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45화 (345/1,277)

##  345화

잠시간의 환담이 지나가고, 곧 연주회에 대한 심도 깊은 회의가 있었다. 선곡한 곡과 오케스트라 구성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지휘자인 스타니슬라프의 지시로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 사안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하고 가는 것 같다.

그렇게 모든 확인이 끝나고, 스타니슬라프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슬슬 말은 이쯤 하도록 하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신들의 악기를 꺼냈다. 스타니슬라프도 지휘봉을 꺼냈다.

난 내가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스타인웨이의 그랜드피아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내게 맞도록 자리를 세팅하고 옷자락을 정돈했다. 소리 없이 페달도 두어 번 밟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스타니슬라프는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저 지휘봉으로 10개도 넘는 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고, 나 역시 그 악기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걸 깨닫자 조금 전율이 일기도 했다.

“…….”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간 몇 번의 미팅과 전화로 결정한 협주곡을 처음 연습하는 자리다. 준비한 최선의 연주를 다하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난 어깨를 살짝 스트레칭하며 다시 몸을 풀었다. 머릿속으로 다시 악보와 선율이 스쳐 지나가고, 난 자신감을 되찾았다.

아직도 조금 어수선하게 악보들을 세팅하는 단원들에게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우선 1악장만 가볍게 해 보는 것으로 하겠네. 알겠나?”

“예. 스타니슬라프.”

“타티아나는 연습해 온 해석 그대로 연주해 주게. 아까 부탁했던 것, 기억하겠지?”

오늘 리허설에서 급할 필요는 없지만 진지하게, 도전적으로 임해 달라는 요청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억하고 있어요.”

“좋아.”

스타니슬라프가 지휘봉을 가볍게 저었다.

“준비하게.”

악장 크리스티나는 내게 피아노의 몇 음을 쳐 달라고 요청했다.

난 건반을 누르면서 이 피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파악했고, 단원들은 이 피아노에 맞춰 각각 악기들을 조율했다. 일반적인 관현악이 아닌 피아노 협주곡은 보통 피아노에 맞춰 조율한다.

조율을 마치자마자, 그때까지도 조금 어수선했던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연주를 앞둔 연주자들의 긴장감이 연습실에 흘렀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돌려 스타니슬라프를 바라보았다. 스타니슬라프는 오케스트라와 내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지휘봉을 들었다.

지휘봉을 든 스타니슬라프의 눈빛은 말 그대로 호랑이와 같다. 노쇠함은 찾아볼 수도 없다.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안광을 연습실 전체에 흩뿌리며 스타니슬라프가 마지막 말을 맺었다.

“시작하지.”

지휘봉이 호쾌한 궤적을 그리며 내려온다.

그리고 마치 투명한 무언가에 맞아 튀어 오르듯 탄력적으로 솟구쳤다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휜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나는 그 지휘봉 끝이 마치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한 타이밍을 잴 수 있었다. 그 지휘봉의 흐름에 따라 호흡까지 멈추었다가,

다시 지휘봉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에 닿았을 때, 건반을 바닥까지 깊고 강하게 터치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하나 되는 강렬한 음악이 연습실을 채우고 있던 적막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

역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연주를 마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연주는 중간에 중단되거나 하는 일 없이 잘 진행되었다. 심지어 1악장에서 그치지 않고 3악장까지 내리 연주하기까지 했다.

시작할 땐 1악장만 해 보자고 했지만, 악장을 마치고도 스타니슬라프는 지휘봉을 내리지 않았고 모두가 그 의도를 이해하고 곧바로 2악장, 3악장까지 연주했기 때문이었다.

첫 리허설치곤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난 굉장히 많은 부분을 미묘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 미묘함은 한마디의 말로 표현하기 어렵기도 했다. 애매했다. 아리송하다.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이나 첼로까지 트리오 정도와 함께 연주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 연주자와 특정지어 대화를 하고 음악을 교류한다는 분명한 교감이 존재했다. 음악을 연주하면서도 그사이 엄청난 양의 대화가 오가고, 서로 즉각 피드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열다섯 명이나 되는 연주자들과 그들을 통솔하는 한 명의 지휘자와 음악을 하다 보니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호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크게 보면 지휘자와 해석을 맞추는 것이겠지만, 실제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은 각각의 연주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어떨 땐 내 해석을 강력하게 주장해 보기도 하고, 또 어떨 땐 오케스트라의 해석을 밑받침해 주기도 했지만 이래서야 아무래도 아마추어 같다는 느낌이 물씬 나는 음악일 뿐이었다.

이미 흘러간 음악을 잠시 곱씹고 있는데,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군.”

난 고개를 들었다. 하긴 처음이니까 한 번에 큰 문제 없이 3악장까지 완주했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통일성과 교감이 부족하다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스타니슬라프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겠어.”

스타니슬라프가 단원들과 날 죽 둘러보았다. 그 눈빛이 심히 매섭다.

단원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악장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본격적인 리허설은 지금부터로군요.”

“음.”

스타니슬라프는 지휘봉을 똑바로 세우며 말했다.

“타티아나. 어떻게 생각하나. 이게 자네 음악이 맞나?”

“……!?”

난 갑자기 내게로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라서 대비하지 못해 허둥댔다. 하지만 대답할 말은 정말이지 많았다.

“……그게.”

할 말은 많았지만 그대로 내뱉어도 되나 걱정된다.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연주자도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 앞에서도 협연자로서 당당하게 내 주장을 할 수 있어야겠지만, 나 스스로도 이렇다 할 확신이 없는 주장이 어쩌면 이 음악의 불완전성을 오케스트라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들리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때 얼마나 많은 다툼이 생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다툼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못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되레 협연자와 오케스트라 두 쪽 모두 확고할 때 더 많은 알력이 생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전철을 다시 밟고 싶진 않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하지만 나는 적어도 듣고 느낀 음악에 있어선 내 의견 없이 대충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반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말이 있다면 한다. 다만 되도록 공손하고 협조적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하며 스타니슬라프를 바라보았다.

스타니슬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해야만 하네.”

된다 안 된다가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투였다. 이렇게까지 확실한 허락을 받았다면 말할 수 있어야 했다.

다른 단원들은 내게 압박을 주지 않고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지 스타니슬라프 쪽만 보고 있었다.

난 주의 깊게 말했다.

“제 연주에 전체적인 해석을 맞춰 주신다는 건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가끔은 다른 색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음. 계속하게.”

“그 색이 무엇인진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를 허물어뜨리지 않기 위해 맞추려다 보니 약간 실수한 부분도 있었어요. 결국 제 실수인데 변명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스타니슬라프는 확실하게 내 해석과 의도에 따라와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그대로 쭉 나 혼자 달려 나가 버리기엔 문제가 많았다.

난 여기저기서 덜컥거리는 소리들을 감지했고, 그 소리들이 길을 잃고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면서 피아노의 소리도 조금 방향성을 상실하기도 했고, 처음 그려 놓았던 청사진과 꽤 다르게 곡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건 나도 잘한 건 아닌 것 같았고, 그렇게 사과로 짧은 감상을 밝혔다.

스타니슬라프는 가만히 내 말을 듣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변명이라고 생각하진 않네.”

어떠한 생각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듯 스타니슬라프의 지휘봉이 스르륵 움직였다. 그리고 봉의 끝이 멈췄을 때,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곡의 통일성이 무너졌을 때 이유를 찾아내 수정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꽤 정확하게 짚어 냈군, 타티아나. 색이라…….”

내가 말한 곡에서 느껴지는 다른 색이라는 것에 스타니슬라프도 공감하고 있는 듯했다.

다시 그 이야기를 하려는데, 스타니슬라프가 지휘봉을 휙 흔들더니 말했다.

“예컨대, 71마디.”

그 한마디에 촤르륵 하며 모두가 악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난 71마디가 어디인지 기억해 보려 했지만 악보를 외우고 있어도 특정 마디의 숫자를 불렀을 때 반사적으로 그 부분이 떠오를 정도까진 아니었다.

스타니슬라프가 이어 말했다.

“춤곡 같은 피아노의 리듬을 따라 명백하게 우리가 따라가 줘야 하는 부분이었지.”

난 그 말을 듣자마자 대충 어느 부분을 말하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리듬을 맞추기 정말 까다롭다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난 거기서 내 해석을 조금 미뤄 두고 오케스트라를 벗어나지 않게 했어야 했다.

스타니슬라프는 악보를 손끝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타티아나의 부점 컨트롤 다들 들었잖나? 그걸 정확하게 따라가 줘야지. 미적거리니 템포가 깨지잖나. 그리고 거기에 맞춰 타티아나가 따라오고, 밸런스가 깨지고. 악순환의 반복이지.”

신랄한 비판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리고 스타니슬라프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었다.

“첫 리허설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 단원들 중 몇몇이 지난 협연자의 해석과 버릇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군.”

스타니슬라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 속에서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난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안 그런가? 크리스티나.”

“그 말이 맞습니다. 스타니슬라프.”

크리스티나는 배시시 웃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실직고하자면 저도 실수를 여기저기 꽤나 했거든요. 자꾸 저번에 했었던 연주랑 헷갈리지 뭐예요?”

“분명하게 들렸네.”

“죄송합니다.”

다른 단원들을 대신하는 듯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게도 사과해 왔다.

“미안해, 타티아나.”

“예? 아, 아니에요.”

오케스트라가 이전에 했었던 협연자와의 해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휘자의 해석에만 따르면 되는 관현악과 달리 협주곡 같은 것은 협연자에 따라 계속해서 해석과 연주가 바뀐다. 헷갈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기억에 있는 해석대로의 연주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젠 나와 협연을 하는 것이니 같이 잘 했으면 좋겠다. 그뿐이었다. 사과를 받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 후에도 스타니슬라프의 주도로 한참 동안이나 연주에 대한 지시가 이어졌다. 바이올린도 비올라도, 첼로, 콘트라베이스, 오보에, 플루트, 바순 모두 지시 사항이 적어도 하나 이상씩 있었다.

스타니슬라프는 조금 과묵한 분이었는데, 프로그램 회의나 리허설 자리에선 정말 열정적이고 깐깐한 분이기도 했다.

물론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퍼붓진 않았지만, 험상궂은 눈으로 노려보며 꼼꼼하게 지시하는 것만으로도 단원들은 그 카리스마에 꼼짝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느라 집중하던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예리한 부분도 하나하나 정확하게 짚어 내는 것이 소름 돋을 정도였다.

지시 사항은 오케스트라를 지나서 나에게도 날아들었다.

“그리고 피아노의 해석에 대해서도 조금 더 세세하게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도입보단 우리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해석이 가장 갈렸던 지점부터 보도록 하지. 일단 32마디…… 아니지. 타티아나, 1악장의 칼란도calando부터 보겠나.”

“이곳 말씀이신가요?”

난 서서히 느려지며 감미롭게 연주되는 구간을 떠올리며 곧바로 피아노로 쳐냈다. 스타니슬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네.”

그리고 스타니슬라프는 지휘봉을 들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모든 단원들이 악기를 들었고, 지휘봉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음악이 시작되었다.

난 이전에 했던 것과 똑같이 요청받은 부분을 연주했다. 오케스트라가 똑같이 따라오지만, 어쩐지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통일이 안 되는군.”

모두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방법도 모른다. 16명의 연주자들이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스타니슬라프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내게 주문했다.

“이 부분은 피아노가 조금 늦추는 것이 맞다고 보네. 자네의 이전까지의 해석과의 통일감을 맞추기 위해선 말이지. 어느 정도인진 잠시 보게. 크리스티나.”

“예.”

다시 스타니슬라프가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크리스티나가 해당 악절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정확한 리듬감의 바이올린 소리는 이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이 부분을 연주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잠깐 듣는 것만으로도 감이 왔다. 내 해석보다 조금 더 미세한 여백을 주는 듯한 감각의 리듬이었다. 알 것 같다.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요.”

“다시 해 보지.”

그리고 다시 나와 오케스트라는 스타니슬라프의 지휘에 맞춰 똑같은 부분을 연주했다. 난 건반을 몇 개 누르기도 전에 이전보다 훨씬 더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 한 번의 지시로 스타니슬라프는 확실하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조금 더 가까이 붙여 놓은 것이다.

내가 한 번에 말귀를 알아들은 것보단 스타니슬라프의 지도력이 감탄스러웠다. 이렇게 깔끔하게 레슨하듯 지도하는 지휘자는 처음이었다.

단원들을 휘어잡는 열정적인 카리스마와, 섬세하고 정확한 지시. 이 노년의 지휘자가 보여 주는 모든 것들에선 각각의 배울 점들이 있었다.

그렇게 난 연륜 있는 음악가 선배님에게 레슨을 받는다는 기분마저 느끼며 연습에 임했다.

1분 1초도 귀중하게 느껴지는 리허설 시간이 흘러갔다.

난 최대한의 집중력을 기울여 그 모든 시간에서 연주회에 올릴 음악의 완성과 내 실력 향상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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