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39화 (339/1,277)

##  339화

난 친구들을 이끌고 레슨실 밖으로 나왔다.

“…….”

하고 싶은 말과 자기주장만 잔뜩 하고 나와 버린 기분이었다.

사실 이렇게 친구 아버지와 팽팽하게 주장을 주고받을 생각은 없었고 피아노를 칠 생각도 없었지만, 한승우의 아버지가 클래식 음악에 대해 조예가 없는 것을 떠나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하고 계신 것을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그런 인식으로는 클래식 음악으로 진로를 잡으려는 자식의 생각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바보 같은 한승우는 아버지를 설득한다면서 피아노 연주도 한 번 들려 드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병원장 일로 바쁘신 분에게 휴대 가능한 바이올린이나 기타가 아닌 피아노는 쉽게 들려 드리기 어려웠겠지만, 그렇게나 꽉 막힐 만한 이유가 있기도 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음악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와 힘을 지니고 있는지 일단 보여 주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레슨실이었고, 피아노가 있었고, 난 연주자로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도 상당히 건방진 짓이었다는 자각이 있긴 있다.

대뜸 진짜 의사에게 진찰이랍시고 멋대로 피아노를 연주해서 감정을 흔들어 놓다니, 고깝게 보시려면 한도 끝도 없이 고깝게 보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쩐지 그렇게까지 나쁘게 상황이 흘러갈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 했다.

“……괜찮을까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리처드가 무슨 말이냐는 듯 답했다.

“괜찮고말고. 그 아저씨 표정 못 봤어?”

“정말 잘 했어.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도 밝게 웃으며 날 껴안았다. 이렇게 내게 모든 것을 위임해 주었던 친구들이 괜찮다고 해 주니 약간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져 간다.

다시 생각해 봐도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며 리처드가 말했다.

“승우가 헛소리만 하지 않고 네가 만들어 준 유리함을 잘 끌고 가기만 하더라도 이전보단 훨씬 상황이 나을 거야.”

“그럴까요.”

“물론.”

그가 확고하게 말했다.

“얼마나 꽉 막힌 괴물 같은 아저씨일지 걱정했었는데, 결국 평범한 사람이었던 거지.”

“…….”

리처드가 날 바라보았다. 난 약간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렸다. 그 정도는 내가 아니라 이 자리의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리처드는 그런 내게 조금 미안해했다.

“그래도 타티아나 네게 모든 것을 맡긴 건 미안하네.”

“예!? 아, 아니에요. 전혀. 갈등이 쭉 이어지는 내내 리처드와 에르네스트가 애쓴 사이 전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잖아요. 직접적으로 도움을 제대로 주지도 못했고……. 결국 러시아에 홀로 오고 나서야 연습실을 계약해 준 것이 전부고요.”

“나랑 에르네스트가 한 것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네가 한 번에 해낸 일에 비하면.”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리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가 한 일이 아주 결정적이었다고 평했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도 거기에 동의했다.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복도에 서서 우린 잠시 상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떠올리며 서로 들었던 것들을 맞춰 보았다. 한승우에게 승산이 있을 것인지에 대한 예상을 해 보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의견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오늘 아침에만 하더라도 우린 한승우가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은 남을 것 같다는 기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문제가 다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우리가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끝났고, 리처드가 물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 스터디룸에 가 있을래?”

“아뇨. 음……. 잠시 기다릴까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더라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

상담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돌아가 봐야 연습이나 공부가 될 리도 만무했다. 우린 그냥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괜히 만지작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때웠지만 동갑내기 친구들 4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크게 떠들거나 즐겁게 놀긴 애매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복도에서 다 같이 벌서는 것도 아닌데 멍하니 있기도 이상했다.

리처드가 심심하지 않냐면서 음료수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고, 모두가 즉시 응했다.

내기 내용은 간단하게 동전 앞뒷면을 맞추는 것이었고, 무슨 패배의 신의 가호가 깃든 것처럼 내가 한 판 만에 졌다.

“…….”

왜 맨날 나만 지는 거지.

늘 그렇듯 난 깔끔하게 승복하고 모두의 음료수를 사기로 했다.

“내가 같이 가 줄게.”

그리고 혼자 음료수를 4캔 들고 오긴 힘들다면서 에르네스트가 따라와 주었다. 아나스타샤와 리처드도 다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에르네스트가 다 따라올 필요는 없다면서 딱 잘랐다.

“…….”

또각또각. 복도를 딛는 발소리가 하나로 들린다.

난 에르네스트와 함께 복도를 걸으면서 살짝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먼저 따라오겠다고 하지 않더라도 아나스타샤가 같이 가 주었을 텐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난 한참이나 말없이 걷다가 물었다.

“에르네스트?”

“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지금? 글쎄.”

내게 할 말이 있다면 말해 달라는 에두른 표현이었는데,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묘한 대답을 했다.

“네가 나서기 전에 내가 나서서 뭐라도 했어야 했단 생각.”

난 움찔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친구들의 대표인 것처럼 위임을 받아서 모든 것을 해 버리긴 했지만, 에르네스트로선 자신이 설득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한승우와 가장 친했던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역시 에르네스트가 연주를 보여 주셨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뭐? 아니, 그런 뜻은 아니야.”

“?”

“그냥……. 어쨌든 그런 건 아니고.”

에르네스트는 날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젓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냥 생각할 뿐이지, 만약 내가 했다고 하더라도 너만큼 잘 해내진 못 했을 거야. 난 그냥 승우 한의 아버지가 한 말에 대한 반박을 백 개쯤 궁리해 두고 있었거든.”

“백…… 개요?”

“그래. 그리고 그것들을 쏟아 내곤 피아노 앞에 앉을 기회도 얻지 못하고 쫓겨났겠지.”

확실히 그건 굉장히 안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난 한승우의 아버지와 대면하는 순간, 오늘 저분을 그럴싸한 논리나 말솜씨 같은 것으로 설득하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애들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분이 아니었고, 오늘은 아주 공격적이시기까지 했다.

만약 내가 조목조목 반박을 하려 들었다면 한승우의 아버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와 끝장을 보려 하셨을지도 모른다. 우리와 선생님들이 분노로 이성을 잃고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때문에 내가 한 것은 조금 막무가내이긴 하지만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고 진실하다는 마음 그 자체를 전달한 것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건 자신 없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킥킥 웃었다.

그는 내 대신 나섰어야 했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현 상황에 크게 불만족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군.”

“그렇죠……? 이젠 선생님들과 한승우가 얼마나 잘 설득하느냐에 달렸으니까요.”

“크게 어려울 것 같진 않지만.”

에르네스트는 대수롭잖다는 듯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날 바라보았다.

내가 올려다보자 그는 지나가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 학교에 여러 사람을 붙잡아 두는구나. 타티아나.”

“여러 사람이요?”

“응.”

난 한승우에게 약간의 애착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물론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외에 누구를 직접적으로 붙잡았던 적이 있던가……?

잠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우리는 교내의 자판기에 도착했고, 미리 주문받은 대로 캔 음료수를 뽑았다.

에르네스트가 허리를 숙여 캔을 집어 올리곤 내게 오렌지 주스를 건네주었다.

“자, 네 것.”

“고마워요.”

“따 줄까?”

“아하하, 괜찮아요 지금은.”

“그래. 가자.”

먼저 마시고 싶진 않아서 바로 우린 레슨실 쪽으로 돌아갔다.

자판기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은 불과 몇 분 걸리지도 않았는데,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아나스타샤와 리처드는 레슨실 쪽으로 바짝 붙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난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레슨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내 쪽으로 말했다.

“승우 한이 연주 중이야.”

분명 무언가 리퀘스트가 있었을 것이라 예상되긴 했다. 나는 그 옆에 달라붙었다. 피아노 소리는 방음 처리가 된 레슨실을 잘 뚫고 나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연주하고 있음이 들리긴 했다.

난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이어서 한승우가 잘 해낼 수 있길 기원했다.

***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2번.

큰 기교나 어려운 해석을 요하진 않으면서 음표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완벽성과 맑은 이미지로 피아니스트의 목소리를 잘 전달해 주는 좋은 곡이었다.

한승우는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연주를 하면서 리스트나 라흐마니노프의 곡으로 자신의 테크닉을 뽐내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이 곡을 골랐다.

아름답고 청량한 음악이 레슨실을 채웠다.

모든 분노도 불안도 잠재워 버릴 수 있을 듯한 따뜻하고 맑은 음악이 마음에 스며든다.

한승우는 정성껏 다듬은 모차르트를 선보이는 것으로 깔끔하게 자신의 실력을 선보였다. 방학 동안 제대로 연습을 하진 못했지만, 학교로 돌아온 뒤에 반 달간 미친 사람처럼 피아노 연습에 매달렸던 것이 확실하게 그 결과를 드러냈다.

연주가 끝나고, 한승우가 피아노에서 내려오자 구세프가 박수를 쳤다.

“브라보.”

한승우는 평소 조금 어려워하던 선생인 구세프에게 찬사를 받고는 약간 황망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한승우의 아버지 한성회 역시 이번엔 멍하니 있지 않고, 클래식 음악을 감상한 뒤의 청중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웠다는 듯 짧게 박수를 했다.

그가 말했다.

「네 피아노 연주를 들어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처음이었죠.」

「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지?」

「기회가 없었죠. 아버지는 바빴고, 저는…….」

한승우는 이전까지 아버지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좋은 기억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피아노에 대해선 두렵고 무서운 기억이 많았다.

「진지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고요.」

「자신이 없다고?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다고 이 난리를 친 놈이?」

「자신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한승우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버지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선 전혀 모르시고, 전 제 실력이 부족함을 충분히 알고. 괜히 들려 드렸다가 쓰레기 같은 음악은 집어치우라고 혹평이라도 당할까 봐…….」

「그런 생각을 했다고?」

「어렴풋이요.」

「멍청한 놈.」

여태껏 어떠한 걱정이 있었는지 털어놓는 한승우를 보며 한성회는 툭 던지듯 말하고는, 이어서 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음악에 대해 아무리 몰라도 이게 쓰레기 같은 음악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음악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이 없을 수 있느냐?」

「……!」

「쯧…….」

결국 자신의 입으로 인정해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성회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타티아나가 들려준 음악은 정말 클래식 음악에 대한 편견을 산산조각 낼 정도로 충격적이었지만, 그건 타티아나의 음악이었다. 한승우의 음악이 형편없다면 한성회는 단호하고 매정하게 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연주를 시켜 본 결과, 한성회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승우는 일부러 뽐내듯이 기교가 넘치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

그저 무엇보다 순수하고 정갈한 음악이었다. 매끄러운 모차르트의 음악은 평화롭게 울려 퍼지면서 한성회로 하여금 보다 차분하게 클래식 음악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들이 굳이 의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잘못되거나 세상이 멸망하거나 하진 않는다는 극히 단순한 사실이 머리에 떠오른다.

한성회는 또다시 음악의 마력에 당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화를 낼 수 없었다.

「골치 아프군. 어려서부터 공부를 곧잘 하기에 머리가 좋겠구나 생각은 했다만, 대체 넌 왜 피아노도 잘 치는 것이냐?」

「잘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널 낳은 건 나니까 나한테 감사해야지 승우야?」

「어머니…….」

이때다 싶었는지 어머니 최연희가 농담조로 말했고 부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약간 밝아진 분위기 위에 중앙음악학교의 선생이자 한승우의 지도 선생인 예브게니아가 통역을 통해 말했다.

“저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어머님.”

「……예?」

최연희가 되묻자 노년의 피아노 선생은 안경을 고쳐 쓰며 웃었다.

“좋은 아들을 낳아 주셔서 제가 말년에 다시 한 번 제자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 주셨으니까 말이죠. 한 군의 재능은 제 열정도 되살려 주었답니다. 그러니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어머……. 그런 말씀이라면…….」

저야말로 아들을 맡길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최연희는 순간 남편의 기분을 살폈다. 그냥 말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남편은 결정을 내린 상태가 아니었다.

미묘한 긴장 속에서 한승우의 할아버지인 한대철이 큰 웃음소리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하하,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범아.」

「아버진 가만 계세요. 생각 중이니까.」

「생각?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이 더 필요한지 난 잘 모르겠구나?」

「……괜히 모시고 왔군.」

한성회는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고, 한대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연히 네 실수 아니더냐? 내가 정말 네 말에 넘어가서 손주의 앞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느냐?」

「혹여나 잘못되면 마지막으로 설득할 수 있을 테니 무조건 따라오시겠다고 하셨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제가 멍청했네요.」

「이제 알았느냐? 허허헛.」

한승우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무조건 편을 들어 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러지 못했던 한대철은 이렇게 러시아에 따라와서 조금이나마 손자의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에 기쁘다는 듯 웃었다.

한성회는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듯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남자였다.

「아버지나…… 이 아들놈은 관심도 생각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전 병원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단 말입니다. 승우가 피아노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뭘 어떻게 하느냐? 네가 잘 운영하고 물려주면 되지.」

「피아니스트에게 물려주라고요?」

「승우와 결혼할 며늘아가에게 주면 되지 않겠느냐?」

그 말대로였다. 한승우가 병원장으로 취임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면 의사 며느리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한성회가 생각하기에 그건 상당히 괜찮은 방법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또 아들의 생각 문제였다.

「어차피 나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저 녀석이 반항하지 않을까 싶군요.」

한성회는 한승우를 돌아보았다.

「네가 병원에 생각이 없다면 나중에 네 부인 될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면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의사여야 하겠지. 연애결혼을 해도 좋겠지만……. 네가 병원이 아니라 콘서트홀에 있을 것이라면 필히 선을 봐야 할게다.」

「…….」

「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냐?」

한성회가 다시 한 번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방금 전, 그 애라든지.」

한성회가 보기에 아무리 봐도 아들은 타티아나에게 반해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인이라는 것이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그건 그녀가 지닌 다른 모든 장점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피아노를 하고 싶다는 진심 어린 말이 없었다면 단순히 그 학생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함께 있고 싶어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한승우는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피아노로 만족하기로 했어요.」

「……그 애는 널 꽤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타티아나는 친구로서 끼어들었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식 의리가 얼마나 두터운진 몰라도 단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까지 하긴 힘들 것 같았다.

한성회는 무슨 이유인진 잘 알 수가 없지만 약간 억측을 하자면, 타티아나가 한승우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고 이 학교에 붙들어 매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승우도 그 정도는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저도 그 애를 좋아해요. 당연하죠.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단순한 애정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보다 진지하고 엄격한 경애가 드러난다.

「하지만 당장 갚아야 할 것들이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정도에요. 전 그 애에게 그저……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

한승우는 외국인인 자신이 어떠한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고 싶어 하는 관계들이 얼마나 크게 뒤틀어질 수 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도, 갚기 어려울 정도로 큰 도움을 받은 한승우에겐 이 이상 타티아나에게 부담을 지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선 같은 이야기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 말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죠?」

「……그래. 한참 후의 이야기니까. 사실 중학생인 네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그럼 나중에 생각해 보죠, 뭐…….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버지도 어머니와 선을 보셔서 만나셨잖아요?」

「그래.」

한승우는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한성회는 병원의 일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더 꺼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대철이 물었다.

「결정이 난 게냐? 아범아.」

「하…….」

결국 마지막 한숨을 쉬고, 한성회가 말했다.

「좋다. 네 마음대로 해 봐라.」

「……!」

지금까지 분위기가 분명히 넘어오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말로 허락이 떨어지자 확실하게 긴장감이 모두 풀어졌다.

이 완고한 아버지에게서 허락을 얻어 낸 한승우가 눈을 크게 떴고, 부자간의 갈등이 드디어 매듭을 지었다는 기쁨에 최연희가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한성회는 끝까지 만만찮았다.

「하지만 분명하게 해라. 아까 넌 네 친구들과 피아노로 동등해지고 싶다고 했지. 그걸로는 부족하다. 동등이 아니라 그보다 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 네 엄마가 그토록 울고 내가 그토록 반대했는데도 하겠다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전 여기에 목숨을 걸었어요.」

「죽진 말고.」

농담처럼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한성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생각은 정말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연주자들이 고위험군이라는 생각엔 큰 바뀜이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가시밭길을 가겠다고 끝까지 우기는 아들을 막을 수 없다면 이젠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옆에서 응원하고 도와 달라고. 고독하게 두지 말라고.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진 모르겠지만 그 간절한 호소는 한성회의 마음에 분명하게 틀어박혔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느냐.」

「학교 기숙사에서요.」

「기숙사는 불편하겠지. 주변의 아파트라도 구해서 피아노도 한 대 들여 놓는 게 낫지 않느냐?」

「……됐어요. 기숙사에도 연습실 있으니까요.」

「크흠.」

갑자기 태도가 바뀐 아버지가 어색한지 한승우가 난색을 표했다. 한성회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져서 헛기침을 했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그런 헛소리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고 정말 이 먼 러시아까지 와서는, 아들과 아들 친구들에게 설득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성회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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