려한 것이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한성회는 타티아나가 마치 장난처럼 음들을 눌러 가며 계이름을 따라 부른 것을 음악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상당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만큼 타티아나가 보여 준 짧은 음의 연속들은 놀라웠다.
하지만 그 놀라움을 솔직히 표시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그것 참…… 명의시로군요, 타티아나. 제가 음치가 아니라는 걸 한 번의 진찰로 밝혀 주시다니 말입니다.」
절대 팔짱을 풀지 않고 괜한 비꼼으로 말하자 타티아나도 이번엔 그것이 비아냥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는지 약간 표정이 흐려졌다.
부인인 최연희가 옆에서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찔러 오며 비난하는 듯한 눈빛을 했다. 한성회는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지고 약간의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겨우 열다섯 살짜리가 보인 무언가에 혹해서 넘어가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타티아나는 가만히 한성회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실제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의사겠지요. 거기에 도전할 생각은 없어요.”
「…….」
“하지만 전 그 누구나 이 음악의 힘을 느낄 수 있고, 또 그 가치를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답하지 않는 한성회에게 타티아나가 물었다.
“그렇지 않을까요?”
한성회는 짧게 답했다.
「잘 모르겠군요.」
“……그러신가요.”
타티아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한성회가 팔짱을 낀 채 꿈쩍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방법이 없을 것이란 걸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적 재능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씀드려도 소용없겠군요.”
약간의 실망 어린 표정. 하지만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곧 지워진다.
타티아나는 음악의 힘을 믿고, 그것이 그 어떤 언어보다도 위에 위치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절망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물러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곡 들려 드리고 싶어요. 길진 않으니 모쪼록 편히 들어 주시길.”
그렇게 선언한 타티아나가 다시 건반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성회는 이쯤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친구를 위해 얼마나 열성인진 잘 알겠으니까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서 어떠한 준비에 들어간 타티아나를 방해할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경건한 의식에 임하는 사람과 같이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서 집중한다. 한성회는 그 어떤 언어로도 타티아나를 막을 수 없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타티아나가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
한성회는 첫 소절을 듣자마자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었다.
타티아나가 앞서 들려준 간단한 선율은 그 자체로도 음악이지만 사실 즉흥적이고 빈약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풍성하고 섬세한 화성으로 수많은 음악가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아 온, 진짜 클래식이 타티아나의 손에서 재현되었다.
프레데릭 쇼팽의 녹턴 op.9의 2번째 곡.
어두운 밤, 발코니에서 와인을 기울이며 야경을 바라보며 느낄 법한 정취가 레슨실 안에 가득 찼다.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쇼팽의 명작을 정면으로 느끼면서 한성회는 이 곡의 제목도 작곡가도 모르지만 양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서커스처럼 빠른 기교와 화려함이 돋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왼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느린 왈츠처럼 화성을 쌓고, 오른손이 달빛 아래의 야경을 그리듯 선율을 만든다.
한성회는 잔뜩 긴장한 팔짱이 힘을 잃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선율을 들으면서 끝까지 화가 난 사람처럼 인상을 쓰고 뻣뻣하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바로 앞에서 듣는 피아노 연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가끔 삽입곡으로 나오는 클래식 음악 등과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전율적이었다. 스피커로는 재현해 낼 수 없는 아주 작고 미세한 음색까지 모두 한데 뭉쳐 한성회를 뒤흔들었다.
「…….」
한성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사였다. 현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아주 단순했다. 피아노 소리는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귀로 들어와 고막을 울리고 청소골과 달팽이관을 거쳐 청세포에 도달해 신경 신호로 변환된다.
그 신호는 청신경을 통해 뇌로 가서 소리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밝혀져 있는 것이 전부일 뿐.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한성회는 의사로서 익힌 모든 지식이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타티아나의 녹턴이 품은 마력에 빠져들었다.
분명 귀를 통해서만 들을 수밖에 없는 소리는 귀가 아닌 온몸으로 파고드는 듯했고, 뇌가 아닌 심장으로 인지하는 듯했다. 흥분으로 높아졌던 심박수마저 천천히 피아노 소리와 합을 맞추는 듯했다.
대체 어떻게 심박수를 인위적으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의사인 한성회가 아는 방법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강심제인 에피네프린이나 디곡신 혹은 베타차단제 같은 약물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약물들을 이용한 것들은 심박수를 높이거나 낮출 뿐,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아름다운 흐름에 자연스레 맞추진 못한다.
「…….」
타티아나의 연주는 계속되면서 흘러가는 강물과 수면에 비치는 달빛처럼 흔들리기도 하고, 다시 밝아지기도 했다. 주제는 다시 반복되면서도 똑같지 않았고 색다른 느낌을 다시 한 번 제시한다.
그리 힘을 들이지도 않고, 과하게 심취하지도 않는다.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유려하게 손을 움직여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한성회는 타티아나가 만들어 내는 리듬 하나하나에 휘둘리는 것을 느꼈다. 메말라 있다고 생각했던 감성이 날뛴다.
음악이 어떠한 힘을 지녔는지, 어떠한 가치를 지녔는지. 또 음악에 대한 재능을 지녔다는 것이 대단하다면 얼마나 대단하기에 대형 병원의 병원장이라는 자리까지 마다하고 추구해야 할 정도인지.
논리적인 설득력이나 긴 변명 같은 것은 일절 필요 없었다.
타티아나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도록 이 자리에서 그것을 철저히 증명해 보였다.
「…….」
음악은 조금 더 잦아들면서 슬픈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고아한 선율이 살짝 위로 치솟고, 화음은 보다 두터워진다.
그리고 보다 화려하게 달려 나가는 듯하다가, 한 걸음 물러서서는 우아하게 살며시 내려앉았다.
천천히, 미처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내려앉은 음악은 어느새 이불이 되었고 한성회는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다는 착각마저 느꼈다.
「…….」
도저히 상식과 이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연주가 섬세한 시작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졌고, 타티아나가 손을 들었다.
“브라바.”
구세프가 짧게 칭찬하며 박수를 세 번 쳤다.
같은 학교의 선생이 학생을 칭찬한다고 삐딱하게 비아냥거릴 수도 있지만, 한성회는 방금 들었던 음악에 대해서 비판 같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가 한성회를 바라보았다.
한성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절대 풀어지지 않을 것처럼 꽉 틀어져 있던 팔짱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려와서 풀어져 있었다.
타티아나의 표정이 약간 놀라움에 찼다가, 배시시 웃는 아이 같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한성회는 약간 부아가 났다.
그래,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은 알겠다. 그 음악이라는 것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성회는 러시아까지 와서 자신의 입장이 완전히 틀렸다고 확인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틀어 올리는 순간,
「아버지.」
「……뭐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승우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말끔한 교복을 입고 있더라니 손수건도 항시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왜 내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의아한 눈으로 한승우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눈물 닦으세요.」
그제야 한성회는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지금 손수건이 필요한지도 이해했다.
「…….」
허탈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이건 사람이 지닌 힘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마법 그 자체였다.
의식적으로는 절대 말려들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타티아나가 자신했던 만큼 음악은 마치 마법처럼 한성회를 완전히 무방비로 만들어 놓았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으로 한성회가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나도 근 수십 년 만에 눈물이 나는 기분이구나.」
한승우의 할아버지인 한대철이 그렇게 말하며 눈가를 문질렀다.
타티아나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서 이 작은 무대의 청중들을 향해 작게 인사했다.
다시 한 번 타티아나는 레슨실의 모두를 휘어잡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거의 모든 발언권이 넘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수한 음악에 감동해서 눈물까지 보인 한성회가 지금 타티아나에게 무슨 말을 한들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이 자리는 클래식 음악의 가치를 따지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논점인 한승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할 말은 남아 있었지만, 아무래도 힘이 많이 빠진 것은 사실이었다.
타티아나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중년 남성을 완전히 무력화시켜 놓고 이제 마음대로 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드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셨던 것이 조금이나마 풀리셨으면 좋겠어요.”
“……?”
자신만만하게 우쭐거리며 한마디 정도는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탄과 존중의 의미에서 그 정돈 들어 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한성회는 약간 당혹감을 느꼈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리에 선 타티아나는 별 미련 없다는 듯 이어 말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구세프 선생님, 예브게니아 선생님. 상담 나누세요.”
“……그래. 고맙다.”
애초에 구세프는 학부모들과 다시 상담을 하기 전에 타티아나와 친구들에게 나가라고 명령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연주도 하게 되었지만, 타티아나는 음악학교의 선생들이 상담에 나서기 전에 친구로서 한마디 하겠다고 끼어든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정확하게 자신이 할 일만 하고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자, 잠깐.」
한성회는 약간 황당하기도 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예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친구로서 제게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겠지요. 여러모로 주제넘게 귀찮게 해 드려 죄송했습니다. 모자란 연주도 끝까지 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미처 무어라 붙잡기도 전에 타티아나는 인사를 마쳤다.
“실례 많았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친구들을 이끌고 레슨실 밖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에르네스트와 리처드, 아나스타샤 그 누구도 자신도 할 말이 있다고 나서거나 하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타티아나가 대신해서 했다.
그렇게 4명의 학생들이 나가고, 한성회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정말 잠깐 들어와서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더니 한성회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고는 도로 나가 버린다. 그 행동엔 어느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이제 보면 말도 안 되는 폭거였다.
한성회는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구세프가 말했다.
“관계없는 애들은 내보냈고. 상담을 계속 해 볼까요.”
“…….”
이 사람들 정말 너무한다. 이제 와서 관계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한성회는 저 만만찮은 러시아 선생을 이제 말로 분노하게 만들거나 포기하게 할 자신이 사라졌다. 구세프와 예브게니아가 정말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한성회가 포기하게 만들고 말 것이라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세상 누가 와도 자신을 이길 순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러시아로 직접 왔다. 말을 안 듣는 아들을 강제로라도 데리고 가려고 했고 거기엔 선생이든 누구든 아무 방해도 되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 자신감은 음악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마법에 깨어졌다.
한성회는 허탈하게 물었다.
「방금…… 타티아나라고 했던 아이 말입니다. 평범한 학생 같진 않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구세프는 지금 상담과 무관한 질문에도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학교의 자랑이지요.”
그야 그렇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니까.
한성회는 한숨을 쉬며 조금은 진지하게 학부모 상담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