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7화
여행 준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오케스트라 캠프는 여행이 아니라 전지훈련에 가까운 것이어서, 모든 것이 오케스트라의 일정대로 따라가게 되기 때문에 난 개인적으로 계획 등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나와 함께 갈 사람들도 경호원 세 사람뿐이었다. 루슬란 오빠가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따라가 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극구 만류했다. 연습이 주가 될 것이 분명한 자리에 오빠를 데려가면 내가 미안해서 못 견딘다.
비슷한 이유로, 다른 친구들에게도 주말엔 연습 때문에 모스크바에 없을 것이란 사실만 전했다. 아나스타샤는 여행이 아닌 연습이라면 진지하게 잘 하고 오라며 응원해 주었다.
일주일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출발일이 다가왔다.
“준비 되셨으면 가시죠. 아가씨.”
“잘 부탁해요. 빅토르. 소로킨과 자하르도요.”
이틀간 특별히 고생해 줄 세 사람에게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빅토르와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니 세레메티예보 공항은 금방이었다. 그간 몇 번이고 와 봤던 곳이라 이젠 꽤 익숙하게 느껴졌다.
전용기 터미널로 들어서니 대기실 옆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타티아나.”
커다란 노년의 지휘자. 스타니슬라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난 다가가서 그와 짧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 준 것에 대해 유리 알렉세예비치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네만, 다시 한 번 자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군.”
“괜찮아요, 스타니슬라프.”
짧은 인삿말이 오가고, 우린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비행기에 올랐다. 단원들은 가벼운 악기들은 화물칸에 싣지 않고 그대로 들고 탔다. 최대한 조심해서 악기를 옮기려는 모습이었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내 옆자리엔 크리스티나가 앉았다. 그녀는 항상 북적거리는 여객기나 타 봤지 이렇게 편한 비행기는 처음이라며 감탄하더니 내게 물었다.
“이렇게 쉽게 해외로 나갈 수 있으면 여행도 자주 다닐 만하겠어. 타티아나는 어때? 자주 다녔니?”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리고 이 전용기는 제 것이 아니라서요.”
“아, 그래. 저번에 프랑스에서 봤을 때도 여행 자주 다닌 쪽은 네가 아니라 네 친구 아나스타샤 쪽이었지?”
“예, 맞아요.”
“음…… 스칸디나비아 반도 쪽에도 가 본 적 없고?”
“처음이에요.”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유럽에 있는 기다란 반도를 부르는 말이다. 그냥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뿐이지 가 본 적은 없다.
그런데 크리스티나는 조금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네 피아노는 스칸디나비아를 모르는 사람의 것처럼 들리지 않던걸? 음, 저번 주에 같이 가자고 바로 말하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아. 그래도 미안했어. 타티아나.”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크리스티나. 원래 오케스트라 캠프에 협연자가 항상 끼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합동 리허설이 아닌 오케스트라 캠프에 이렇게 협연자가 따라가는 게 특이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티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어쨌든 잘 됐네. 타티아나 너는 기본적으로 그쪽 지방 음악의 색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직접 풍경을 보면 느껴지는 게 또 다를 거거든. 나무랑 강밖에 없긴 해도.”
그녀의 말에 난 순간 웃어버릴 뻔했다. 내가 느끼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이미지는 정말 나무와 강 같은 자연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대했던 것들을 보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내가 혼자 상상하는 것과 직접 가서 보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난다. 프랑스에서 그랬고, 독일에서 그랬다. 이번에도 역시 내 음악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직접 보게 될 풍경이 내 음악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굉장히 기대되었다.
날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네 피아노가 얼마나 더 좋아질지 궁금해지는데?”
분명 나빠지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두 개의 나라가 위치하고 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이다. 덴마크와 핀란드가 근처에 있긴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를 엄밀히 정하자면 노르웨이와 스웨덴 단 두 나라만이 들어간다.
그 두 나라 중에서 우리는 노르웨이로 향했다. 짧은 일정동안 조금이라도 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정취가 살아 있는 곳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내린 곳도 수도인 오슬로 공항이 아니라 노르웨이 제2 도시인 베르겐 공항이었다.
“역시 여기로 오길 잘한 것 같아.”
노르웨이 서남부의 항구도시 베르겐은 과거 노르웨이의 수도였으며 19세기까지도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 후엔 오슬로가 훨씬 더 크고 현대적으로 발전했지만, 베르겐은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과거 중세풍의 건물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너무 예쁘네요. 이런 건물들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에요…….”
해안가의 문화 관광 도시. 언뜻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비슷하지만 베르겐은 그보다 더 오래 된 도시였다.
삼각형의 지붕으로 다들 비슷하게 생긴 중세 양식의 반듯한 목제 건물들은 마치 동화 속 마을을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마치 장난감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14세기 경 베르겐의 건물양식과 다르지 않다고 하니 그사이 600년이 넘는 세월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풍경도 이 나무로 만들어진 도시와 정말 잘 어울렸다. 수백 년 동안 하나로 어우러졌다는 느낌이 분명하게 와닿는다.
“일단 높은 곳에서 한 번에 볼까.”
크리스티나를 따라 푸니쿨라를 타고 가까운 전망대로 향했다.
내려다보니 아기자기하고 예쁜 항구도시가 손에 잡힐 것처럼 보였다. 막 항구를 떠나는 배가 정말 작다. 손을 뻗으면 살짝 잡아서 다른 곳에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여행 생각이 없었지만 이렇게 막상 도시를 보고 나니 이곳저곳 돌아볼 욕심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난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가 박수를 쳐서 모두의 시선을 모으더니 말했다.
“자, 모두들. 내려가서 하나하나 둘러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일정이 짧으니 이 풍경만 눈에 담아 두기로 하죠.”
확실히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우리 음악가들은 이렇게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것들을 이끌어 낼 줄 안다.
노르웨이의 문화와 분위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정취. 그런 것들을 이 풍경만 보고 느끼고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현실감이 뇌리에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난 벌써부터 피아노 소리가 변화할 것이란 것을 직감했다. 뇌리에 떠돌던 소리들이 이 풍경에 따라 흘러내려간다.
그리고 그런 직감을 느낀 건 비단 나뿐이 아닌 듯했다.
“스칸디나비아는 이런 느낌이었군.”
“지금 보니 연주를 조금 더 묵직하게 했어야 했던 것 같은데?”
“바이올린을 들고 왔어야 했는데.”
나도 지금 손이 근질거림을 느낀다.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을 건반으로 그려 보고 싶다.
모두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크리스티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때, 여러분. 난 우리가 벌써 비슷한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걸.”
“같은 풍경을 보았다고 해서 같은 그림을 그리란 보장은 없지. 크리스티나.”
로만의 대답에 크리스티나는 눈치를 주면서 인상을 썼다. 하지만 로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잠시 도시를 감상할 시간을 주고, 이윽고 스타니슬라프가 모두에게 말했다.
“이만 내려가지. 저기 보이는 바다로 이제 우리도 나가 봐야 할 테니.”
“알겠어요. 음, 배 타고 나가서 피오르를 따라가며 풍경을 보면 로만도 딱딱한 소리를 못 하겠지. 자, 다들 내려가죠!”
정확한 일정에 따라 우리는 움직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는 해외 연주회를 많이 하는 오케스트라답게 외국에서 움직일 정확한 일정을 기획하고 움직이는 데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단 한 명의 단원도 혼자 행동하거나 시간을 끌지 않고 모두 한 몸인 것처럼 움직였다.
가까운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한 뒤, 맡겨 두었던 악기들을 찾아서 다다른 곳은 배가 드나드는 항구였다.
“…….”
가을바다의 소리와 새소리가 한데 얽혀 상쾌하다. 난 잠시 부둣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막 배에 오르는 여행객들이 보인다.
그때, 빅토르가 말했다.
“저 배입니다.”
“……정말요?”
난 빅토르가 가리키는 쪽을 보고, 멍하니 되물었다.
흰 여객선이었다. 마치 배 위에 건물이 올라가 있는 것처럼 몇 층이나 되는 객실 창문이 보였고, 세련된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이 커다란 여객선은 이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많은 배들 중에서도 월등히 돋보일 정도였다.
내가 정말이냐고 되물은 것은 저 배에 타는 것이 맞냐고 물은 것이 아니다.
저 배가 아버지가 보내 준 것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빅토르가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맞습니다. 유리 님이 보내 주신 배입니다.”
“…….”
아버지는 전용기에 이어 다른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스타니슬라프와 약조한 바 있었다. 거기엔 러시아 무스만스크에 정박하고 있던 배를 보내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큰 여객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물론이고 크리스티나나 다른 단원들도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스타니슬라프만이 짧게 말했다.
“선상 리허설도 충분히 가능하겠군. 미리 보낸 팀파니도 세팅되어 있다고 들었고.”
원래 아버지는 이곳의 여객선을 한 척 전세 내려고 하셨다. 하지만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어서 완전히 예약이 빈 여객선을 구하지 못했고, 무거운 퍼커션 등을 옮겨서 준비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아예 미리 러시아에서 준비해서 배 자체를 보내온 것이다.
무스만스크에서 북극해를 돌아 이곳 노르웨이 베르겐까지 오는 데에 이틀이 걸렸다고 듣기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아버지에게 무슨 말로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빅토르가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했다.
“타시죠.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 달리 수속은 필요 없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다들 흰 여객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두에 내려와 있는 계단을 밟고 오르니, 푸른색의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는 승무원들이 나와서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분들. 본 여객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인사를 받고, 우리는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객실로 향했다.
“여기가 배야 호텔이야?”
뒤에서 누군가 소곤거렸다.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준 것 같은 말이었다.
그 말대로 객실은 호텔 로비처럼 꾸며져 있었다. 각 좌석들은 불편하지 않도록 하나하나가 가죽소파처럼 되어 있었고, 조명 하나까지도 배 안의 분위기를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전용기도 충분히 고급스러웠지만, 그래도 몇 번 타면서 많이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런 배는 처음이라서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런 황망한 감정도 잠시, 출항한다는 방송이 나오고 배가 앞으로 나아가자 흥분된 분위기가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이 배로 하르당에르 피오르를 간다고 했었지? 가다가 갑판에서 리허설도 하고.”
“배 위에서 연주해 보는 건 처음인데 멀미 안 하려나 모르겠네.”
“이런 기회에 멀미하면 손해지.”
정말 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나는 대화들을 들으며 나 역시 기대감을 부풀렸다. 이 배엔 피아노도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악기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배 위에서 피아노를 만질 수 있으리라곤 기대도 않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준비해 주신 덕에 리허설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정말 이런 기회에 멀미라도 하게 된다면 끔찍하다.
“으음.”
난 괜히 머리를 좌우로 기울여보며 멀미의 전조가 없는지 살폈다. 비행기를 탔을 땐 전혀 없었으니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언젠가 비행기 멀미와 배멀미는 다르다고 들은 적이 있다.
혹시 모르니 가능하다면 멀미약을 얻어서 미리 먹어둬야 할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할 것이라면 멀미를 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연주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먹는 게 나았다.
자리에서 살짝 일어난 나는 승무원을 찾았다. 하지만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난 객실 밖으로 나와서 아까 본 푸른 승무원 복장을 한 사람이 없는지 찾아다녔다.
그렇게 복도를 걷길 잠시.
“……? 누구세요?”
“…….”
낯선 남녀를 발견한 난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30대 쯤으로 보이는 남녀였다. 두 사람 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난 저 사람들을 단원들 사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나 못지않게 저 사람들도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진 몰라도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