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화
엄한 목소리가 연습실을 갈랐다.
“그만.”
“…….”
건반에서 손을 떼자마자 집중이 풀리며 순간 눈앞이 핑 돈다. 머리가 멍하고 귀도 먹먹하다. 엄청나게 밀려오는 피로가 점점 어깨를 짓누르고 몸을 무겁게 만든다.
간신히 정신을 다시 잡고 목에 힘을 주었다.
이걸로 몇 번째지?
그렇게 연습 횟수를 새는 것으로 연습량을 따지는 성격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10번이 넘어간 건 확실했다. 벌써 창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주곡을 연습하는 것은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을 앗아 가는 일이었다. 최근에 막심 선배와 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바이올린 연주자와 합주를 하는 것과는 또 피로도가 다르다.
일대일이 아니고 열다섯 명이나 되는 프로 연주자들과 합주하면서 당연히 음악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 모두를 이끄는 스타니슬라프가 나와 대화하고 있지만, 그래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연습을 하니 지칠 대로 지쳤다.
하지만 처음 했을 때보다는 훨씬, 서로 간에 통일성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리허설을 거듭할수록 더 악화되거나 다툼이 벌어지진 않았다. 나와 오케스트라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점차 가까워져 갔다.
그건 상당히 기분 좋았다.
“…….”
난 숨을 가다듬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다른 단원들 역시 계속된 리허설로 조금 지친 것 같다.
스타니슬라프는 단원들을 향하던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무슨 말이 떨어질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스타니슬라프가 근엄함을 거두며 말했다.
“타티아나. 나쁘지 않았네. 리허설을 거듭할수록 방향을 잃고 흐트러지거나 뭉개지지 않고 되레 더더욱 앞으로 발을 내딛는 용감함이 돋보이더군.”
“아……. 감사합니다.”
“주변이 어지럽고 길을 잃을 것 같을 때일수록 스스로를 믿기 어려울 텐데, 꽤 인상적일세. 멋졌네.”
이렇게 깔끔한 칭찬만을 해 주실 줄은 몰라서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이 리허설에 정말 진지하게 임했다는 것을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 감격스럽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감사 인사를 하자 스타니슬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견 미소가 입가에 스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눈빛을 달리하더니 한 명 한 명 단원들을 꼽으며 지시했다.
“로만. 방금 자기 위치를 잊은 것 같더군. 앞서 나가지 말게. 중심을 지켜.”
“노력하겠습니다, 스타니슬라프.”
“다네르, 자네는 조금 더 신경 써주었으면 좋겠군. 부드럽게 가야 할 상황에서 휘슬이 왜 나나? 현 좀 갈게.”
“윽, 알겠습니다.”
“조야, 작은 새를 표현하는 구간이지. 피아노는 숲속에서 날아다니는 새를 그리고 있는데 첼로가 정물화를 그려서야 되겠나?“
“저도 하면서 느꼈어요. 고치겠습니다.”
난 스스로 귀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얽혀 있는 모든 소리를 저렇게까지 세심하게 짚어 내는 건 엄두도 못 낼 초인적인 일처럼 보였다.
꽤 긴 시간 동안 지시가 이어졌다. 통일된 이미지와 조화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상당히 엄격한 분위기였다. 그 누구도 지금 이 정도 완성도로는 무대에 올려서 만족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단원들은 모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사항을 받아들였다.
지시에 따라 연습하고, 합동 리허설을 하고.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해서 맞춰 나간다면 연주회 전까진 괜찮은 결과물을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스타니슬라프는 악장 크리스티나에게 지시했다.
“크리스티나. 조금 더 무게감 있는 소리를 부탁하지.”
“알겠어요, 스타니슬라프. 음, 그런데 말이죠. 살짝 드리고 싶은 의견이 있는데 괜찮겠죠?”
크리스티나는 지시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조금 더 말을 덧붙였다. 단원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악장은 이렇게 지휘자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눌 의무가 있었다.
스타니슬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게.”
“스타니슬라프가 모두의 통일성을 지적하는 것처럼, 이미지가 각자 따로 노는 것 같은 건 저도 느꼈어요.”
첫 리허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흔들림. 크리스티나는 조금 웃으면서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우린 가족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아직 질리지 않고 서로를 알아 갈 여지가 많다는 게 기쁘네요.”
오랜 기간 함께한 오케스트라는 정말 하나의 악기처럼 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렇게 색다른 레퍼토리에서 각각의 개성이 드러난다는 것이 그녀로선 즐거운 일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이 개성들을 하나로 조화롭게 모으는 것이 악장과 지휘자의 역할이다.
“음, 그래서?”
“스타니슬라프가 고생하시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보다 좋은 방법이 떠올라서요.”
“좋은 방법?”
“다음 주에 별 일정 없죠? 우리 오케스트라 가족끼리 다 같이 음악적 에센스를 느끼고 공유하러 직접 움직여 보는 건 어때요?”
“직접 움직이고 있잖나?”
“이렇게 연습하는 거 말고요.”
스타니슬라프는 직접적으로 다시 물었다.
“휴가를 가잔 건가? 여름에 못 갔으니까.”
“무슨 휴가예요. 가서 연습할 건데. 오케스트라 캠프 가자는 거죠. 할 수 있다면 현지로요.”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고 느꼈는지 크리스티나가 다시 말했다.
말투는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눈빛은 정말 진지했다. 크리스티나는 이 음악의 음악적 통일성을 높이기 위해 리허설 한 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스타니슬라프는 자신의 악장을 믿는다. 그는 잠시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이윽고 결론을 내놓았다.
“크리스티나. 자네 조언에 따라서 결과가 나쁜 적은 없었지.”
“몇 번 망쳤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내 기준에선 아니었네. 어쨌든 자네 말처럼 오케스트라 캠프가 우리 곡의 완성도에 도움이 된다면, 추진해 보겠네.”
“믿어 주셔서 고마워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스타니슬라프.”
자신의 의견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서 기분이 좋은지 크리스티나는 활짝 웃었다.
다른 단원들 역시 기대감에 찬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주회가 아닌 리허설로 해외에 가는 건 이들에게도 특별한 일인 것 같다.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의자 끄는 소리, 각 악기들을 케이스에 정리하는 소리 등이 여기저기에서 들리며 조금 어수선해졌다.
난 그 사이에서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갑자기 해외 현지 연습이라니 준비할 것이 많은…….
“타티아나. 이야기 들었다면 알겠지만, 미안한데 다음 주 리허설은 쉬게 될 것 같아. 대신 훨씬 더 나아진 모습 보여 줄게. 알았지?”
“……?”
갑자기 크리스티나가 내게 말했고, 난 약간 당황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절 두고 가시나요?”
“응?”
묻고 나니 크리스티나 역시 당황한 기색이다. 난 서로 오해가 없기 위해 조금 더 길게 말해야 함을 느꼈다.
“다 함께 조화로운 음악적 완성도를 갖추기 위해 현지에 가 보신다는 것 아니었나요? 저도 그게 도움이 된다는 건 알아요. 프랑스와 독일에서 느낀 게 많았었거든요.”
“응……. 맞는데?”
“그럼 저도 함께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늦게 어색함이 찾아들었다. 지금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는 건가?
오케스트라가 한 음악을 연습하면서 음악적 이미지를 통일시키기 위해 함께 움직인다는 건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그 음악엔 나도 끼어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비중으로. 때문에 난 당연히 모든 리허설에 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하다 보니 오케스트라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기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니까.
“그렇지…… 않나요?”
애초에 오케스트라 캠프, 오케스트라 가족이라고도 했었지. 어쩐지 남의 가족여행에 끼는 듯한 기분마저 들어서 마지막엔 자신 없이 조심스레 물었다.
크리스티나는 급히 내 말에 동의했다. 약간 놀란 것 같다.
“아니, 네 말도 맞아. 맞는데……. 학기가 막 시작해서 시간을 내기 어렵지 않니? 게다가 해외로 나갈 참인데?”
“주말에 이틀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 않아요. 아니면 하루만이라도……. 리허설을 할 순 있지 않을까요? 오늘처럼 말이에요.”
“해외에서?”
“프랑스에서도 했었잖아요?”
리허설은 아니고 그냥 이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를 들어 보고 회의를 했던 정도였지만, 크리스티나는 내 말을 듣고 조금 더 진지하게 날 바라보았다.
“여행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관심은 있죠. 음악적 에센스를 느끼러 가는 것이라면요.”
“아하하핫!”
정말 진지하게 답했더니 느닷없이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한참을 웃더니 경쾌하게 말했다.
“기다려 볼래?”
그녀는 곧장 스타니슬라프에게 갔다. 내 말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난 내가 꽤 특이한 제안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스타니슬라프가 내게 다가왔다. 한참이나 커다란 그는 날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괜찮겠나? 타티아나. 힘들텐데.”
정말 엄청나게 연습하려는 모양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흠, 그러면 우선 부모님에게 연락을 해 보게.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 역시 최선을 다해 자네를 책임지도록 하지.”
스타니슬라프는 상당히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경비나 행정 등은 우리 쪽에서 해결할 테니 그렇게 전하면 되겠네.”
“아……!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나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생각했었는데, 스타니슬라프는 날 데려가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드는 경비 등도 오케스트라의 재정으로 해결해 주려는 것 같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돈을 써도 되겠지만, 이렇게 사정을 봐준다니 감사하다.
이제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난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었다.
잠시 신호가 가고,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불렀다.
- 타티아나.
“아버지. 잠시 통화해도 될까요?”
- 괜찮다.
“허락받고 싶은 것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 허락?
토요일에도 출근하신지라 혹시 바쁘신 때가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버지는 마침 조금 한가하신 것 같았다. 난 앞선 이야기들을 최대한 축약해서 아버지에게 전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 현지에 가서 그 정서를 공유한다라……. 여러 명이서 하나의 예술을 하는 음악가들의 방법이군. 멋질 것 같구나.
“예. 그래서…….”
-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그래도 될까요?”
- 그래. 얼마든지. 그리고 일단 전용기를 내어 주마. 쓰거라.
아버지는 너무 흔쾌하게 허락하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도와주시려는 것 같았다.
나 역시 흔쾌히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난 그렇게 많이 전용기를 타 보고도 아직도 마냥 그리하겠다 답하지 못했다.
“아,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 타티아나. 난 네가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단 1시간도 허비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런데 허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다. 약간 놀랍고, 기쁘다.
그런 이해에서 비롯된 지원이라면 난 거부할 수 없었다.
직접 티켓을 구해 공항에 가서 탑승수속 절차를 밟으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전용기를 이용하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다.
난 다시 한 번 괜찮다고 하는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감사해요.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
- 오케스트라에도 그렇게 전하거라. 경비 등은……. 음, 아니지. 책임자가 옆에 있느냐?
난 스타니슬라프를 바라보았고,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스마트폰을 넘겨주자 스타니슬라프와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자세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스타니슬라프의 입에서 시간과 일정 등등의 이야기와 함께 전용기라는 단어도 몇 번 나오자 옆에 있던 크리스티나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살짝 물었다.
“타티아나.”
“예?”
“베르체노프 전용기 티켓은 비싸니? 내가 호기롭게 해외 연습 가자고 하긴 했지만, 사실 우리가 좀 영세 오케스트라라서. 우린 이코노미 석으로도 괜찮아.”
설마하니 아버지가 항공권 값을 받으실까 싶다. 크리스티나도 농담조였고, 그 농담을 받아 난 가볍게 말했다.
“모두 퍼스트클래스로 준비해 드릴게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사실 퍼스트클래스밖에 없어요.”
“아하하, 그러니?”
사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 상관없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