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44화 (344/1,277)

##  344화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일부러 별관 연습실의 불을 켜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 안을 밝혔다.

은은한 빛무리가 머무는 연습실에서 나는 의자에 앉아 향긋한 허브차를 마시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재미있는 것이 없나 찾아보다가, 문득 며칠 전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보드게임 카페에 가서 놀았던 것이 떠올랐다. 남자 셋 여자 셋의 그룹이었기에 보드게임 카페는 우리가 함께 놀기에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한 장씩 넘겨 보았다. 발렌티나가 게임 룰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망쳐 버린 사진도 있었고, 게임에 엄청나게 강한 아나스타샤와 한승우가 활약하던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승부욕 강한 에르네스트가 어떻게든 그 두 사람을 이겨 보려고 집중하는 모습도 찍혀 있었다.

이상하게 찍혔을 것 같으니 사진을 지워 달라던 그의 모습도 그대로 사진으로 남겼다. 미안하지만 절대 지워 줄 생각이 없었다.

이 모두 다 내 새로운 추억이자, 행복이었다.

사진을 조금 더 넘겨 보다가, 마지막으로 찻잔을 기울이고, 내려놓았다.

“…….”

난 스마트폰으로 아나스타샤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잘 갔다 와.]

짤막한 메시지였지만 이 메시지에서 난 정말 큰 힘을 얻었다.

“……후.”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쉬는 것으로 짧은 망중한이 끝났다.

난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집었다.

오늘 오케스트라와 리허설로 맞춰 보아야 할 협주곡의 피아노 악보였다.

이미 총보도, 피아노 악보도 다 암보하고 있었지만 다시 차분하게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첫 리허설이니만큼 굉장히 중요한 날이었다. 오늘 일정을 잡아 준 에이전트 베르너는 부담 가지지 말고 임해 달라고 했었지만, 내게 있어서 오늘 리허설은 실전 무대를 준비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 머릿속에 들어있는 악보가 현실 세계의 악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하고, 내가 그간 이 곡에 대해 공부했던 것들과 그것으로 착실한 짜임새를 갖춘 해석 역시 다시 확인했다. 실수는 있을 수 없었다. 보다 완벽성을 기한다.

“…….”

악보를 다시 선명하게 새겨 넣고, 이번엔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린다. 이상을 현실로 바꿀 때다.

오케스트라 없이 피아노만이 협주곡을 연주한다. 연주하는 손과 발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본래 협주곡으로 작곡된 곡에선 빈틈이 곳곳에 보인다.

난 피아노로 다른 악기의 파트들을 메우는 대신, 입으로 나지막하게 노랫소리를 얹었다.

피아노와 함께하는 다른 선율을 소리에 합치자 조금 더 구체적이고 또렷한 음악의 이야기가 보인다.

난 기억에 따라 혼자서 협주곡을 연습했다.

막심 선배와 함께 연습하면서 얻어 냈던 부분들과,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의 레슨에서 배웠던 것들, 그리고 이전까지의 수많은 선배 음악가들이 남겨 놓은 귀중한 음원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정수들.

그 모든 것을 다시 합쳐 쌓아 올린 음악은 꽤 신선하고, 괜찮게 들린다.

“…….”

마지막으로 홀로 연습을 끝마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 오케스트라와 확인을 해 볼 차례였다.

***

소로킨이 차를 세웠다.

“이곳입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소로킨.”

난 소로킨에게 감사를 전하고 빅토르와 함께 차 밖으로 나왔다.

신아르바트 거리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는 포바르스카야 거리. 우리 중앙음악학교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가까운 곳이었다.

“…….”

눈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4층 높이의 흰 건물은 네모반듯한 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평범한 성은 아니다. 이 유서 깊은 음악의 성은 러시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네신 음악원.

1895년 엘레나 파비아노브나 그네신이라는 이름의 피아노 연주자가 각각 예브게니아, 마리아라는 이름의 자매들과 함께 러시아의 영재들을 모아 클래식 음악 교육을 하는 것으로 음악학교에서 시작된 음악원이었다.

그 역사는 조금 짧지만 그네신 세 자매의 노력으로 단기간에 굉장히 높은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하는 음악원으로 인정받았으며, 지금은 러시아 내에서 모스크바 음악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함께 러시아 3대 음악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들어가실까요. 아가씨.”

“예.”

빅토르와 함께 난 그네신 음악원의 안으로 들어섰다.

방문객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단정하고 깔끔한 분위기의 복도를 조금 걷다 보니 미리 약속했던 연습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 약 15분 전이었다. 괜찮은 시간인 것 같다. 난 조심스레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커다란 합주 연습실엔 의자가 여러 개 있었고 보면대도 정확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맨 앞에는 단 한 명, 의자가 작아 보일 정도로 큰 체구에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남성이 종이 뭉치를 들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 타라소프다.

스타니슬라프는 종이뭉치를 들고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걸어와선 나와 악수했다. 아프지 않게 살살 쥐는 것 같은데도 그 강인함이 느껴졌다.

“좋은 날이군.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

공손하게 인사하자 스타니슬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이 나왔다.

악수를 마친 스타니슬라프는 다시 의자에 앉아선 말했다.

“다른 단원들은 곧 올 테니 잠시 기다리지.”

“예.”

모스크바에 있는 오케스트라가 아니다 보니 따로 출근하진 않았을 테고, 아마 일찍 도착했는데 잠시 담배 같은 것을 피우기 위해 나가 있는 모양이었다.

난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놓곤 오케스트라를 위해 세팅되어 있는 의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내 의자에 앉았다.

“…….”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스타니슬라프가 일부러 긴장감을 조성한 것도 아닌데, 둘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자 절로 약간 긴장되었다. 딴청을 피우며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자니 그건 그것대로 예의가 아니었다.

난 괜히 옷깃을 매만지고 작게 손목을 스트레칭을 하다가 이렇겐 안 되겠다 싶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

“뭔가.”

“음……. 차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

“저쪽에 티포트가 있는 것 같은데 써도 될지 잘 모르겠지만……. 음, 나가서 허락을 받아야 할까요?”

“…….”

저편을 보니 언제든 차를 마실 수 있게 티세트가 준비되어 있긴 했지만 다른 학교에 와서 마음대로 써도 될지 모르겠어서 약간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착각인진 모르겠는데 스타니슬라프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것 같았다.

“내가 타지.”

“예? 아뇨, 괜찮아요. 제가 해도 되는…….”

“앉아 있게. 카페인 없는 허브티면 되겠나?”

“……부탁드릴게요.”

난 일어나서 찻물을 끓이기 시작한 스타니슬라프를 말릴 수 없었다.

괜히 차를 끓여 달라고 이야기한 것 같은 모양이 되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스타니슬라프가 물었다.

“리허설 준비는 어떤지 듣고 싶군. 타티아나.”

두서없이 휘몰아치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난 최선을 다해 곡을 연습해 왔지만 너무 과하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했다.

“악보 없이 암보로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왔어요.”

“빠르군. 대단해.”

“감사합니다.”

지휘자의 입장에선 연주자가 악보를 암보해 왔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일일 것이다. 난 담백한 칭찬을 받고 감사를 표했다.

스타니슬라프는 막 끓은 물을 잔에 부으며 말했다.

“연주는…… 들어 보면 알 테고.”

“예.”

“아마 오늘 하루 리허설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할 걸세. 어차피 여러 번 맞춰 봐야 할 테고, 그러니 너무 마음을 급하게 먹진 않았으면 좋겠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진지하게 해 주게. 도전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잘 할 테지만.”

커다란 손이 내게 잔을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받아 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 대답은 하나뿐이다.

“열심히 할게요, 지휘자님.”

“타티아나 자네는 참……. 신뢰할 수 있는 연주자처럼 보이는 방법을 아는 것 같군.”

“……예?”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협연에 익숙지 않은 어린 연주자들은 긴장하고 음악을 휘두르거나, 휘둘리기 마련인데 말일세.”

“아하하……. 더 어린 나이에 협연을 하려면 그럴 수도 있겠어요.”

“내가 말하는 어린 연주자엔 서른 살이 넘은 연주자도 있네만.”

“…….”

스타니슬라프가 보기엔 서른이 넘는 연주자도 어린 연주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번에 프랑스에서 트러블이 있었던 피아노 연주자 루이 디아라도 나이가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긴 했다.

스타니슬라프는 그간 많은 협연을 하면서 그만큼 많은 연주자들을 봐 왔을 테고, 때문에 약간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만큼 이전까지의 연주자들이 스타니슬라프에게 신뢰를 못 주었다면 그건 조금 유감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스타니슬라프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깊게 생각하진 말게. 별말 아니니까.”

정말 별말 아닐 것이다. 적어도 스타니슬라프는 날 꽤 고평가해 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난 약간의 책임감을 느꼈다. 굳이 누가 무어라 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야 했지만, 그 각오를 입으로 내어서 스타니슬라프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저…… 전 오늘 정말 진지하게 리허설을 할 생각이에요. 시간과 거리 관계상 매일같이 리허설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 가고 싶어요.”

“좋은 마음가짐이군.”

내 대답이 어떻게 들렸는진 모르겠지만, 스타니슬라프는 흡족하게 말해 주었다. 내 마음가짐이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잠시 그렇게 나와 스타니슬라프는 찻잔을 기울이며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대화는 그리 이어지지 않았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보단 훨씬 더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복도에서 발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내가 문 쪽을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그 문이 벌컥 열렸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갈색 머리를 단발로 짧게 친 익숙한 분이었다.

“어머, 타티아나! 일찍 왔구나!”

“안녕하세요. 크리스티나.”

악장 크리스티나 안드레예브나 나미코바는 언제나처럼 밝게 미소 지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악수를 하려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섰더니 그녀는 날 덥석 끌어안았다. 난 약간 놀라기도 해서 멍하니 안겼다가, 인사로 마주 포옹했다. 정말 붙임성 좋은 분이었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안녕! 타티아나. 우리의 앙팡 테리블.”

“잠깐만, 난 가글 좀 하고 올게.”

“으, 담배 냄새.”

“오랜만이네요, 타티아나. 잘 지냈어요?”

한 분 한 분마다 인사를 주고받고, 몇 명을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보았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에 연습실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뭔가 정신은 없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다. 난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크리스티나가 내 옆에 털썩 앉더니 갑자기 목을 쭉 빼고는 날 밑에서부터 올려다보았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아……. 감사해요.”

“혈색도 좋고 말야.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때문에 요 근래 계속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모험담처럼 너무 구구절절 하는 것도 실례였다. 난 그저 짧게 말하며 웃었다.

“학교에 다니니까 좋은 일밖에 없는걸요.”

“세상에……. 난 여태 살면서 타티아나 너처럼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학교가 좀 바뀌었나? 중앙음악학교에서 학생 복지를 위해 쉬는 시간마다 간식과 차를 내어 주고 온 교실에 시스템 에어컨을 설치하기라도 했니?”

“아하하, 아뇨.”

“그냥 좋은 거구나?”

“그냥……이라기엔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아서요.”

“음, 그렇구나.”

크리스티나는 더 길게 캐묻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 어쨌건 내가 기뻐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덩달아 기뻐하는 듯했다.

그녀가 손으로 머리끝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그건 참 다행이야. 다른 학생들은 있지, 리허설을 주말이 아닌 주중으로 잡으면 안 되느냐고 묻곤 한다니까?”

“예……?”

“주중에 적당히 연주회 리허설 핑계로 학교의 연습 시간을 빼고 싶은 거지. 뭐 이해는 해. 나도 그랬거든.”

“크리스티나도요?”

“난 연습을 싫어하는 학생이었거든.”

“…….”

난데없는 학창 시절의 고백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어쨌든 지금 크리스티나의 실력은 악장답게 굉장하니 상관없지만, 약간 무어라 답하기 난감했다.

살짝 궁리하다가 난 오늘의 이야기를 꺼냈다.

“음……. 죄송해요. 생각해 보니 오늘은 주말인데 어떻게 일정이 주말에 잡히게 되었네요.”

“응? 그걸 왜 네가 미안해하니? 타티아나.”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다. 때문에 적절히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주말 연습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크리스티나는 시작부터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는 미소를 약간 지우고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주말에도 열심히 연습하는 너 같은 애들은 누군가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우리 편의 같은 건 더더욱 말야.”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크리스티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린 어른이잖니? 그러니 제대로 할 거고, 타티아나 넌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연주회에만 집중하면 돼.”

“…….”

난 저번에 파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연주자 루이와 스테이지 매니저 브뤼노 베르트랑의 대립을 마무리 지으면서 어른이면 제대로 해 달라고 말했었다.

그건 일단 두 사람을 향한 말이긴 했지만, 악장인 크리스티나도 그때 연주자들의 트러블을 약간 방관하긴 했으니 책임을 느꼈나 보다.

그녀가 싱그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까딱였다.

“그리고 타티아나와 함께하는 리허설이라면 주말 반납 같은 건 일도 아니지! 안 그래요 여러분?”

“그렇고말고요.”

“밤을 새워도 좋습니다.”

순식간에 단원들 쪽에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까지 날 환영해 주고 받아들여 준다는 것이 조금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그중에서 한 명. 무심한 표정의 한 남자가 말했다.

“밤을 새워 연습하는 건 능률도 높지 않고 타티아나에겐 많은 부담이 될 겁니다. 별로 추천하지 않는…….”

“로만, 그냥 농담은 농담으로 들으면 안 될까?”

바이올리니스트 로만의 말에 다른 단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다시 봐도 어쩐지 친숙한 이 오케스트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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